소설리스트

짐승의 꽃-24화 (24/88)

24.

자신에게 반말해도 좋다는 황태자의 관대한 말에 더욱 놀란 것은 당사자인 라일라가 아니라, 밀크티를 가져다주던 세실이었다.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황태자를 바라보았다가, 얼른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게다가 나는 당신 앞에서라면 황태자보다는, 그저 비오스트인 게 좋으니까요.”

“그건 무슨 말이야?”

“황태자가 아니라 그저 한 명의 사람으로 봐 주는 것이 좋다고나 할까요? 사실, 나는 당신이 내가 황태자인 걸 알아보지 못해서 은근히 좋았어요. 세상의 사람들은 전부 나를 비오스트가 아니라 황태자 전하로 보니까요. 그 자리는 뭐랄까…….”

말을 고르는 듯, 비오스트는 입을 멈췄다.

“누구나 나를 보고 있지만,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은 느낌이죠.”

순간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하지만, 그의 말대로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은 텅 빈 시선으로 비오스트가 말했다. 뒤를 잇는 씁쓸한 미소는 군중 속의 외로움을 느끼는 황태자로 보이기에는 충분했다.

말하자면, 아주 고독하고 쓸쓸한, 그래서 여자라면 모성애를 느끼며 그를 감싸 안아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느끼기에, 충분한 모습 말이다.

“……무슨 거지 같은 소리야?”

하지만 라일라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그것이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나 편할 대로 하라는 거지?”

“네. 결론은 그게 맞아요.”

“좋아, 황태자.”

“아, 좋을 대로 하지만, 호칭은 비오스트가 좋겠어요.”

“어째서?”

“라일라에게는 황태자가 아니라 비오스트라는 한 명의 남성이 되고 싶으니까요.”

과감한 고백이었지만, 라일라는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당연히 남성이지. 누가 널 여자로 봐?”

“……그렇군요.”

라일라의 공격 아닌 공격에 비오스트는 말없이 물을 들이켰다.

“어쨌든 비오스트. 내가 할 말은 이거야. 왜 나에게 잘해 줘?”

“그 부분은 이미 우리가 결론을 내리지 않았나요?”

“결론 나지 않았어.”

“그건 당신이 귀엽고, 예쁘기 때문이죠.”

“헛소리!”

“네. 맞아요. 마차에서도 당신은 그렇게 이야기했죠. 하지만 내 대답은 계속 같을걸요? 나는 당신이 귀엽고, 예쁘니까 잘해 줄 겁니다.”

“내가 싫어.”

불퉁한 표정을 하고 라일라는 단칼에 비오스트의 말을 거절했다.

“차라리 일을 시켜. 나한테 잘해 주는 대가를 받아 가라고.”

“이건 그냥 제가 잘해 주고 싶어서 잘해 주는 거예요. 대가를 받고자 하는 건…….”

“그게 싫다고. 불편해! 나는 누군가가 나한테 잘해 주는 게 이상하다고!”

발칵 화를 내는 라일라를 보며 비오스트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난 잘해 주고 싶은데, 그게 라일라에게는 곤란하다니, 저도 참 곤란하네요.”

“그래. 그러니까 차라리 일을 시켜. 그러면 나도 안 곤란하고, 너도 안 곤란하잖아.”

완벽하게 논리적인 문장이었다.

“좋아요. 그럼 라일라는 뭘 잘하죠?”

“난…….”

라일라의 눈동자가 오른쪽을 향했다. 이내 왼쪽 아래를, 그리고 인상을 찌푸리며 오른쪽 위를 향했다.

“요리?”

한참이나 생각에 빠진 라일라를 도와주기 위해서 비오스트가 먼저 한 가지를 제시했다.

그의 말에 라일라는 물끄러미 자신의 앞에 놓인 음식들을 쳐다보았다. 라일라는 이런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없었다.

“……아니.”

“그럼 바느질은요?”

비오스트가 다른 것을 물었지만, 마찬가지였다. 라일라는 제가 입고 있는 옷과 같이 복잡한 것은 전혀 만들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바느질이라는 것은 구멍 난 양말을 기우고, 찢어진 치마를 기우고, 헐어서 못 쓰는 옷을 걸레로 만드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아무리 황성에 대해서 모르는 라일라라지만, 비오스트가 구멍난 양말을 기워 신고, 찢어진 옷을 기워 입고, 못 입는 옷으로 만든 걸레가 필요할 리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아니.”

“음……. 그럼 다른 건 뭐가 있을까요? 세실. 황태자궁에서 라일라가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지?”

“글쎄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세실은 잠시 생각했다.

“굳이 말하자면 청소는 어떨까요?”

“아, 그래. 청소. 청소는 어때요?”

“……그거 하려면 사람들이랑 마주치지 않아?”

사람이랑 마주치는 일은 싫다는 말이었다.

“아아-”

비오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침묵.

“꼭 일을 해야 할…….”

“일을 줘!”

고집스럽게 입술을 꽉 다물고 있는 라일라의 표정에서 꼭 일하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느껴졌다.

참…… 난처했다.

* * *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걱정스러운 감정을 한가득 담고 있는 세실을 보며 라일라는 뭘 그런 걸 묻냐는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 알겠습니다.”

세실은 작은 한숨과 함께 눈앞에 있던 문을 열었다. 얼마나 쓰지 않은 것인지 황궁임에도 불구하고 문은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기름칠을 좀 해야겠네요.”

중얼거리는 세실을 뒤로 하고 라일라는 씩씩하게 그 안으로 들어갔다.

환기를 위한 것인지 높은 천장은 라일라의 키에 열 배는 됨직했다. 얼마 되지 않는 수의 창문에서는 은은한 빛이 들어와, 어둡지만 않을 정도로 안을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사방으로 꽂힌 책들.

억지를 부리는 라일라에게 비오스트가 시킨 일은 황태자궁의 도서관을 청소하는 일이었다.

황태자가 어릴 때부터 공부하고, 책을 읽는 도서관이었지만, 이제 다 큰 성인이 돼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은 곳이었다.

이미 비오스트의 지식은 제국의 어지간한 학자들의 위에 있어 학습을 더는 필요로 하지 않았고, 필요한 책들은 교육을 위한 책들 위주로 있는 황태자궁의 도서관보다는 본궁의 방대한 서적이 있는 황실도서관을 이용했다.

그리하여 주인이 드나들지 않아 문이 열리지 않은 지 이미 몇 년이 된 이곳을 청소해 주면 좋겠다는 부탁 아닌 부탁, 일 아닌 일을 받게 된 라일라였다.

“아, 아가씨. 이건 황태자 전하께서 대강 적어 주신 내부 구조입니다.”

세실이 작은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책장들의 위치와 대강의 종류가 꽂혀 있는 종이었다.

“……뭐라고 적혀 있어?”

“네?”

“읽어 보기 귀찮아. 뭐라고 적혀 있어?”

실은 귀찮은 것이 아니라, 읽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라일라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그렇게 말했다. 자신의 약점을 알려 주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지금은 방실방실 잘도 웃고 있는 여자지만, 돈을 받으니까 자신의 냄새를 참아 주고 있는 거겠지만, 나중이 되면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적어도 라일라의 생각에는 그랬다.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존재를 말할지도 몰랐다. 지독한 악취의 마녀를 봤다며, 소문을 내고 다닐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그 소문이 퍼지고, 사람들이 마녀를 죽이겠다고 몰려올지도 몰랐다. 그러면 황궁이든 뭐든 자신은 불타서 죽을지도 몰랐다.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라일라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음……. 책장들은 전부 학문의 종류에 따라 분류가 되어 있으니, 책장 간의 이동은 하지 말아 달라고 하시네요. 그리고 책장 내에서 철자 순으로 정리를 해 달라고 하시네요.”

“철……자?”

“네.”

제가 읽은 내용이 맞는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세실과는 달리 라일라는 그저 입술을 꾹 다물고 바닥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라일라는 철자를 몰랐다. 아니, 철자라는 단어 자체를 몰랐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아, 아니. 그저…….”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세실의 눈을 황급히 피한 라일라는 눈으로 도서관의 내부를 훑었다. 몇 개의 창문에서 햇볕이 들오는 자리마다 너울너울 뽀얀 먼지가 춤을 추고 있었다.

“정리보다 청소를 먼저 해야 할 거 같아서.”

“아, 그렇겠네요.”

세실은 라일라가 쳐다보는 곳을 같이 바라보았다.

분명 치워야 할 먼지였지만, 뽀얀 햇살에 먼지가 춤을 추는 광경은 어쩐지 고요하고 아늑해 보여 세실도, 라일라도 가만히 그것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평화로웠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 * *

“오늘 고생하셨어요.”

도서관 청소를 하고 돌아온 라일라를 보며 세실은 방긋 웃었다. 아침에 뽀송뽀송하던 모습은 오간 데 없이 먼지투성이인 라일라의 옷을 얼른 벗겨 주려 손을 뻗자, 그녀는 얼른 뒤로 물러섰다.

“얼른 씻으셔야죠.”

“씻을 거야.”

“옷을 입고 씻을 수는 없으시잖아요?”

“나 혼자.”

단호한 라일라를 보며 세실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귀족 아가씨가 이렇게 ‘혼자’를 좋아하는지 몰랐다. 처음에 올 때부터 옷을 갈아입는 것도, 씻는 것도 저 혼자 할 거라고 말하던 라일라였다.

황태자 전하께 고집을 부려서 받아 낸 도서관 정리도 저 혼자 하겠다고 부득부득 우겨서 끝끝내 세실을 내쫓고 말았다. 제가 먹고 자는 것에 대한 값을 치르는 것이니 자신이 혼자 해야 한다는 말로 말이다.

“나가.”

한숨을 쉬는 세실에게 라일라는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제 방문을 직접 가리키면서까지 말이다.

“네. 알겠어요. 하지만 저는 다시 돌아올 겁니다.”

세실의 말에 라일라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황태자 전하께서 저녁식사를 같이하겠다고 하셨거든요.”

“그 황태자는 혼자 밥을 못 먹어? 왜 아침저녁으로 계속 나랑 밥을 같이 먹겠다고 하는 거야?”

“혼자 식사를 못 하신다기보다는, 라일라 님이 적적하실까 봐 그러시는 거겠죠.”

세실의 말에 라일라의 인상이 더욱 찌푸려졌다. 그리고 그녀를 노려보는 눈빛이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내가 적적할 것 같아?’

라고. 물론, 그 눈빛을 해석하지 못할 세실이 아니었다.

“아니면, 황태자 전하께서 적적하시던가요.”

찌푸려져 있던 라일라의 인상이 봄 햇살에 얼음이 녹듯 스르르 풀렸다.

“비오스트가 적적하다고?”

“네. 황태자 전하께서는 언제나 혼자 식사를 하셨으니까요. 아주 가끔 숙부이신 대공 전하나, 그것보다 더 가끔 아버님이신 황제 폐하께서 같이 식사를 하시긴 하셨지만, 황태자궁에서의 식사는 언제나 혼자셨지요.”

“밥은 누구나 다 혼자 먹잖아.”

“하지만 같이 밥을 먹으면 더 즐겁지 않나요?”

“…….”

“같이 담소를 나눈다거나, 맛있는 음식을 권한다거나, 그런 행동들을 하면서 먹으면 더 즐거운 식사가 되죠.”

세실의 말에 라일라는 가만히 제 발치를 쳐다보고 있었다.

확실히, 혼자서 후루룩 식사를 먹어 치울 때는 맛 같은 것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저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었다. 아주 가끔 제가 한 요리가 그럭저럭 맛있을 때도 있었지만, 말없이 그것을 먹다 보면 아주 순식간에 해치워 버리고 없었다.

그에 비해 비오스트와 함께하는 식사는 뭔가 달랐다.

음식도 맛있었지만, 쓸데없는 이야기를 묻는 것은 짜증났지만, 더 먹으라고 권유해 주는 것도 귀찮았지만, 그래도 뭔가…… 달랐다.

“그러니, 나중에 황태자 전하와 식사에서 예쁘게 보이실 수 있도록 제가 목욕시중을…….”

“나가.”

은근슬쩍, 라일라의 목욕시중을 들려고 설득하려던 세실은 이번에도 단칼에 쫓겨나고 말았다.

“고집도 참.”

고개를 내저으며 세실이 자기 방으로 가려던 순간이었다. 빼꼼히 방문이 열리더니, 라일라가 고개를 내밀었다.

“비오스트랑 저녁은 같이 먹을 거야. 나중에 다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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