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릭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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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년은 높은 나무 위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핏방울이 눈가를 지나 상처 난 턱으로 흘러 내려갔다. 두려움이 깃든 눈으로 저 아래를 내려다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다시 그 오크의 모습이 보였다.
소년은 나무를 끌어안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오크가 그대로 지나가 줬으면 얼마나 좋을까.
‘제발….’
하지만 잠시 후 다시 조심히 밑을 보니 그 오크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손에 쥔 돌도끼를 들어 올리며 웃는 그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소년은 다급히 나무를 더 기어올랐다. 오크는 나무를 오르지 못했다. 대신 돌멩이가 소년의 머리를 스쳐 하늘로 솟았다. 소년은 더 이상 오를 데가 없을 때까지 올라가 다시금 아래를 보았다.
오크가 팔매질을 하고 있었다. 돌멩이는 소년의 어깨와 무릎을 연이어 때렸다. 상처 난 곳이 아팠다.
‘제발… 제발….’
집에서 자신을 기다릴 병든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이 떠올랐다. 늘 그렇듯 오늘도 약초를 한 아름 캐서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을 텐데….
눈물이 터질 것만 같은 그때 밑에서 솟구친 돌멩이가 눈가를 스쳤다. 놀란 눈으로 밑을 보자 오크는 결코 놓칠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어서 떨어져라. 난 너의 영혼이 필요하니까.”
인간의 말을 하는 오크, 부드러운 음성은 암컷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휙!
솟구치는 돌멩이를 피하려 몸을 옆으로 뉘이자 그 무게를 따라 가지가 느릿하게 휘어졌다. 소년은 세상이 기울어지는 걸 느꼈다.
그러나 나무는 다시 그 휘어짐을 일으켜 세웠고 소년은 한 마리 작은 새처럼 가지에 붙어 흔들렸다.
‘제발….’
그때였다. 하늘 위로 푸르스름하면서 투명한 바람 한 자락이 불어왔다.
보일 듯 말 듯한 그 바람은 허공을 휘돌아 소년이 붙잡고 있는 나무 근처의 다른 가지에 목도리처럼 감겼다. 그리고 한쪽 끝을 세워 소년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광경이군. 나무 아래선 하프오크가 돌팔매질을 하고 있고 나무 꼭대기엔 한 아이가 겁먹은 다람쥐처럼 매달려 있으니 말이야.’
햇살 속에서 나울거리는 푸르스름한 바람은 영혼으로만 남은 전설적인 요정 마법사 라그헨이었다.
‘그래, 꼭 붙들고 있어라. 떨어지면 오크의 배 속으로 들어갈 터이니.’
소년은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두려운 현실에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멀리 떨어진 언덕 위에서 이 숲의 주인인 휴룩 보르헹의 아들 벤차드 보르헹이 활을 쥔 채 지켜보고 있었다.
“저건 무슨 추태지?”
“그러게요.”
옆에서 시종인 데렌이 벤차드를 돌아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숲은 보르헹 가문의 영지이자 사냥터로 영주의 허락 없인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금지였다.
가끔 약초꾼들이 몰래 들어와 약초를 캔다는 말이 있었지만 명을 어겼을 땐 성으로 붙들려 와 매질을 당하기에 영지에 빌붙어 사는 이들은 감히 들어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보란 듯이 높은 가지 위에 매달려 있는 한 평민 아이는 겁을 상실했거나 용감함이 배 밖으로 나왔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마 순찰을 도는 병사들을 피해 나무 위로 도망을 친 것 같습니다.”
데렌의 말대로 아래에 병사들이 있는지 연달아 돌멩이가 솟고 있었다. 벤차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활을 들어올렸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내가 도와줘야겠군.”
“도련님.”
데렌의 만류하는 표정에 벤차드는 허리에 찬 전통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며 미소 지었다.
“설마 내가 아이를 죽일까 봐?”
화살을 시위에 걸어 부드럽게 당겼다. 거리는 백 보 가량. 멀었지만 바람이 살가우니 아이를 겁주기엔 무리가 없었다.
퓽!
화살은 날렵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그리고 소년의 어딘가를 맞출 것 같던 화살은 그러나 오른편으로 휘어 버렸다.
“어라?”
눈을 끔뻑거린 벤차드는 다시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힘껏 당겨 겨냥을 보니 돌멩이가 소년의 머리를 치는 게 보였다.
슝!
날렵한 소리를 내며 화살이 멀어졌다. 생각한 대로 날아가던 화살은 뜻밖에도 왼쪽으로 크게 휘어 버렸다. 벤차드의 표정이 주춤했다.
“뭐야? 내가 헛것을 본 것인가?”
“저쪽에 바람이 이상하게 부나 봅니다.”
어릴 적부터 명궁 소리를 듣던 벤차드는 자존심에 상처가 나는 걸 느꼈다.
“흥미롭군.”
전통에서 다시 화살 하나를 꺼내 시위에 걸었다. 목표점은 소년의 허리에 달린 작은 주머니, 시위 줄은 끊어질 듯 팽팽해지고 데렌은 설마 이번에도 화살이 제멋대로 날아갈까 숨을 죽였다.
슝!
화살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고 웬일인지 그 뒷모습이 아련하게 느껴졌다. 그런가 싶던 화살은 소년의 팔에 번갯불처럼 꽂혔다.
벤차드는 입을 헉 벌렸고 이번엔 끼어들지 않았던 푸르스름한 바람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거니? 아래엔 오크가 기다리고 있고 이 땅의 주인 녀석은 너의 팔을 맞혀 버렸는데….’
소년은 왼팔에 박힌 화살을 보았다. 비명이나 고통에 겨운 소리를 내는 대신 몸이 서서히 기울어졌다. 오크에 쫓겨 이곳까지 도망치다 힘이 모두 소진된 소년은 붙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놓치고 말았다.
순간 병든 어머니와 재롱둥이 여동생이 스치며 소년은 눈을 번쩍 뜨고 다시 나무를 붙잡았다. 활처럼 휘어지는 나뭇가지와 소년의 모습이 햇살 아래 빛났다.
‘엄마….’
가까운 뒷산으로 갈 걸….
하지만 영주의 사냥터인 이 숲엔 사람의 발길이 뜸한 만큼 실하고 질 좋은 약초들이 많았다.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을 굶기지 않기 위해선 이따금 몰래 들어올 수밖에 없었는데….
휘어졌던 나뭇가지가 핏방울을 날리며 다시 바로 서려는 그때였다.
아래에서 솟구쳐 오른 돌멩이가 화살이 박힌 소년의 왼팔을 강타했다. 팔이 쳐들리며 작게 비명을 지른 소년은 몸이 뒤로 넘어갔다. 그예 나무를 놓쳤고 이어 허공으로 기울어졌다.
푸르스름한 바람은 아이를 잡아 줄까 하다가 말았다.
소년은 추락했다.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무성한 잎사귀 아래로 둔탁한 충격음이 피어올랐다.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본 벤차드와 데렌은 곧 놀란 얼굴로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푸르스름한 바람은 나무 밑을 살피다 당황한 기색으로 머리를 세웠다.
‘뭐 하는 오크지? 대체 지금 뭘 하는 거야? 이런… 아이의 영혼을 뽑고 있구나. 마법을 부릴 줄 아는 오크란 말이야? 놀랍구나.’
잠시 신기함을 금치 못하던 푸르스름한 바람은 이내 떠올라 허공을 날아갔다. 인간 아이의 영혼을 갖고 도주하는 한 마리 오크를 따라서….
잠시 후, 늦은 오후의 햇살이 반짝이는 숲속에서 벤차드와 그의 시종 데렌은 굳은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모여 있을 줄 알았던 병사들은 그림자도 없고 흩어진 나뭇잎 위엔 조금 전 추락한 소년이 석상으로 변해 쓰러져 있었다. 왼팔엔 벤차드의 화살이 꽂힌 채….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우리가 헛것을 본 것이야? 아니면 어떤 마법사가….”
“아무래도 마법사의 짓인 듯합니다. 이제 보니 이 소년을 알고 있습니다. 카린이라고 저 아래 마을에 약초를 캐러 다니는 아이입니다.”
웅크린 채 눈을 감고 있는 소년의 석상은 너무도 섬세해 머리칼을 한 올까지 셀 수 있을 정도였다.
“도 도대체 이게….”
벤차드는 붉어진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인기척이나 병사들의 발소리는 느껴지지 않았다. 데렌은 석상의 팔에 박혀 있는 화살을 빼려 했지만 빠지지 않았다. 화살촉엔 보르헹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자칫 문제가 커질 수 있습니다.”
“어떡하지? 바위로 팔을 깨 버릴까?”
“네, 얼른 그렇게 하는 게….”
하지만 석상을 만져 본 데렌은 이내 낭패스러운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안 되겠는데요? 엄청나게 단단한 재질입니다. 이걸 깨려다간 순찰을 도는 병사들이 소리를 듣고 달려올 겁니다.”
“그럼?”
“묻어 버리죠?”
“아….”
둘은 소년을 숲 깊숙한 곳으로 옮겨 땅에 묻었다. 붉은 노을이 피처럼 번져 오는 보르헹 가문의 사냥터이자 숲에서 한 아이가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열두 살 약초꾼 카린의 집은 마을에서 조금 외따로이 있었다. 그리고 집엔 병든 어머니와 일곱 살 여동생이 오빠의 귀가를 밤늦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밤늦도록….
불 밝혀진 집 안엔 어머니의 한숨이 깊어져 갔고, 이따금 여동생이 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지만 하늘엔 별들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약초를 한 아름 캐 오던 착한 오빠는 보이지 않았다.
그 애탄 밤이 하염없이 깊어지다 푸르스름한 새벽이 찾아왔을 때였다. 잠든 어린 딸을 안고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의 귀에 무언가 둔중한 소리가 들렸다.
아들 카린이 왔구나 하는 반가움과 왠지 발소리 같지 않은 그 묵직한 소리에 어머니는 어린 딸을 침상에 눕혀 놓고 문으로 갔다.
그리고 문을 열었을 때, 그리고 어두운 마당을 살폈을 때, 한 걸음 두 걸음 걸어 나간 어머니는 무언가가 마당에 웅크리고 있는 걸 보았다.
흙투성이….
그 속에서 본 건 웅크린 채 차갑게 굳어 있는 아들의 모습이었다. 비명 소리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온 마을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아침 햇살이 비쳐 오는 너른 공터에 백여 명 남짓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둘러싸고 있는 건 석상으로 변한 카린이었고 그 앞엔 카린의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이 통곡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여자들은 눈물을 흘렸고 남자들은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분명 못된 마법사의 짓이었다. 그런데 왜 석상으로 변한 카린을 다른 곳도 아닌 집 앞에 던져 놓은 것일까. 가난하고 평범한 집안일 뿐인데….
팔에 박혀 있는 부러진 화살대….
두려운 상상의 씨실과 날실이 어지러이 번져 갔다.
그런 마을의 공터를 내려다보며 하늘 위에선 푸르스름한 바람 한 자락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도 당황스럽구나. 대체 그 오크 녀석의 정체가 뭐람?’
오크가 소년의 영혼을 뽑아내 작은 가죽 주머니에 넣고 도주하자 서둘러 뒤쫓아 갔는데, 어느 순간 냇가의 근처에서 몸을 던지더니 그대로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당황한 라그헨은 마법의 흔적이나 결계를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했고, 결국 보르헹 영지의 숲으로 돌아와 밤이 깊도록 고뇌하다 일단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으로 벤차드가 숲속에 묻어 버린 소년을 그 집 앞에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아침 햇살이 눈부신 이 시간, 마을의 공터에 모인 사람들의 슬픈 눈길 속에서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이 웅크린 카린을 끌어안은 채 서럽게 오열하고 있었다.
마법의 불꽃이 일렁이는 지하 동굴.
가루모스는 오크 고욤이 자랑스럽게 내민 가죽 주머니를 소중히 받아 들었다.
“수고했다.”
고욤은 나부시 머리를 숙였다.
가루모스는 기쁨 가득한 얼굴로 주머니를 열었고 검푸른 빛이 도포되어 있는 그 안엔 작은 별빛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여섯 번째 영혼이군.”
복수를 위한 여섯 번째 걸음이었다. 이제 나머지 네 개만 더 모으면 철천지원수인 악비온을 향한 복수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래….”
가루모스는 카린의 영혼을 가슴 속으로 흡수했다. 스며드는 그 별빛에 가슴의 고통이 조금 더 잦아드는 걸 느꼈다.
“희망이 보이는구나.”
노인의 표정이 밝아지자 오크 고욤도 같은 표정으로 다가들었다.
“마스터. 이제 네 개만 더 모으면 저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거죠? 그렇죠?”
“아무렴. 당연히 들어줘야지.”
가루모스는 손을 들어 고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이제 내게 그 무엇보다 소중하단다. 나 역시 네가 아름다운 인간 여자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고 있어.”
고욤은 기쁨에 두 볼이 상기 되었고 가루모스는 흡족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산에서 내려오는 차고 맑은 약수에 농토도 비옥하고 인심 좋은 보그달 마을의 공터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은 남녀노소 사람들이 그대로 모여 있었다.
병든 어머니와 따라 우는 여동생의 지극한 슬픔 앞에 카린은 하얀 천에 덮여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급히 불려 온 검시 마법사는 카린의 석상에서 특별한 마법적인 흔적을 발견하진 못했다.
다만 왼팔에 박혀 있는 부러진 화살대를 마법의 힘으로 빼냈을 때 뜻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화살촉에 보르헹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까닭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당황하며 웅성거렸고 그 모습을 공터 옆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푸르스름한 바람은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범인인 오크 대신 벤차드가 누명을 쓰게 되겠군.’
누군가의 분노한 목청이 솟았다. 카린의 어머니와 어린 누이의 울음소리는 격정적으로 변했고, 잠시 후 마을 사람들이 석상으로 변한 카린을 들고 영주의 성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