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지금 20년이 넘게 이 짓을 반복하고 있잖아요.”
“아니, 그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도 땀을 흘리고 있지 않던 남작은, 제 딸의 추궁에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사실, 남작은 자신의 둘째 딸을 가장 예뻐하면서도, 가장 어려워하고 있었다.
제 씨에서 난 것이 믿기지 않았을 만큼 예쁜 용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어떨 때는 자신보다 더 똑똑한 것 같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으며, 지금처럼 태도가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이 세 번째 이유였다.
“제가 정말 살 수가 없네요.”
“네가 이해를 해야지 어쩌겠느냐.”
한숨까지 내쉬며 짜증을 부리는 둘째 딸을 보며 남작은 그야말로 쩔쩔매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체 언제까지 이해해야 하냐고요.”
“네 언니인데 어쩌겠느냐.”
“누가 저런 언니를 낳으래요? 낳았으면 아버님, 어머님이 책임을 지셔야지. 왜 저한테까지 이렇게 피해가 오게 만드냐고요.”
날카로운 아리아드네의 말에 또 한 번 남작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제 나이가 벌써 스물이에요. 그런데 이제까지 혼담이 오간 가문도 하나 없잖아요. 옆 영지의 그 못생긴 피아도 혼담이 오간다는데. 걘 이제 열여덟이고, 저는 스물이고! 제가 훨씬 예쁜데도 말이에요!”
“그, 그야…….”
‘피아는 백작 영애이지 않니?’라는 소리를 꿀꺽 삼키는 남작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또 왜 아버님은 남작에 머물러 있느냐며 짜증을 낼 아리아드네였다.
사내라면 야망을 품고 영지를 넓히든가, 수도에 진출하든가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며 질책을 당한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남들은 부인의 바가지를 견디어야 한다는데, 남작은 항시 야심 많은 딸에게 바가지를 긁혔다.
“그, 그래서 황태자 전하를 모셨지 않느냐. 네가 황태자 전하의 마음만 사로잡는다면 그깟 혼담이 뭐가 대수겠냐?”
“아! 그래요.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아버님을 찾던 중이었어요.”
황태자라는 말에 금세 아리아드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황태자님의 시종이 아버님을 찾습니다.”
“시종이?”
“긴히 할 말이 있답니다.”
아까의 그 짜증스러운 표정은 금세 사라지고, 아리아드네는 어느새 화사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님을 찾고 있었는데, 저것들에게 잡혀 있는 걸 보고, 제가 얼마나 속이 터졌는지.”
“혹시, 그래서…….”
“뭔가요?”
“아까 고개를 숙인 것이냐?”
“당연하죠. 그게 아니면 제가 뭐 하러 고개까지 숙여요? 빨리 저것들을 내보내고 시종을 만나러 가야 하니까 그렇죠. 게다가 고개를 숙인 사이에 눈물이 나오게 만들려고 눈을 찔러서 지금 눈도 따갑다고요.”
화사한 미소에 다시 짜증이 깃들었다.
“얼른 가 보세요. 아니, 같이 가요. 무슨 이야기를 할 건지 저도 들어야겠어요.”
“그, 그래.”
아리아드네의 재촉에 서둘러 발걸음을 떼면서 남작은 생각했다.
제 딸이지만, 무서운 여자라고.
* * *
“그러니까 저택에 좀 더 머무르고 싶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닙니다.”
단칼에 부정하는 수리의 말에 남작과 남작 부인, 그리고 아리아드네의 표정이 단번에 샐쭉해졌다.
“제가 어느 분의 말씀을 전하는지 잊으셨습니까? 제국의 황태자 전하십니다. ‘머무르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머무르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수리가 말을 마치자, 세 명의 표정이 당장 밝아졌다. 종결어미가 어떻게 끝나는지는 상관없었다. 요는 황태자가 여기에 더 있겠다는 거였으니까.
“그, 그, 혹시 더 머무시는 연유는 말씀을 하시던가요?”
“아뇨. 그렇게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마는…….”
수리는 살짝 말꼬리를 늘리며 바깥 눈치를 보는 시늉을 했다.
“걱정 말고 말씀하십시오. 주변을 이미 물린 상태입니다.”
“그래도 역시나, 황태자님의 사생활이니까 말입니다.”
살짝 미소를 띤 수리의 표정에는 의뭉스러운 꿍꿍이가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재빨리 잡아낸 것은 역시나 아리아드네였다.
“물론, 황태자 전하의 사생활은 중요하시죠.”
그녀는 슬그머니 서랍을 열었다. 혹시나 이런 일이 있을까 봐 일부러 시종에게 응접실이 아니라 남작의 서재에서 기다려 달라고 말한 것이 아니던가.
살짝 미소를 띤 얼굴로 아리아드네는 백 실링짜리를 꺼내 슬쩍 수리의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황태자님을 당분간 모시고 있는 저희 입장에서는, 황태자님의 의도를 안다면, 훨씬 모시기 수월할 것 같아서요.”
힐끗 그 돈을 보는 수리의 표정은 좋아하는 것도, 안 좋아하는 것도 아닌 미묘한 표정이었다.
“이건 순전히 황태자님을 더욱 세심하게 보필하고자 하는 저희의 충심이랍니다. 물론, 시종님도 그러시겠죠?”
“네. 그렇죠. 저에게는 무엇보다도 그분의 편의가 우선이니까요.”
슬그머니 테이블로 올라간 수리의 손이 돈을 덮었다. 그리고 수리와 아리아드네는 서로를 마주 보며 슬쩍 웃었다.
“아마도 황태자님께서 이곳에 더 머물려고 하시는 이유는 어느 여성분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머~ 그러시구나.”
찬찬히 고개를 흔드는 아리아드네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꽃같이 피어올랐다.
“그, 그게 정말이요?”
놀란 남작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수리에게 물었다.
아리아드네가 하도 졸라 대는 통에 황태자를 초청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황태자가 진짜 올지는 몰랐었다. 게다가 정말로 황태자가 아리아드네를 마음에 들어 할 줄은 더욱 몰랐었다.
“그분께서 직접적으로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오랜 시간 그분을 모셔 온 제가 봤을 때는 그런 눈치였습니다.”
어느새 테이블에 있던 돈은 마술처럼 수리의 주머니에 들어가 버리고 없었다.
“그, 그, 눈치라는 것은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어머, 아버님. 그런 말씀은 실례가 아닐까요?”
라고 말하면서도, 구체적인 증거를 듣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인 듯 아리아드네는 반짝이는 눈을 수리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황태자님께서는 그 여성분에게 무언가 선물을 하시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말에 남작과 남작 부인, 아리아드네의 입이 동시에 떡 벌어졌다. 그리고 또 동시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러셨군요. 참으로 구체적이네요. 정말로 감사드려요.”
“별말씀을요. 남작가에서 황태자 전하를 모시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말씀드렸을 뿐인데요.”
“물론 그러시겠죠.”
“아, 그럼 혹시 오늘 저녁에 드시고 싶은 거나 필요하신 거라든가 하는 말씀은 없으시던가요?”
안주인의 도리를 다하려는 것인지 남작 부인이 시종에게 물었다.
“황태자님께서는 오늘 저녁 선약이 있으십니다.”
“선약이요? 어느 분과요?”
“그건 정말로 황태자님의 사생활이라서요.”
수리는 이것만은 비밀이라는 듯 난처한 미소를 살짝 띠었다.
* * *
그 시간의 황태자는 자신의 사생활을 즐기지 못하고 있었다.
초에 대한 대가로 저녁 식사 초대를 억지로 받아 낸 것은 좋았다. 뭘 좋아하느냐는 말에 스테이크라고 말을 한 이유도, 그저 고기를 굽기만 하면 되는 요리라고 생각해서였다.
그것이라면 쓰레기 같은 양배추 수프를 만드는 여자라도 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막상 그의 앞에 놓인 접시에 있는 것은 가니쉬에나 적합할 버섯 나부랭이였다.
“이게 뭔가요?”
“…….”
비오스트의 말에 새삼스럽게 찔리는 건지 라일라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아, 혹시 전채요리인가요?”
“그래. 이게 전체야.”
포인트가 어쩐지 미묘하다고 생각하며 비오스트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힐끗 부엌을 봤지만, 뭔가가 더 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다음에 스테이크가 나온다는 건가요?”
“무슨 소리야? 이게 전체라고.”
이제 아예 대놓고 반말을 하는 라일라는 비오스트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하자 울컥해서 말했다.
“아아- 그 전체.”
비오스트는 다시 한번 자신의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그저 버섯이 구워져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라일라와 자신의 사이에는 풍성하게 푸성귀가 있을 뿐이었다.
“전 스테이크가 먹고 싶다고 했는데요?”
“머쉬룸 스테이크잖아.”
“전 버섯보다는 고기를 좋아해요.”
“그럼, 여기서 저녁을 먹지 말고, 당신 집 주방장에게 해 달라고 했으면 됐을 것 아니야. 여긴 내 오두막이고, 이 오두막에서 주방장은 나야.”
“하지만 제가 그 주방장에게 어제 돈도 줬는데요. 스테이크용 고기를 사라고요.”
그랬다.
초의 값을 내겠다는 라일라를 만류한 것은 비오스트였다. 돈 따위는 비오스트에게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가 초의 값으로 원한 것은 저녁 식사 초대였다. 게다가 재룟값을 하라며 외려 100실링을 주고 가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저녁 식사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비오스트가 이런 걸 먹고 있는 걸 봤다면, 수리를 틀림없이 기절했을 터였다.
“그, 그건……. 돌려줄게.”
라일라는 당장이라도 돈을 돌려줄 듯,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아니. 돌려 달라는 뜻은 아니었어요. 난 그저, 음…….”
비오스트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어떻게 하면 라일라를 더욱 궁지에 몰 수 있을지, 이 오두막을 지겹게 여길지, 무슨 말을 해야 지금과 같은 삶이 지옥 같다는 것을 더욱 구체적으로 깨닫게 될지, 그래서 자신을 따라나설지를 생각하며.
“당신이 왜 시장을 가지 않았는지 궁금했을 뿐이었어요. 뭔가 바쁜 일이라도 있었나요?”
비오스트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물었다.
물론 그는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그건…….”
라일라가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리라는 것도.
“아주 바빠서 시장을 가지 못한 건가요?”
자를 것도 없는 버섯 하나를 포크로 쿡- 찍어 입에 넣으며 비오스트는 재차 물었다. 뭐 하나 특별할 것 없는 버섯구이였다. 굳이 말하자면 간이 덜 되어서 싱거운 버섯구이.
“난 시장에 갈 수 없어.”
“어째서요?”
비오스트가 버섯을 씹는 동안, 라일라의 입에는 제 손톱이 들어가 있었다. 딱- 소리를 내며 손톱이 이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재차 다시 입속으로 손톱이, 손가락이 들어갔다.
라일라의 얼굴에서는 낭패감이 스쳤고, 비오스트의 입가에서는 슬쩍 미소가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