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이게 정말…… 내가 지낼 방이야?”
“물론입니다, 아가씨.”
주춤주춤 방으로 들어가며 연신 이 방이 제 방이냐고 불신 가득한 목소리로 묻는 라일라와는 달리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여기서 잔다고?”
“네, 아가씨.”
침대의 이불을 슬쩍 만진 라일라는 그 부드러운 촉감에 움찔해선 얼른 손을 뗐다. 10여 년 동안 매일같이 덮고, 빨아서 해어지고 뻣뻣해진 이불과는 감촉이 달랐다.
“옷장은 아가씨의 취향을 몰라서 조금만 채워 두었습니다.”
세실이 옷장을 열자 대여섯 벌의 옷이 안에 걸려 있었다. 모두 고급스러운 천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레이스나 장식도 아낌없이 사용한 유명 디자이너의 제품이었다.
물론, 라일라는 디자이너라는 게 뭔지도 몰랐지만.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욕실을 알려 드릴게요.”
“욕실?”
오두막의 뒤편의 시냇가에서 모든 것을 해결했던 라일라는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단어라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제가 시중을 들어 드리겠지만, 혹시나 혼자서 사용하실 때도 있으실 테니까요. 씻으실 도구들은 전부 여기에 있어요. 모두 캐모마일향으로 통일해 두었는데, 싫으시다면 바꿔 드릴게요.”
라일라로서는 쓰임새도 모르는 크고 작은 병들을 가리키며 세실이 말했다.
“그리고 여기가 욕조. 여기 빨간 돌을 누르면 따뜻한 물이, 여기 파란 돌을 누르면 차가운 물이 나와요.”
“따뜻한 물이 나온다고?”
무슨 이상한 소리냐는 듯, 라일라가 인상을 찌푸리며 세실을 쳐다보았다. 마치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이.
“한번 보시겠어요?”
세실은 그런 라일라의 반응에 전혀 괘념치 않으며 손으로 빨간 돌을 터치했다. 그러자 빨간 돌의 옆의 구멍에서 물줄기가 쏟아져 나왔다. 따뜻한 수증기와 함께.
라일라의 눈이 커졌음은 당연했다.
“아주 간단한 마법이랍니다. 황궁에는 이런 마법이 걸린 물건들이 몇 가지 있어요.”
살짝 다시 빨간 돌을 눌러서 물을 끈 세실은 웃으면서 라일라를 바라보았다.
“혹시 궁금하신 게 있으실까요?”
“……너는 황궁에서 일하는……. 그러니까…….”
적당한 단어를 모르는 라일라의 입안에서 단어들이 맴돌았다.
“궁녀 말씀이신가요?”
“그래. 그런 거야?”
“아뇨. 저는 그냥 라일라 님을 모시기 위해서 황태자님께서 고용하신, 굳이 말하자면 유모가 되겠네요.”
“유모?”
유모라면 뭔 줄 알았다. 자신이 어릴 때, 라일라를 돌보기를 거부한 어머니 대신에 자신을 돌본 할머니들을 말했다.
“내가 아기라는 거야?”
“물론 그건 아니에요. 다만, 저희 어머니는 황태자 전하의 유모셨고, 저도 언젠가 황태자 전하의 자녀분이 생긴다면 그분의 유모가 되도록 교육을 받은 사람이랍니다.”
친절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하는 세실이었지만, 라일라는 여전히 그녀에게서 경계심을 감추지 않고 발산하고 있었다.
“당신……. 냄새 안나?”
그리고 결국, 툭- 하고 자신의 경계심의 근원을 세실에게 내뱉었다.
“아가씨에게서 나는 냄새 말이죠?”
제가 먼저 말을 꺼냈으면서도, 세실의 입에서 나온 ‘냄새’라는 단어에 라일라의 어깨가 움찔했다.
“물론 나요.”
“그런데 왜 안 나는 척을 하는 거지?”
“안 나는 척을 한 건 아니에요.”
“거짓말. 날 보고 한 번도 욕도 하지 않았고, 노려보지도 않았고, 마녀라고 손가락질하지도 않았잖아.”
“저런……. 그런 짓을 당한 건가요?”
“…….”
“물론 아가씨는 냄새가 나고, 그렇게 좋은 냄새는 아니긴 해요. 하지만 저는 황태자님께 미리 그 이야기를 들었고, 아가씨를 돌봐 드리기로 약속했어요. 그러니 저는 제 할 일을 하는 것뿐이랍니다.”
세실의 말에 라일라의 경계심이 조금, 아주 조금 줄어들었다.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거짓말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돈을 대가로, 윗사람이 시킨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이, 선의로 그렇게 한다는 것보다 훨씬 믿음직스러웠다.
적어도 사람을 믿지 못하는 라일라에게는 그랬다.
“또 질문 사항이 있으신가요?”
“……가.”
“네?”
“나가라고. 혼자 있고 싶으니까.”
그렇게 세실은 단박에 방에서 쫓겨났다. 라일라의 방에서.
* * *
똑똑.
조용했다.
“아가씨?”
세실의 부름에도 방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녀가 살짝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자, 그 안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라일라 아가씨?”
침대에 누운 흔적은 보였지만, 싸늘함만 있을 뿐 침대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욕실의 문도 열어 보지만 그곳 역시 아무도 없었다.
세실은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혹시 도망이라도 간 걸까? 당장 황태자궁의 경비병에게 알려서…… 아니, 전 황궁의 병사들에게 알려서 당장 라일라를 찾아내라고 해야 하는 걸까?
만약에 라일라가 진짜 도망간 거라면 끔찍했다. 비오스트는 자신을 분명히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제발 그건 아니어야 할 텐데.”
당황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방을 훑던 세실의 눈에 이상한 점이 하나 보였다. 침대 위에 베개가 하나 보이지 않았다.
방의 주인은 한 명이었지만, 준비된 베개는 분명 둘이었다. 그런데 지금 침대 위의 베개는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왜 베개가 하나뿐이지?”
하나 남은 베개를 만지작거리던 세실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옷장의 문을 열었다.
커다란 옷장에 아직 걸려 있는 옷은 몇 벌 되지 않아서 공간은 넉넉했다. 그리고 그 넉넉한 공간에 사라진 베개를 베고 쪼그리고 누워 자는 라일라가 있었다.
“라일라 아가씨?”
살짝 손으로 그녀를 흔들자, 곤히 자고 있던 라일라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왜 여기서 주무세요?”
세실이 라일라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라일라는 그녀의 손을 무시하고 자기 혼자의 힘으로 옷장에서 빠져나왔다.
“여긴 너무 넓어.”
아직도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은 표정으로 방의 구석구석을 째려보던 라일라였다.
“그래서 안정이 안 돼.”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전에 내가 불면증으로 죽든가.”
정말로 늦게 잔 것인지 라일라의 눈은 살짝 붉게 충혈이 되어 있었다. 들고 있던 베개를 침대에 던져 놓고, 라일라는 가는 다리를 비틀거리며 욕실로 향했다.
“씻으시게요?”
“응.”
“도와 드릴게요.”
당연하다는 듯 욕실로 따라 들어온 세실을 보며 라일라는 당황했다.
“뭘…… 도와준다는 거야?”
“아가씨께서 씻으시는 걸 도와 드리는 거죠.”
“그게 남의 도움을 받을 일이라고?”
라일라는 한껏 인상을 찡그렸다.
“나가.”
“네? 하지만 아가씨…….”
“당장 나가.”
“알겠습니다.”
단호한 라일라의 말에 세실은 어쩔 수 없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욕실을 나갔다. 한참이나 문을 노려보고 그녀가 다시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라일라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작고 깡마른 그녀의 몸이 욕실의 공기에 모두 노출되고 나서, 라일라는 욕조 안에 쪼그리고 앉았다.
한껏 긴장된 표정으로 천천히 라일라의 손이 뻗어 나갔고, 빨간 돌에 닿았다. 그리고 얼른 떨어졌다.
벽에 뚫린 구멍에서 즉각 따뜻한 물이 솟아 나왔고, 그걸 보고 있던 라일라의 눈이 어제와 마찬가지로 똥그랗게 떠졌다. 주춤거리며 손바닥을 내밀자 따뜻한 물이 라일라의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신기해…….”
제 손에 닿는 따뜻한 물을 보며 라일라는 혼자 중얼거렸다.
“아가씨?”
“뭐, 뭐, 뭐, 뭐야!”
라일라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제 몸을 가렸다. 하지만 세실은 욕실로 들어온 게 아니라 바깥에서 말하고 있는 중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어제 저녁 식사를 같이하지 못한 것에 대한 대신으로 오늘 아침을 같이하시겠다고 연락을 하셨어요. 얼른 준비해야 할 것 같으니, 빨리 씻고 나오시겠어요?”
“아, 알았어.”
라일라는 그렇게 대답하며 얼른 제 머리를 물줄기의 아래에 들이밀었다. 따뜻한 물이 머리에서부터 흘러나와 목덜미를 지나고, 따뜻하게 몸을 데워 주었다.
그 기분 좋음에 라일라는 자기도 모르게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 * *
부드러운 양송이 수프는 고소하고 깔끔했다. 갓 구운 빵은 보드랍고 폭신하고 쫄깃하기까지 했다. 채소는 싱싱하게 아삭했으며, 달콤하고 진한 밀크티는 맛있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모두 라일라가 처음 먹어 보는 맛이었다. 아니, 사실은 밀크티를 제외하면 먹어는 본 것이었지만, 이제까지 라일라가 먹었던 것들이 이런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이제껏 몰랐었다.
“이게 이름이 뭐라고?”
벌써 두 잔째의 밀크티를 전부 먹어 치운 라일라가 비오스트에게 물었다.
“밀크티요.”
친절하게 대답을 하며 그가 손짓하자 옆에 있던 세실이 재빨리 다가와 라일라의 잔을 회수해 갔다. 세실이 금방 새로운 따끈한 밀크티를 만들어서 라일라에게 가져다줄 것이다.
“라일라가 맛있게 먹으니, 저도 기분이 좋네요.”
“뭐? 나는 그냥…….”
있으니 먹을 뿐이라는 식으로 말을 하려고 했던 라일라는 제 앞의 음식들이 초토화된 것을 보고는 그냥 입을 닫아 버렸다.
“옷도 아주 잘 어울리고요.”
라일라가 입은 파란색 드레스를 가리키며 그가 말하자 라일라의 시선이 제가 입은 옷을 향했다. 이런 드레스는 입는 법을 몰라서 이것만은 세실에게 나가라고 할 수 없었다.
예쁘게 프릴이 달리고, 소매 부분이 부풀려져 있는, 과하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예쁜 드레스였다. 생전 처음 입어 보는 드레스에 라일라는 어색해 죽을 지경이었지만, 비오스트가 잘 어울린다고 하니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너 말야…….”
운을 떼었던, 라일라가 슬그머니 다시 입을 다물었다. 비오스트는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듯이 눈빛으로 그녀를 재촉했다.
“그러니까 황태자 전하? 저하? 님아, 그러니까…….”
“황태자 전하고, 전하 자체가 높이는 뜻이라서 님은 붙이지 않아요.”
“그럼, 황태자 전하 너 말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너 말입니다?”
라일라는 비오스트를 그에게 맞게 부르려고 했지만, 뭔가 입에 붙지 않는지 연달아 실수했다. 예법 따위 배우지 못했다. 오며 가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서 스스로 말을 익혔을 뿐, 대화의 방식도 서툴렀다.
그런 라일라가 존댓말이라니, 그것도 황실의 황태자를 위한 존댓말이라니 당연히 힘들 법도 했다.
“라일라?”
“응. 아니, 네.”
“그냥 편할 대로 해요. 당신이 반말이 익숙하다면, 나는 그걸로 좋아요.”
비오스트는 그렇게 말하며 따뜻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