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20/24)

<8>

아침이 밝자 제릭과 제나 그리고 벤차드와 데렌은 다시 길에 올랐다.

“오늘도 날씨가 기가 막히게 좋습니다, 기사님.”

“그러네.”

봄볕이 따사로운 들길엔 마차를 몰고 가는 상인들이나 터벅터벅 마주 오는 나그네들이 제나의 외모와 한들거리는 그녀의 오른팔을 흘끔거렸다.

검을 찬 순찰 병사들은 제릭의 등에 달린 대형 검과 검집도 없는 기묘한 탈착 장치를 쳐다보며 지나갔다.

“기사님, 잠시 쉬었다 가시죠.”

해가 조금 높이 오르자 벤차드가 헤 웃으며 청했다. 일행은 길에서 조금 벗어난 숲에서 차를 마셨다. 잠깐 자리를 비운 벤차드는 노란 꽃으로 화관을 만들어 와 제나에게 바쳤다.

“잘 어울리실 것 같아 얼른 만들어 봤습니다.”

“예쁘네요.”

“머리에 한 번 써 보시면… 오오, 요정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정말입니다.”

벤차드의 빤한 아부에 제나는 빙그레 웃고 말았다.

“선물 고마워요.”

“이제 보니 왕관을 쓴 여왕님 같습니다.”

벤차드의 말에 제나는 모호하게 웃었고 제릭은 문득 일리아가 떠올라 기분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벤차드와 데렌은 여왕님께 인사를 올린다고 제나 앞에 엎드려 절을 하고….

난처하게 미소 짓는 여왕….

그 모습을 나무속에서 내려다보며 하늘빛 작은 새는 분노로 들끓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몸짓을 푸르스름한 바람이 다독였다.

제릭 일행은 다시 길에 올라 자줏빛 들꽃이 흔들리는 들판을 지나 연분홍 꽃들이 만발한 언덕을 넘어갔다.

점심때는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풍광 좋은 호숫가에 머물러 평화로이 식사도 하고 차도 마셨다.

그리고 식후 벤차드와 데렌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제나는 호숫가에 쭈그려 앉아 여전히 머리에 화관을 쓴 자신의 모습을 수면에 비춰 보았다.

바람에 오른팔이 한들거리는 그 모습을 보며 제릭은 기분이 더 미묘해짐을 느꼈다.

‘조금 닮았나….’

화관 때문일까. 마치 일리아를 보는 듯했다. 즐거웠던 어린 시절의 풍경이 떠오르고 또 쥴른의 옹달샘에 놓아두고 온 그 붉은 왕관도 생각났다.

제릭은 알 수 없는 이끌림에 끌려갔다. 수면에 아른거리는 눈부신 빛들이 복잡 미묘한 감정을 더욱 부풀리고 그처럼 쳐다보는 제나를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입맞춤을 했다. 오래전 일리아처럼 제나도 제릭의 입맞춤을 거부하지 않았다.

“ …… .”

숲에서 과일을 따오던 벤차드와 데렌이 그 모습을 보고 조용히 입술을 모았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연인의 모습에 벤차드는 살짝 한숨을 쉬었고 데렌은 혹시라도 언감생심 딴마음 품지 말라고 어깨를 툭 쳤다.

벤차드의 품에서 과일 하나가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갔다. 나무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새끼 손가락만 한 마귀는 히죽 웃었다.

‘적과 사랑에 빠진 모양이군. 가루모스가 알면 아주 좋아하겠어. 히히.’

그때였다. 하늘빛 작은 새가 날아와 그 마귀를 한 발로 움켜쥐었다. 깜짝 놀라 돌아보는 마귀의 얼굴을 새는 부리로 깨물더니 그대로 홱 돌려 뽑아 버렸다.

새는 마귀의 날개를 찢고 두 팔도 뽑아 버리고 몸도 갈기갈기 찢어 휘휘 내버리고는 제나를 향해 두 눈을 이글거렸다.

마귀를 부하로 부릴 정도로 저 인간의 탈의 쓴 오크는 악귀였다. 당장에라도 화살처럼 날아가 오크의 피 냄새가 진동하는 저 목에 꽂히고만 싶었다.

‘제릭!’

하지만 괴물은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겨 두 볼이 붉어지고 그 모습을 보는 작은 새는 심장이 도려내지는 고통에 이리저리 몸을 흔들고 머리를 내저었다.

하늘 위에서 푸르스름한 바람 한 자락이 혼란스레 흔들리고 있었다.

슈흘라이성 앞에 긴 창을 들고 있는 크로닌과 순백색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 새하얀 검을 등에 차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둘은 이제 막 성 앞에서 섰고 위에서 내려다보던 병사는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오?”

크로닌이 매부리코 위로 두 눈을 빛냈다.

“영주님과 무공을 겨루러 온 무사요. 듀우란 영주님을 불러 주시오.”

성문 위 병사들은 이채로운 순백색 가죽 갑옷 차림에 새하얀 머리칼 그리고 눈처럼 하얀 검을 등에 맨 여인에 시선을 뺏겼다.

“잠시 기다리시오.”

이곳 슈흘라이의 듀우란은 흥미진진한 대결과 영웅적인 모험에 열광하는 서른 중반의 젊은 영주였다.

하지만 평화가 봄바람처럼 흐르는 세상엔 더 이상 영웅은 존재치 않았고, 요정과 드래건 그리고 오크 같은 괴물들은 대부분 발카람으로 숨어 들어가 있었기에 옛 이야기에 나오는 그런 환상적인 모험 또한 찾을 길이 없었다.

하여 자칭 낭만 영웅 듀우란은 무공이 뛰어난 이들을 찾아가 대결을 청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영지를 지나간다는 소식이 들리면 무구를 갖춰 입고 달려가 싸움을 거는 등 약간 현실과 동떨어진 인물이었다.

아무튼 그런 영주의 성격에 종종 뜨내기 무사들이 찾아와 대결을 청했고, 또 그럴싸한 무공으로 낭만 영주의 가슴을 설레게 해 밥과 술과 적지 않은 돈을 챙겨 가곤 했다.

크로닌은 은은한 냉기를 뿜고 있는 순백색 여인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떠버리 영주 듀우란이 곧 마중을 나올 것입니다.”

나르팟 렌은 한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여성으로 화한 그녀의 새하얀 모습은 성 위에 더 많이 모여든 병사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고, 당연지사 듀우란은 그 낭만적인 흥분을 감추지 못할 터였다.

잠시 후 성문이 열렸다.

“오, 낭만 영주께서 저기 나오시는군.”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적에게 자연스레 접근할 연결고리가 필요했고, 사각 턱에 덩치 좋고 성격 활달한 낭만 영웅은 그 연결고리를 해 줄 안성맞춤인 인물이었다.

해 질 녘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마법사들은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음에, 제릭 일행은 슈흘라이 영지에 속한 작은 도시 ‘후지트’로 들어갔다.

다년간 산적 생활을 해 온 벤차드와 데렌은 도시를 피해 가고 싶었지만 제나가 원했다.

“목욕도 하고 싶고 그래요.”

제나는 이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맛난 음식도 먹고 싶고.”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운 심정에 오늘 낮 호숫가에서 제릭이 전해 준 그 입맞춤은 마음과 머릿속을 쉼 없이 헝클어뜨리고 있었다.

‘모르겠다….’

공허하게 설레는 제나의 눈빛과 그녀의 오른팔이 붉은 석양 속에서 하늘거렸다.

그리고 때마침 후지트는 축제 기간이었다.

“잘 왔네.”

“봄맞이 축제인가 봐요.”

넷은 여관을 잡고 몸을 씻은 다음, 여관의 1층 식당에서 간만에 근사한 저녁 식사를 했다.

그런 후 흥겨움이 가득한 축제의 밤거리로 나섰다. 인력의 힘으로 불을 밝힌 형형색색의 등과 신성 마법의 힘으로 빛나는 희고 동그란 돌들이 거리를 별바다처럼 장식하고 있었다.

밤공기도 달보드레한 그 축제의 거리를 넷을 차차 동화되는 표정으로 걸었다.

오가는 많은 사람들, 이야기 소리, 웃음소리, 그리고 꽃단장을 한 모습으로 짝을 지어 흘러가는 청춘 남녀의 물결….

들길과 숲을 지나갈 때는 오가는 인적도 별로 없는데다 제릭의 큰 검을 보고 미리 피해 버리는 바람에 행인을 마주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도시로 들어와 이 많은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자 뜻밖의 변화가 생겼다. 팔 하나가 없어 얇은 옷자락이 한들거리지만 그 아름다운 외모로 제나가 뭇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었다.

휘익.

휘파람도 불어왔다. 스쳐 가는 그 많은 시선들의 반짝임에 제나도 마음이 난분분해졌다. 마치 이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기분이랄까.

제릭은 그런 제나를 향한 남성들의 시선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 속에서 에르카의 모습이 보이진 않을까 하고 살폈다.

에르카가 꽃만큼 좋아하는 게 바로 이렇게 사람들로 붐비는 흥겨운 분위기이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잘생긴 남자 하나 붙잡고 정신없이 춤을 추고 있을지 모르지.’

하늘빛 작은 새는 3층 4층 지붕들 위를 뛰듯이 날며 그런 제릭을 따라가고 있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건 얼마 전까지 제릭과 함께 이런 축제를 즐겼기 때문이었다.

‘안 돼….’

하지만 이젠 다신 그때로 돌아갈 수 없게 돼 버렸고 더구나 자신을 비참히 죽인 그 괴물이 제릭과 다정히 손잡고 걷고 있으니, 작은 새는 지붕 위를 미끄러지며 뛰고 또 날아오르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제릭 일행은 불빛이 환히 밝혀진 술집의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내다보이는 광장에선 많은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시거나 짝을 지어 춤을 추고 있었다.

제릭, 제나, 벤차드, 데렌 모두 술잔을 들었다. 오고 가는 남성들의 시선은 여전히 제나를 훑고, 제나는 흐르는 밤공기에 머리칼을 맡기며 가슴이 수많은 불빛들에 물드는 걸 느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구나….’

눈길이 닿자 제릭이 빙그레 웃었다. 그 모습에 데렌이 제안을 했다.

“두 분도 한 번 추시지요.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제릭의 시선이 춤을 추는 광장으로 향했다. 제나도 그곳을 바라봤고 아름다이 꽃물이 든 축제의 풍경은 온통 설렘으로 나붓거렸다.

‘괴물….’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던 괴물이 이렇게 사람들 속에서 꽃처럼 빛나고 있었다. 새롭게 변화한 자신의 존재가 화려한 인간 세상에서 꿈을 꾸듯 점멸하고 있었다.

제릭은 그런 제나를 보며 일리아를 상상했다. 오래전 그날 아무 일도 없었더라면… 평화롭게 둘만의 시간이 흘렀다면… 일리아의 모습이 지금 제나와 같았을까.

마치 과거의 시간이 새롭게 흘러 지금 일리아와 축제 속에 마주 앉아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릭!’

하지만 건물 위에서 그런 사랑을 내려다보는 작은 새는 분노의 열에 들떠 몸을 들썩거리고 있었으니, 모든 게 뒤섞이고 소용돌이치는 혼돈의 밤이었다.

축제의 밤도 깊어 도시는 화려했던 기억의 여운으로 잠들고 있었다.

물론 도시의 중심부에선 여전히 술 취한 합창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제릭 일행이 여장을 푼 여관은 주위를 둘러싼 나무들 속에서 평온한 밤빛이었다.

하지만 나무속에 웅크리고 앉아 제릭의 방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 작은 새는 눈빛이 이글거렸다. 당장에라도 날아가 그의 창에 몸을 부딪고 싶은데, 바로 옆방의 창에 불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오크인 그 괴물의 방, 그 창에 불이 꺼지기를 기다리는 작은 새의 까만 눈엔 분노와 원망이 광기처럼 흐르고 있었다.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었다.

낮에 본 호숫가의 모습과 축제가 벌어진 광장에서 연인처럼 거닐던 둘의 모습에 온몸이 불살라지려 했다.

‘제리익!’

그때 오크의 방에 불이 꺼졌다. 그리고 에르카의 격정에 화답하듯 제릭의 창문이 열렸다.

고개를 내밀어 밤하늘의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에르카는 당장에라도 날개를 쳐 날아가려 했지만, 원망일까 아니면 다정했던 둘 사이가 이토록 비참해진 현실 때문일까, 부르쥔 나뭇가지만 경련을 일으키듯 움킬 뿐이었다.

제릭은 설레는 달빛 아래 가슴이 조금 흔들리는 걸 느꼈다. 늑대인간으로 화한 기억이 이젠 가물가물했다.

생각해 보니 이이제케의 목에 검을 꽂을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삼 년 전 에르카가 이계의 괴물에 부상을 당하자 설핏 모습이 변했던 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나저나 에르카는 올 때가 됐는데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급하면 영혼으로 부른다더니 뭐 아무런 느낌도 없고… 어디 다치거나 한 건 아니겠지?”

애틋해지는 제릭의 표정에 새는 별안간 숨통이 트였다. 날개를 펴고 나뭇가지를 날아오르려 하는 그때였다. 열린 창문 너머로 제릭의 방문에서 조그맣게 소리가 났다.

제릭은 몸을 돌렸고 이내 문이 열리며 하얀 잠옷 차림을 한 제나가 나타났다. 에르카는 허공으로 띄우려던 몸을 움찔하며 다시 나뭇가지를 붙들었다.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제릭은 에르카가 아닌 제나를 바라보았고, 제나는 방문을 닫고 등을 기대며 평화로운 표정을 그렸다. 잠시 세 인연 사이에 아득하고도 깊은 시간이 흘렀다.

결국, 제나는 문을 떠나 제릭에게로 다가왔고 제릭도 마중을 나가 둘은 방 한가운데서 마주했다. 작은 새의 몸이 꿈틀거리고… 제나와 제릭은 서로를 안고 입맞춤을 했다.

작은 새는 나뭇가지를 부러뜨릴 듯 움켰다. 남녀는 서로를 깊이 감쌌고 잠시 후, 제나의 잠옷이 어깨선으로 밀려날 때 서로를 탐하는 남녀의 모습도 바람처럼 창가로 밀려왔다.

제릭의 손이 가만히 창문을 닫았다. 순간 작은 새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닫히는 창문 사이로 행복해하는 괴물의 얼굴이 보였던가.

커튼이 그들의 모습을 감추고 이내 방엔 불마저 꺼지고, 잠시 맥없이 흔들리던 작은 새는 눈이 하얗게 뒤집히는가 싶더니 그대로 추락했다.

바람 한 자락이 땅에 닿기 직전의 새를 휘감았다. 그리고 다시 나무 위로 데리고 올라와 나뭇잎이 모인 자리에 눕혀 주었다. 에르카는 경련을 일으키며 머리를 꿈틀거렸다.

‘제릭….’

자신을 참혹하게 죽인 오크가 그를 안고 있었다. 그 오크의 품속으로 빠져드는 사랑의 모습에 에르카는 영혼이 하얗게 불살라지고 말았다.

라그헨은 침묵했다. 창문 너머 남녀의 뜨거운 숨소리는 하염없이 엉키고 또 엉키며 악연의 탑을 쌓고, 그사이 처량한 하늘빛 새는 하얗게 불타고 있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깃털마저 하얗게 변해 가는 새는 어느덧 마지막 경련과 함께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라그헨은 그 모습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아가야….’

안타까운 마음에 생명의 바람을 불어넣었다. 하얗게 탈색이 된 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시 바람이 일어 새의 깃털을 어루만지자 그 흔들림에 깨어난 새는 마치 정신이 나간 여인처럼 히죽 웃는 것 같았다.

발카람의 지하 동굴.

가루모스의 분노한 목소리가 불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제나….”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라 했던 마귀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강제 소환을 해도 나타나지 않으니 죽임을 당하지 않고서야 있을 리 없는 일이었다.

“제나….”

아무래도 오크가 배신을 하려나 보다. 그 보잘것없는 모습을 생명력까지 나눠 주어 아름다운 인간 여자로 만들어 주었는데… 지난 십 년 동안 연인이 되어 사랑을 나누고 또 수많은 마법의 지식들을 아낌없이 전해 주었는데… 그 연인이자 제자가 꿈이 이뤄지려 하는 이 마지막 순간에 배신을 하다니….

“으아아!”

가루모스는 별안간 괴성을 지르며 동굴 이곳저곳을 휘청휘청 돌아다녔다. 머리칼을 움키고 몸을 뒤틀며 도려내는 듯한 가슴의 고통에 발광을 했다.

“ …… .”

그러다 문득 그림자처럼 멈췄다. 서서히 정신을 차리는 그 눈빛이 생각지도 못한 깨달음을 응시했다.

“행복?”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노인은 만면에 웃음을 떠올렸다. 머리를 쥐어뜯어도 풀리지 않던 그 문제가 ‘행복’이란 단어 하나 속에서 풀려 버린 것이었다.

“이럴 수가… 잘하면 제릭을 사로잡을 수 있겠어. 아니 완전히 무력화시킬 수 있겠어.”

가루모스는 뜻밖의 설렘에 당황하듯 웃다가 또 머뭇했다. 제나가 돌아와야 했다. 제나가 그 녀석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이 모든 게 헛된 꿈일 뿐이었다.

“안 돼….”

들떴던 가루모스의 얼굴은 금세 새벽처럼 어두워지며 고뇌에 싸여 갔다.

“아닐 거야.”

설마 새로운 삶이란 은혜를 잊고 제나가 자신을 버렸을 리 없었다. 결코 그럴 리 없다고 가루모스는 애써 가슴을 진정시키며 조금 전 떠오른 해결책을 다시 살폈다. 그건 짐승을 잡을 수 있는 덫이자 빠져드는지도 모르는 완벽한 늪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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