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나는…….”
라일라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제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처음으로 자신의 악취를 맡지 못하는 사람인데 자신의 몸에서 냄새가 난다고 제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시장에 갈 수 없는 이유는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한단 말인가?
“피가 나네요.”
“뭐?”
바로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에 라일라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비오스트가 어느새 시야에 없었다.
“손에서, 피가 나요.”
대신 그는 라일라의 뒤편에 서서 허리를 숙여 라일라의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 뒤쪽에서 손을 뻗어 와 라일라에 입에 물려 있던 손가락을 빼내었다.
비오스트의 말대로 붉은 피가 자신의 엄지손가락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있었다. 찢어진 손톱이 나달나달하게 달린 곳이었다.
라일라는 멍하니 그 피를 바라보고 있었다.
“치료해 줄까요?”
나른한 속삭임이 라일라의 귀를 파고들었다.
“치료?”
치료가 뭔지 모르는 사람처럼 라일라가 되물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로 뭔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핥아서 침을 발라 줄까요?”
“아니, 그건!”
그의 말에 당황해하며 라일라는 고개를 돌려 비오스트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동요도 없이 찬찬히 친절한 웃음을 띤 그가 보였다.
“아…….”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리고 어제의 그 이상했던 그의 치료가 생각이 났다.
뭔지 몰라도 비오스트의 혀가 닿으면 몸이 찌릿찌릿했었다. 발바닥은 간지럽고 발가락은 곱아들었다. 아니, 발가락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다 움찔거리고,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기분이 싫지는 않았었다.
“아프지 않아요?”
다정한 목소리가 라일라의 귓가에 울렸다. 이것도 이상했다. 그저 말을 했을 뿐인데, 오싹하게 소름이 돋았다. 전혀 춥지 않았는데.
그가 손을 핥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괜찮아요. 내가 빨리 낫게 해 줄게요.”
다정한 속삭임에 라일라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흣-”
그리고 비오스트가 뭉텅 라일라의 손가락을 베어 물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까슬한 혓바닥이 라일라의 피부에 닿았다.
비오스트의 말이 맞았다. 아픔은 벌써 낫고 없었다. 다친 것보다는 그의 혀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처음에는 라일라의 다친 엄지를 빨아 당기더니, 이내 그 까슬한 혀가 그녀의 손가락을 제 입천장으로 붙였다. 입천장에 단단히 라일라의 손가락을 고정한 혀는 이제 제 몸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천천히, 혹은 빨리. 가끔은 다정하게 감싸 쥐기도 하면서.
어쩐지 초조해지는 기분에 라일라는 다른 손으로 테이블을 꽉 붙들었다. 그러지 않으면 꼭 어딘가로 휩쓸려 가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딘지 모르겠지만, 아득하고 깊은 어딘가로 한없이 끌려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라일라…….”
다정한 속삭임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누구도 이렇게 다정한 목소리로 라일라를 부른 적은 없었다. 그녀의 이름 자체를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들은 적이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 사실에 다시 오스스 닭살이 돋아났다.
“흐읏…….”
생경하게 들리는 자신의 신음에 라일라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야 말았다.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라일라.”
고작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파르르 떠는 라일라를 보며 비오스트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귓가에 자신의 숨결을 불어 넣자, 그녀는 더욱 파들파들 떨었다.
분명 시작은 비오스트가 라일라의 손을 잡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라일라가 그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마치 그 손을 놓으면 저 어딘가로 떨어져 버릴 것이라고 믿는 사람처럼 라일라는 비오스트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비오스트가 빨았던 라일라의 엄지는 번들거리는 자신의 타액과 함께 어느새 다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까워.’
그는 얼른 다시 라일라의 손가락을 자신의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아아!”
더는 꼭 쥐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라일라가 이전보다 더 세게 비오스트의 손을 잡았다. 하찮기 짝이 없는 그 악력이 귀여워 비오스트는 보답처럼 라일라의 손가락을 빨아 당겼다.
그러자 비오스트의 혓바닥으로 라일라의 맛이 퍼져 나갔다.
비릿한 금속의 맛이 아니었다. 달았다.
설탕이나 과자나 과일 같은 단맛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저 달다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맛이었다.
그리고 갈증 난 이가 마시는 바닷물과 같은 마력이 있었다.
아무리 마셔도 부족하고, 더욱더 원하게 되고, 그리고 끝내는 갈증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그것을 알아도 원하게 되는.
그저 손가락 하나로는 부족했다.
고작 피 몇 방울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비오스트는 라일라의 모든 것을 원했다.
이 가련한 꽃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싶었고, 남김없이 약탈하고 싶었으며, 사정을 봐주지 않고 무참하게 씹어 먹고 싶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몽땅 잘근잘근 씹어서 전부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은, 그야말로 짐승과 같은 욕망이 비오스트의 안에서 들끓어 올랐다.
“자, 잠시만, 그만!”
그런 비오스트의 욕망을 알아차린 것일 수도 있었다. 본능적으로 육식동물의 낌새를 알아차리는 초식동물처럼 말이다.
비오스트의 품속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던 라일라가 갑자기 그를 제지하며, 그의 품속에서 벗어나려고 바르작거렸다.
“스, 스튜가 있어.”
헐떡거리는 숨을 참으며 라일라는 그렇게 말했다.
“고기를 좋아한다며. 돼지고기로 만든, 스튜가 있어.”
지금 비오스트가 먹고 싶은 것은 스튜가 아니라 라일라였다.
“……그래요?”
하지만 비오스트는 점잖게 물러났다. 붙잡고 있던 라일라의 손을 놓아주고, 그녀의 뒤에 바싹 붙어 있던 몸도 떼어 냈다.
“스튜를 데워 올게.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아직도 숨을 헐떡거리면서 라일라는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맛있겠네요.”
라일라가 후들거리는 다리로 걷는 것에 집중하지 않았더라면, 달달 떨리는 손을 바로 하려고 그걸 쳐다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정하고 친절한 말과는 달리 날카롭고 흉포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비오스트를.
자신을 바라보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비오스트를.
* * *
“아무래도 황태자 전하께서는 발렌시아 남작님의 딸을 황태자비감으로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수리의 한마디에 발렌시아 남작과 발렌시아 남작 부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설마설마했던 일이 정말로 일어나 버린 것이다.
“그, 그게 진짜입니까?”
“물론이지요.”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 황태자 시종의 얼굴을 보면서도 남작은 방금 그 말이 믿기지가 않았다.
내 딸이 황태자비라니. 그럼 내가 황태자의 장인이 된다는 건가? 그러면 미래에는 온라이언 제국 황제의 장인? 내 딸이 제국의 황후?
“세상에나!”
부채로 입을 가리며 놀라움이 섞인 탄식을 하는 부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남작은 남몰래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팠다. 분명히 꿈은 아니었다.
“그, 그건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겁니까? 아니면 그, 그런 눈치라는 겁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말씀을 하신 겁니다.”
남작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황태자의 시종이 드릴 말씀이 있다며 잠시 보자고 하는 것을 보며 가볍게 생각했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오늘 먹고 싶은 요리가 있으신가? 아니면 뭔가 밤사이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셨나? 라는 소소한 생각밖에 하지 못했었다.
혹시 몰라 안주인인 남작 부인까지 부르고, 딸아이까지 부르려다 자신들이 뭔가 책잡힐 일을 한 것이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화를 낼 아리아드네를 생각하고 참았던 거였다.
그런데 세상에! 황태자비라니!
“혹시, 따님께서 짐을 꾸리실 시간이 필요하신가요?”
“짐이요?”
“네. 황태자 전하께서는 따님을 직접 황궁으로 모실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황궁이요?”
“네. 정식으로 황태자비로 맞이하기 전에 황실의 분위기나 예법 같은 것을 익히기 위해서 황실에 미리 입궁을 시킬 예정이십니다.”
“이, 입궁요?”
남작은 마치 앵무새처럼 수리가 하는 말을 되물었다. 갑자기 일어나고 있는 일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수리는 다 안다는 듯, 넓은 아량이 담뿍 담긴 미소로 그런 남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준비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실까요?”
“아, 아니요! 황태자 전하를 기다리게 만들 수는 없지요! 빨리 준비를 시키겠습니다.”
“네. 그래 주시면 고맙지요.”
“네. 그러겠습니다.”
“…….”
“…….”
대화는 끝이 났다. 보통이라면 이제 수리가 서재 밖을 나가야 할 타이밍이었다.
“…….”
“…….”
하지만 수리는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로 남작과 남작 부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 잊은 것이라도 있는 것처럼.
“저기, 다른 전하실 말씀이라도……?”
“아니요. 없습니다. 그저…….”
시종의 친절한 미소가 모호한 미소로 변하였다.
“남작님께서 저에게 하신 어떤 약속이 있으실 텐데요.”
“제가 시종님께 약속을요? 아!”
그제야 남작은 이 시종이 나가지 않고 있는 이유를 알아 차렸다. 그는 얼른 서랍을 열어 주머니에서 500실링을 꺼냈다.
“아하하하! 제가 경황이 없어서 잊고 있었습니다.”
남작이 테이블 위로 그것을 올려놓자, 수리는 애매한 미소 그대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번에는 또 뭐가 문제인지 몰라 남작이 어리둥절하는 사이에, 남작 부인이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장래에 황제의 장인어른 되실 분이 통 좀 크게 쓰세요.”
“아? 아아!”
남작은 그제야 분위기를 알아차리곤, 얼른 다시 서랍을 열었다.
‘가만, 황제의 장인어른이면 어느 정도여야 하지?’
고민하던 발렌시아 남작은 통 크게 500실링을 더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천 실링이 올라오고 나서야 수리는 재빨리 그 돈을 수거했다.
“이러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좋은 일에 쓰겠습니다.”
그 좋은 일이 수리 자신에게 좋은 일이라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 남작 영애께서는 언제 준비가 될까요?”
“언제까지 하면 될까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요. 내일은 어떠십니까?”
“내일이요? 내일은…….”
남작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아리아드네의 드레스와 보석들은 제법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입궁한다고 해서 아리아드네가 그것들을 포기할 리 없었다. 그것들을 싸는 데 하루면 가능할까?
“시간이 좀 걸리신다면 모레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황태자비님께서 안전하게, 편안하게 입궁을 하시는 거니까요.”
모레도 충분히 촉박한 시간이었지만, 수리는 말미를 넉넉하게 주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짐을 꾸려서 늦어도 모레는 출발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모레로 알고 있지요.”
주머니의 천 실링을 느끼며 수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