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10/24)

<10>

하염없이 쫓기는 뒤숭숭한 꿈으로 잠을 설친 제나는 아침 식사 후 그대로 슈흘라이성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하루를 더 머물기로 한 건 풍요로운 환경에 눈이 돌아간 벤차드와 데렌의 간청과 에르카가 찾아오기를 바라는 제릭의 희망 때문이었다.

“그 마법사들이 몰려오더라도 이곳 영주와 함께 있으면 오해가 쉬 풀리겠지. 또 움직이는 것보다 머물러 있는 게 에르카가 찾아오기도 쉬울 테고.”

듀우란은 손뼉을 치며 기뻐했고 들뜬 얼굴로 제릭의 손도 부여잡았다.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왕 하루 더 쉬시는 거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기회를 놓칠 수 없다며 듀우란은 제릭을 성내 연병장으로 이끌었다. 밥값을 해야 하기에 제릭도 흔쾌히 목검을 들었고 이에 마주 선 듀우란의 얼굴은 설렘으로 물결쳤다.

“진정 영광입니다. 언젠가 이렇게 위대한 영웅과 맞서게 되는 날이 찾아올 줄 저는 분명 알고 있었습니다.”

“하하.”

“그럼 감히 검을 한 번 부딪쳐 보겠습니다.”

“들어오시지요.”

잘 대접받고 있는지라 제릭은 부드럽게 공격을 받아 주고 또 나름 힘차게 공격해 들어가며 흥미로운 공방을 연출해 주었다.

“조심.”

“이크! 오옷! 이야앗!”

누가 보면 호각을 이룬다고 할 그 진기한 대련을 연병장 가에서 크로닌과 벤차드와 데렌이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남자들이 그러는 동안 제나와 렌은 성 안의 잘 가꿔진 정원을 거닐었다. 주위의 시선을 피해 조용히 가루모스에게 다녀올까 하던 제나에게 렌이 산책을 청한 것이었다.

“봄꽃들이 예쁘게 피었습니다.”

순백색 머리칼과 그처럼 흰 얼굴 그리고 입술만 붉게 칠한 렌은 기품 있는 치마 정장이었다.

“네….”

제나는 시종들에게 부탁해 남성적인 편안한 일상복 차림이었다.

“영주님 부인께서 손수 가꾸시는 정원이라고 하더군요.”

어제 턱을 찔린 기억 때문일까, 제나는 걸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반면 제나와 제릭의 모든 게 흥미로운 렌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두 분이 연인 사이 같던데….”

피처럼 붉은 꽃무리를 배경으로 렌이 물었지만 제나는 시선을 거두고 말없이 걸었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이어지다 렌이 다시 물었다.

“사귄 지 오래되었나요?”

제나는 걸음을 멈추고 풍성한 숲을 향해 아득해지는 시선을 던졌다.

“오래되기도 하고… 짧기도 하고… 과거는 알 수 없고 미래 역시 알 수 없으니… 그저 꿈같은 인연이라 할 수 있죠.”

“아… 그렇군요.”

제나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마음속의 이야기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과연 내가 제릭의 곁에 머물러도 되는지… 제릭의 손을 잡고 그 눈을 바라봐도 되는지… 과연 내가….”

아련해지는 제나의 눈빛을 보며 렌은 의아하면서도 생경한 기분을 느꼈다. 제나와 제릭에 대한 흥미로움이 한 걸음 다가설 때마다 더욱 야릇하고 낯선 풍경을 그려 내고 있었다.

‘오크의 냄새를 감춘 예쁜 꽃을 보는 기분이구나. 다가온 연인이 그 냄새를 맡을까 두려워하는….’

렌이 처음으로 제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중요한 건 현실이죠.”

제나가 눈을 마주했다.

“그런가요?”

“삶이란 과거 위에 서 있긴 하나 지난 일이 늪이 되어선 곤란하죠. 딛고 날아올라 하늘을 비상할 수 있는 단단한 현실이 되어야 하니까. 두 분의 개인적인 사연은 내 알 수 없지만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닮았다고나 할까?”

어제 만나 충돌하고 오늘 다시 만나 삶을 이야기하는 렌의 미소에 제나는 어수선한 감정의 바람을 느꼈다. 눈물이 핑 돌 것 같은 기분에 당황하듯 미소를 지었다.

그런 제나의 마음을 넘겨다보듯 하며 렌은 가슴 깊이 숨을 마셨다.

“꽃향기가 좋네요.”

둘의 시선이 울긋불긋한 꽃밭으로 향하는 그때였다. 가까운 정원수 속에서 갑자기 작고 하얀 뭔가가 날아와 제나의 얼굴을 들이받았다.

피하거나 막을 수 있었지만 뭉클한 감정에 휩싸여서일까, 평범한 인간 여성처럼 제나는 그 충돌을 받아들였고 새는 튕겨 올랐다 다시 날갯짓하며 부리와 발톱으로 공격을 해 왔다.

제나는 손을 들어 막았고 새는 그 손을 넘어 물어뜯을 듯 달려들었다.

렌은 어젯밤 상처를 치료해 준 뒤 날려 보낸 그 하얀 새임을 알아보았다. 뒤늦게 제나가 한 손밖에 없는 걸 깨닫고 손을 내밀었다.

새는 그런 렌의 손을 내차고 날아올라 숲 너머로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몸짓을 남기고 새가 떠나자 제나와 렌 사이엔 텅 빈 침묵이 흘렀다.

작은 새가 부딪친 제나의 오른쪽 볼이 불그레했다. 차오르던 뭉클한 감정들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고, 대신 헝클어진 감정의 안개가 애써 감추는 서로의 표정 위에 어색한 미소로 번졌다.

새가 다시 나타난 건 그 정원에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점심 식사를 모두가 흡족히 즐긴 후였다.

후식까지 맛나게 먹은 후 듀우란은 붉은 과일 주가 담긴 잔을 들고 일어나 좌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모두 잠시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아주 중대한 발표가 있습니다.”

모두는 낭만 영주께서 무슨 발표를 하려나 했고 듀우란은 기쁨과 설렘이 물결치는 얼굴로 이런 중대 선언을 했다.

“내일 다시 여행길에 오르는 영웅적인 기사님을 따라 저도 함께 발카람을 향해 모험을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힘찬 주먹질에 이미 이야기가 오고 간 벤차드와 데렌이 열렬한 박수로 그의 동행을 환영했다. 나머지는 뜻밖이긴 하나 그럴 만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고, 허락을 바라는 듀우란의 시선에 제릭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호탕하신 영주님께서 함께하신다면 여행길이 더욱 즐거워지겠지요. 오히려 제가 감사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말린다고 포기할 성격이 아님을 파악한 터라 제릭은 흔쾌히 화답했다.

“오오, 역시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입니다. 비록 제가 아직은 미약하지만 발카람에서 드래건과 오크를 때려잡는 그날 기사님을 비롯한 여기 모이신 영웅님들께 작은 힘이라도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크로닌이 즉시 그 흐름에 편승했다.

“저 역시 오래전부터 낭만적인 모험을 꿈꿔 왔습니다. 일행으로 함께한다면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크로닌에 이어 렌도 무어라 말을 하려는 그때였다.

숲에서 뭔가가 제릭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왔다. 제릭은 손을 들어 가볍게 쳐 냈고 그 무언가는 크로닌에게로 튕겨 와 어깨를 부딪고 땅으로 떨어졌다. 모두의 시선이 모인 그곳엔 작고 하얀 새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제나와 렌의 눈이 반짝 떠졌다.

크로닌이 모두를 대신해 반응했다.

“새잖아.”

어젯밤의 그 병든 새임을 알아본 크로닌은 렌을 일견한 후 새를 주워 들었다.

렌이 손을 내밀자 크로닌은 새를 렌에게 넘겨주었다. 순간 정신을 잃은 것 같던 새가 렌의 손을 박차고 다시 제릭에게로 날아갔다.

제릭은 이번엔 막지 않았고 새는 제릭의 가슴에 부딪치며 세찬 날갯짓으로 파드닥거렸다. 마치 제릭의 가슴에 하얀 꽃 한 송이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듀우란은 그 모습을 자신의 기분대로 해석했다.

“하하, 새도 모험에 따라가게 해 달라고 지금 떼를 쓰나 봅니다. 하하하!”

모두가 어색하나마 웃음을 지었다. 제릭은 여전히 자신의 가슴에서 팔락거리는 새를 내려다보았다. 기분이 묘했다. 머리로 부딪고 부리로 쪼고 날개로 때리는 그 모습이 어쩐지 누군가를 닮아 보였다.

그때 새가 제풀에 지쳐 땅으로 굴러떨어졌다. 쓰러진 새는 그 짧은 시간에 모든 기력을 다 쏟았는지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렌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손을 내밀었다.

“제가 키우는 새입니다. 지금 병들어서 이상한 행동을 하곤 하는데 놀라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제릭은 담담히 말했다.

“괜찮습니다.”

분위기가 부드러워지고 데렌은 새를 고이 들어 렌에게로 갖다주었다. 제나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아무도 보지 못했다. 렌은 새를 손안에 받았을 때 불덩이를 쥐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대체 무슨 이유로 이렇게 뜨거운 건지 렌은 손안에 쓰러진 새를 내려다보았다.

제나는 자신을 공격했던 새가 이번엔 제릭을 공격하고, 아까는 아무 말이 없던 렌이 이젠 그 새를 자신이 기르고 있다고 하자 불안감에 가슴이 떨려 왔다.

‘설마….’

렌의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손안에서 새는 떨림이 잦아들었다. 렌은 고개를 들어 제나를 보았고 제나는 시선을 거둬 잔을 들었다. 피처럼 붉은 잔에서 포도주가 아닌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하하, 아무튼 흥미진진한 모험이 시작될 우리의 내일을 위해 다 같이 잔을 듭시다!”

듀우란의 활기찬 목소리에 렌을 제외한 모두가 잔을 들었다.

‘뭔가가 있군.’

렌은 잦아들다가 다시 격해지는 새의 고동 소리를 느끼며 그 떨림 안에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직감했다.

‘뭘까.’

바라보니 포도주를 끝까지 다 마시고 잔을 내려놓는 제나의 눈빛이 그 빛깔처럼 붉어 보였다.

시간이 금세 흘러 밤이 찾아왔다.

슈흘라이성엔 다시금 떠들썩한 만찬이 벌어졌다.

듀우란은 영지 내 유력 인사들을 죄 초대해 자신의 발카람행을 알리려 했지만 측근들이 두 손 모아 말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제릭과 벤차드, 데렌, 크로닌, 렌만이 참석하는 만찬 겸 술자리를 마련했다.

제나는 피곤하다며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불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의 침대에 홀로 앉아 고요한 달빛을 호흡하고 있었다. 달빛이 가시나무만 같았다.

‘설마….’

에르카의 모습이 눈앞에 확 다가왔다 불살라지면 시커먼 괴물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다시 나타난 하얀 새는 날갯짓을 하며 시뻘건 피를 토했다.

달빛 속으로 두려움이 파도쳤다. 에르카가 이계의 화염에서 되살아났을 때부터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일까.

가루모스일까. 악비온일까. 혹 제릭이 이 모든 상황을 모른 척하며 오크 고욤의 목을 칠 운명의 순간을 즐기고 있는 걸까.

망상과 혼돈이 제나의 영혼을 늪으로 빨아들였다.

“하아….”

자리에서 일어나 제나는 방 안을 방황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눈빛이 불안하게 반뜩거렸다.

“늪.”

자신은 오크였다. 암컷 오크 고욤이었다. 가루모스를 스승으로 삼아 이제 다시 태어난 인간 여자 마법사 제나였다. 그런 자신의 현실을 망각하고 제릭에게 연정을 느낀 순간부터 모든 게 늪으로 변해 버린 것 같았다.

“그래….”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오크의 피 냄새를 지울 수 없다면 자신이 돌아갈 곳은 가루모스의 지하 동굴뿐이었다.

처음 계획대로 제릭의 영혼을 취해 스승의 고통을 치유하고 그와 함께 인간 세상에 당당한 나서 여왕으로 군림하는 꿈을 꿔야 했다.

“꿈….”

그 꿈을 잊고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자신은 일리아를 죽이고 요정 에르카를 바위 아래 짓눌려 불사른 괴물이었다.

결코 제릭과 사랑 따윈 꿈꿀 수 없는 악연….

“맞아.”

가슴이 진동했다. 갑자기 술이 마시고 싶어졌다. 주먹을 움키고 갈등하다 방문을 열고 나갔다.

“ …… .”

텅 빈 복도는 고요했다. 마치 다른 세상으로 나온 듯 복도엔 은은한 향기마저 좋았다. 갑자기 공허했다.

아무도 없는 이 복도처럼 아무도 없는 자신만의 세상이….

가족도 없고 사랑하는 이도 없는 고독한 존재는 더 이상 갈 곳을 몰랐다. 뒷걸음질 쳐 도로 방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문을 닫고 힘없이 기대어 섰다. 눈을 감았다. 꿈을 꾸고 싶었다. 그저 평범한 여인이 되고 싶었다.

“제나.”

여왕의 자리보다 한 남자의 사랑을 받는 평범한 여자가 되고 싶었다.

“누굴 기다리는 거지?”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찾고 있는 거야?”

어둠 속 환청인가 싶은 그 목소리가 왠지 귀에 익다 싶은 그때였다.

“무너질 망상의 탑을 쌓고 있는 중인가?”

달빛 내린 책상 위에 뭔가가 반하게 밝아지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빛의 중심에 서 있는 자그마한 물체를 본 순간 제나는 돌덩이처럼 굳어 버렸다.

“왜, 잊어버렸던 자신의 본모습을 보니 두려운가?”

제나는 악몽을 꾸는 얼굴로 나아갔다. 걸음마다 영혼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고 그렇게 다가온 책상 위엔 손가락만 한 오크가 그 옛날 자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왜, 설마 날 잊은 건 아니지?”

제나는 금방이라도 불붙을 것 같은 안광으로 말했다.

“누구냐.”

오크 고욤은 소리 내 웃었다. 자기 자신을 몰라볼 수가 있냐는 듯 깔깔 웃다가 이윽고 그 웃음을 씹어뱉었다.

“누구냐고? 내가 누구인지 네가 모르면 대체 너는 누구냐? 네가 나로부터 출발했는데 이 모습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대체 지금의 너는 누구인 거야? 정말 네 자신을 아무렇지 않은 인간 여자라고 생각하는 거야?”

“ …… .”

“아서라. 너는 바로 나야. 내가 바로 너지. 너의 피 냄새를 나는 맡을 수가 있어. 왜냐면 너의 붉은 피엔 나의 기억이 남아 있으니까.”

제나의 눈빛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렸다. 그 불길 속에서 이제는 기억하기도 싫은 과거가 생생한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가루모스….”

“그래, 바로 지금의 너를 있게 해 준 스승님께서 보내서 왔다.”

뿜어 날 것 같던 불길이 허망하게 무너지며 제나는 떨리는 입술을 다물었다.

고욤은 뿌듯해지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가루모스의 뜻을 전하도록 하지. 돌아와라. 그립다. 제릭을 사로잡을 기막힌 비책을 마련해 놨다. 사랑한다.”

마지막 말과 함께 히죽 웃는 고욤을 제나는 하마터면 달려들어 움켜 버릴 뻔했다.

그 전율하는 시선 속에서 오크 고욤은 희끗한 연무가 되어 사라졌고, 어둠에 묻히는 공간엔 뒤늦게 손을 내밀려다 만 제나가 그림자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가루모스….’

이제 보니 늪은 제릭이 아닌 그일지 몰랐다. 자신이 오크임을 알고 있는 하늘 아래 유일한 존재… 어두운 지하 동굴에 숨어사는 패배자….

밝은 세상에 있는 자신을 자꾸만 그 어둠 속으로 끌어들이는 그가 바로 악몽의 늪이었다.

‘차라리….’

지금 당장 제릭과 함께 발카람의 지하 동굴로 공간이동을 해 그 늙고 추악한 마법사의 가슴에 검을 꽂아 버리고 싶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오크 고욤의 모습과 함께 그 모든 기억들을 하얗게 불살라 버리고 싶었다. 그 불길에 휩싸여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지더라도… 제릭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죽어 버리고 싶었다.

나르팟 렌은 은은한 마법의 불빛이 밝혀진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텅 빈 복도에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렌의 걸음이 바닥에 닿지 않은 채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요한 순백색 머리칼을 찰랑이며 그렇게 나아간 렌은 걸음을 멈추고 닫힌 방문 하나를 바라보았다.

‘오크.’

그 피 냄새를 가진 아름다운 인간 여자가 이 방 안에 숨어 있었다. 어떤 표정으로, 어떤 생각으로, 그리고 어떤 비밀을 품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지금 그 열쇠로 보이는 작은 새 하나가 자신의 방에 있었다.

발걸음을 옮겼다. 흥겨운 만찬장에서 조용히 빠져나온 까닭은 밤이 찾아왔고 하늘에 별과 달이 떴기 때문이었다.

‘영혼을 불러낼 수 있는 시간이지.’

아침에 제나를 공격하고, 낮에 제릭을 향해 원망 어린 몸부림을 친 그 새의 영혼을 꺼내 해부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리하면 새는 목숨이 끊어지겠지만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유로 생을 마감하는 것보단 나을 터였다.

‘이해하겠지.’

그런 생각으로 자신의 방에 들어선 렌은 그러나 발소리가 나도록 우뚝 서 버리고 말았다.

“ …… .”

닫혀 있던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진한 숲의 향기가 밀려드는 창가 앞 탁자 위엔 뜻밖의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무슨 의미일까.”

만찬에 참석하기 전 목숨이 위태로워 보이는 새를 금빛 새장 안에 넣어 두었다. 새장은 마법으로 만든 문이 없는 새장이었고, 그 새장은 안에 담긴 생명체의 힘을 북돋워 주는 생명의 장과 같았다.

그런데 지금, 새장은 갈가리 휘어진 채 벌어져 있고 그 안에 쓰러져 있어야 할 병든 새는 창문 밖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렌은 한숨을 쉬었다.

웬만한 인간족 마법으로는 감히 대적할 수도 없는 드래건의 마법을 이렇게 헤집어 놓다니, 자연스레 고개를 돌려 방의 벽면을 바라보았다.

그 벽 너머 크로닌의 방 너머, 아마도 이 새장에서 새를 꺼내 간 마녀가 그 작은 비밀을 움켜쥐고 있을 것 같았다. 오크의 피 냄새가 나는 마녀가….

슈흘라이성의 귀빈용 저택, 그 뒤뜰에 잘 가꿔진 정원은 아담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달빛이 드리워진 나무속엔 푸르스름한 바람 한 자락이 천천히 나울거리고 있었다.

‘아가야.’

나뭇가지엔 기력을 되찾은 하얀 새가 총총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조심해라. 드래건에게 잡히면 넌 이 영혼마저 빼앗길지 몰라.’

새는 알았다는 듯 나직한 소리를 냈다.

봄밤의 달빛 아래, 영혼으로만 남은 전설적인 요정 마법사 라그헨과 모든 걸 잃고 새의 모습으로 남은 요정 에르카가 그렇게 숲의 향기를 마시고 있었다.

제나는 절절한 감정의 혼돈에 싸인 채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방문에서 그 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쿵쿵….

누가 찾아왔을까.

누가 이 혼돈의 순간을 알고 찾아온 걸까. 일렁이는 제나의 눈앞으로 새를 가져간 렌의 하얀 모습이 소름 끼치게 다가왔다.

그때 문이 저절로 열렸다. 나타난 이는 뜻밖에 술에 거하게 취한 제릭이었다. 이제 보니 문을 잠그지 않았다는 게 제나의 머리를 스쳤다. 제릭은 문가에 손을 얹더니 만월처럼 환히 웃었다.

“보고 싶어서 왔어요. 듀우란이 술을 은하수에 닿을 때까지 마시자고 했는데, 잠깐 달빛 좀 보고 오겠다고 하고 왔어요. 하하.”

제나는 가슴이 물결쳤다. 제릭이 비틀비틀 다가왔다. 도망치고 싶은데 제릭이 두 팔을 벌려 감싸왔다. 술 냄새와 함께 그의 편안하고도 깊은 한숨이 몸을 휘감았다.

“모르겠어. 달빛이 밝아서 그런지 오늘따라 내 마음이 좀 그래요. 괜히 서글프고, 괜히 즐겁고, 또 괜히… 괜히… 그냥… 내 마음이 그래요.”

“ …… .”

“당신이… 당신의 모습이… 내가 아는 누군가를 닮아서… 그래서 뭔가… 내 마음이 안타까워요….”

아련한 추억의 향기에 한숨을 짓는 제릭….

제나는 눈물이 차오르며 떨리는 손으로 제릭의 등을 다독였다. 차라리 이대로 숨이 끊어져 모든 게 끝나 버렸으면 싶었다. 비극도 악연도 다 모두 다….

깊은 밤, 만찬의 떠들썩함도 모두 하늘로 올라가 조용히 빛나는 시각….

크로닌과 렌은 둥그런 탁자에 마주 앉아 비밀스러운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

헤벌어졌던 금빛 새장 대신 탁자 위엔 대마법사 악비온으로부터 날아온 친서가 놓여 있었고, 그곳엔 화이트 드래건 렌에게 전하는 고마움과 부탁 그리고 변화된 계획이 수놓아져 있었다.

“알겠소.”

렌은 아쉬움이 묻은 한숨을 희미하게 쉬었다. 반면 크로닌은 달라진 계획에 담담한 듯했지만 가슴은 설렘으로 생동하고 있었다.

‘끝을 보겠군.’

제릭의 이질적이고도 강력한 마법력은 이단자 가루모스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추측을 낳았고, 그의 행선지가 발카람인 게 알려진 후 평화의 탑은 그와 동행하며 가루모스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일거에 공격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그 계획이 급히 변경되었으니 까닭은 동행으로 참여하게 된 나르팟 렌이 드래건이라는 막강한 위력에도 불구하고 단 일합 만에 나가 떨어졌다는 급보가 평화의 탑을 뒤흔들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가루모스보다 제릭이 더 위험할지 모르거든.’

그런 존재가 가루모스와 만나도록 방관할 수 없다는 게 악비온의 결론이었다.

결국, 새로운 계획은 가능한 한 이른 시간에 제릭을 평화의 탑으로 공간 이동시켜 그곳에 미리 대기해 놓은 드래건과 대신전의 신성마법사들과 수백여 평화의 탑 고위급 마법사들로 그를 단숨에 제압하겠다는 것이었다.

‘제릭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드래건에 대신전까지 합류한 평화의 탑엔 대항할 순 없지.’

마계의 검은 불꽃과 이계의 연보랏빛 화염이 세속의 일에 한 걸음 물러나 있던 대신전을 자극했을 터였다.

‘아무튼 곧 비밀이 드러나겠군.’

듀우란이 꿈꾼 영웅적인 모험은 더 이상 없었다.

모두가 잠든 한밤, 제나는 홀로 잠들지 못했다.

침대 위엔 제릭이 술기운에 싸여 깊은 잠에 빠져 있고 그를 바라보는 제나의 얼굴엔 아득한 비감이 어두운 바다처럼 넘실거렸다.

‘제릭….’

오크 고욤이 다시 나타날까, 제릭이 그 모습을 보고 눈을 부릅뜰까, 가슴이 조마조마 조여 왔다.

‘어떻게… 어떻게….’

차라리 도망가 버릴까? 아무도 없는 깊고 깊은 어딘가로? 하지만 가루모스가 끝내 찾아올 텐데….

가루모스가 일리아를 죽인 괴물이라고 거짓말을 할까? 분노한 제릭이 그를 단칼에 죽여 버리면 이 모든 고뇌가 사라지지 않을까?

하지만 과연 가루모스가 죽어 줄까….

악비온이 안겨 준 가슴의 고통만 없으면 당장 이계와 마계의 괴물들을 이끌고 세상을 지배하려는 그를 없애는 게 가능할까….

제나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냥 이곳에서… 죽어 버릴까….’

그러지 말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자고 바다 속 괴물의 아가미가 속삭였다. 악연일 뿐이라고, 진실을 알게 되면 제릭이 너를 불태워 죽일 거라고….

‘돌아갈까….’

오크 고욤이 화한 원래의 제나로… 가루모스와 함께 왕국을 만들고 여왕의 자리에 앉아 대관식을 꿈꾸던 본래의 나로 돌아갈까….

그때 제릭이 꿈꾸듯 누군가를 불렀다.

에르카….

꿈속에서 그녀를 만나고 있나 보다….

부글부글 검게 녹아 버린 요정이….

핏빛 옹달샘에 쓰러져 있던 그 소녀가….

지금 피눈물을 흘리며 제릭을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제나는 떨리는 손을 들어 푸른빛이 도는 단검을 소환했다. 그곳엔 가루모스의 지하 동굴을 향한 공간이동 마법이 새겨져 있었다.

“제릭….”

운명의 수레바퀴가 어디로 흘러갈까. 파도치는 비극과 알 수 없는 열기에 휩싸인 채 제나는 단도를 움켰다. 누가 죽어날까. 아니 모두가 죽어날까….

그때 어두운 방 어딘가에서 차가운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뭘 하려는 거지?”

소리 난 곳을 보니 문 앞에 렌이 전장에라도 나가는지 새하얀 갑옷 차림에 그만큼 하얀 검을 내려뜨리고 있었다. 하얀 냉기가 피어나는 검의 모습에 제나는 아련한 미소를 그렸다.

‘십 년 전 그날처럼… 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려는가 보구나.’

헝클어지고 또 헝클어져 버려라, 제나는 어떤 쾌감마저 느끼며 물었다.

“어떻게 들어왔어?”

“벽을 지나서. 이 정도 벽쯤은 공기처럼 통과할 수 있어.”

“잠이나 자시지….”

제나의 말에 렌은 재미있다는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싶은데, 열린 창으로 독특한 피 냄새가 흘러 들어와서 말이야. 그건 그렇고 설마 새장 안에 넣어 둔 새를 잡아먹은 건 아니겠지?”

“악비온이 보낸 건가?”

“너야말로 가루모스의 부하인가?”

나지막이 오가는 물음 끝에 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렌은 궁금했던 조각 하나가 맞아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서 다가올 미래를 정리했다.

“적이로군.”

제나는 재차 고개를 끄덕인 후 렌을 향해 물었다.

“마법사인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지.”

제나는 세 번째로 고개를 끄덕이며 푸른 단검에 빛을 불어넣었다.

“맞아.”

렌의 표정에 흥미로움이 일었다.

“단검에 마법이 깃들어 있군. 그것도 아주 강력하고 이질적인 파장을 지닌.”

“설명이 필요 없군.”

“제릭을 가루모스에게로 데려가려는 건가?”

“그건 설명이 필요하나?”

“강제로 입을 열게 할 수도 있어.”

“그래? 그럼 입 다물고 조용히 지켜봐.”

제나는 즉시 허공을 갈랐고 렌은 자신의 백색 검을 움켰다.

“누가 빠를까?”

공간이동을 하려는 제나를 그 마법의 밖으로 쳐낼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렌은 자신의 두 다리가 하얀 꽃잎 무더기로 부서지는 걸 보았다. 미리 결계를 쳐 놨던 것일까.

‘드래건인 내가 느끼지 못한 마법의 결계라니, 역시 마계와 이계를 제멋대로 혼합해 내는 가루모스의 마법이군.’

두 다리가 무너져 내리며 렌이 휘청하는 사이 제나는 마법의 별빛으로 제릭을 휘감고서 공간이동의 틈 속으로 사라졌다.

‘이런.’

렌은 자신의 다리를 검으로 내리쳤다. 마법의 결계가 푸른 유리처럼 박살이 나고 두 다리는 즉각 회복이 되었다. 렌은 몸을 날려 닫히기 직전인 공간의 틈새에 검을 꽂아 넣었다.

파각!

사라지던 틈새가 가까스로 벌어졌다. 그러나 마법의 힘으로 찢어 놓은 공간은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려 검을 밀어냈고 렌은 혼신을 다해 들이박았다.

파가각!

불꽃이 튀며 시작된 공간과 렌의 싸움이 이내 공간의 승리로 돌아가려는 그때 방바닥에서 크로닌이 솟아올랐다. 즉각 틈새로 창을 꽂아 넣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서둘러 마법사들을 부르시오. 도망자들이 저편의 공간 밖으로 나가 버리면 끝이야.”

공간이동이란 현재 위치하는 곳에서 다른 목적하는 곳으로 공간 속 별바다를 급행하는 마법이었다. 입구를 붙들고 있다 하더라고 출구가 닫혀 버리면 그걸로 끝이었다.

“빨리!”

렌의 외침이 있은 직후 창문을 깨뜨리며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그건 하얀 새였고, 새는 창과 검이 벌려 놓은 공간의 틈새로 몸을 던졌다.

렌은 그 천금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왼쪽 눈으로 실낱같은 광선을 쏘아 새의 발목을 휘감으니 별바다로 날아 들어간 새를 따라 렌의 안광이 도르래에 달린 실처럼 빨려 들어갔다.

크로닌은 슈흘라이 영지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들을 호출했다.

다급한 부름에 수십여 유성들이 밤하늘을 날아왔고, 귀빈용 대저택 위로 모여든 마법사들은 귓가에 들려온 크로닌의 명에 따라 일제히 마법력을 발했다.

그러자 렌과 크로닌이 있는 방의 천장과 대저택의 지붕이 통째로 뜯겨 하늘로 올라갔다.

휑뎅그렁하니 열린 저택의 복도에선 잠옷 차림인 벤차드와 데렌이 입을 떡 벌리고 있었고 그렇게 떠올려진 구조물은 넓은 연병장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이제 달빛이 쏟아져 내린 방에선 크로닌과 렌이 공간의 틈새와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놓치면 안 돼!’

틈새로 보이는 별바다엔 렌의 안광을 매단 하얀 새가 아득히 멀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에르카가 두 눈을 번뜩이며 뒤쫓고 있는 건 잠든 제릭을 별빛으로 휘감은 채 날아가고 있는 제나….

그녀의 푸른 단검이 가리키는 목적지는 발카람의 지하 동굴이었다. 하지만 슬픈 눈으로 제릭을 돌아본 제나는 곧 행선지를 바꿔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별바다를 쫓아오는 작은 새와 그 다리에 묶여 있는 하늘빛 실이 보인 까닭이었다.

‘그래….’

새가 에르카임을 이제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즉시 방향타처럼 쥐고 있는 단검을 옆으로 틀었다. 공간이동 중에 목적지를 변경하는 건 미아가 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지만 악비온의 일당이 뒤쫓아 오는 건 허락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에르카가 바로 뒤까지 따라붙었을 때 제나는 단검을 쥔 왼손에 열기가 모여드는 걸 보았다. 그건 공간이동의 주동자가 느끼는 출구에 대한 육체적 반응.

‘저기다.’

앞쪽 멀리에 둥그렇게 소용돌이치는 별무리가 보였다. 그곳을 통과하면 공간이동은 완성이었다.

‘다 왔다.’

제나는 제릭과 함께 소용돌이 별무리로 돌진했고 순간 눈부신 빛이 터지며 어둠이 가득한 출구로 빠져나왔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뒤돌아보자 닫혀가는 공간의 문으로 별바다를 쫓아오는 하얀 새가 보였다. 제나는 공간이동의 마법력을 강제로 끊어 버렸고 출구는 급속히 오므라져 틈을 지웠다.

‘됐어.’

전율이 몸을 휩쌌다. 에르카는 공간의 별바다에 갇혀 이제 영영 다시는 나타나지 못할 터였다.

하얀 새는 소용돌이치는 별무리 앞에서 광기 어린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제릭!’

점멸하는 별무리를 온몸으로 부딪고 들이받아 보지만 공간은 더 이상 통과를 허락하지 않았다.

렌은 안광을 타고 전해져 오는 그 몸부림에 탄식을 하고 말았다.

“나가지 못했어.”

죽임을 당하더라도 출구로 빠져나가야 하는데 새는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제릭에게 가닿지 못했나 보았다.

그때였다. 휑뎅그렁하게 열린 저택의 하늘 위에 거대한 공간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대마법사 악비온을 위시한 평화의 탑 마법사들이 눈보라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눈에 상황을 파악한 악비온은 벼락처럼 내려와 공간의 틈새로 구불구불한 지팡이를 꽂아 넣었다.

콰직!

불꽃이 뿜어 나며 공간의 틈이 활짝 열렸다. 렌은 기다렸다는 듯 검을 거두고 새와 이어져 있는 자신의 안광에 마법력을 불어넣었다.

‘네가 우리 대신 그 문을 열어 다오!’

렌의 마법력은 별바다를 하늘빛 광선처럼 뻗어 나가 하얀 새를 들이쳤고 에르카는 일순 거대한 불새로 화해 별빛 소용돌이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제리익!’

아득한 공간 속에 홀로 남겨지는 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바라는 건 괴물의 손에 끌려간 연인을 지키는 것….

그렇게 공간의 한 꺼풀 너머에서 에르카가 불을 뿜는 사이, 제나는 깊은 밤의 정적이 흐르는 광장을 돌아보고 있었다.

‘게라크온….’

급히 목적지를 바꿔 도착한 이곳은 드넓은 게라크온 광장이었다. 저 멀리 우뚝우뚝 솟은 바위들이 오랜 세월의 탑처럼 하늘을 향해 두 손 모으고 있는 곳….

바로 이 아래 깊고 깊숙한 지하 동굴 속에 가루모스가 숨어 있었다.

“후우….”

광장 너머 원시림에서 숲의 내음이 물씬 밀려왔다. 그 시공을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제나는 처연한 감정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밝구나….’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지하 동굴로 내려가 가루모스에게 제릭의 영혼을 바쳐야 하는 걸까.

“여기가 어디죠?”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보니 역시나 그가 눈을 뜨고 일어나 있었다.

제릭은 서늘한 밤공기를 호흡하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무수한 별들이 뿌려진 하늘을 보고 다시 제나를 보았다. 과음을 하긴 했지만 제나가 슈흘라이의 그 방에서 단검을 빼든 순간 이미 정신을 차렸던 터였다.

“공기가 많이 다른 느낌인데….”

밤바람이 제릭의 앞 머리칼에 살랑거렸다.

제나는 아련해지는 눈빛으로 그에 답했다.

“발카람… 제릭이 오려고 했던 그 발카람….”

“ …… .”

“찾아보세요… 만나고 싶어 한 그 오크가 어디에 있는지….”

“그… 오크?”

제나를 향한 제릭의 눈빛이 어수선해지는데, 그 모습을 멀리 돌탑 위의 누군가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뭐 하는 것들인가.”

암청색 판금 갑옷 차림의 그는 제릭과 제나를 향해 푸르른 눈빛을 일렁거렸다.

그리고 그때, 공간의 한 꺼풀 너머에선 대마법사 악비온의 마법력까지 전해 받은 불새가 광휘에 휩싸이며 별빛 소용돌이를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카아아악!

그 공간의 한 꺼풀 밖, 광장의 달빛 위로 제나는 힘없는 걸음을 돌렸다.

“제나.”

제릭이 불렀지만 제나는 말없이 어둠 속을 걸어갔다. 제릭은 그 뒤를 따랐고 잠시 후 커다란 바위기둥 앞에서 제나는 걸음을 멈췄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그녀의 한숨이 어둠처럼 무거웠다.

제릭은 나직이 말을 건넸다.

“마법사인가요?”

“ …… .”

“침대에서 듣자 하니 날 가루모스란 마법사에게 데려갈 생각인가 보던데. 렌은 이곳 아후란의 대마법사 악비온의 부하인 듯싶고.”

제나는 천천히 돌아서 제릭을 마주했다. 머리칼이 헝클어져 있었다.

“듣고 있었어요?”

제릭의 미소가 달빛처럼 은은했다.

“가루모스와 악비온에 대해선 들은 적이 있어요. 오래된 악연이라고… 그런데 제나는 날 가루모스에게 데려가고 싶어 하고, 악비온은 그걸 막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 이유는 대략 짐작이 되긴 하죠. 나로선 그다지 얽히고 싶진 않지만….”

목석처럼 말이 없던 제나는 이내 한스러운 눈빛을 떠올리며 말했다.

“나랑 같이 가요.”

“어디로?”

“가루모스에게로.”

“가루모스?”

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릭을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로 가면 모든 진실을 알게 될 거예요. 나에 대해서도, 그리고 에르카에 대해서도.”

“에르카?”

반짝이는 제릭의 시선을 제나는 외면했다. 그때 공간이동의 출구가 사라졌던 곳에서 파열음이 들려왔다. 악비온의 일당들이 닫힌 공간의 출구를 강제로 열고 있는 것 같아 제나의 표정이 달라졌다.

“제릭.”

“에르카는 지금 어디에 있죠? 무사한가요? 혹시 나 때문에 볼모로 잡혀 있는 거예요?”

그때 또 어딘가에서 돌덩이가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바라보니 저만치 우뚝 솟아 있는 바위 탑 위로 암청색 판금 갑옷이 번뜩이는 게 보였다. 표정이 뒤틀려 있는 그는 묵직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지금 가루모스라고 했는가?”

그의 눈빛이 파랗게 불이 붙었다.

“지금 악비온이라고 했는가?”

으르렁거리는 그 알 수 없는 존재에 제나는 또 난마처럼 뒤엉킬 운명을 느꼈다.

“제릭, 나와 함께 가요. 제발 나랑 이곳에서 도망가요.”

제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공간이동을 해 온 발카람은 결국엔 찾아올 목적지. 생경한 공기 냄새 너머 돌탑 위에는 또 누구인가. 뒤쪽에서 연이어 파열음이 들리는 걸 보니 슈흘라이에서 렌이 쫓아오려는 모양인데….

“제릭!”

제나가 소리쳤다. 푸른 단검에 마법력을 불어넣으며 그녀 역시 이글거리듯 말했다.

“지금 나랑 같이 가지 않으면 여기서 죽어 드릴게요.”

“제나.”

“결정해요. 에르카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 테니까.”

“기다려요.”

“기다릴 시간 따윈 내겐 없어요. 같이 가지 않겠다면 그저 조용히 죽어 버릴 뿐….”

제나는 단검을 높이 들어 자신의 목을 향해 내리쳤다. 제릭이 번개같이 달려와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단검이 공간을 갈랐고 제릭이 그 손을 잡았을 땐 마법의 별빛이 뿜어져 나왔다.

별빛은 제나의 바람대로 두 사람을 휘감고서 잘라 낸 공간의 틈새로 빨려 들어갔다.

‘제나….’

제릭은 그녀를 뿌리치고 튕겨 나올 수 있었음에도 절박한 눈빛 때문일까 아니면 그 눈가의 눈물 때문일까, 거부하지 않고 함께 빨려 들어갔다.

순간 탑 위에 서 있던 정체불명의 푸른 눈빛이 득달같이 다가와 닫히려는 그 틈을 붙잡았다.

“누구냐!”

그 옛날 인간족과 전쟁에서 패배하고 이곳 발카람에 구겨 넣어진 드래건 이이오블….

흐르는 시간 속에 동족들은 흩어지고 심지어 인간족에게 투항해 빌붙기까지 하는 걸 보며 더없이 초라해지는 고독감에 석화되고 있었는데….

“가루모스라고 했는가? 악비온이라고 했는가?”

공간의 틈새를 붙움킨 두 손에선 불꽃이 날리고 분노가 끓어오르는 두 눈은 시퍼런 안광을 게워내는 그때였다. 파열음이 들려오던 뒤편에서 그예 섬광이 터지며 닫혔던 공간이동의 출구가 다시 열렸다.

그곳에서 거대한 불새 한 마리가 튀어나왔고 불새는 허공에서 찬란한 날갯짓을 하다 곧 또 다른 공간이동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소리를 지르며 날아들었다.

크아악!

그러나 이이오블은 가볍게 손을 뻗어 화염을 폭발시켰다.

퍼헝!

화염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불새는 불길에 휩싸여 나뒹굴었고 이내 화염이 연기처럼 사라지자 조그마한 하얀 새로 되돌아왔다.

그 시각 슈흘라이에선 악비온이 공간이동의 출구가 열렸음을 감지하고 소리를 질렀다.

“문이 열렸다! 목숨을 버릴 자, 나를 따르라!”

이단자이자 사랑하는 아들을 마계의 불꽃으로 녹여 버린 철천지원수를 멸하기 위해 악비온은 공간의 별바다로 몸을 던졌다.

뒤이어 대저택 위로 몰려와 있던 수백여 마법사들이 그를 따라 눈보라처럼 쏟아져 들어가니 긴 세월 동안 석화되어 있던 원한의 전쟁이 다시 눈을 뜨고 불을 뿜기 시작했다.

그때 게라크온 광장에선 렌의 마법력 덕분에 크게 다치지 않은 작은 새가 정신을 차리고 제나와 제릭이 사라진 공간의 틈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이이오블은 그 새를 붙잡으려다 새의 다리에 묶여 있는 하늘빛 광선을 보고는 멈칫했다. 새는 공간 속의 별바다로 사라졌고 뒤따르는 광선은 저만치에 보이는 또 다른 공간이동의 출구로부터 실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제나는 제릭과 함께 별바다를 날아가며 눈물을 방울방울 날렸다. 이 모든 게 꿈만 같았다. 제릭과 함께 이 영롱한 별빛 속을 날고 있는 지금이 더 이상 나아가기도 돌아가기도 싫은 영원한 꿈만 같았다.

‘놓아 버리자….’

손에 쥐고 있는 악연의 늪을 놓아 버리고 그와 함께 이 아득한 별빛 속에서 산산이 흩어져 버리고 싶었다.

그래도 될까….

그래도 되는 걸까….

알 수 없는 고통에 휩싸이며 제나는 눈물을 터트렸다. 제릭의 걱정스러워하는 눈빛이 그 눈물에 스쳤다. 움켜쥔 푸른 단검이 떨리고 제나는 마지막으로 제릭을 돌아보았다.

그때… 멀어지는 눈물방울 너머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별빛이 아니었다. 조그마한 새 한 마리가 그 별빛 속을 애타게 쫓아오고 있었다.

에르카….

제나는 허망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 오롯한 사랑 앞에 자신의 존재는 산산이 부서져 내릴 자격조차 없었다.

‘가자….’

단검을 다시 움키고 다가올 미래 속에서 이 모든 악연을 끝내기로 했다.

게라크온 광장엔 공간이동의 문이 두 개가 열려 있었다. 하나는 출구였고 또 하나는 입구였다. 그중 제나와 제릭이 사라진 입구를 붙잡고 있던 이이오블은 저만치에 있는 또 다른 출구가 갑자기 발광하며 팽창하는 걸 보았다.

“또 무엇인가!”

대답하듯 섬광이 터지며 그곳에선 인간족 마법사들이 눈보라처럼 쏟아져 나왔다. 뜻밖의 광경에 당황한 이이오블은 공간의 틈새를 놓을 뻔했다가 다시 와락 붙잡았다.

마법사들은 하늘을 뒤덮었고 악비온은 허공에 지팡이를 들고 서서 암청색 판금갑옷 차림의 무장을 노려보았다. 그가 제릭이라는 마법기사인 듯싶었다.

“네놈인가? 정체를 밝혀라! 이단자 가루모스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것이냐!”

이이오블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비틀었다. 인간족의 무도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정체라 그랬느냐? 오호라, 우리에게 마법을 훔쳐 배운 미개한 종족이 떼로 몰려와서 감히 나에게 정체를 묻는 것이냐? 감히이!”

예상 밖의 반응에 악비온은 미간을 구겼다.

“마법을 훔쳐 배워? 설마… 드래건인가?”

제릭이 인간화한 드래건이라면 수십여 마법사들을 널브러지게 한 전격마법과 화이트 드래건인 렌을 질풍처럼 날려 버렸다는 게 납득이 되었다.

그때였다. 크로닌과 렌이 마지막으로 공간이동을 해 와 악비온의 옆으로 날아왔다. 순간 렌을 본 암청색 무장과 그를 발견한 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흠칫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놀람을 먼저 삼키고 입을 연 건 렌이었다.

“이이오블.”

암청색 무장 역시 붙들고 있던 공간이동의 틈새를 내버리고 돌아섰다. 판금갑옷을 번뜩이며 앞으로 걸어 나온 그는 렌을 향해 파랗게 이글거리는 안광을 뿜었다.

“나르팟 렌!”

천칠백 년 전 인간과 요정의 연합군에 패배한 날, 함께 발카람으로 물러나는 걸 거부한 채 적들의 배려 속으로 숨어 버린 백색 드래건.

한때의 연인이었던 렌을 향해 이이오블은 분노와 원망을 한꺼번에 드러냈다.

“배신자를 이렇게 다시 만나는 건가! 이렇게 말이야! 적들과 함께 말이야!”

그때 이이오블이 놓아 버린 공간의 틈이 닫히며 얇은 섬광이 흘렀다. 도망자들이 또 다른 출구로 빠져나간 것이었다. 다행히 렌의 안광이 이어져 있어 다시 뒤를 쫓을 수 있긴 한데, 문제는 닫힌 입구를 이이오블이 가로막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군.”

이이오블은 렌의 옆에 구불구불한 지팡이를 들고 있는 노인을 노려보았다.

“네놈이 악비온이라는 인간족 대마법사인가 보군.”

“그렇소이다.”

“흐흐,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배신자가 끝내 적들을 몰아 다시 쳐들어올 거란 걸 나도 모르진 않았지!”

이이오블은 분노의 불길에 휩싸여 이글거렸고 그 모습에 렌뿐만 아니라 크로닌과 악비온까지 당황했다.

그 광장의 땅 밑….

깊고 깊숙한 지하 동굴엔 이제 막 공간이동을 해 온 제나와 제릭이 마법진이 새겨진 편편한 바위 위에 내려서 있었다. 그리고 바로 뒤따라 도착한 하얀 새는 제릭의 어깨에 부딪고 튕겨 나가 동굴 벽 쪽으로 굴러떨어졌다.

“왔구나….”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가루모스는 꿈을 꾸듯 두 손을 내밀었다.

마침내 마주하게 된 운명 같은 만남….

그날의 오크였던 제나는 두려움에 손을 떨었고, 제릭은 벽 쪽에서 꿈틀거리는 작은 새를 일견한 후 다시 자신을 향해 감격스러운 눈빛을 일렁이는 노인을 보았다.

“드디어….”

노인은 기쁨에 휩싸인 채 한 걸음씩 다가왔고, 제나는 그 걸음마다 영혼이 산산이 흩날리는 환상을 느꼈다.

“어서 오너라, 제릭. 기다리고 있었다.”

두 팔을 펼쳐 보이는 노인에 제릭은 제나를 돌아보았다. 제나는 쓰러질 것만 같은 걸음으로 마법진에서 내려와 의자 모양으로 돋아나 있는 바위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초점 없는 눈으로 혼잣말을 했다.

“가루모스예요….”

제릭은 세월에 삭고 추레해진 한 노인을 바라보았다. 이계와 마계의 마법의 혼합하여 자신만의 새로운 마법 체계를 이루려다 쫓겨난 자연 마법계의 이단자, 그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저를 기다린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가루모스는 벅찬 감동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내가 널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데… 지난 세월의 고통을 어찌 다 이야기 할까….”

제릭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고, 이제야 정신을 차린 작은 새는 무슨 일인가 하며 까만 눈을 빛냈다.

가루모스의 두 손 위로 금색 별빛들이 모여들었다.

“그 긴 기다림이 결국 이렇게 행복이 되었구나.”

“무슨 이야기인지 도무지 모르겠군요. 대체 저를 왜 기다렸는지….”

“당연히 널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지.”

“행복?”

“그렇단다. 행복. 너와 나 그리고 우리 제나가 모두 행복해지는 바로 이 순간을 기다린 게지.”

동시에 가루모스의 두 손에서 금색 별빛들이 날아올랐다. 금빛은 방울 소리와 함께 동굴을 환히 채색했고, 돌아보니 어느새 하늘은 투명하도록 맑은 푸른빛이며 세상은 다사롭기 그지없는 봄날의 풍경이었다.

‘어….’

평화로이 언덕진 풀밭엔 노랗고 하얀 봄꽃들이 피어 있고, 군데군데 무리지어 있는 분홍, 빨강 꽃들은 보석만 같았다.

제릭은 그 세상을 돌아보며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환영 마법일 터였다. 슈흘라이의 방에 검을 놓고 왔지만 마음만 먹으면 이런 환영 마법은 얼마든지 깨뜨릴 수 있었다.

다만 해맑은 공기를 마시며 다시 돌아본 봄날의 풍경이 왠지 낯이 익은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

이제 보니 고향인 쥴른의 풍경을 닮았다. 그리고 그 느낌에 답하듯 저 언덕진 꽃밭에 한 꼬마 아이가 앉아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살랑거리는 봄바람 너머 그 어린 소녀 또한 누군가를 닮았는데….

소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제릭은 전율에 싸이고 말았다. 놀란 눈은 금세 혼란이 스치고 입에선 떨리는 그 이름이 흘러나왔다.

“일리아….”

그 옛날의 어린 공주님이 햇살처럼 제릭을 반기고 있었다.

가루모스는 가슴이 설렜다. 공간 이동의 마법진 위에 꿈을 꾸는 얼굴로 서서 점점 더 행복해져 가는 제릭의 얼굴은 준비한 환영 마법이 완벽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어떠냐? 내가 준비해 놓은 덫이? 야수가 그 덫에 걸린 줄도 모르고 저렇게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잖니?”

“어떻게….”

바위 의자에 앉아 멍한 얼굴로 물어오는 제나에게 가루모스는 흐뭇하게 답했다.

“네가 보다시피 이건 환영 마법이야. 물론 제릭도 그 환영 속의 현실이 환영이라는 걸 느끼고 있을 테지. 하지만 이 마법이 보통의 환영 마법과 다른 점은 그 대상이 지금껏 살아오며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되살려 행복하다는 심정을 숨 쉬는 순간 환영이 아닌 바로 현실이 되어 버리는 마법이야.”

제나는 작은 새가 횃불 아래 몸을 떠는 걸 일견한 후 다시 가루모스를 바라보았다. 백이십 살이 넘은 노인은 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제나, 네가 제릭이 상상을 초월하도록 강력하다고 해서 내가 고심 끝에 강구해 낸 거란다. 물론 완전히 내가 만든 건 아니고 마계의 환영 마법을 조금 활용했다고 할까. 아무튼 이 환영 마법은 상대가 강력할 때 그와 충돌하지 않고 제압할 수 있는 아주 효과적인 마법이지.”

뿌듯한 얼굴로 제릭을 가리켰다.

“봐라. 아무리 강력한 존재라 해도 스스로의 마음에서 피어나는 행복한 심정에 봄날처럼 풀어지잖니? 그리고 저 행복을 숨 쉬는 순간 영원히 그 행복한 꿈속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거야. 바로 행복한 환영이라는 늪에 빠져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거지. 후후후.”

가루모스의 말처럼 제릭은 두 볼에 홍조까지 어리고 있었고, 그 모습에 제나는 문득 가슴이 울렁거렸다.

‘행복….’

마법의 주동자인 가루모스는 환영 마법을 들여다볼 수 있지만 제나는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제릭이 어떤 행복을 숨 쉬고 있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제나는 이제까지의 감정이 또 한 번 헝클어지는 걸 느꼈다. 혹 이게 바로 악몽의 끝은 아닐까. 비극의 끝은 아닐까.

악연의 시작이었던 일리아의 죽음을 환영으로나마 되돌려 제릭을 영원한 행복 속에 잠들게 하면 이 모든 혼돈을 끝낼 수 있지 않을까….

행복감이 밀려드는 제릭의 표정을 보며 제나는 점점 고통에서 벗어나는 자신의 마음을 보았다.

‘미안….’

잠시나마 사랑했던 제나로 기억될 수 있는 지금이 둘의 인연을 덜 아프고 덜 괴롭게 끝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만 같았다.

‘그래… 이걸로 됐어….’

환영의 현실 속에서 제릭이 영원한 행복을 꿈꾸길 바랐다.

그와 달리 하얀 새는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고통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렇게 끝나 버릴 비극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며 영혼을 게워 내듯 몸을 흔들었다. 결국 땅을 박차고 날아가 제릭의 가슴을 들이받았다.

가루모스가 물었다.

“어디서 온 새지?”

제나는 떨리는 눈빛으로 답했다.

“제릭의… 새예요….”

새는 제릭의 가슴을 붙잡고 한 송이 흰 꽃처럼 나부꼈다. 가루모스는 가볍게 손을 뿌리쳤고 꽃을 날려 버렸다. 새는 날아가 벽을 부딪고 떨어졌다.

환영의 현실에선 제릭이 한 걸음씩 일리아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 걸음마다 시간을 거슬러 모습이 변하고 있었다.

“일리아….”

키가 작아지고 어깨가 줄어들고 얼굴이 앳되게 변해 간 제릭은 이윽고 일리아 앞에 섰을 때 오래전 열 살 꼬마 소년으로 돌아와 있었다. 소년과 소녀는 쥴른의 제릭과 일리아였다.

“어서 와.”

“일리아.”

“여기 앉아. 내가 꽃으로 왕관을 만들었어. 예쁘지? 노란 꽃들은 금이고 하얀 꽃은 은이야. 자, 제릭이 씌워 줘. 나 공주님이 되고 싶거든. 아니 여왕님이 되고 싶어. 그러면 내가 제릭을 내 호위기사로 임명해 줄게. 모두가 부러워하는 여왕님의 호위 기사. 하하.”

제릭은 일리아 앞에 무릎을 꿇고 꽃으로 만든 왕관을 받았다. 화창한 봄바람에 둘의 머리칼이 흔들리고 어느새 제릭은 기쁨 가득 환히 웃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

“나도 그래. 나도 네가 좋아. 이 세상에서 제릭이 제일 좋아.”

현실이었다. 꿈이 아닌 분명한 현실….

제릭은 일리아의 머리 위에 봄꽃 왕관을 씌워 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왕님이 꽃처럼 웃었고 제릭은 그 모습을 보며 아득히 밀려오는 행복감에 젖어 들었다.

“사랑해….”

수줍게 까르르 웃는 일리아 앞에 제릭은 둘만의 행복을 꿈꾸었다. 그리고 그 환영을 들여다보며 가루모스는 벅찬 만감에 가슴을 떨었고 제나는 마침내 이별의 눈물을 떨어뜨렸다.

‘안녕….’

그 시각 지상의 게라크온 광장에선 이이오블이 분노를 토하며 거대한 드래건으로 화하고 있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왔겠지!”

날개를 펴며 시뻘건 화염을 게워 내는 그 모습에 렌은 서글피 탄식했다. 악비온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크로닌을 돌아보았다.

“그 마법기사는 어디 있는가! 가루모스는!”

가루모스는 그 땅 밑 깊고 깊은 지하 동굴 속에서 제릭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고 있었다.

“그래… 어서….”

제릭이 환영의 행복감에 취해 완벽히 꿈속으로 빠져드는 순간, 현실의 제릭은 그야말로 껍데기가 되고 보석처럼 남아 있을 그의 영혼은 그저 내 것인 양 꺼내 가면 되었다.

“어서 잠들어라. 어서 그 행복 속에서 영원한 꿈을 꾸어라. 어서….”

그때였다. 벽 쪽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작은 새의 가슴에서 바람 한 자락이 흘러나와 가루모스도 모르게 제릭의 영혼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내가 깨워 주마.’

봄날의 햇살 아래 제릭은 여왕님께 입맞춤을 했다. 감긴 눈과 보드라운 두 볼에도 입을 맞추니 들려오는 웃음소리… 다시 마주한 일리아는 세상 누구보다 사랑스럽기만 한데… 그런데 환히 웃는 일리아 뒤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누구….

‘어….’

놀란 제릭이 멍하니 쳐다본 그곳엔 오크 고욤이 돌도끼를 들고 있었다. 두려움에 입을 벌리는 제릭처럼 그 환영을 들여다보고 있던 가루모스는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다.

“안 돼!”

그러나 고욤은 일리아의 머리를 내리쳤다. 피가 퍼지고… 품으로 쓰러지는 일리아를 안으며… 제릭의 얼굴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오크… 오크….

그날의 오크가 생각이 났다. 일어선 제릭 앞엔 그날의 옹달샘이 핏빛을 반사하고 석상으로 변한 일리아는 이제 그 기억 속에 삼켜지고 있었다.

아아….

제릭은 몸이 급격히 전율하며 현재의 모습으로 변해 갔다. 히죽거리는 오크 고욤은 핏빛 옹달샘에 손을 넣었고 옹달샘은 부글부글 끓어 넘치기 시작하는데….

안 돼….

가루모스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내뻗는 그때 제릭이 거대한 벼락을 폭발시켰다. 환영은 산산 조각이 나고 벼락의 연쇄 폭발은 지하 동굴을 눈부신 섬광으로 물들였다.

또 한 번 작열하는 어마어마한 벼락….

지상을 향해 수직으로 치올라 가며 다시 한번 폭발을 하니 때마침 나르팟 렌을 향해 불을 뿜던 이이오블이 솟구친 불덩이에 턱을 얻어맞으며 홱 뒤집히고 말았다.

광장을 뒤흔든 느닷없는 대폭발에 평화의 탑 마법사들은 집단 방어막을 치며 물러났고 라그헨은 작은 새를 휘감아 안고서 화염 물결을 넘어 피신했다.

가루모스와 제나는 넘실거리는 불길 위로 떠올랐다가 몰려온 수많은 마법사들을 발견하고는 맞은편으로 물러섰다. 그 뒤에서 너부러졌던 드래건 이이오블이 성난 얼굴로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치솟았던 화염은 빠르게 꺼져 내렸다. 그리고 쩍 갈라진 광장의 땅 속에선 이제 제릭이 불길을 일렁이며 떠오르고 있었으니 그의 두 눈은 아직 환영으로 뒤집혀 있었다.

‘일리아….’

그리고 이 뜻밖의 상황에 먼저 입을 연 건 악비온이었다.

“가루모스!”

구불구불한 지팡이를 뻗어 철천지원수를 가리키니 가루모스는 칼로 저미는 듯한 가슴의 고통을 움키며 으르렁거렸다.

“그래, 결국에 네놈이구나. 결국,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됐어. 하지만 내가 예전처럼 이 고통에 겨워 도망을 갈 거란 착각은 하지 말거라.”

“무어라?”

“후후, 이 고통을 잠재워 줄 영혼을 아홉 개나 삼켰거든. 아직 마지막 하나를 삼키지 못했지만 그 옛날 네놈이 준 그 처절한 고통만큼은 아니란 말이다. 이 정도는 버틸 만해. 흐흐흐.”

그때 양측 사이의 허공에 떠 있던 제릭의 몸에 불길이 파도쳤다. 눈앞엔 여전히 환영 속의 오크와 핏빛 일리아의 모습이 나부끼고 있었고, 이제 이 모든 연유에 대해 답하라고 가루모스의 옆에 서 있는 제나를 노려보았다.

목석처럼 굳어 있는 제나는 말없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대신 가루모스가 환히 웃으며 손을 내보였다.

“그래, 바로 너란다. 내가 애타게 기다린 마지막 열 번째 영혼이 바로 너야. 네 영혼만 삼켰으면 모든 게 완벽해져 저 악비온을 향해, 아니 이 빌어먹을 세상을 향해 불같은 복수에 나섰을 텐데, 너무도 아쉽게 되었어.”

“내 영혼….”

“맞아. 십 년 전 그날 그 여자애가 아홉 번째, 네가 열 번째였지. 그리고 이제껏 그 영혼들을 모아 오고 너를 이곳까지 데려온 건 바로 나의 사랑하는 제나란다.”

제릭의 불길이 휘청했다. 제나는 고개를 수그리고 어깨를 웅크렸다. 가루모스는 보란 듯 소리쳤다.

“그래! 그 오크가 바로 제나다! 네 사랑을 바위로 만들어 버린 그날의 오크가 바로 제나란 말이다!”

“ …… .”

“그런 제나에게 호감이라도 느꼈는가? 그런 제나를 품에 안고 희망찬 꿈이라도 꿨는가? 아니야, 아니야, 제나는 나의 사랑이야. 사랑스러운 내 아내야. 나와 함께 이 세상을 지배할 바로 나의 여왕이란 말이다!”

가루모스의 외침에 악비온이 크로닌을 돌아보았다. 이제 보니 제릭은 가루모스와 아무 관련이 없는, 오히려 희생양인 모양이었다.

제릭을 휩싸던 불길이 힘없이 흩어져 버렸다. 허공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넋이라도 나간 듯했다. 이에 렌이 냉기가 하얗게 타오르는 검으로 제나를 가리켰다.

“너의 목은 내가 베어 주마.”

렌은 섬광처럼 날아갔다. 느닷없는 들이닥침에 가루모스는 움찔하며 뒤늦게 손을 뻗었고 그 찰나 제나를 향해 내닫던 백색 검이 턱! 멈춰 섰다.

렌의 손목을 붙든 건 제릭….

흔들리는 그의 눈빛이 렌을 홱 던져 버렸다. 하얀 망토를 휘날리며 렌은 저 멀리 숲 그늘까지 쓸려 나갔고 그 모습에 드래건 이이오블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가루모스 역시 내밀었던 손을 거두며 뒤로 물러났고, 드래건을 마른 나뭇가지처럼 던져 버리는 괴력에 악비온마저 조용히 숨을 죽였다.

그렇게 광장의 모든 시선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제나가 파르라니 고개를 들었다. 제릭은 그녀를 향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정말… 정말….”

제나는 얼굴이 급격히 붉어지며 눈물을 그렁거렸다. 결국, 이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세상 모두 앞에 발가벗겨지며 자신의 실체가 드러나는 이 순간이….

그때 밤하늘을 가로질러 별빛 하나가 날아왔다.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은 그 별빛은 곧 가루처럼 흩어지며 제릭의 대형 검으로 화했다.

슈흘라이의 저택에서 아르카가 공간의 틈으로 좇아 들어갈 때 라그헨이 휘감아 온 것이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 마침내 마주한 이 기막힌 악연을….’

낙하한 검은 제릭의 손에 척 잡혔다. 그와 동시에 가루모스가 두 손을 뻗어 광선을 쏘았다. 제릭은 검을 돌려 막아냈지만 강력한 폭음과 함께 허공 위를 밀려 나갔다.

그 모습에 악비온은 당장에라도 튀어 나갈 듯 지팡이를 부르쥐었고, 가루모스는 보란 듯이 비웃음을 떠올렸다.

“감히 짐승 따위가 이 가루모스의 연인을 해치겠다는 거냐? 어림없지. 그렇지 않니, 제나야?”

제릭은 안광을 이글거렸고 제나는 떨리는 눈빛을 들어 결국 제릭을 직시했다. 그리고 모든 걸 놓아 버리듯이 둘 사이의 악연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래요….”

바람에 오른팔이 허망하게 흔들렸다.

“제가… 그 오크였어요… 인간 여자가 되고 싶어서… 아이들을 그렇게 했어요… 당신의 그 아이도… 내가 쓰러뜨렸고… 샘물이 붉게 물드는 것도… 지켜봤어요….”

붉어진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냐면… 난 다시 태어나야 하니까… 새롭게 태어나야 하니까… 멸시하고… 짓밟아도 되는… 그런 괴물이 싫으니까… 그런 내가… 너무 싫으니까….”

제릭의 낯빛이 멍들었다.

가루모스는 안타까운 얼굴로 도리질을 했다.

“아니야, 제나 넌 아름다운 여인이야. 괴물이라니 당치도 않지. 괴물은 너의 팔을 앗아간 저 늑대 녀석이 괴물이지. 자, 이제 내가 그동안 미뤄 왔던 마지막 선물을 주도록 하마.”

가루모스는 현을 튕기듯 마법의 발했다. 그러자 제나의 오른편으로 금빛 연무가 몰려들었고 거짓말처럼 새로운 팔이 생겨났다.

제나는 갑자기 나타난 오른팔을 보며 멍한 표정이 되었다. 마치 그 자리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그걸 이제야 깨달은 것처럼 손가락은 아무렇지 않게 움직였다.

가루모스가 대신 기쁨을 표했다.

“그래, 이제야 진정 네가 원하던 모습이 됐구나. 저 괴물이 앗아갔던 소중한 너의 팔이 제자리로 돌아왔어. 자, 이제 나와 함께 그 손으로 이 세상을 움켜쥐자꾸나.”

악비온은 철천지원수가 눈앞에서 웃고 있음에도 쉽사리 불을 뿜지 못했다. 마치 둘의 악연을 대신하듯 또 다른 악연이 지금 달빛 아래 빛나고 있었기에….

제나는 오른손을 그러쥐며 아득해지는 허망함을 느꼈다. 어쩌면 이로서 모든 게 끝났다는 체념일까. 아니면 모든 게 이루어졌다는 행복일까….

제나는 텅 빈 표정으로 그 손을 내보였다. 그 옛날 제릭이 날려 버렸던 손이 이렇게 다시 생겼다고… 일리아와 에르카를 죽인 대가가 바로 이거라고….

제릭은 조금씩 숨이 가빠져 갔고 그런 둘 사이엔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악연이 깊은 심연처럼 어두웠다.

그때였다. 갑자기 제나의 오른손이 수많은 넝쿨 무더기로 화해 제릭을 향해 몰려갔다. 그리고 한 걸음 앞에 멈춰서더니 조그마한 꽃들을 피워 냈다.

꽃들은 얼키설키 엮어져 화관을 만들었고, 화관 앞엔 붉은 꽃망울이 그날의 기억처럼 맺혔다.

그날의 왕관처럼….

파도치는 제릭의 낯빛을 보며 제나는 아득해지는 표정으로 말했다.

“씌워 주세요. 당신의 곁은 이제 저의 자리니까. 일리아는 죽어 사라졌고… 에르카도… 다 죽어 버렸으니….”

제릭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대형 검이 번뜩임과 동시에 넝쿨들이 허공에 흩날렸다. 왕관은 입 벌린 광장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제나는 떨리는 입술에 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요….”

넝쿨이 다시 몰려와 꽃을 피웠다. 제릭은 그 화관을 와락 잘라 버렸다.

흩날리는 꽃들… 넝쿨들….

다시금 휘몰려 와 꽃을 피우는 그 모습에 제릭은 별안간 괴성을 내질렀다. 가슴을 찢는 그 소리에 꽃과 줄기들은 지푸라기처럼 흩어지고 제나는 휘청하고 말았다. 동시에 제릭의 몸에 벼락이 쳤다.

!!!

천공을 흔드는 그 벼락 줄기에 모두가 움찔해 버렸다.

제릭의 몸은 다시 활활 불타올랐고 이에 당황한 가루모스는 서둘러 제나를 옆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소리쳤다.

“어림없다! 평생을 지하 감옥에서 이날을 기다려온 내가 그저 손 놓고 있었을 줄 알았더냐! 나에게도 병력이 있고 동지가 있다!”

가루모스는 손을 뿌리쳐 마법을 발했다. 그러자 뒤편의 어두운 하늘에 틈이 쩍 벌어지면서 연보랏빛 운무가 흘러나왔다. 그 광경에 악비온과 크로닌이 한 모습으로 놀랐다.

“저 저건….”

“설마….”

입 벌린 연보랏빛 공간 속에서 무언가가 우글우글 밀려나오기 시작했고 그건 이계의 괴물들이었다. 인간을 닮기도 하고 짐승을 닮기도 한 오만 가지 괴물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뒤쪽에 진을 치니 가루모스는 자신감이 넘실거리는 얼굴로 손을 내보였다.

“아직 놀라기는 이르다.”

또 하늘을 향해 마법력을 날리자 천공에 검은 화염이 물결을 쳤다. 모두가 숨을 집어삼키고 바라보니 새로운 공간의 문이 열리며 그곳에서 진홍빛 무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악비온과 크로닌은 경악하고 말았다.

“마계….”

“세, 세상에….”

천공을 걸어 내려오는 진홍빛 무장은 그처럼 불타는 두 눈을 이글거렸고 가루모스는 그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어서 오십시오.”

그는 마계대장 펨탄이었다. 하지만 펨탄 자체가 이곳에 나타난 건 아니었다.

가루모스가 만든 갑주 인형에 펨탄의 진홍빛 영혼이 스며든 것이었는데, 악비온 쪽에서 보기엔 마계대장이 현실에 등장한 것과 같았으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저 미친….”

“정말 마계의 문을 열어 버렸나 봅니다.”

제릭은 가루모스 옆에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제나만 노려보고 있었다. 세상이 무너지든 뒤집히든 그건 아무 상관없었다. 오로지 그날의 오크가 지금 눈앞에 있다는… 일리아를 무참히 쓰러뜨린 그날의 오크가 제나라는… 믿기지 않는 현실만이 붉게 파도쳤다.

그때였다. 지원군을 돌아보며 희망차게 웃는 가루모스 뒤로 거대한 드래건 하나가 날개를 폈다. 입에 화염을 머금으며 이이오블은 으르렁거리듯 말을 뱉었다.

“그래… 나 역시 이런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다시 올 줄을 믿고 있었지!”

새로운 전쟁은 패배의 역사를 만회할 절호의 기회였다.

“네놈들 탓에 처량한 신세가 된 우리 종족들을 대신해 오늘 밤 내가 네놈들을 멸하리라!”

이이오블은 악비온을 향해 화염을 뿜었다. 날아오는 불덩이에 악비온은 방어막을 쳤고 평화의 탑 마법사들은 즉각 사방으로 산개했다.

기다렸다는 듯 가루모스도 명을 내렸다.

“모조리 쓸어버려라! 내 원한만큼 이 세상을 불태워 버려라!”

이계의 괴물들이 연보랏빛 화염을 뿜으며 몰려나왔다. 충돌은 삽시간에 시공을 물들였고 벼락과 폭음과 쏟아지는 빛줄기 사이로 벌써부터 비명 소리가 치솟았다.

그 아수라장을 유성처럼 뚫고 나르팟 렌이 제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새하얀 검을 내리치는 순간 또 다시 그 손목을 제릭이 붙잡았다.

턱….

제나의 목덜미까지 닥쳤던 백색 검이 진동했다. 렌이 쳐다보자 제릭은 그녀를 확 밀쳐 버렸다. 렌은 허공을 밀려 나가다 멈췄다.

“ …… .”

제나는 두려움에 고개를 수그렸다. 제릭은 그런 제나를 향해 혼돈과 울분이 일렁이는 눈으로 물었다.

“그랬는가….”

“ …… .”

“그랬었는가….”

믿을 수 없다는, 아니 믿고 싶지 않다는 그 심정이 파도쳤다.

그때 마법사들의 협공을 뚫고 가루모스가 제릭을 향해 광선을 쏘았다. 제릭은 검으로 튕겨 냈지만 뒤이어 달려든 바윗덩이 같은 이계의 괴물에 튕겨 나고 말았다.

제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제릭은 바위 괴물의 몸을 두 쪽으로 갈라 버린 후 다시 불같이 제나를 응시했다. 난장판으로 변한 세상 속에서 눈물을 떨어뜨리는 제나의 모습이 악몽만 같았다.

‘정말….’

이지러지는 가슴에 제릭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 틈을 타 드래건 이이오블이 제릭을 향해 불을 뿜었다. 화염에 파묻힌 제릭을 때마침 몰려온 이계의 괴물들이 협공을 했고 다시 그 위에 이이오블이 불덩이를 토하자 제릭은 세찬 두 빛깔의 불길 속에서 어지러이 검을 휘둘렀다.

그때였다. 제나가 번개같이 날아와 이이오블의 어깨에 거대한 창을 쑤셔 박았다. 이이오블은 괴성을 지르며 날개를 움츠렸고 그 모습에 가루모스가 놀라 소리쳤다.

“뭐 하는 짓이냐!”

이계의 괴물들은 돌아서서 제나를 공격했고 분노한 이이오블도 어깨의 창을 뽑아 던지고서 있는 힘껏 불을 뿜었다. 피할 수 있는데도 제나는 우두커니 미동도 안 했다. 결국, 화염에 휩싸여 광장 구석으로 처박혔다.

가루모스가 날아와 그 불길을 제압했다.

“왜 이러는 것이냐! 제나야, 왜!”

연기 속에 웅크린 채 제나는 불탄 얼굴을 들었다. 텅 빈 눈빛에 알 수 없는 웃음이 스쳤다.

“모르겠어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자 가루모스는 당황하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계의 괴물들과 인간 마법사들이 사방에서 뒤엉킨 밤하늘은 화려한 불꽃놀이판만 같았다.

그중에 마계대장 펨탄의 전투력이 강력했다. 렌과 악비온과 크로닌을 비롯한 수십여 마법사들이 협공을 하는데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감당하기 힘든 마력입니다! 아무래도 지원이 필요합니다!”

“이, 이런….”

악비온은 부러진 손목에 치유 마법을 불어넣으며 미간을 구겼다. 그때였다. 뒤편 밤하늘에 공간이동의 섬광이 비치더니 그 훤히 열린 출구에서 대신전의 신성마법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오오!”

악비온은 두 팔을 벌려 반겼고, 신성한 지원군을 이끌고 별바다를 날아온 이는 이제 갓 서른을 넘긴 대신전의 마법신관 랑칸콘루였다.

“이단자 가루모스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에 급히 달려왔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신의 가호가 악의 세력을 물리칠 것입니다.”

대신전에 감사를 표하느라 방심한 그 찰나 펨탄이 검을 뻗어 진홍빛 광선을 쏘았다. 악비온은 흠칫하며 피했지만 크로닌이 그 광선에 맞아 폭발하고 말았다.

크로닌은 가루모스 쪽으로 튕겨 날아갔고 이에 가루모스는 날아오르며 허공에서 붉은 창을 뽑아 들었다.

“죽어라, 이 원수의 무리!”

하지만 어느새 날아든 렌의 백색 검광이 그 창을 세 동강 냈다. 그리고 현란한 쾌검으로 몰아붙이니 당황한 가루모스는 쉼 없는 방어막을 형성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쾅쾅쾅쾅!

그 모습에 제나가 치솟았다. 제나의 오른팔이 수많은 촉수로 화해 렌을 공격했다. 렌은 검을 휘둘러 송곳 같은 촉수들을 잘랐지만 촉수들은 다시 채찍처럼 휘어 들어와 끝내 렌의 흉갑을 찢었다.

주춤하는 렌을 향해 가루모스가 마계의 검은 불꽃을 날렸다. 렌은 백색 검을 풍차 돌리듯 돌려 그 불꽃을 튕겨 냈다. 그리고 그때 하늘 위에서 쏟아져 내린 제릭이 가루모스를 향해 벼락을 내리꽂았다.

콰직!

가루모스는 괴성을 지르며 광장으로 처박혔다.

제릭은 홱 제나를 돌아보았다. 번뜩이는 그 눈빛에 제나는 얼음이 돼 버렸다. 시선을 떨어뜨리니 촉수들이 힘을 잃어 사라졌다. 제릭은 검을 들어 그런 제나를 겨눴다.

“정녕… 그 말이 사실인가….”

제나는 죄인처럼 눈을 들지도 못했다. 마침내 제릭이 분노하며 검을 하늘로 쳐들었다.

“그렇다면… 정녕 그렇다면… 우리야말로 악연 중의 악연이 아닌가!”

제나의 텅 빈 눈빛은 죽음을 받아들이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서….’

제릭은 안광을 이글거리며 치켜든 검에 벼락을 일으켰다. 그때 어디선가 진홍빛 검이 섬광처럼 날아들었다. 피하기엔 늦어 제릭은 그 검을 후려쳤다. 폭발과 함께 허공을 밀려나니 마계대장 펨탄이 튕겨 오른 그 진홍빛 검을 움켜쥐고서 다시 제릭을 향해 돌진했다.

제릭도 물러서지 않고 맞받았다.

콰광!

강렬한 빛줄기가 사방팔방으로 휘어 나가고 그 속에서 둘은 재차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데 제나가 번개처럼 날아와 펨탄의 뒤통수에 그 날렵한 검을 꽂아 버렸다. 안면으로 튀어나온 검신에 펨탄은 경직되었고 그 틈에 제릭은 혼신을 다한 벼락을 내리쳤다.

콰직!

상체가 쪼개지며 펨탄은 추락했다. 제나의 배신에 가루모스는 악을 질렀고 이계의 괴물들은 제릭과 제나를 향해 떼로 몰려들었다.

제릭은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제나를 돌아본 후 이계의 괴물들을 향해 벼락을 날렸다.

콰과광!

그 모습을 제나는 망연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마치 텅 빈 껍데기만 같았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우두커니 서 있는 제나를 향해 이이오블이 화염을 토했다. 제나는 불덩이가 되어 광장으로 추락했다. 한참을 굴러 나가다 마법을 발해 그 화염을 뿌리쳤다.

“하아….”

휘청거리듯 일어선 제나는 까닭 모를 쾌감을 느꼈다.

‘죽어 버려라….’

화답하듯 집채만 한 이계의 괴물이 달려들어 연보랏빛 화염을 토했다. 제나는 바라만 보았고 화염은 그녀를 뒤덮쳤다.

순간 렌이 날아와 백색 검광으로 괴물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그런 후 냉기를 뿜어 제나를 휩싼 연보랏빛 불길을 꺼 주었다. 쓰러진 제나는 더 이상 아름다운 인간 여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렌은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런다고 제릭이 용서해 줄 것 같은가?”

“ …… .”

렌은 제나를 외면하고서 전장으로 날아갔다.

제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녹아내리고 일그러진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 되돌릴 수 없는데… 용서해 줄 리도 없는데….’

눈물을 떨어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힘들게 주저앉아 한숨을 쉬니 온몸이 고통으로 지글지글 끓었다. 아수라장인 세상 위로 정신이 하얀 재처럼 나리는 듯했다.

‘어째서….’

제나는 뜨거운 눈물이 돋았다. 그토록 바라던 인간의 모습이 되었는데…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는데… 왜 차라리 죽고 싶은 걸까….

‘왜….’

갑자기 제릭이 미워졌다. 제릭만 아니었다면, 차라리 다시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행복을 꿈꿨을지도 몰랐다.

‘악연… 악연….’

그 말을 되뇌며 제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력을 발하니 녹아내린 얼굴과 오른 어깨가 재생되었다. 온몸이 악연의 불꽃으로 달아오르는 듯했다.

‘악연….’

온통 번쩍거리는 하늘을 보니 제릭과 가루모스가 충돌하고 있었다. 누가 원망이고 누가 애증인가….

‘모르겠다….’

제나는 한 줄기 유성이 되어 날아올랐다.

제릭은 가루모스를 향해 시퍼런 벼락을 뽑아내려다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제나를 보고 멈칫했다. 어찌하지도 못했다.

퍼헝!

제나는 튕겨 나갔고 제릭은 휘청하며 물러 나갔다. 가루모스는 그 틈에 재빨리 광선을 쏘았다. 제릭은 폭발을 뒤집어쓰며 재차 물러 나갔고 때마침 그의 등 뒤에서 솟아오른 이이오블은 시뻘건 화염을 토했다. 그리고 그런 드래건의 안면에 제나는 섬광을 꽂아 버렸다.

카아악!

이이오블을 괴성을 지르며 몸을 뒤챘고 가루모스는 분노하며 소리를 질렀다.

“제나아! 이 정신 나간 것! 원수와 사랑에 빠진 이 얼빠진 것! 그럴 거면 뭐 하러 인간 되었어! 괴물의 모습으로 괴물처럼 죽어 버리지!”

피아 구분을 하지 못하는 그녀에 모두가 혼란스러워했다.

제릭도 어지러이 뒤엉키는 심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하늘 위에서 눈 깜짝할 새에 급강하한 펨탄이 제릭을 향해 진홍빛 검을 내리쳤다.

콰직!

제릭은 그 위력에 밀려 추락했고, 반대로 솟아오른 이이오블은 인간화하여 검푸른 판금갑옷 무장으로 화했다. 그리고 제나를 향해 돌진해 검을 휘둘렀다.

“이 하찮은 것!”

제나의 왼팔이 허공을 날아갔다. 움츠리는 그녀에게 이번엔 펨탄이 손을 뻗어 마계의 불꽃을 날렸다. 제나는 시커먼 불덩이가 되어 떨어졌다.

검은 불덩이는 광장을 들이받고 굴러 나가 바위 무더기를 들이받고 멈춰 섰다. 그 어두운 불길 속에서 제나는 고통에 꿈틀거리면서도 마력을 발해 그 불꽃에 대항했다.

그러자 그 검은 불꽃이 서서히 잦아들어 곧 사라졌다. 하지만 부들부들 몸을 떠는 제나의 모습은 이미 녹아내리고 짓물러져 엉망이었다.

“아아….”

오른팔로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마법력을 발했지만 검은 불꽃에 녹아든 왼팔은 더 이상 재생이 되지 않았다. 파르라니 고개를 들자 하늘 위에서 가루모스가 소리쳤다.

“미친 거 아니냐! 대체 왜 이러는 것이냐! 대체 왜!”

제나는 녹아내리지 않은 오른 눈으로 눈물을 흘리며 한숨을 토했다.

‘그러게요… 제가 왜 이러는 걸까요… 대체 제가 왜 이러는 걸까요….’

가루모스는 또 분노하며 외쳤다.

“그토록 바라던 인간 여자가 되었잖느냐!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는데, 지금 너의 모습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다시 괴물처럼 변해 버리지 않았느냐!”

제나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 제가 원한 건 이게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돼 버렸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그 모습을 보는 제릭의 낯빛도 비감으로 얼룩졌다.

그때였다. 인간화한 이이오블이 쏜살같이 날아와 제나를 걷어차 버렸다. 제나는 깨어진 바위 속으로 천둥처럼 처박히고 제릭은 눈에서 불덩이를 토해 내며 이이오블을 향해 돌진했다.

콰라락!

두 무사의 검이 충돌하자 붉고 푸른 벼락 줄기가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이이오블이 하늘로 도망치자 제릭은 뒤쫓아 올라가 끝내 거대한 벼락을 작열시켰다.

콰광!

불덩이가 되어 추락하는 이이오블….

제릭은 씩씩거리며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심정에 괴성을 질러 댔다.

으아아!

그 뒤죽박죽인 세상엔 저마다 다른 빛줄기들이 눈보라처럼 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광장의 무너진 바위 속에선 왼팔이 사라진 제나가 비틀거리며 일어서고 있었다.

‘악연….’

오래전 따사로운 봄날이 생각났다. 그 언덕 위의 신전, 옹달샘 옆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던 소녀, 그리고 쓰러져 피로 붉어 가던 샘물은 이 비극이 시작….

기억 속의 그곳에 여전히 자신이 서 있었다.

‘그래….’

제나는 죽어야만 끝날 이 비극을 바라보았다. 마력을 끌어 올려 그 안에 신성마법의 치유력을 강제로 불어넣었다. 이질적인 혼합에 온몸이 뒤틀리는 고통에 휩싸였지만 녹아내린 얼굴이 재생이 되어 본래대로 돌아왔다.

“허억….”

뒤이어 오른팔에 마법력을 불어넣으니 팔이 길어져 빛나는 검이 되었다. 긴 한숨을 토하고 눈물 한 방울을 흘린 후 하늘로 날아올랐다. 제릭을 향해 유성처럼 돌진했다.

제릭은 그런 제나를 보았지만 막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운명의 순간일까. 한순간에 다가온 그녀의 검이 제릭의 가슴을 들이쳤다.

뿜어 나는 붉은 조각들….

제나의 검은 제릭의 가슴 속으로 계속 파고들며 핏빛을 토했다. 그렇게 날리는 붉은 빛깔만큼 서로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이내 둘은 마지막인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았다.

“ …… .”

“ …… .”

그런데 이제 보니 둘 사이로 뿜어 난 건 핏방울이 아니라 꽃잎이었다. 검으로 화한 제나의 오른팔이 제릭의 가슴 속으로 사라진 게 아니라 그 모든 게 가슴 위에 붉은 꽃잎으로 부서져 날린 것이었다.

허망한 그 붉은빛 속에서 제나는 눈물 가득 말했다.

“미안….”

“ …… .”

“미안….”

제릭은 입술이 흔들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분노도 원망도 모두 붉게 흩날리며 악연은 그렇게 둘 사이에 흩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엔 제나가 제릭의 가슴에 검을 꽂아 넣은 것처럼 보였으니, 악비온이 소리를 지르며 날아와 지팡이를 내리쳤다.

콰직!

불꽃을 날리며 제나는 광장으로 처박혔다. 그런 그녀 위로 랑칸콘루의 신성마법의 화염이 또 내리꽂혔다. 폭발하며 화염 덩이로 튀어 나가는 그녀를 제릭은 넋 없이 바라다보았다.

화려한 신성마법의 불길 속에서 제나는 꿈틀거렸지만 두 팔이 없는 그 모습을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가루모스가 힐끔 돌아봤지만 적들의 공격을 받아 내기도 벅찼다.

렌은 새하얀 검을 들어 냉기를 뿜어 줄까 하다가 말았다.

제나는 불길 속에 웅크린 채 마력을 긁어모았다. 그 힘에 불길이 조금씩 잦아들어 이내 몸 곳곳에 작은 불꽃으로만 남았다. 두 팔 없는 몸이 그제야 신음 소리를 흘렸다.

만신창이….

얼굴은 녹아내려 알아보기 힘들었고 오른 다리는 떨어질 듯 건들거리고 있었다. 제나는 마지막 마력을 모조리 쥐어짜 몸을 재생시켰다.

힘겹게 눈 하나가 떠지고 다리가 다시 붙었지만 신성마법과 마계의 검은 불꽃이 녹아든 두 팔은 재생시킬 힘이 없었다.

제나는 몸을 웅크렸다. 팔이 없으니 작은 바위에 머리를 대고 무릎을 꿇듯 몸을 일으켰다.

“하아….”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탄식하듯 숨을 뱉었다. 대신전의 불꽃에 살점은 녹아내리고 뭉개진 왼쪽 눈에선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끝이야….’

힘겨운 숨소리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지러운 폭발과 폭발… 그리고 불꽃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제릭의 모습도 불꽃이었다.

제나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다시 그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세상 밖의 오크로… 보잘것없는 존재로… 초라한 본래의 운명으로….

‘그래….’

돌고 돌아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었나 보았다. 절절한 고통이 영혼을 휩싸여 왔지만 탄식도 사치일 뿐… 몸뚱이를 바위에 기대듯 밀어붙여 가까스로 일어섰다.

‘가자….’

운명은 변함없이 흐를 뿐….

세상은 불꽃놀이로 아름답고….

절룩이는 걸음마다 녹아내린 불꽃이 떨어지고….

그렇게 제나는 천둥번개 치는 하늘을 뒤로하고 숲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제릭은 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멀어지는 그 모습에 검을 겨눌 수 없었다. 이름을 부를 수도 없었다. 그저 가슴에 묻은 붉은 꽃잎들이 비극의 바람을 탔다.

콰광!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마계대장 펨탄이 랑칸콘루와 악비온을 비롯한 인간족 마법사들의 협공에 밀리다 진홍빛 섬광을 작열시킨 것이었다.

그 뿜어 나는 화염 속에서 펨탄은 거대한 괴물로 변화했다.

랑칸콘루와 악비온은 다시 광선과 벼락을 뽑아 양쪽에서 펨탄을 지져 댔고, 렌은 화이트 드래건으로 화해 이이오블과 뒤엉켜 괴성을 질러 댔다.

세상은 그야말로 불꽃 난장판….

그 속에서 거대 괴물로 화한 펨탄이 인간 마법사들의 공격을 뿌리치고 날아오르다 문득 허공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제릭을 발견했다. 입을 쩍 벌렸다.

“피해!”

제릭은 돌아서며 반사적으로 검을 뻗었다. 그 팔을 펨탄이 덥석 물어 버렸다. 직후 펨탄은 입 안에 마계의 불꽃을 폭발시켰고 제릭은 자신의 대형 검에 벼락을 작열시켰다.

눈부신 섬광과 함께 펨탄의 얼굴이 터져 버렸다. 엄청난 화염이 사방으로 내뻗치고 펨탄은 얼굴이 갈가리 찢겨진 채 너부러졌다. 그를 향해 두 눈을 이글거리는 제릭은 오른팔과 검이 통째로 사라지고 없었다.

마계의 검은 불꽃이 그 팔의 단면을 녹이고 있음에 랑칸콘루가 급히 날아와 신성마법의 불꽃으로 훔쳐 냈다.

“공격하라!”

크로닌의 외침에 평화의 탑 마법사들이 펨탄을 향해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다.

악비온은 다시 그 위로 거대한 빛줄기를 내리꽂았고 펨탄은 재생할 시간도 없이 하염없이 터져 나갔다.

가루모스와 이이오블이 다급히 날아왔으나 가루모스는 악비온의 천둥소리에 고꾸라지고, 이이오블은 랑칸콘루와 신성마법사들의 협공에 불덩이가 되어 나가떨어졌다.

백색 드래건으로 화했던 렌은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화려한 신성마법의 불길 속에서 몸부림치는 이이오블을 향해 냉기를 뿜어 줬다. 랑칸콘루는 더 이상 이이오블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사이 펨탄은 불붙은 넝마가 되어 쩍 갈라진 광장의 어둠 속에서 추락과 상승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 제릭이 왼손을 하늘로 쳐들었다. 천공에 짙푸른 벼락들이 몰려와 그 손 위로 모여들고 그곳에 랑칸콘루가 신성마법의 불꽃을 더했다. 활활 타오르는 그 벼락을 제릭은 펨탄을 향해 내리꽂았다.

찬란함… 태양 같은 빛줄기와 함께 펨탄은 두 쪽이 나고 다시 네 쪽으로 터져 나며 진홍빛 마력이 눈처럼 흩날렸다.

제릭은 안광을 번뜩이며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인 가루모스를 찾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악비온과 평화의 탑 마법사들의 무수한 광선에 한 마리 불꽃 벌레가 되어 도망 다니고 있었다. 마치 수십 년 전 전투에서 패하고 도주하던 그날의 광경처럼….

“가루모스, 네 이놈!”

악비온이 원한 가득한 화염검을 내리꽂았다.

그렇게 전세가 급속히 기울었다. 산개한 채 연보랏빛 불을 뿜던 이계의 괴물들은 시시각각 당황하며 퇴각을 위해 무리를 지었고, 이이오블은 날개가 다 타 버린 모습으로 휘청거리더니 곧 렌을 한 차례 흘겨본 후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그 순간 전투가 끝을 달렸다.

이계의 괴물들은 아우성치며 공간의 문을 열고 도주하기 시작했으니 인간족 마법사들은 고이 돌려보낼 수 없다는 듯 비명의 끝장을 연출했다.

갈기갈기 찢어진 괴수의 모습으로 몸부림치던 펨탄 역시 더 이상 그 안에 깃든 영혼이 버티지 못하고서 껍질을 내버렸다. 다시 돌아오겠다는 분노 어린 말을 남기며 마계의 창문을 닫으니 펨탄의 진홍빛 영혼이 사라진 괴수는 검게 탄 나무처럼 허물어졌다.

승리의 함성이 천공을 뒤덮었다.

가루모스는 만신창이가 된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그 주위로 채 도망가지 못한 이계의 괴물들이 모여 들었다.

모든 게 종말을 그리고 있었다.

나르팟 렌은 제릭을 돌아보았다. 커다란 검을 휘두르던 오른팔이 사라진 제릭은 이제 제나가 사라진 어두운 숲을 응시하고 있었다.

두 팔 없는 몸이 달빛 내린 숲길을 힘겹게 걷고 있었다.

아련히 들려오는 전장의 소리들이 망각의 속삭임만 같았다.

‘꿈….’

흐릿한 달빛 사이로 지난 기억들이 꿈처럼 흘러갔다. 그리고 잠시 후 폐허로 남은 오래된 궁전 앞에 걸음을 멈추니 몸에서 흘러내린 신성마법의 불꽃들이 걸어온 어둠 속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꿈을 꿨나 보다….’

암컷 오크는 매일 밤 이 궁전에서 아름다운 인간 여자가 되길 희망했는데… 그리고 결국 되었는데… 이제 두 팔을 잃고 모든 걸 다 잃고 초라한 몰골로 돌아온 지금 그 모든 시간들이 다 꿈만 같았다.

‘그래….’

제나는 긴 한숨을 풀어냈다.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고 비틀거리며 궁전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 시각, 게라크온 광장에선 이제 역사에 기록될 전투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이계로 도망가지 못하고 잡혀 버린 패잔병들은 마법의 밧줄에 묶이고, 부상이 심한 괴물들과 시신들은 신성마법의 불꽃 속으로 화려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반면 인간족 마법사들의 시신은 한쪽에 반듯이 정리되고 있었다.

그 광장의 가 쪽 높은 바위기둥 위에선 렌이 저 멀리 어두운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그맣게 솟아 있는 구조물은 달빛 아래 은은했고 제릭은 마지막 악연을 끝내려 지금 그곳으로 향하고 있을 터였다.

절반 가까이 무너져 내린 궁전은 하늘이 훤히 내다보였다.

아련히 달빛 내린 왕좌엔 두 팔 없는 제나가 앉아 있었고, 그녀의 몸에 피어 있던 불꽃들은 이제 깜빡거리며 꺼져 가고 있었다.

‘꾸지 말았어야 할 꿈이었나 보다….’

괴물이 아닌 인간이 되고팠던 꿈도…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사람들 속에서 살고팠던 꿈도… 여왕이 되어 꿈만 같은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다 잘못된 꿈이었나 봐….’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시간들이 달빛 속을 흘러갔다. 그리고 제자리로 돌아와 꿈에서 깨어난 지금, 자신의 모습이 아무도 없는 이 폐허만 같았다.

제릭은 어두운 숲길을 걷고 있었다. 시선은 어둠 속에 발자국처럼 이어져 있는 불꽃들을 따라가고 있었고, 걸음마다 제릭의 눈빛도 그 불꽃처럼 흔들렸다.

그리고 이 불꽃의 끝에서 마주하게 될… 그 마지막 모습에… 어떤 표정을 지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제릭은 이 비극의 끝에서 길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 시각 게라크온 광장에선 악비온이 신성마법의 화염검을 가루모스의 가슴에 꽂아 넣고 있었다.

아아악!

밤하늘로 솟는 비명과 함께 가루모스는 몸부림을 쳤고 악비온은 긴 세월 원한의 불덩이처럼 끌어안고 있던 분노를 뱉었다.

“너는 악마가 돼 버렸다!”

이글거리는 화염검에 괴로워하면서도 가루모스는 비웃음을 흘렸다.

“흐흐… 악마… 악마아….”

“그렇다! 너는 악마가 돼 버렸어!”

“하하… 내가… 내가 만든 마법을… 지금도 대신전에서 쓰고 있는데… 대신전도 악인가? 흐흐… 아니야. 난 그저 패했을 뿐이야. 악이 아니야. 난 그저 패했을 뿐이라고!”

가루모스가 불을 뿜듯 안광을 토하는 그때….

제릭은 폐허만 같은 숲속의 궁전 앞에서 두 눈을 빛내고 있었다. 녹아내린 불꽃들이 어서 오라며 그 폐허의 어둠 속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제릭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때 화려한 꿈을 꿨을 궁전은 적막했다. 세월의 먼지가 쌓인 계단엔 누군가의 발자국이 마지막 불꽃을 남겨 놓았다.

그 계단을 올라, 다시 휘어 돌아가는 계단에 올라서자 환한 달빛 아래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저만치 단 위의 왕좌에 누군가가 홀로 앉아 있었다.

“ …… .”

타다 만 나무인형처럼, 두 팔이 잃은 제나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선 불꽃이 사라진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을 꿨어….”

“ …… .”

“인간이 되고 싶었어….”

“ …… .”

“여왕이 되고 싶었는데… 당신이 그 꿈을 산산이 부숴 버렸어….”

제릭은 손끝이 떨렸다.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눈빛이 흔들렸다.

일그러진 제나의 눈에서 마지막 마법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건 스스로 택한 죽음….

“이젠… 슬프지 않을… 꿈을… 꿀래….”

제나의 몸이 빛이 나며 붉어졌다. 얼굴과 눈물과 머리칼까지 모든 게 붉어지며 제나는 마지막 시선을 허공에 띄웠다. 그렇게 붉은 석상이 되었다.

“ …… .”

“ …… .”

달빛이 둘 사이에 강물처럼 흘렀다.

악비온은 가루모스를 향해 뜨거운 눈물을 터트렸다.

“사죄를 하라! 스승님께! 그리고 나에게! 또한 비통하게 죽어 간 그 모든 이들이게 사죄하라!”

가루모스는 고통이 타오르는 눈빛으로 말했다.

“사죄는… 필요 없어… 그저 패했을 뿐… 그저 네가… 이겼을 뿐….”

“기어이….”

“흐흐… 혼자 죽을 순… 없지… 나의 아내… 나의 사랑을… 데려가야지….”

말을 마치자 가루모스의 몸에 파도치듯 불이 붙었다. 세찬 불길이 그를 집어삼켰고 지난 세월도 삼켰다.

석상이 된 제나가 별안간 화염에 휩싸였다.

제릭은 불타오르는 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다보았다. 달빛이 불길에 흩날리고 제릭은 화염 속 그 누군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꿈에서 깨지 마….”

“ …… .”

“영원히….”

“ …… .”

“제나….”

가슴에 묻은 마지막 꽃잎이 바람을 탔다.

게라크온 광장의 모두가 화염 덩이로 변한 가루모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가슴에 검 한 자루가 꽂혀 있는 모습이었고 이제 그 모든 악연을 불태우고서 한 맺힌 세월의 최후를 맞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어두운 숲 위로 불길이 솟았다.

무얼 바랐는지, 무얼 꿈꿨는지, 길고 길었던 시간이 그렇게 찰나의 불꽃이 되어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잠시 후, 무너져 내린 가루모스의 모습 위로 영롱한 별빛들이 날아올랐다. 그건 가슴의 고통을 지우기 위해 오래전부터 모아 온 순수한 영혼들….

몇몇은 돌아갈 자리가 사라져 별 하늘로 멀어져 가고….

몇몇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옛 시간을 향해 날아갔다.

바람에 흩날리는 불꽃들….

달빛 아래 숲의 궁전 위로 마지막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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