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23/24)

<11>

이른 아침, 구름 가득한 하늘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입을 벌리고 있는 게라크온 광장은 어제의 격렬했던 전투를 어두운 음영으로 칠해 놓았고, 불에 탄 광장 주변의 숲은 그 기억의 냄새가 짙었다.

악비온과 나르팟 렌 그리고 랑칸콘루는 바위 무더기 위에 나란히 서서 그 전장을 정리하고 있는 마법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나겠지요.”

랑칸콘루의 말에 악비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또 다른 가루모스가 마계와 소통을 하겠지요.”

한숨 소리 후 악비온은 렌에게 물었다.

“제릭은 어디에 있습니까?”

렌은 담담히 시선을 옮겼다.

“저 숲속의 오래된 궁성에 있습니다.”

“ …… .”

“그… 여자의 무덤을 만들고 있습니다.”

모두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복잡다단한 심상이 어둑한 세상의 풍경만 같았다. 하지만 이내 갈라지는 구름… 그 사이로 아침 해가 비치기 시작했다.

불탄 궁전의 폐허 앞에 돌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제릭이 서 있었다. 왼손에 들고 있던 분홍 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았다. 구름이 해를 가져갔다가 다시 빛을 내주었다.

“ …… .”

그늘진 제릭의 얼굴에 그 빛이 닿았다. 가까운 나무 위에서 하얗게 바랜 새 한 마리가 조용히 소리를 내고, 하늘 위엔 푸르스름한 바람 한 자락이 말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 * * * * * *

아침 햇살이 유리창에 환했다.

빨랫감을 널고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집 안에 들어서다 조용히 멈춰 섰다. 잠시 흐르던 침묵이 빈 바구니와 함께 떨어졌다. 빙글빙글 구르는 그 모습을 벽 쪽의 선반에 걸터앉아 있는 일리아가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아….”

놀라는 엄마의 모습에 일리아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왜에?”

엄마의 눈빛이 파도치는 그때, 시집을 가 가까운 곳에 사는 일리아의 여동생이 아기를 등에 업은 채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일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웃고 있던 그 얼굴이 엄마처럼 굳었다.

“ …… .”

그제야 일리아의 표정도 달라졌다. 분명 동생의 얼굴인데 뭔가가 달라진 듯한… 키가 많이 커진 것 같고… 아기를 업고 있는 아가씨 같은 모습에 기분이 묘해졌다.

“뭐야….”

햇살에 물든 집 안에 혼란스러운 빛들이 반짝거렸다.

“왜 둘 다….”

일리아의 그 표정에 엄마와 여동생은 한 모습으로 입이 크게 벌렸다. 눈물이 급격히 차오른 엄마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딸을 향해 달려갔다. 기적이 일어난 거였다.

잠시 후 온 마을 사람들이 일리아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울고불고 눈물을 날리는 친척 여인들과 친구들에 둘러싸여 일리아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꿈을 꾸는 얼굴이었다.

“십 년이라니….”

어제의 기억과 많이 달라져 버린 주위의 모습들과 결혼해 아이까지 안고 있는 여동생의 생글거리는 얼굴은 이 현실을 더욱 비현실적으로 채색하고 있었다.

“제릭은?”

“그 자식 이야기는 하지도 마! 널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니까!”

오빠들의 외침에 일리아는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십 년 전 그날의 이야기를 들은 일리아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어….”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집을 나섰다.

‘그럴 리 없어!’

우르르 마을 사람들이 뒤따르는 가운데 일리아는 언덕 위에 있는 둘만의 궁전으로 갔다.

‘제릭!’

봄바람이 일렁이는 그곳엔 어제처럼 또는 십 년 전처럼 오래된 세월의 흔적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웅성이며 둘러싸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일리아는 신전의 한가운데에 있는 옹달샘으로 갔다.

어제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옹달샘 옆에 앉아 선물을 가져온다는 제릭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가간 그곳엔 풀들만 무성할 뿐 기억은 햇살처럼 하얗게 눈가를 스쳤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눈물이 차오르고 가슴이 울렁이며 일리아는 떨리는 입술로 불러 보았다.

“제릭….”

그럴 리 없는데….

“제릭….”

거짓말일 터인데… 변해 버린 모두의 모습이 다 꿈처럼 사라질 것만 같은데….

하지만 세월처럼 달라진 모습들은 자신만을 안타까이 바라보고 있었고… 그럴 리 없다고… 그럴 리 없다고… 일리아는 눈물을 터트리며 외쳤다.

“제릭!”

그때였다. 옹달샘 안에서 무언가가 반짝반짝 떠올랐다. 허공으로 떠오른 그건 제릭이 놓아둔 왕관… 영롱한 보석들이 빛을 발하며 눈물 같은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제릭….”

일리아의 눈에서 기쁨이 뜨거워지고, 놀라는 마을 사람들의 얼굴엔 탄성의 빛들이 날아올랐다. 꽃을 닮은 왕관은 일리아의 품에 안겼고 그렇게 사랑의 선물은 커다란 울음소리로 화했다.

아아….

보고픈 그 울음이 푸른 하늘 높이 그리고 멀리 울려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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