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아침 해가 도시 너머 멀리 동산을 넘어왔다.
그 빛은 축제의 감흥이 여전한 도시를 따듯한 빛깔로 물들였고 그에 반응하듯 집집마다의 창문이 반짝반짝 열렸다.
여관의 창문은 뒤뜰로 나 있었고, 그곳엔 키 큰 나무 여러 그루가 풍성한 푸른 잎을 숲처럼 두르고 있었다.
햇살 묻은 그 나무들을 보며 창가에 선 남녀는 미소 지었다. 흐트러진 잠옷 차림으로 그만큼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제나는 제릭을 바라보았다.
상의를 입지 않은 제릭의 조각 같은 몸매와 그 살 내음이 어젯밤의 하염없던 희열과 혼돈의 감정들을 되살아나게 했다.
제나의 눈웃음에 제릭은 빙그레 웃으며 그 볼을 만졌다. 다시금 서로를 감싸는 남녀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사랑스러운 연인의 모습….
그러나 뒤뜰의 나무속에선 어젯밤의 하늘빛 새가 하얗게 탈색이 된 채 흔들거리고 있었다. 히죽 웃는 것도 같은 그 모습이 이상했다.
그때 창문이 닫혔다. 닫히는 그 소리가 정신을 깨웠을까. 작은 새는 머리를 이리저리 뒤틀고 처박더니 나무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바람이 부드럽게 받아 줬지만 작은 새는 풀밭을 구르며 날개를 파득거렸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 모습을 보며 저만치 여인숙의 귀퉁이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제릭 일행은 여관의 1층 식당에 모여 앉아 풍미 좋은 아침을 먹었다.
우락부락한 다른 여행자들이 식사를 하며 제나에게 추파를 보내왔지만 여러 해 산적질로 단련된 벤차드와 데렌의 날카로운 눈빛 앞에 모두 그 마음을 접었다.
제릭은 한 팔로 식사를 하는 제나에게 맛난 음식들을 골라 건네줬다.
“이거 먹어 봐요. 맛있어요.”
제나는 미소 지었지만 까닭 모르게 뱃속이 떨려 왔다. 어젯밤엔 몰랐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또렷했고, 식당의 창문으로 비춰 오는 아침 햇살이 지나치게 밝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그렇게 아침 식사를 한 후 제릭 일행은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제릭은 하루 정도 더 머물고 싶었지만 웬일인지 제나가 떠나기를 바랐다.
“숲이 좋아요.”
어제는 무언가에 쫓기듯 또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제릭과 함께 사람들이 많은 도시로 오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 사람들의 시선을 벗어나 조용한 숲으로 숨고 싶었다.
제릭의 지시에 벤차드와 데렌은 말을 구입했고 그렇게 말 네 필은 도시를 떠나 평화로운 걸음으로 언덕을 넘고 들길을 나아갔다.
데렌은 벤차드에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제나와 제릭은 이제 막 사랑하게 된 사이 같다고, 다정한 이들의 충성스러운 개가 되어 잃어버린 영지를 꼭 되찾자고, 둘은 희망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제나가 박차를 가했다.
“우리 조금 달려 봐요.”
제나가 힘차게 말을 몰자 제릭도 박차를 가했고 벤차드와 데렌 역시 신나게 그 뒤를 쫓았다.
바람처럼 멀어지는 그 뒤로 오늘 아침 고양이에게 날개를 물어뜯긴 새 한 마리가 하얀 날갯짓으로 쫓아가고 있었다.
정오를 조금 지난 무렵, 제릭 일행은 약수터가 있는 숲속에서 여인숙이 싸 준 푸짐한 음식으로 상을 차렸다.
화기애애한 식사를 할 때 나무 위에서 하얀 새 한 마리가 시끄럽게 울자 벤차드가 돌멩이를 들었지만 제나가 말려 던지지 못했다.
점심 후 차를 마실 때 데렌은 행선지를 물었고 제릭은 발카람이라 답했다.
“발카람이요?”
벤차드와 데렌의 표정이 샐쭉해졌다. 괴물들만 모여 있는 그곳에 왜 가느냐고 벤차드는 조심히 물었고 제릭은 찾는 게 있다고 말했다.
데렌이 그게 무엇이냐고 묻자 제릭은 비릿한 미소만 지었다.
‘오크….’
제릭이 일리아에게 왕관을 바친 후, 곧장 벨차라키로 돌아가지 않은 건 그 날의 오크를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지만 사람을 잡아먹기 위해서가 아닌 영혼을 내놓으라고 한 건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터였다.
그 까닭을 알기 위해선 대부분의 오크들이 모여 살고 있는 발카람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고, 상황에 따라선 울분 어린 벼락을 쏟아 낼 작정도 하고 있었다.
대답 없는 제릭에 벤차드와 데렌은 뭔가 놀라운 비밀이나 보물을 찾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제나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하늘 저편의 흰 구름으로 시선을 보냈다.
“ …… .”
네 사람은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가는 늦은 오후였다.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넘어 다시 평평해지는 들길을 다각다각 나아가는 그때, 길 오른편의 두두룩한 숲에서 말 세 필과 그 위에 앉아 있는 무사 세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들길로 또각또각 걸어 나와 길을 막아섰고, 잠시 후 열 보 정도 사이를 두고 마주 선 양측은 호기심 어린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데렌이 앞으로 나서며 목소리를 키웠다.
“길을 비키시오! 위대한 우리 기사님의 앞길을 가로막다니 무례가 지나치오!”
이에 마주 선 무사 중에 사각턱과 듬직한 덩치를 가진 남자가 서글서글하니 답했다.
“그렇게 경계하지 마시오. 나는 이 슈흘라이 영지의 주인인 슈흘라이 듀우란이라 하오. 다시 말해 여긴 내 땅이니 내가 어디에 서 있든 그건 그다지 무례라 할 건 없소. 오히려 내 땅에 허락 없이 들어온 그대들이 내게 먼저 양해를 구해야 할 처지이니까. 그렇지 않소?”
상대가 슈흘라이 가문의 젊은 영주 듀우란임으로 드러나자 제릭을 제외한 셋은 익히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낭만과 모험에 미쳐 있는 허풍선이 영웅.’
제나는 그런 듀우란을 놔두고 그의 좌우에 있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남녀를 살폈다.
매부리코가 눈에 띄고 등에 긴 창을 메고 있는 남자는 덩치로 보아 무사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눈빛만큼은 매서웠고, 머리칼이 순백인 여자는 그처럼 하얀 가죽 갑옷 차림에 그만큼 새하얀 검을 차고 있었는데 왠지 모를 냉한 기운이 주위를 감돌고 있었다.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군.’
제나와 제릭이 같은 생각을 하는 사이 벤차드가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듀우란을 향해 공경스러운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이름 높으신 영주님께 뒤늦은 양해를 구합니다. 저희는 그저 세상을 여행하는 나그네입니다. 혹시 가시는 길에 무례가 되었다면 길을 비키겠습니다.”
일단 그렇게 말은 했지만 충돌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듀우란의 영웅과 모험에 대한 과잉 집착은 이곳 레에스랑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소문이 퍼져 있을 만큼 유명한 웃음거리였다.
그런 듀우란이 말을 몰아 부하들과 함께 길을 막았으니 한 번 부딪쳐 보겠다는 심산이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듀우란은 두 손을 내보이며 유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례라니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하지만 보아하니 그쪽도 나름 무공을 갖추고 계신 듯하니 혹 저의 대결 제안을 모른 체하고 그냥 지나간다면 그때는 무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제릭이 약간 멀뚱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자 듀우란은 말을 보탰다.
“이곳 슈흘라이에 들어왔으면 나 듀우란의 위명에 대해 모를 리 없을 텐데.”
제릭이 무슨 소리냐는 듯 돌아보자 제나가 말을 옆으로 붙이고 상대에 대한 짧은 설명을 했다. 제릭은 곧 피식 웃었고 그 웃음은 화살처럼 날아가 듀우란의 만면을 더욱 활기차게 했다.
‘그래, 검이 아주 멋들어지게 크구나. 후후, 흥분이 화염처럼 몸을 감싸는 기분인 걸?’
무료한 일상을 들썩이게 한 설렘은 사실 어제부터였다. 좌우 옆에 있는 독특한 무사들이 대결을 청해 와 반가이 맞아들였고, 창을 무기로 사용하는 매부리코 무사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자신이 멋진 검술로 승리를 거뒀더랬다.
하지만 새하얀 검이 인상적인 여자 무사에게는 치열한 공방 끝에 검을 손에서 떨어뜨렸으니 간만에 맛본 상쾌한 패배와 낭만적인 결투에 손끝부터 발끝까지 들떠 있는 중이었다.
“나를 이기면 슈흘라이성에서 만찬을 베풀 것이고, 지더라도 그 실력에 따라 호의를 베풀어 줄 것이니 두려워하거나 하진 마시오.”
“재미있군.”
제릭의 반응이었다. 제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잠시 머릿속이 분주했지만 아무래도 피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듀우란은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는데 좌우의 부하들이 묘한 분위기를 드리우고 있구나.’
양측은 불어 가는 바람에 머리칼과 말갈기를 날리며 잠시 서로를 살폈다. 그리고 그다지 대화가 필요치 않은 상황임을 이심전심으로 느끼고 말에서 내렸다.
제릭 쪽에선 데렌이 말들을 모아 숲 쪽으로 데려갔고, 듀우란 쪽에선 창술 고수로 화한 평화의 탑 최고위급 마법사 크로닌이 평소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수고를 했다.
말 세 필을 나무에 묶어 두고 크로닌이 제 자리로 돌아오자 들길 위의 대결 준비가 완료되었다.
“자, 그럼 나의 첫 상대는 누가 되시려나?”
듀우란이 즐거운 놀이마당에 나서는 것처럼 검을 뽑아 들자 벤차드가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섰다.
한때 슈흘라이 가문 따윈 손도 내밀지 못할 만큼 강력하고 부유했던 보르헹 가문의 영주였던지라 호승심이 일었다. 더해서 제릭에게 잘 보여야 하는 명분도 있었다.
“내가 상대해 주겠소.”
“이름은?”
“오래전엔 내가 그대보다 가진 땅이 더 넓었다는 것만 말해 주지.”
벤차드의 당당한 목소리에 듀우란은 그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웠다. 자신보다 가진 땅이 넓었다는 건 최소한 영주였다는 말이었다.
‘허풍이라 해도 그 기세가 사뭇 장하군.’
둘은 들길 위에서 검 한 자루를 들고 서로를 응시했다. 충돌은 마주 선 잠깐의 침묵 끝에 시작되었고, 결과는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던 분위기와 달리 너무도 쉽게 드러나고 말았다. 듀우란의 힘찬 위력에 벤차드가 검을 놓쳐 버린 것이었다.
캉!
쇳소리를 내며 길가로 날아가 버린, 오래전 어느 귀족에게서 빼앗은 명검은 현재의 신세를 말해 주듯 말똥을 베었다.
“이런 제길….”
“너무 쉽군.”
살짝 긴장했던 듀우란은 빙긋 웃으며 자신의 검을 붕붕 돌렸다. 얼굴이 붉어진 벤차드는 말똥이 묻은 명검을 풀잎에 대충 닦은 후 다시 소리를 지르며 듀우란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나 어릴 적부터 영웅적인 모험담의 주인공이 되고팠던 듀우란은 서른 중반에 이른 지금 자연스레 상당한 검술 실력을 갖고 있었다.
슛!
벤차드가 바람처럼 듀우란을 베고 지나갔다고 생각한 순간, 그러나 대자로 자빠진 건 벤차드였고 잘려 하늘에 흩어진 건 그의 머리칼이었다.
제나와 제릭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반면 자신이 모시던 이의 패배에 데렌은 즉각 검을 꼬나 쥐고서 땅을 박찼다.
“이야아!”
일격필살, 동귀어진, 그런 품새로 돌진한 데렌이었지만 결과는 어른 앞의 어린아이였다. 탱강탱강 듀우란과 몇 차례 검을 섞더니 이내 가죽 갑옷의 여러 군데를 찔리고 또 얻어맞으면서 뒤로 벌러덩 넘어가고 말았다.
“아흑….”
“이거야 원.”
듀우란은 난처한 웃음으로 주위를 돌아봤고, 초라하게 일어나 함께 물러나는 얼마 전 산적 두목과 부두목의 모습에 제나는 안쓰러운 미소를 지었다.
크로닌과 나르팟 렌은 다음 차례일 마법기사를 응시했다. 과연 이계의 화염과 마계의 검은 불꽃이 이 자리에서도 나타나게 될지 긴장감이 피어났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듀우란만 연승을 거둔 뿌듯함으로 검을 붕붕 돌리며 다음 도전자를 기다렸다.
“자, 이번엔 그 커다란 검을 가진 젊은이인가? 솔직히 실망이야. 처음 분위기는 썩 그럴 듯해서 난 치열한 공방의 즐거움을 느낄 줄 알았는데 말이지. 사실 한 수 가르쳐 주는 건 별 재미가 없어. 비등비등하거나 아니면 내가 조금 딸려야 맛이 나거든. 오래전 내 나이 스물 때 새끼 드래건 하나를 목숨을 건 사투 끝에 죽인 적이 있는데, 그때의 희열감을 내가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어. 결투란 그런 맛에 하는 거야. 하하하.”
드래건의 유아체를 죽여 봤다는 말에 크로닌은 애매한 눈빛으로 렌을 보았다. 렌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마찬가지인 제나와 달리 제릭만이 뜻밖이라는 낯으로 반가움을 표했다.
“그래? 그렇다면 또 내가 가만있을 수 없지.”
하지만 제릭보다 먼저 제나가 날렵하게 생긴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제가 상대해 드리죠. 널리 알려진 허풍선이 영주님.”
사방 하늘 아래서 악비온의 마법사들이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제릭을 폭발시키는 건 아무래도 불안했다.
더해서 창을 들고 있는 매부리코 무사와 온통 새하얀 여자가 자꾸 신경을 건드렸다. 제나는 서둘러 이 결투의 장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덤비시죠.”
“후후, 아름다운 아가씨께서 먼저 나서겠다니 이거 영광이로군. 좋아. 허풍선이란 말은 살짝 기분이 나쁘긴 하지만, 예쁘니까 내가 살살 어루만져 주도록 하지. 자자, 어서 들어와 보시게. 내가 알고 보면 또 부드러운 남자야.”
듀우란은 씩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제릭은 제나가 조금 걱정이 됐고, 크로닌과 렌은 아름다운 외모에 팔이 하나 없는 여인이 나서도록 내버려 두는 제릭을 살짝 의아하게 바라봤다.
당연히 그 누구도 제나가 번개처럼 다가가 팔꿈치로 듀우란의 코를 강타하리라는 건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퍽!
허공으로 떠오르는 그 몸체를 향해 제나는 사선으로 검을 그었다. 크로닌은 입을 벌렸고 렌은 눈을 반짝 떴고 제릭은 주춤 손을 내밀었다.
웬만한 공격엔 끄떡도 않을 최고급 가죽 갑옷이 쩍 벌어졌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너부러지는 그 듬직한 몸뚱이에선 코피가 뿜어 났다.
“자….”
늦은 오후의 햇살이 날렵한 검신에 빛났고 제나는 그 끝으로 듀우란의 목에 겨눴다.
“재미 있으셨나요, 허풍선이 영주님? 영웅적인 모험을 하려면 이 정도는 예상을 했겠죠?”
“하하….”
듀우란은 황황히 웃으며 코피를 쏟았으니 뭔가 알 수 없는 짜릿함을 동반한 상쾌한 얻어터짐이었다.
“제가 멋지게 졌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아가씨.”
그동안 상대했던 강력한 무사들은 영주의 체면을 생각해 적당한 겨루다 말았고, 하수들은 듀우란에게 신나게 얻어맞는 대신 만찬을 즐겼으니 자칭 낭만 영웅이 쌍코피가 터지며 패배를 인정한 건 실상 오늘이 처음이었다.
“내가 상대해 주지.”
나르팟 렌이 허리에 찬 새하얀 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나섰다. 자신의 차례인 줄 알고 창을 움키던 크로닌은 주춤했고 그 사이 렌과 제나의 검은 이미 충돌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렌의 백색 검광 앞에 금세 제압을 당할 것 같던 제나의 검은 그러나 예상과 달리 충돌의 힘을 빗겨 치거나 흘려보내며 오히려 섬세한 잔상으로 렌의 눈과 목, 가슴을 위협했다.
세차게 튕겨나는 두 검은 불꽃이 아닌 얼음 조각을 날렸고 이는 화이트 드래건의 검이 냉기를 뿜는 까닭이었다.
그 뜻밖의 검광에 제나는 마법력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속으로 당황했다. 반면 렌은 제나의 날렵한 검신이 내보이는 방어력에 놀라움을 느끼며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다.
둘의 검광은 듀우란의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쾌검이었고, 특히 제나는 크로닌과 제릭이 서로 뜻밖이라는 눈빛을 주고받을 만큼 외모와는 전혀 다른 검술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쾅!
나르팟 렌의 일격을 제대로 비껴 치지 못한 제나의 검이 하늘을 날았다. 요정의 검처럼 날렵한 그 검은 허공을 빙글빙글 날아 길 옆 풀밭에 수직으로 꽂혔다.
동시에 렌의 새하얀 검이 제나 앞에서 한 차례 바람을 일으켰다. 나울거리던 텅 빈 오른팔이 소리 없이 잘려 둘 사이로 떨어졌다. 렌은 검을 들어 제나의 턱 앞에 겨누며 결투의 승자를 알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렌의 검 끝이 제나의 턱을 살며시 찔러 들어갔다.
어찌 됐든 같은 편인 듀우란의 코피 터짐에 대한 복수였고, 현재 관심의 초점인 제릭에 대한 도발이기도 했다.
찔림과 동시에 고개를 젖히며 물러섰지만 제나는 턱 끝에서 퍼지는 작은 통증이 피를 불러 버렸다는 걸 직감했다. 서둘러 손등으로 턱을 막았다.
그러나 바늘처럼 살짝 찌르고 빠져나간 하얀 검 끝엔 그 피의 흔적이 남았다. 턱에 손을 얹은 제나의 얼굴 위로 붉은 기운이 살짝 지났다.
‘당황하지 마.’
이곳엔 오크의 피 냄새를 맡을 요정 따윈 없었다. 서둘러 표정을 다독이는 제나를 떠나 이제 렌의 검은 제릭을 겨눴다. 물론 바람을 타고 전해 오는 야릇한 오크의 피 냄새를 감지하고 렌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지만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제릭은 턱을 찔리며 물러나는 제나의 모습에 가슴이 울렁거리는 걸 느꼈다. 즉시 등 뒤의 탈착 장치에서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듀우란은 코피를 훔치며 흥미진진한 웃음을 금치 못했고 크로닌은 드디어 마법 기사의 실체를 들여다볼 상황에 긴장된 숨을 죽였다.
‘과연 어느 정도인지… 고위급 이상의 마법을 쓰는 기사라는데….’
제릭은 나르팟 렌을 향해 묵직한 눈빛을 발했다.
“마음의 준비는 됐는가?”
제릭의 도발적인 말에 렌은 선명한 미소를 지었다. 계획한 대로 일단 져 줘야겠지만 왠지 무릎 꿇리고 싶은 당당한 남자였다. 그때 제릭이 검을 치켜들자 그 커다란 검에 벼락이 쳤다.
파직!
전격 마법이 특기인 크로닌은 눈을 빛냈고 렌은 백색 검을 부여잡고서 마법 기사의 이채로운 모습을 반겼다.
“덤벼라.”
그 말에 대한 후회를 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제릭이 땅을 박차고 날아오는 것까지는 어느 정도 예상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두 검이 충돌하는 순간 터져 나온 천둥소리와 함께 나르팟 렌이 마치 질풍을 맞은 헝겊처럼 들길 저 멀리로 굴러가 버릴 줄은 아무도 상상치 못했다.
더욱이 그녀가 인간의 모습으로 화한 거대한 화이트 드래건임을 알고 있는 크로닌은 입을 떠억 벌린 채 들고 있던 창을 떨어뜨렸으니, 렌의 모습은 들길에 너부러진 하얀 천 뭉치만 같았다.
‘허억….’
소름이 끼치는 것조차 부족해 크로닌은 비틀거렸고, 듀우란은 주루룩 흘러내리는 코피를 막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꺽…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제나 역시 제릭이 제압하리라 예상은 했지만, 단 일합 만에 그것도 상상을 초월하는 모습으로 결판이 나 버리자 턱에 난 상처를 막는 것도 잊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저 벤차드와 데렌만이 당연하다는 듯 두 손을 쳐들고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
그리고 이제야 먼지투성이로 고개를 든 렌은 오롯이 넋 나간 얼굴로 제릭을 보았다.
‘이게….’
제릭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아직 실 벼락이 감돌고 있는 대형 검을 등 뒤의 탈착 장치에 철컥 꽂았다.
경이로운 모습….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전쟁이 일상화된 벨차라키의 드래건들은 생존을 위한 전투력이 최고조에 올라 있었고, 그중에서도 으뜸이었던 이이제케의 마법력이 살아 숨 쉬는 제릭에게 렌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알 길 없는 렌은 일어서다 충격에 휘청했고, 크로닌은 자신의 주특기인 전격 마법으로 충돌해 보겠다는 심산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는지 이제야 심장이 어디론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비상사태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마법사들이 황황한 얼굴로 평화의 탑에 급보를 날릴 터였다.
제릭은 제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괜찮아요?”
제나는 떨림을 감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턱에 깨알만 하게 찍힌 핏자국은 이미 피부가 닫혀 말라 가고 있었다. 이 미미한 피 냄새를 누가 맡았을 리 없다고 제나는 조그맣게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제릭은 잠시 불길이 일렁인 심정을 한숨처럼 털어 내고 저 멀리 들길 위에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는 새하얀 여자 무사를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선 벼락처럼 날아가 한 번 더 일격을 가하고 싶지만 괜한 마법력이 폭발하면 저번처럼 마법사들이 떼로 몰려와 귀찮아질지 몰랐다.
“오오, 위대하신 기사님! 너무도, 너무나도 반갑습니다!”
흘러내리는 코피를 붉은 수염처럼 드리운 채 슈흘라이의 영주 듀우란이 달려왔다. 그리고 주춤하는 제릭의 손을 코피 묻은 두 손으로 부여잡으며 그 끓어오르는 열광을 만끽했다.
“진정 놀랍습니다! 정말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그저 제가 너무나도 존경해 마지않습니다, 기사니임!”
한 번도 본 적 없는 엄청난 무력 앞에 듀우란은 신명난 어린아이처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위대하신 기사님, 이런 영광스러운 순간을 저는 진정 태어날 때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문의 영광입니다. 만찬을 열겠습니다. 오늘의 이 축복을 위해 이 세상 가장 화려한 만찬을 열겠습니다. 오오, 이렇게 꿈만 같은 만남이 있을 줄이야.”
호들갑을 떠는 듀우란에게 벤차드와 데렌은 먼저 무례에 대해 사과하라고 엄중히 주문했고, 듀우란은 수차례 머리를 숙여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좀 전에 자신의 코피를 터트린 제나에게도 환한 웃음으로 화해를 청했다.
“제 코가 필요 이상으로 단단했지요? 팔꿈치는 괜찮으신가요? 하하하!”
급작스러운 분위기 반전에 제나와 제릭은 어색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또 그만큼 어색한 모습으로 최고위급 마법사 크로닌은 렌의 눈치를 살폈다.
‘계획대로 되긴 했는데….’
정체불명의 마법기사가 가루모스와 연관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발카람까지 동행한다는, 그래서 일단 대결에서 져 주고 유대감을 형성한다는 것이 애초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런 모습으로 지게 될 줄이야.
렌 또한 흙 묻고 헝클어진 머리칼을 바람에 날리며 황황한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놀랍군….’
어쩌면 당혹스러움보다 궁금함이 파도쳤다. 대체 어찌 된 인간이기에 드래건인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한 건지, 그리고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오크의 피 냄새를 풍기는 인간 여자는 또 어찌 된 사연인지, 혼란스럽기만 한 오후의 푸른 하늘이 차차 꿈같은 노을빛으로 채색되고 있었다.
기쁨에 쉼 없이 입을 놀리는 듀우란을 따라 슈흘라이성에 당도한 제릭 일행은 여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고급스러운 방에서 여장을 풀고, 시종들의 시중 속에서 뜨거운 물로 목욕을 마친 후 듀우란의 저녁 만찬에 초대를 받았다.
“어서들 오십시오. 슈흘라이를 대표해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자자, 이쪽으로….”
만찬장은 넓고 화려한 홀이었으며 듀우란은 시종처럼 직접 자리를 안내했다. 이미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크로닌과 렌은 제릭에게 눈인사를, 얇게 화장을 한 아름다운 제나에게는 크로닌만 미소를 보냈다.
렌이 잘라버린 제나의 오른 소매는 연푸른 빛깔 새 옷으로 다시 자라 있었다.
“자자,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정말 최선을 다해 그리고 정성을 다해 차렸습니다. 그러니 오늘 이 기쁜 만남을 위해 영웅 여러분들께서는 마음껏 즐겨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만찬의 상은 그야말로 형형색색의 음식들이 휘황찬란하게 차려져 있었다.
벤차드와 데렌은 남부러울 것 없었던 옛날을 떠올리며 울컥했고, 제릭은 낮에 대결을 벌이긴 했지만 호탕한 듀우란과 풍요로운 만찬 상에 마음이 풀려 낭만 영웅의 건배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어찌 됐건 감사하고 반갑습니다, 영주님.”
“하하,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저 이 모든 게 저의 기쁨이자 감동일 따름입니다. 자자, 어서들 드십시오.”
“네.”
그런 제릭 옆에서 제나도 부드러운 낯빛을 하고 있긴 했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 변화와 낯선 상대들 그리고 턱 끝에 감추어진 상처로 인해 마음은 조금 어수선했다.
렌은 그런 제나를 흘끔 보며 오크의 피 냄새를 떠올렸지만, 그보다는 제릭에 대한 놀람이 여전히 생생한지라 모든 관심은 스무 살이나 됨직한 젊은 마법기사에게로 향했다.
‘드래건이 아닌 건 확실한데….’
드래건은 그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특유의 기운이 있어 인간화하더라도 서로를 감지할 수 있었다.
“음하하하!”
만찬 내내 듀우란은 웃고 떠들썩했으며 또 건배를 외치며 제릭의 무공에 찬사를 보냈다.
“제가 지금껏 살아오며 수많은 강자들과 대결해 봤지만 기사님처럼 강력한 분은 처음입니다. 기사님이야말로 우리가 익히 들어왔지만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그런 전설적인 영웅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자, 그런 의미에서 건배를 청하지요.”
모두가 잔을 들었고, 또 시원스레 잔을 비운 뒤 듀우란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위대한 기사님,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일 년 정도 머무르시면서 저를 여러모로 지도해 주실 순 없으실까요? 제가 저의 모든 걸 다 바쳐 잘 모시고 또 하늘처럼 우러르겠습니다.”
존경심을 듬뿍 담아 청했지만 제릭은 가볍게 도리질을 했다. 실망감이 스치려다 듀우란은 하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그러시겠지요. 영웅적인 기사님께서야 세상을 위해 공사다망하실 테니까요. 그건 그렇고, 저기 그렇다면 가시는 행선지는 혹 어디신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어떻게든 인연의 끈을 유지하려는 간절한 시선에 제릭은 웃으며 답했다.
“발카람으로 갑니다.”
“발카람!”
듀우란은 그것 보라는 듯 좌중을 돌아보았다.
“발카라암! 그곳은 드래건을 비롯해 온갖 괴물들이 숨어 산다는 금지 아닙니까? 역시 영웅이십니다. 그럼 그곳에 가셔서 드래건 한 마리라도 떼로 잡으실 계획이신가요?”
크로닌은 낮게 헛기침을 했다. 그나마 나르팟 렌이 점잖은 성격이라 다행이지, 일반적으로 성격 급하고 사나운 드래건이라면 진작 한입에 삼켜졌을 터였다.
제릭이 눈빛을 살짝 세우고 답했다.
“드래건이 아니라 오크 사냥을 해 볼까 합니다. 개인적으로 오크에게 맺힌 게 많아서 말이지요.”
술이 약간 오른 상태인지라 제릭은 좌중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듀우란을 박수를 치며 환호해 마지않았다.
“오오, 오크! 그렇군요! 오크 사냥! 그 역겨운 괴물들을 신나게 베어 나가는 기사님을 상상하면 벌써부터 제 가슴이 두근대는 듯합니다. 하하하!”
“같이 가시렵니까?”
“오호호, 그런 영광을 주시는 겁니까? 우하하하!”
신명난 듀우란과 술기운 오른 제릭은 잔을 부딪쳐 가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에 반해 제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달콤한 과일들만 맛보고 있었는데, 렌은 그런 제나를 보며 모호한 감정을 되새겼다. 서로 눈길이 스치자 렌은 피처럼 붉은 포도주를 마시며 미소 지었다.
그때 내내 경청하고 있던 크로닌이 말을 꺼냈다.
“그런데….”
시선들이 모이자 크로닌은 매부리코 위로 정중한 눈웃음을 떠올리며 제나에게 물었다.
“아름다우시면서 또 뛰어난 검술이 인상적인 아가씨께선 어쩌다가 그 소중한 옥체 하나를 잃으셨는지요. 혹 무례한 질문이라면 용서를 바랍니다.”
제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어렸을 때 어떤 짐승이 물어 가 버렸어요.”
“어떤 짐승이?”
“아주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나진 않아요.”
“아….”
크로닌은 목례를 해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뒤이어 듀우란과 벤차드가 대체 어떤 저주받을 짐승이었냐고 분노와 슬픔을 표하는 동안 나르팟 렌은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으며 모호한 눈매를 지었다.
‘재미있군.’
오크의 피 냄새가 나는 여자,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버린 남자, 그리고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드래건이 한자리에 모여 만찬을 즐기고 있는 지금이 어쩌면 듀우란이 원하는 그런 낭만적인 모험의 한 장면만 같았다.
‘오크….’
과연 이 모험의 끝엔 누가 어떤 모습으로 정체를 드러낼지, 렌은 인간의 피처럼 붉은 포도주를 마시며 궁금해했다.
모두가 기분 좋이 또는 거나하게 취해 만찬을 마쳤다.
듀우란은 침대에 대자로 누워 제릭을 따라 발카람으로 모험을 떠나는 설렘에 쉬 잠들지 못했고, 그처럼 불 밝혀진 귀빈용 저택의 방 창문마다엔 제각각 다른 흥취와 감정들이 또 달빛처럼 흐르고 있었다.
방문을 걸어 잠근 렌은 어느 사이 연기처럼 새어 나와 저택 밖 나무속에 하얀 새처럼 앉아 있었다.
응시하고 있는 곳은 제릭과 제나가 함께 들어간 3층 방의 창문. 같은 방을 쓰는 걸 보면 깊은 관계인 것 같았고 이는 렌의 머릿속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오크에 원한이 있는 이가 그 피 냄새가 나는 여자와 함께한다….’
아무래도 자신 역시 이 기묘한 혼돈 속으로 빠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때 옆에서 작은 바람이 일며 평화의 탑 서열 두 번째인 크로닌이 나타났다. 크로닌은 목례를 한 후 나직이 물었다.
“별다른 점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있다면 남녀가 한방으로 들어간 게 전부.”
둘은 잠시 말이 없다가 렌이 크로닌을 돌아보았다.
“평화의 탑에선 전언이 없습니까?”
“아직 없습니다만 아마도 낮의 일 때문에 크게 놀라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낮에 있었던 그 황황한 순간을 떠올렸다. 거부할 수 없는 막강한 힘에 휩싸여 들길을 정신없이 휩쓸려 가던 자신의 모습은 평화의 탑을 발칵 뒤집었을 것이 자명했다.
그때 커튼이 내려진 창문으로 사람의 그림자가 비쳐 들자 렌과 크로닌은 동시에 투명해졌다.
창문이 열리고 편안한 잠옷 차림인 남녀가 나타났다. 둘은 달빛 내린 창가에 몸을 기댄 채 달콤한 밤공기를 마셨다. 그리고 제나가 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기한 밤이네요.”
“신기해요?”
“그렇지 않나요? 이 아름다운 성과… 저 환하게 빛나는 달과… 우리 둘은 단둘이 나란히….”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요. 솔직히 난 신기한 것보단 이런 상황들이 흥미롭고 재미있는데.”
제릭의 말에 제나는 알 수 없는 감정과 술기운이 혼합된 날숨을 쉬었다. 기분이 막막하면서도 좋았다. 불안하면서도 설레고, 평온한 듯 허망하며 또 그러면서 행복했다. 그런 심정으로 제릭을 바라보았다.
“에르카 기다려요?”
문득 들려온 이름에 제릭은 밤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네.”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혹시 이계의 화염이 숲을 태울 때 어디 다친 건 아닌지, 살짝 불안해지는 마음이 들어 반대로 툭 웃고 말았다.
“곧 나타나겠죠. 이 달빛을 타고.”
“달빛 아래 우리의 모습을 보면 에르카가 어떤 생각을 할까요?”
제릭은 모호하게 웃었다.
“글쎄요.”
“질투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화를 낼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무책임하게 들리네요.”
“무책임이라… 후후,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제릭은 가슴을 약간 동요케 하는 달빛에 미소 지었다. 제나는 별안간 가슴이 뒤엉키는 걸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내가….”
어디선가 구슬픈 새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 …… .”
“아니에요.”
제나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함께 벨차라키로 가도 되겠냐고, 이젠 돌아오지 않을 에르카의 빈자리를 대신해도 되겠냐고, 모든 걸 잊고 도망치려 한 자신을 책망했다.
“아니에요….”
제나가 담담한 미소로 마주하자 제릭은 그녀를 당겨 입맞춤을 했다. 키스는 창가에 달처럼 빛났고 잠시 후 창문이 닫히고 커튼이 쳐졌다.
정원의 나무속에 렌과 크로닌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크로닌이 속삭였다.
“연인 사이가 분명해 보입니다.”
렌이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때였다.
어둠 속으로 희끗한 뭔가가 파라락 날아와 조금 전 제릭과 제나가 함께 있던 그 창문을 들이받았다. 부딪치는 소리는 고요한 밤중이라 꽤 선명했고 튕겨 나와 허공에서 휘청거리던 새는 다시 그 창을 들이받으며 마치 뚫고 들어가려는 듯 세찬 날갯짓을 했다.
동시에 창문이 휙 열렸다. 새는 그 창문에 부닥쳐 어둠 속으로 추락했고 벗은 상체로 밖을 내다본 제릭은 컴컴한 정원을 두리번거렸다.
“뭐지?”
침대 쪽에서 제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예요?”
“글쎄… 소리로 보아 새가 잠깐 날아왔다 간 것 같은데… 음, 별일 아니네요.”
창문은 다시 닫혔고 잠시 정적이 흐른 후 불마저 꺼졌다. 기다렸다는 듯 옆방 벤차드와 데렌의 방도 어두워졌다. 그리고 컴컴한 정원의 풀밭에선 조그맣고 하얀 새 한 마리가 힘겹게 떠올랐다.
새는 휘청거리듯 날아 다시 제릭의 창문 근처로 갔다. 이내 방향을 틀어 정원의 나무쪽으로 그 겨운 날갯짓을 했다.
렌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달빛 같은 그 시선에 이끌려 새는 다가왔고 곧 렌의 손 위에 힘없이 쓰러졌다. 두 발로 앉지도 못하고 쓰러진 새는 한눈에도 정상이 아니었다.
“병든 새 같습니다.”
크로닌의 말대로 하얀 새는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전율하고 있었다. 날개는 산짐승에서 물어 뜯겼는지 상처가 나 있었고, 그 성긴 날개를 가지고 그렇게 날아오른 것만도 대단하다 싶었다.
“어디서 왔느냐.”
렌의 물음에 새는 대답 대신 눈을 감고 머리를 가슴으로 숙였다. 아무래도 생이 다하려나 보았다.
“뜻한 바가 있는 게냐?”
죽은 듯 움직이지 않던 새가 파르라니 눈을 떴다. 달빛 아래 작은 새는 놀랍게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가루모스는 손가락만 한 마귀 하나를 새로 빚어냈다. 그리고 마귀 앞에 자신의 심상을 표출시켰다.
희뿌연 빛과 함께 떠오른 가루모스의 심상은 다름 아닌 오래전 제나의 모습이었던 오크 고욤이었다.
손에 조잡한 돌도끼를 쥔 고욤은 그 쉰 듯하면서도 부드러운 암컷의 목소리로 가루모스를 향해 감사를 전하고 있었다.
“이렇게 변해라.”
가루모스의 주문에 마귀는 심상 속 오크를 응시하더니 곧 그와 똑같은 모습으로 화했다. 웃는 모습이 영락없었다.
“어떻습니까?”
목소리마저 완벽해 가루모스는 흡족해했다.
“좋아. 아주 좋아.”
좋은 게 좋은 것이었으니 제나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했다. 끝내 제나가 자신을 배신한다면 그건 파멸이자 비극적인 공멸이었다.
“제나를 만나면 그 모습으로 화해 내 뜻을 전해라.”
“알겠습니다.”
“가 보거라.”
만약 돌아오지 않으면 이런 과거의 모습을 기억하는 가루모스가 분노할 거라고, 오크 고욤은 현재의 자신에게 속삭일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