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비가 그친 동굴 앞엔 아침 햇살이 반짝이고 있었다.
밤새 별다른 일은 없었고 제릭과 제나는 다시 길을 나설 준비를 했다.
“아마 조금 있으면 에르카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재잘거리며 찾아올 거예요. 머리에 빨강, 노랑 꽃들을 이렇게 가득 꽂고서 말이죠.”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보이며 웃는 제릭과 달리 제나는 뒤숭숭한 어젯밤의 꿈 때문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녹아내린 어떤 형체에 쉼 없이 시달리며 어둠 속을 휘청휘청 하염없이 도망쳤는데….
‘정신 차려.’
어제의 사달으로 악비온의 마법사들이 대대적인 추격에 나설 터였다. 당연히 이 레에스랑을 조용히 벗어나기는 불가능할 터인데….
설상가상으로 어젯밤 알게 된 제릭의 실체, 막강한 드래건의 마법력이 꿈틀대는 존재라는 사실은 상황을 더욱 막막하게 만들어 버렸다. 더해서 그는 생명의 은인인 요정 에르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요.”
제릭이 손을 내밀었다.
“세상이 시끄럽든 말든 가던 길을 가면 그만이에요. 오해야 풀면 그만이고.”
“ …… .”
“신경 쓸 거 없어요. 전쟁터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제릭은 제나를 번개같이 안아 들고 숲을 내달렸다. 쏜살같이, 때론 하늘 높이 비상하며 공간을 가로질렀다. 전쟁으로 얼룩진 벨차라키와는 또 다른 모험을 하는 기분이었다.
‘뭔가 설레는 느낌이다.’
과연 자신을 오해한 아후란의 마법사들이 오늘도 길을 가로막을 것인지, 에르카는 또 어떤 앙증한 모습으로 나타나 지금 이 모습을 시샘할지, 목을 스치는 제나의 머리칼과 그녀의 기분 좋은 향기가 비 갠 후 봄날의 풍경처럼 좋았다.
어느덧 해가 한낮에 이르러 있었다.
들판과 숲을 가로지르고 산과 계곡을 훌쩍 뛰어넘어 다시 차분한 숲길을 걸을 때까지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공기가 좋네요. 날씨도 좋고.”
소풍 나온 듯한 제릭의 표정과 달리 제나는 조금 전부터 기분이 모호해지고 있었다. 모호함의 까닭은 바람에 실려 오는 알 수 없는 이질적인 냄새 때문이었다.
‘뭐지….’
날 듯 말 듯 희미하게 스쳐 가는 그 냄새가 이상했다.
“제나, 여기서 점심이나 먹죠. 완전 꽃밭이네.”
“네….”
둘은 노란 꽃들이 수를 놓은 숲길 가에 자리를 잡았다. 제나는 너른 바위 위에 손수건을 깔고 허리에 차고 있는 작은 가죽 가방에서 먹을 것을 꺼냈다.
“마른 과일 조각들하고 육포 그리고 견과류뿐이에요.”
“전장에서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죠. 가만, 물이 떨어졌는데 어디 근처에 냇가가 있을 거예요.”
제나는 자신의 수통에 물이 조금 남아 있다고 말을 하려다 또 다시 코끝을 스치는 모호한 냄새에 표정이 달라졌다.
“제릭, 그러지 말고 아까 그 작은 호수에 가서 물고기 몇 마리 잡아와요.”
“물고기요?”
“네, 갑자기 생선이 먹고 싶어서 그래요. 화살처럼 빠르잖아요. 얼른 갔다 와요. 오다가 산 근처에서 산딸기 같은 것도 좀 모아 오고요. 어서.”
꼭 에르카처럼 재촉하는 모습에 제릭은 슬쩍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요, 얼른 잡아오고 또 따 올게요. 기다려요.”
“많이 따 와요.”
“그러죠.”
제릭은 가볍게 땅을 박차더니 순식간에 숲 너머로 사라졌다.
“ …… .”
제나는 제릭이 사라진 하늘을 잠시 바라보다 불어오는 바람 쪽으로 고개를 돌려 숲 어딘가를 응시했다. 오른팔이 공허하게 떠오르고 그 모호한 냄새를 좇는 제나의 눈빛엔 혼란스러운 의구심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에르카는 화살처럼 만든 뾰족한 나뭇가지로 땅에 새 모양의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마계의 불꽃에 사라졌던 마법력이 미세하게나마 돌아온 덕분이었다.
‘어서….’
하지만 그건 에르카의 마법력이 아니라 라그헨이 안타까운 마음에 마법의 별빛 하나를 넣어 준 것이었다.
‘마지막 몸부림이라도 쳐보렴.’
에르카는 그 작은 마법력을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마음이 급했다. 녹다가 멈췄던 몸이 다시 거멓게 흐르고 있었다. 부글거리며 연기를 피우는 곳도 있었다. 어서 마지막 생명력을 불어넣어 이곳으로 제릭을 불러내야 했다.
‘빨리… 시간이 없어.’
하지만 자꾸 손이 떨려 왔다. 점점 흐려지는 정신에 죽을힘을 다했다.
‘제발… 어서 와서 내 이야기를 들어 줘… 이 고통스러운 내 마음을 들어줘… 제릭….’
마법진이 완성이 되면 그 위에 자신의 영혼을 불어넣고, 그 영혼의 부름에 제릭이 찾아오면 영혼은 제릭이 알아보지 못할 이 비참한 모습과 그 까닭을 모조리 이야기해 줄 것이었다.
그 후 자신의 영혼은 하늘로 흩어질 것이고 그것으로 제릭과 영영 이별을 한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결코 이렇게 원통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어쩌다가… 어쩌다가….’
거의 다 그려 가는 마법진은 죽음과 맞바꾼 유언장이었고, 되돌릴 수 없는 자신의 괴물과 같은 손가락들에 에르카는 눈물만 방울방울 떨어졌다.
제릭이 나무줄기로 엮은 물고기 두 마리와 산딸기 한 주머니를 들고 돌아왔을 때 제나는 없었다.
너른 바위 위엔 차리다 만 수수한 점심상이 몇 가지 먹을거리만 늘어놓고 있었다.
“어디 갔지?”
두리번거리던 제릭은 이상한 낌새에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조그맣게 소리가 들린 숲 쪽을 응시하자 곧 나무 뒤에서 항복하듯 두 손을 번쩍 들고 남자 둘이 나타났다.
“접니다.”
“네, 저희들입니다. 기억하시죠?”
바로 한때 너른 땅과 병사들을 거느린 유력한 영주였다가 십 년이란 세월 후 산적으로 몰락한 벤차드 보르헹과 그의 시종 데렌이었다.
둘은 허둥거리듯 다가오더니 무릎을 꿇고 넙죽 절을 했다.
“용맹무쌍한 기사님, 부디 저희들을 거두어 주십시오!”
“거두어 주십시오! 충성을 맹세할 테니 제발 저희들을 부하로 삼아 주십시오! 이렇게 간청을 드립니다!”
검 한 자루로 대지를 뒤집어 버린 제릭을 보고 그 즉시 말을 달려 부랴부랴 쫓아온 둘은 도중에 벼락을 맞은 새들처럼 널브러진 수십여 마법사들을 발견하고서 더더욱 인생의 마지막 기회인 양 미친 듯이 말을 몰았다.
물론 이미 까마아득히 멀어져 버린 거리를 단숨에 좁혀 이곳에 나타난 건 능력 밖의 일이었고, 실상은 라그헨이 그들을 공간이동 시켜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그 둘도 이 운명의 수레바퀴에 올라탈 자격이 충분했으므로….
“기사님이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하겠습니다. 부디 옆에서 심부름이라도 할 수 있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위대한 기사님.”
마법사 수십을 나동그라지게 만든 제릭의 가공할 힘이면 자신의 잃어버린 영지를 단숨에 회복할 수 있으리라고 벤차드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발 이렇게….”
“허참.”
제릭은 머리가 깨져라 절을 하는 그들을 보다가 혹시 제나가 이들 때문에 어디로 숨었나 하고 숲을 돌아보았다.
에르카는 이제 막 마법진을 완성했다. 떨리는 두 손을 모으고 마침내 자신의 비극적인 죽음을 고하려 했다.
그때였다.
“뭐 하는 짓이지?”
누군가가 옆으로 불쑥 다가왔다. 돌아본 에르카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몸을 젖혔고 제나는 그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어디서 역겨운 냄새가 난다 했더니… 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응?”
“ …… .”
겁에 질려 쳐다보는 괴물을 향해 제나는 있는 힘껏 발을 질렀다. 뒤로 세차게 구르는 모습이 불탄 나무 같았고 역겨운 진흙 덩이만 같았다.
‘세상에….’
제나는 입술을 깨물고서 에르카의 마법진을 발로 지웠다. 에르카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 울음을 터트리며 달려와 그 마법진을 지키려 했지만 제나는 다시금 걷어차 버렸다.
나동그라지는 에르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서 꺽꺽 고개를 흔드는 사이 제나는 땅에 그려진 마법진을 모조리 발로 문질러 지웠다. 그리고 에르카 앞으로 가 낮은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뭘 하려고 했는지 모르지만, 그래 지금 기분이 어때? 한때 요정이었다가 이제 추악한 괴물이 돼 버린 자신의 모습이?”
“ …… .”
“제릭이 그러는데 꽃을 좋아한다면서? 그럼 내가 마지막 선물로 꽃이라도 꽂아 줄까?”
오크였다가 아름다운 인간 여자가 된 자신을 알아본 요정. 그 앙큼하도록 귀엽던 요정이 이제 괴물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죽어. 죽어, 이 괴물아. 그런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느니 차라리 죽어 버려.”
제나는 온 힘을 다해 에르카를 걷어찼다. 너부러지는 시커먼 몸뚱이가 검은 연기를 흘리며 구부러졌다. 그렇게 꿈틀거리는 괴물을 노려보다 제나는 마법력을 발해 나무 옆에 있는 집채 만 한 바위를 떠올렸다.
허공을 두둥실 날아온 거대한 바위는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에르카 위에 멈췄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 에르카의 두 눈에 절망적인 비애가 들이쳤다.
“죽어.”
바위가 에르카를 덮쳤다. 둔중한 충격음에 이은 침묵이 숲을 그러쥐었다.
바위 아래선 뭔가가 녹아내리듯 검고 역한 연기가 피어올랐고 제나는 손끝을 파르르 떨며 나직이 되뇌었다.
“죽어….”
괴물이 사라졌다. 아니 괴물은 사라져야 했다. 이 세상은 괴물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벤차드와 데렌이 여전히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가운데 제릭은 뽑아 들었던 검을 도로 등 뒤의 탈착 장치에 철컥 꽂았다.
혹시나 목이 뎅강 날아갈까 했던 둘은 안도하며 환히 웃었고, 그 모습에 제릭도 피식 웃어 버렸다.
“바보 같은 산적들.”
그때 숲속에서 제나가 걸어 나왔다. 아무 일 없듯 손에 분홍 꽃 한 송이를 빙그르 돌리던 제나는 벤차드와 데렌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산적들이네? 여긴 어쩐 일이지?”
벤차드는 자신을 알아봤던 제나를 구명줄 보듯 반겼다.
“오오, 아름다운 귀공녀님, 제가 오매불망 기다렸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쫓아온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제나, 어디 갔다 왔어요?”
제릭의 물음에 제나는 분홍 꽃을 내보였다.
“식탁을 장식할까 해서 예쁜 꽃을 찾으러 갔어요. 봐요. 빛깔도 곱고 향기가 좋아요.”
제나는 제릭의 얼굴 앞으로 꽃을 내밀어 빙그르 돌렸다. 풍차처럼 돌아가는 은은한 향기에 제릭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벤차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나를 향해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두 손을 내밀었다.
“저기, 아름다운 요정님만 같으신 분과 제가 과거에 어떤 인연이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지만, 부디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돌아갈 데도 없고 그저 받아만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시키는 대로 개, 돼지처럼 다 하겠습니다. 정말입니다.”
벤차드는 가련한 표정을 지었고 제나의 오른팔은 바람결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요정….’
죄 없는 어린 소녀를 죽이고 인간이 되어 이제 요정마저 무참히 죽인 자신이 그 존재로 불리고 있었다.
또한 그 옛날 자신 때문에 몰락한 영주는 무릎을 꿇고 개, 돼지가 되겠노라고 애원하고 있으니 이 황망하고도 놀라운 현실 앞에 제나는 새로운 운명의 소용돌이를 느꼈다.
‘제릭….’
빨려 들어가 가뭇없이 사라져 버릴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설렘이 몸을 차올랐다.
제릭이 다가와 손에 든 분홍 꽃을 가져갔다. 가져가 꽃향기를 마시는 그 모습에 제나는 마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변화해 지금 이 순간이 새로운 운명의 시작인 것만 같았다.
들길을 편안하니 말을 타고 가는 제릭과 제나의 표정이 밝았다. 말 두 필은 황급히 뒤쫓아 온 벤차드와 데렌의 말이었고, 사양했지만 애걸복걸하듯 부탁하는 벤차드에 둘은 할 수 없이 말에 올랐다.
“그나저나 그 먼 거리를 어떻게 찾아왔어?”
“아, 그게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기사님을 다시 뵈려고 열심히 말을 달렸는데 갑자기 푸르스름한 바람이 슥 지나가면서 정신을 잃었고요. 그러다 눈을 떠 보니 멀리 기사님의 모습이 보여 가지고 그냥….”
아마도 평화의 탑 마법사들이 데려다줬나 보다고 제나는 생각했다. 이계의 연보랏빛 화염에 놀라 일단 상황 파악을 해 보려는 것일까.
아무튼 상황이 더 악화되지는 않을 것 같아 제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벤차드는 제릭과 눈이 마주치자 지나치게 활짝 웃어 보였다.
“오늘 날씨가 아주 좋습니다!”
말 옆에서 두 발로 걷고 있는 한때 유력한 영주였던 벤차드와 그의 시종 데렌… 제나로부터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제릭은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인생이란 알 수가 없구나.’
고아나 같았던 자신의 어린 시절과 용병대 대장으로 위세를 떨친 벨차라키의 기억이 떠오르며 이렇게 뒤바뀐 운명들 앞에 왠지 모를 만감이 밀려들었다. 노래를 불러 주던 일리아의 모습도 아련히 흘러가고….
그런 제릭 옆에서 제나도 긴 호흡을 하고 있었다.
‘됐어….’
에르카의 마지막 눈빛이 눈앞에 여진처럼 남아 있지만 애써 빛바랜 과거인 양 흘려보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하고 또 산산조각 날 것만 같은 이 평화로움을 호흡했다. 어쩌면 모든 게 변할지도 몰랐다.
‘제릭….’
그렇게 멀어지는 둘의 모습을 길가의 높은 나무 위에서 푸르스름한 바람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선 조그마한 하늘빛 새가 슬픈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으니, 바위가 덮치기 직전 영혼을 이 작은 새에게로 옮겨 놓은 에르카였다.
‘이제 어떻게 할 거니….’
하늘빛 새는 에르카와 새의 영혼이 합쳐진 상태였다. 하지만 비참한 에르카의 영혼이 더 컸을까. 새는 멀어지는 제릭을 바라보며 슬픈 노래를 부르다 불현듯 경련을 일으키며 몸을 떨었다.
‘따라갈 거니? 아니면 이 숲의 작은 새로 살아갈 거니?’
새는 가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제릭을 향해 날아갔다. 그 모습을 보며 라그헨은 한숨을 자아냈다.
‘그래, 사랑하는 이를 이대로 떠나보낼 수 없지.’
바람이 작은 새를 휘감아 푸른 하늘을 날아갔다.
별다른 일 없는 오후의 시간이 흘러 세상은 석양에 물들었고, 또 어두워져 초저녁 하늘 위에 별들이 돋아났다.
가까운 곳에 냇물이 흐르는 풀밭에서 저녁 식사를 한 후 제나와 제릭 그리고 벤차드와 데렌은 술을 한 잔 마시며 담소를 나눴다.
느닷없이 동행이 된 벤차드와 데렌은 우스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밝게 이끌었고 에르카의 비극을 알 길 없는 제릭은 그 농담에 박수를 치며 껄껄 웃었다.
함께 웃었지만 제나는 간헐적으로 가슴이 떨리고 배 속이 쑤시는 듯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에르카가 검게 녹다 만 괴물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처럼 혹시라도 바위 아래서 어떻게든 다시 살아 나와 제릭을 찾아오는 건 아닐까… 달빛이 어둠에 흔들릴 때마다 서늘한 소름이 일었다.
‘아니야….’
마음속으로 도리질을 하는 그때 가까운 나무 위에서 슬픈 새소리가 들려왔다. 즐거운 분위기에 거슬리는 그 소리에 벤차드가 미간을 구겼다.
“교양 없는 새가 우리 기사님의 즐거움에 누를 끼치고 있어 제가 다 죄송스럽습니다.”
데렌이 말을 받았다.
“제가 쫓아 버리고 올까요?”
제릭은 부드럽게 도리질을 했다.
“됐어. 이곳은 저 새의 숲이니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야지. 노랫소리가 좀 슬픈 느낌이긴 하지만 새도 나름대로 삶이 있으니 때론 안타까운 심정을 노래해야 하지 않겠어?”
제나가 미소 지었다.
“안타까운 심정이라면….”
“뭐, 사랑이 떠나갔다든가 아니면 옛 친구 생각이 났다든가, 뭐 그럴 수 있겠죠. 하하, 날짐승을 너무 의인화했나?”
모두는 빙그레 웃으며 새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제릭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별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에르카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제나는 살며시 시선을 떨어뜨렸다. 들려오는 새소리가 구슬펐고 이젠 되돌릴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가 밤하늘을 뒤덮은 듯했다.
깊은 밤….
술기운에 잠든 세 남자를 뒤로하고 제나는 어두운 숲으로 들어가 발카람의 지하 동굴을 향해 공간이동을 했다.
공간이동 마법을 발하면 그 파장이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가지만 가루모스가 대신전의 신성마법과 마계의 마법을 혼합해 만든 결계는 그 모든 걸 집어삼켜 아무런 흔적도 만들지 않았다.
“저 왔습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제나가 마침내 돌아오자 가루모스는 두 손을 내들고 격하게 반겼다.
“어서 오너라, 제나야. 내가 널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니? 내가 정말 너를… 너를….”
눈물까지 보이는 노인에게 제나는 살가운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마주 앉아 이처럼 늦게 올 수밖에 없었던 그간의 일들을 소상히 고했다.
특히 벨차라키에서 찾아온 요정 에르카에 대한 이야기와 그녀를 제거해 버린 대목을 전할 땐 가루모스는 두 주먹을 쥐고 얼굴에 광채를 발했다.
“대단해! 대단해! 역시 내 수제자야!”
제나는 짧게 한숨을 쉰 뒤 말을 이었다.
“그 때문에 지금 상황이 많이 불안정해요. 제릭은 그 요정이 금방이라도 돌아오리라 생각하고 있는데, 악비온 일당은 언제 다시 공격해 올지 알 수 없고, 더해서 우리의 계획은 이미 다 틀어져 버려서….”
“그게 무슨 말이냐? 우리 계획이 다 틀어지다니?”
눈이 동그래지는 가루모스에게 제나는 어젯밤 동굴에서 들은 제릭의 실체에 대해 이야기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강력함의 까닭이 바로 벨차라키의 드래건 이이제케의 마법력이란 사실과 그를 강제로 이곳으로 데려오려다가는 한순간에 두 쪽이 나고 말 거라고 공포심을 내비쳤다.
“솔직히 말해 스승님과 제가 협공을 한다 해도 제릭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요. 마법의 주문 따윈 필요도 없이 그 커다란 검으로 이 지하 동굴을 단번에 불바다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르니까요.”
가루모스는 얼빠진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이이제케라니….
그 포악한 흑룡을 죽인 게 다름 아닌 제릭이라니….
충격을 받은 듯 가루모스의 눈빛이 흔들리자 제나는 기다렸다는 듯 주름진 그의 손을 잡았다.
“아무래도 다른 방도를 생각해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다른… 방도라니?”
“지금은 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제릭을 무장해제 시키지 않는 한 그의 영혼엔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할 거예요. 아니 그 전에 우리가 산산조각이 나고 말 거예요.”
“안 돼… 난 그 녀석의 영혼이 필요해… 그 영혼이 없으면… 악비온에게 복수를 할 수가 없단 말이야….”
아이처럼 울상을 짓는 가루모스에 제나도 탄식을 하며 어깨를 떨어뜨렸다.
“당장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할 수가….”
가루모스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도 저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순간순간이 살얼음을 걷는 기분이지만, 돌아보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조금 더 제릭과 함께 걸어가고 싶었다.
‘잠시만….’
내일 이 모든 게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온몸에 불이 붙어 후회를 하게 되더라도… 왜일까… 조금만 더 평화로운 꿈을 꾸고 싶었다.
제나가 공간이동을 해 돌아간 후 텅 빈 지하 동굴엔 가루모스가 홀로 남아 침묵하고 있었다. 폭풍이 찾아왔다 지나간 듯 그의 눈빛이 허망하고도 초라했다.
“글쎄….”
하지만 곧 미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제나, 너의 말이 사실일까? 아니면 날 떠나려는 이별의 말인 걸까? 아직은 모르겠구나. 아무래도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알아봐야겠어.”
가루모스는 벽 쪽에 있는 책장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책 뒤에서 새끼 손가락만 한 마귀가 기어 올라와 날개를 펴고 날아왔다.
탁자 위에 내려서 날개를 접은 조그마한 마귀는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가루모스는 그 마귀를 향해 속삭였다.
“가서 보고 오너라. 제나의 말이 사실인지 말이야. 눈빛이 왠지 달라진 것도 같아.”
“예.”
마귀는 씩 웃고는 다시 날개를 폈다.
숲으로 돌아온 제나는 잠든 제릭의 옆에 웅크리듯 누웠다. 그의 고른 숨소리가 달빛 아래 평온했다. 제나는 더 깊이 웅크리며 소리 없는 한숨을 쉬었다.
‘될 대로 되겠지….’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 통제를 벗어나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거두어 움킬 생각도, 되돌려 돌아갈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벤차드의 낮게 코고는 소리와 데렌의 뜻 모를 중얼거림이 졸음처럼 밀려왔다. 그렇게 제릭의 옆에서 잠들어 가는 제나를 보며 나무 위의 작은 새는 불같은 안광을 일렁거리며 몸을 떨었다.
‘제릭!’
새는 밤이 깊도록 고통에 겨운 몸짓을 달빛에 비추고 또 비추었고 푸르스름한 바람이 그 모습을 안쓰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어둠에 잠긴 비센체성의 넓은 연병장.
그 한가운데에 거대한 백색 용 ‘나르팟 렌’이 순백에 가까운 흰빛을 온몸에 휘감은 채 나지막이 울리는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화이트 드래건 앞에는 자연 마법계의 본산 ‘평화의 탑’의 서열 두 번째인 크로닌이 만족스러운 미소로 서 있었다.
“감사합니다.”
드래건을 향해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계의 화염을 꺼뜨리기 위해 불러낸 화이트 드래건 렌이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지 않고 이렇게 도움을 주겠다고 하니 크로닌으로선 가슴이 부풀었다.
그건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았으니 그 마법기사가 얼마나 강대할지 모르나 드래건 앞에선 기껏 한 마리 늑대일 뿐이었다.
으르르….
반면 나르팟 렌의 관심을 끈 건 그 마법기사가 향하고 있다는 발카람이었다.
발카람엔 렌의 애증이 숨어 있었고 어쩌면 이 기회가 그 애증을 마주할 마지막 기회일지 몰랐다.
그때 허공에서 마법사 둘이 휘장처럼 내려왔다.
“위치가 확인되었습니다.”
크로닌이 반가운 미소로 렌을 바라보았다.
“모든 게 준비가 되었습니다. 내일 날이 밝으면 저와 함께 떠나도록 하시죠.”
거대한 백색 드래건이 머리를 끄덕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