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오늘 아침은 비가 오고 있었다.
라일라는 어두침침한 오두막에서 쏟아지는 비를 보며 은은한 향의 차를 마시며 매우 감성적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
“제길! 초만 있었어도! 아니, 등잔 기름만 있었어도 훨씬 생산적으로 뭘 할 수 있었을 것 아니야. 떨어진 신발을 기우든지, 구멍 난 냄비를 때우든지 했겠지.”
분하다는 듯, 라일라는 발로 바닥을 내려찍었다.
“이따위로 어두컴컴한 지하실 같은 오두막에서 할 수 있는 건 멍청한 상처나 들여다보고 있는 것뿐이잖아!”
또 한 번 분한 듯 발을 구르는 라일라의 치마는 허벅지 위까지 훌쩍 올라가 있었고, 그녀의 말대로 무릎에는 보라색의 멍과 함께 피가 나고 까진 상처가 있었다.
무릎뿐만이 아니었다. 테이블에 올려놓은 손바닥에도 생채기가 나 있었고, 광대뼈 한쪽도 마찬가지였다.
발렌시아 남작저에서 수모를 당하고 돌아오는 라일라의 발걸음은 씩씩하게 그곳을 향해 갔을 때보다 훨씬 느렸다. 덕분에, 오두막에 도착하기 전에 숲 한가운데서 해가 지고 말았다.
이미 10년이나 이곳에서 살아서 숲길에는 훤한 라일라였지만, 어디에 돌이 있는지, 어디에 나뭇가지가 함정처럼 드리워져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눈앞을 밝힐 것이 아무것도 없던 라일라는 그저 어둠을 더듬어서 오두막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라일라는 깜깜한 숲길에서 제 발 앞에 있던 돌부리를 보지 못했고, 거의 붕- 날아서 그대로 꼬꾸라졌다.
“젠장!”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자 라일라의 인상이 다시 구겨졌다. 안 그래도 화끈거리는 상처가 더 따가워지는 기분이었다.
아주 조금의 조명이 있었더라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였다.
남작가에서 초나 등잔 기름을 조금만 줬더라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아니, 애초에 남작 영애이면서 홀로 이 숲의 오두막에 살지 않았더라면! 남작의 저택에서 내쫓기듯이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라일라의 몸에서 악취가 풍기지만 않았더라면…….
“하아…….”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자, 한껏 솟아올랐던 라일라의 어깨가 아래로 축 늘어지고, 입에서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런 가정 따위는 필요 없었다. 만약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악취를 풍기며 태어났고, 그 누구도 라일라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라일라를 낳은 어머니는 라일라에게 젖을 주기를 거부했으며, 라일라의 아버지는 제가 낳은 자식의 얼굴을 보기를 거부했다.
나중에 태어난 라일라의 동생, 아리아드네 또한 제 언니를 혐오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어.”
스스로를 비하하는 라일라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어떠한 회한도, 비통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세수하듯, 밥을 먹듯, 그렇게 일상적으로 스스로가 태어남을 비관했으니, 이제 와 새삼스럽게 표정이 변할 리 없었다.
“파상풍으로 제발 죽지 않으려나?”
물끄러미 제 손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라일라의 말에는 진심으로 죽음에 대한 갈구가 담겨 있었다.
만약 신께서 자살을 죄로 규정하지 않았다면, 라일라는 이미 제 손으로 칼을 쥘 수 있었을 때 벌써 목숨을 끊었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환생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면, 그녀는 옛날 옛적에 쇠꼬챙이든 뭐든 제 목에 찔러 넣었을 것이다.
신께서 자살을 저지른 라일라의 영혼을 또다시 악취가 나는 몸뚱이로 환생시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라일라는 죽으려야 죽을 수도 없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좋았다. 자살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죽을 수만 있다면, 라일라는 기꺼이 그 길을 택할 수 있었다.
“더럽게 튼튼하기만 한 몸뚱이…….”
아무리 봐도 어제의 상처는 잘 아물어 가고 있었다. 피는 어제 이미 멎었고, 부어오른 것도 이미 많이 가라앉았으며, 피가 맺힌 부분은 딱지가 생길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딱지가 떨어지고, 새살이 돋고, 언제 다쳤냐는 듯이 상처의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될 것이었다.
죽음은 너무나도 먼 곳에 있었다. 아쉽게도.
“쳇…….”
잘 아물고 있는 제 상처를 보며, 라일라는 혀를 찼다.
그때였다.
쾅쾅쾅!
안 그래도 비바람에 부서질 듯이 삐걱이는 문을 누군가가 때려 부술 듯이 두드렸다.
깜짝 놀란 라일라가 그쪽을 바라보았다.
깜박, 깜박.
제가 헛것을 들은 것이 아닐까 해서 라일라는 그대로 굳어져서 문을 쳐다보았다.
쾅쾅쾅!
그리고 네가 들은 것이 헛것이 아니라는 듯, 다시 세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분명히 사람이 문을 두드리는, 일정한 간격의 소리였다. 멧돼지가 제 몸을 들이받고 있는 것도, 노루가 앞발로 문을 차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마녀가 살고 있다는 이 오두막에 얼씬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더더욱 있을 리 없었다.
라일라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천천히 문 쪽으로 다가갔다.
아직도 비바람이 치고 있었고, 문은 삐걱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긴장감에 라일라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살포시 제 손으로 그 심장을 억누르며 라일라가 문 앞에 섰다.
그리고 다시 귀를 기울이는 순간.
“아무도 없습니까?”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오자, 놀란 괭이 새끼처럼 라일라의 어깨가 올라갔다.
사람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통로라는 본래의 목적에만 충실한 이 문은 그 흔한 칸막이도, 밖을 내다볼 수 있는 구멍도 없었다.
라일라는 마른침을 한 번 꼴깍 삼키고는 밖을 향해서 소리쳤다.
“꺼져!”
라고.
밖은 조용했다. 다시 비바람 소리와 그것들에 휘둘리고 있는 나뭇가지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덤으로 삐걱이는 문소리도.
‘갔나?’
눈을 굴리던 라일라가 살그머니, 귀를 좀 더 문 가까이에 가져다 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늘 예민하던 그녀의 감각은 아직도 사람이 문 앞에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자가 마녀를 죽이러 온 토벌꾼이라면 어쩌지? 내 목을 뎅겅 잘라 준다면 환영이지만, 잘못하면 그대로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면 이 깊은 계곡까지 숨어들어 올 만큼의 아주 나쁜 악당일 수도 있었다. 살인, 방화, 강간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이렇게 비가 오니 방화범은 아마 상관없었다. 살인자라면 당장 문을 열어서 칼을 쥐여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강간범이라면 싫었다.
라일라는 순결한 그대로 신께 가고 싶었고, 그래서 상으로 내세에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 주겠다는 확답을 받고 싶었다.
쾅쾅쾅!!
라일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다시 문이 두드려졌다.
“사냥을 나왔다가, 비가 너무 세차게 와서 길을 잃었습니다. 잠시만 쉬어 갈 수 있게 해 주시죠.”
뒤이어 들린 목소리에 라일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게 낮지도 높지도 않은, 약간은 굵은 목소리였다. 말투는 아주 정중했으며, 억양은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처럼 세련되었다.
아주 대놓고 말해서, 섹시하고 근사한 목소리였다.
‘강간범이군.’
문밖의 누군지 모를 남자는 목소리가 섹시하다는 죄로 라일라의 안에서 강간범으로 찍히고 말았다.
그녀의 눈은 서둘러서 무기를 찾았다. 칼이나 가위, 혹은 부지깽이 같은 것.
라일라의 눈이 바쁘게 무기를 찾는 사이, 비바람에 섞인 섹시한 목소리가 다시 말을 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아까보다 좀 더 애틋한 목소리였다. 감정이 더해지자, 목소리가 더욱 섹시해졌음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막 선반 위의 가위를 발견하고 그것을 가지러 가려던 라일라의 발이 멈칫했다.
“사례?”
다른 여자들이 들었으면 녹아내렸을 목소리 따위는 무시하고, 라일라의 귀는 오직 그 단어만을 들었다.
라일라의 눈이 가위를 한 번, 빈 촛대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미 불이 꺼져 있는 등잔도.
마지막은 다시 문이었다. 혹은 문 너머에 있는 사람.
어둠 속에서 라일라의 메마른 눈동자가 그 너머가 보이는 것처럼 문을 쏘아보았다.
“이봐요?”
안에서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자, 애가 타는지 밖에서 더욱 애절한 목소리로 라일라를 불렀다.
“기다려요.”
재빨리 선반에서 가위를 집어 들며 라일라가 말했다.
그녀에게는 사례가 필요했다. 초나 등잔 기름이라면 더 좋겠지만, 돈이라도 좋았다.
빌어먹을 아리아드네가 주는 돈이 아니라면 말이다.
“후읍…….”
크게 한 번 숨을 쉬며, 라일라는 손에 든 가위를 허리 뒤로 감췄다. 그리고 문의 잠금쇠를 잡았다.
아주 잠시, 그녀는 문을 열기가 망설여졌다.
어쩐지 이 문을 열고 나면,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부탁할게요.”
라일라가 망설이는 사이, 문 너머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라일라는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왔다. 불도 켜지 못하는 어두컴컴한 오두막으로.
“알았어요.”
라일라의 손이 결국 잠금쇠를 풀었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살짝 열린 문의 틈으로 남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아주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달라붙은 옷들 아래로 그의 몸이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길게 뻗은 다리와 단단한 근육, 넓은 어깨 등이 탄탄한 몸이었다.
라일라가 제 머리보다 한참 위에 있는 그 남자의 얼굴을 보기 위해선 고개를 꺾어야 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두운 숲의 그림자에 남자의 얼굴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그 순간, 마치 라일라에게 이 남자의 얼굴을 선명하게 보라는 신의 계시처럼 하얀 섬광이 하늘을 찢어 놓았다.
순간 주변이 환해지며, 라일라는 남자를 똑똑히 보았다.
머리카락은 밤하늘만큼이나 검었고, 황금의 눈동자는 싸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날렵하게 뻗은 콧날은 날카로운 인상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라일라가 본 것이 맞았다면, 그는 웃고 있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제발 들여보내 달라고 애처롭게 이야기했던 남자가 지금은 사냥에 성공한 육식동물처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