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3/24)

<3>

화창한 봄볕이 좋았다.

아후란 대륙의 중심 국가 바델의 한 시골 마을 쥴른도 싱그러운 봄빛 아래 꽃들이 봄맞이를 하고 있었다.

백여 가구 되는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엔 다 허물어지고 외벽 두 개만 남은 조그마한 신전이 있었다.

까마아득 오랜 옛날 마을 사람들이 신께 꽃을 바치던 곳이었고, 또 어느 옛날 이름 모를 전쟁으로 불타 기억마저 퇴색된 곳이었다.

그 신전 한가운데에 작은 옹달샘이 있었다.

옹달샘 옆에 앉아 얼굴과 손에 난 상처를 닦고 있는 제릭은 올해 나이 열다섯 살. 마을 아이들에게 얻어맞은 것보다 산에서 꺾어 온 꽃들이 다 상처가 나 버린 게 안타까웠다. 일리아에게 화관 만들어 주려 모아 온 건데….

“제릭!”

일리아가 찾아왔다. 제릭의 모습에 놀람도 당연하지만 분노 또한 익숙했다.

“내 이 자식들을 정말!”

“괜찮아.”

모든 게 익숙했다. 마을 사람들은 늘 제릭에게 거리감을 뒀고 따라서 아이들이 제릭을 따돌리고 미워하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많이 아파?”

일리아만이 제릭을 감싸 줬다. 상해 버린 꽃들에 일리아는 제릭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다독였다. 다정한 일리아의 표정처럼 나긋나긋 불어오는 봄바람… 제릭의 마음은 조금씩 풀어져 갔다.

그러다 일리아가 생각이 난 듯 말했다.

“참.”

좋은 일인지 벌써 웃음이 밝았다.

“내가 어제 테무 할머니한테 별 점을 쳐 달라고 했어. 근데 말이야.”

테무 할머니는 별을 보며 점을 쳤다. 서른 번 중에 스물아홉 번이 틀리고 한 번은 운 좋게 맞기도 해 마을 사람들이 재미로 봤다.

“할머니가 그러시는데 뭔가가 우리를 찾아온대.”

“뭔가?”

“응.”

“뭔데?”

“그건 몰라.”

“음….”

“행복이었으면 좋겠다.”

“아니, 그냥 아무 일도 없는 평화였으면 좋겠어.”

일리아는 멍든 제릭 볼에 입맞춤을 했다.

“나도 평화가 좋아. 그중에 너랑 함께하는 평화가 제일 좋아.”

일리아의 눈웃음이 햇살 아래 빛났다. 그 해맑은 얼굴이 제릭은 사무쳤다.

“일리아.”

“응?”

“노래 불러 줘.”

제릭은 일리아의 노래를 좋아했다. 잘 못 부르는 노래를 불러 달라고 하는 제릭이 일리아는 더 좋았다. 싱그레 웃은 뒤 부르기 시작하는 일리아의 노래는 사랑이 늘 곁에 있기를 바라는 옛 노래였다.

사랑하는 이여

늘 내 곁에 있어 주오

멀리 가지 말고 언제나 가까이에

슬플 때 내가 안아 줄게

힘들 때 내가 노래할게

내 품을 떠나지 마오

사랑하는 이여

늘 내 곁에 있어 주오

인생은 알다가도 모르는 것

하늘같은 사랑도 꿈도

구름 되어 흩어져 가고

남는 건 해 질 녘에 돌아오는 그대뿐

아아, 추억은 이렇게 쌓이고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있을까

사랑하는 이여, 부디

부디 멀리 가지 마오

늘 내 곁에 머물러 주오

영원히 그리고 또 영원히….

노래가 끝난 후 둘은 따사로운 입맞춤을 나눴다. 달콤하고 행복한 봄날이 이렇게 영원했으면 싶었다.

* * * * * * *

밤하늘에 만월이 밝았다.

제릭은 창가에 몸을 기댄 채 상쾌한 밤공기 너머 천공의 달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밝다.”

너무 오래 보고 있으면 몸에 소름이 돋으려 하지만 그래도 일리아를 생각하면 마음이 애틋해지며 달빛 또한 아름답게만 보였다.

“좋은 꿈 꿔. 내가 내일 멋진 선물을 줄 테니까.”

둥근 보름달에 일리아의 웃는 모습을 그려 넣는 그때, 히엔 아주머니가 작은 보퉁이를 들고 제릭이 혼자 사는 집 마당으로 들어왔다.

“안 자고 뭐 하니?”

“아줌마.”

“그리고 달 너무 오래 보고 있지 말라 했지?”

“예, 조금만 보고 있었어요. 근데 이제 계속 바라봐도 뭐 그렇게 이상해지지 않아요.”

이상해진다는 제릭의 말에 히엔은 살짝 엄한 표정을 지었다. 제릭은 그제야 아차 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히엔도 곧 다정한 얼굴로 다가와 창틀 위에 보퉁이를 얹었다.

“내일 아침에 데워 먹어. 아랫마을에 갔던 아저씨가 얻어 온 말린 물고기로 졸였어.”

“고마워요.”

제릭의 친어머니 리이체는 제릭을 낳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 버렸고, 그런 고아나 다름없는 제릭을 친아들처럼 길러 준 사람이 바로 리이체의 단짝인 히엔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제릭에 대해 수군거리면서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은 이런 히엔의 보호막 때문이기도 했다.

“얼른 자라.”

“네, 내일 뵐게요.”

“그래.”

히엔은 달빛 내린 길을 따라 멀어졌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제릭은 맛깔난 향이 피어오르는 보퉁이를 감쌌다. 기억할 수 없는 어머니의 품이 이렇게 따듯한 느낌일까.

제릭은 보퉁이에 입 맞춘 뒤 보름달을 향해 환한 미소를 그렸다. 히엔 아줌마도 좋지만 그보다 더 좋은 일리아가 보고 싶었다.

“어서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

내일은 자신만의 공주님이 여왕님이 되는 날이었다. 제릭은 달님을 향해 소망을 빌었고 설렘은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생동했다.

일리아의 아버지 블런은 방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은은한 불빛이 밝혀진 거실엔 아내가 양말을 기우고 있었다. 블런은 의자에 앉아 조금 마뜩찮은 숨소리를 냈다. 아내가 쳐다보자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일리아도 이제 열다섯이야.”

“그렇죠.”

“제릭 녀석하고 그만 놀게 해. 또래 여자 애들하고 어울리라고 하란 말이야.”

“알았어요. 하지만 너무 그러지 마세요. 히엔이 당신 그러는 거 알면 얼마나 서운해하겠어요.”

히엔은 블런의 여동생이었다. 그런 까닭에 일리아가 제릭과 친하게 지내는 걸 보면서도 그리 뭐라 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이제 선을 그어야 할 때였다.

“솔직히 난 그 녀석이 처음부터 맘에 들지 않았어. 근본이 어딘지도 모르는 애야. 리이체가 어디서 누구의 아이를 배어 온 것인지도 모르고, 또 녀석이 어릴 때 만월을 보면서 괴상한 울음소리를 내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오싹하고 말이야.”

“또 그 이야기.”

“됐어. 아무튼 그렇게 알고 있어. 히엔이 서운해하든 말든 조만간 제릭을 불러다 확실히 이야기를 할 생각이야.”

“여보.”

블런은 팔짱을 끼었다. 점점 자라면서 더 이상 괴상한 모습을 보이진 않았지만 갓난아기 때 제릭의 모습은 어쩌면 짐승에 가까웠고 마을 사람들도 잊은 척하고 있지만 대부분 제릭에 대해 꺼림칙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이제 그만.”

더 이상 일리아와 가깝게 지내는 걸 허락할 수 없었다.

* * * * * * *

다음 날.

완연한 봄기운이 피어나는 한낮에 제릭은 일리아의 손을 잡고 언덕 위에 있는 허물어진 신전으로 향했다.

“기대해도 좋아. 내가 아주 멋진 선물을 준비해 놨거든.”

“어제부터 왜 이렇게 뜸을 들여? 대체 무슨 선물인데?”

“조금만 있어 봐. 입이 귀에 걸릴 걸?”

제릭과 노는 걸 아버지인 블런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일리아는 착하고 다정다감한 제릭이 좋았다. 제릭에 대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들은 다 쓸데없는 소리일 뿐이었다.

잠시 후 둘은 세월을 가늠하기 힘든 자그마한 신전에 도착했다. 달랑 벽 두 개만 남아 있는 그곳엔 작은 옹달샘이 돋아나 있었고, 샘 주위엔 납작한 돌멩이들이 둥그런 원을 그리고 있었다. 알록달록 작은 꽃들이 피어 있는 그곳은 둘만의 놀이터였다.

“자, 뭔데? 그만 궁금하게 하고 어서 보여 줘 봐. 선물.”

“그럼, 일단….”

제릭은 볼을 내밀었다. 일리아는 피식 웃더니 예쁘게 입맞춤을 해 줬다.

“됐지? 자, 이제 선물 보여 줘 봐.”

“그래, 보여 줄게. 대신 눈을 감고 있어야 해. 내가 돌아올 때까지 말이야. 발소리가 들려도 눈을 뜨지 말고 내가 눈을 떠라 할 때까지, 알았지?”

“호호, 나 너무 기대가 되는데? 알았어. 그럼 나 여기 앉아서 눈 감고 있을게.”

일리아는 옹달샘 옆에 자리를 잡고 눈을 감았다.

“얼른 갔다 와.”

“알았어. 금방 올게. 휘익.”

제릭은 바람 소리를 내며 숲으로 향했고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일리아는 웃음을 참았다.

관목과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언덕 뒤로 돌아간 제릭은 좀 더 안쪽의 큰 바위 틈새로 들어갔다.

“누가 손대지 않았겠지?”

잘 보이지 않는 안쪽엔 조그마한 붉은 꽃 하나가 숨어 있었다. 그건 사냥꾼이나 약초꾼도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하는, 신의 꽃이라고도 불리는 체르칸이었다.

그 아련한 꽃향기를 마시면 신의 축복을 받는다고 알려진 보석처럼 붉은 꽃이었다.

얼마 전 깊은 산속에서 우연히 체르칸을 발견한 제릭은 그걸 이곳으로 옮겨 심었고, 이제 풀꽃들을 엮어 만든 화관의 앞쪽에 그 붉은 보석 꽃을 달아 일리아에게 씌워 줄 생각이었다.

“대관식을 하는 거야. 나만의 여왕님이 되는 거야.”

일리아는 눈을 사르르 떠봤다. 주위를 살피니 포근한 봄바람이 살랑거릴 뿐 제릭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풋 웃어 버렸다.

“기대되네.”

설레는 한숨을 쉬고 맑은 옹달샘을 들여다보았다. 원형에 가까운 옹달샘에선 투명한 물이 보들보들 솟아 아래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다정히 미소 짓는 그때였다. 수면 위로 문득 낯선 얼굴이 비춰 들었다.

동화책에서나 보는 그런 괴물의 얼굴이었는데 혹시 제릭이 놀라게 하려고 가면을 쓴 건 아닐까, 일리아는 빙그레 웃었고 그게 일리아의 마지막 표정이었다.

묵직한 소리는 일리아를 쓰러지게 했고 뒷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는 옹달샘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언덕 뒤편에서 뭔가를 조심히 손에 들고 제릭이 나타났다. 그건 풀꽃을 엮어 만든 화관이었고 그중에 붉은 꽃 하나는 보석처럼 생생했다.

제릭은 싱숭생숭한 표정으로 신전의 벽을 돌아 옹달샘으로 갔다. 그리고 드디어 일리아를 위한 대관식을 열….

“ …… .”

그곳에서 모든 게 멈췄다. 제릭의 모든 게 그 순간에 사라졌다. 그곳엔 붉게 물든 샘과 그 위에 쓰러져 있는 일리아의 모습뿐이었다.

제릭은 꿈을 꾸듯 다가갔다. 수면에 얼굴의 절반이 잠긴 일리아는 석상으로 변해 있었고 뒷머리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제릭의 손에서 왕관이 떨어졌다. 일리아는 자신의 피로 물들인 옹달샘을 왕관처럼 머리에 쓰고 있었다.

한 걸음 다가선 제릭의 모든 게 흔들렸다. 눈물과 입술과 심장과 영혼까지 제릭의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났다.

악몽….

일리아를 향해 떨리는 손을 내미는 그때였다. 발소리와 함께 벽 쪽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괴물이었다. 괴물이 붉은 피가 묻은 돌도끼를 들고서 감격적인 웃음을 짓고 있었다.

“너의 영혼을 원해.”

오크 고욤은 마지막 영혼을 향해 간절한 염원을 바랐다. 아름다운 인간 여자가 되는 마지막 열쇠가 지금 저 사내에게 담겨 있었다.

그때였다. 사내아이의 눈이 흰자위를 드러내며 하얗게 넘어가는가 싶더니 몸이 급격히 뒤틀렸다.

고욤은 움찔하며 반걸음 물러섰고 제릭은 순식간에 몸이 커지며 근육질로 변해 갔다. 짐승처럼 온몸이 털로 뒤덮이며 열 손가락마다엔 송곳 같은 손톱이 자라났다.

놀란 고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늑대인간이었다. 어떻게 가루모스의 고통을 잠재워 줄 순수한 영혼이 늑대인간에게 깃들어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이게….’

고욤은 당황하며 돌도끼를 움켰고 늑대인간으로 화한 제릭은 무음의 괴성을 지르며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그러다 일순 오크를 향해 안광을 뿜더니 득달같이 달려가 오른 팔을 휘둘렀다.

고욤은 돌도끼를 뻗어 그에 맞섰지만 눈 깜짝할 사이 신전 밖으로 날아가 버렸고 뒤이어 언덕 아래로 희미한 충격음이 멀어져 갔다.

“허억… 허억….”

턱을 떨며 그 사라진 허공을 보던 제릭은 이내 몸을 돌려 옹달샘을 바라봤다. 피처럼 붉은 그곳에 쓰러져 있는 일리아를 보자마자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어어….”

입을 벌린 채 몸을 떨던 제릭은 한 걸음 한 걸음 일리아를 향해 다가갔다. 옹달샘 앞에 무릎을 꿇고 떨리는 두 손을 내밀었다. 바닥까지 들여다보이던 맑은 샘물이 왕관의 보석처럼 붉었다.

“아아아….”

뜨거운 눈물이 폭포수처럼 떨어지며 제릭은 그 핏물 속으로 괴물의 손을 담갔다. 일리아의 안에 있어야 하는 그 붉은 빛이 왜 옹달샘을 물들인 것인지, 왜 일리아가 이렇게 석상으로 변해 있는 것인지 제릭은 어린아이처럼 온몸을 떨며 죽을 것만 같은 신음 소리를 냈다.

“아아악….”

제릭은 끝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일리아의 석상을 품안에 안은 채 하얗게 뒤집힌 두 눈이 옹달샘의 핏빛에 잠겨 들었다.

‘이런… 이런….’

비극이 일어나 버린 작은 신전의 하늘 위에서 푸르스름한 바람은 고뇌하듯 흔들렸다.

‘정말이지 뒤틀린 인연이구나. 인간과 오크 사이에서 태어난 오크는 아름다운 인간 여자가 되고 싶어 하고, 인간과 늑대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저 아이는 오크가 원하는 영혼을 담고 있으니….’

피 냄새 어린 바람이 안타까운 궁전을 휘돌았다. 비극적인 두 모습 위로 제릭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석양이 쏟아진 해 질 녘에 마을은 난리가 났다. 겁먹은 아이들은 엄마 뒤에 숨었고 노을에 물든 마을 광장엔 비명 소리가 연이어졌다.

석상으로 변한 일리아는 뒷머리가 붉었고 그 앞엔 제 모습으로 돌아온 제릭이 넋 나간 얼굴로 앉아 있었다.

달려온 일리아의 어머니는 딸의 모습을 보자마자 마른 지푸라기처럼 쓰러졌고 일리아의 여동생도 속절없이 실신하고 말았다. 아버지인 블런과 두 오빠들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일리아….”

블런은 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부디 그 숨 쉬는 기운을 느껴 보려 했지만 이내 차오르는 건 눈물이었다. 일리아의 핏빛 뒷머리를 감싼 큰오빠는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듯 흔들렸고 작은 오빠는 떨리는 입술을 깨물고 제릭의 멱살을 움켰다.

“누구야… 누가….”

제릭은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작은 오빠는 두 손을 흔들며 외쳤다.

“누가! 누가 우리 일리아를!….”

번뜩이는 그 눈빛을 따라 아버지와 큰오빠의 광기 어린 얼굴이 들렸을 때 마침내 제릭에게서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괴물이… 괴물… 괴물….”

순간 블런이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괴물이라니, 아버지와 두 아빠의 타오르는 분노가 제릭에게로 쏟아졌다. 주먹과 주먹이 울음과 발길질이 제릭을 뒤덮었다. 달려온 일리아의 친척들도 울부짖으며 제릭을 내리쳤다.

“괴물이라니! 괴물이라니! 네놈이 그 괴물이겠지!”

“살려 내! 살려 내란 말이야!”

마을 사람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제릭은 피투성이가 되어 굴러다녔고 모두는 이 비극에 비명 같은 눈물만 쏟았다.

“그만!”

그때 한 여인이 뛰어들어 제릭 위로 쏟아지는 주먹과 발길질을 막았다.

“그만! 그만해요! 제발 그만!”

여인은 히엔이었다. 친구가 세상을 뜨며 남겨 놓은 아이는 이제 자신의 아이와 같았고, 그 아이는 일리아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한다며 볼을 붉히던 착하고 순한 아이였다.

히엔은 제릭을 감쌌고 이성을 잃은 주먹과 발길질은 그 위로도 한참을 계속 되다가 뒤따라온 히엔의 남편과 어린 남매의 애원 앞에서 그제야 멈췄다.

블런은 하늘을 향해 절규했다. 아버지는 딸의 이름을 부르며 끝내 정신을 잃었고 히엔은 피범벅이 된 제릭의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신이시여….’

제릭에게 늑대인간의 피가 흐르고 있는 걸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동굴은 지하 궁전처럼 넓었다.

마법의 횃불이 일렁이는 그곳에 지금 마법사 가루모스가 놀라움에 사로잡힌 숨소리를 삼키고 있었다. 마지막 두 영혼을 가지러 갔던 오크 고욤이 오른팔이 사라진 채 피를 흘리며 나타난 까닭이었다.

“대… 대체 이게….”

말을 잇지 못하는 가루모스를 향해 땅딸막한 오크는 괴로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늑대인간으로 돌변한 소년의 후려침 한 번에 하늘을 날았고 오른팔은 그와 함께 마른 나뭇가지처럼 날아가 버렸다. 언덕 아래로 추락한 후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돌아왔지만 이미 과다한 출혈에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묻질 않느냐!”

대노한 가루모스를 힘겹게 바라본 고욤은 바델의 시골 마을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런 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너부러진 오크를 내려다보며 가루모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답을 했다.

“늑대인간이라니… 마지막 영혼을 가진 소년이 늑대인간이었다니….”

이제 시작될 복수극을 꿈꾸며 설레는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는데, 현실은 느닷없는 미로 또는 암흑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늑대인간….”

그 괴물의 영혼을 어떻게 가져올 것인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는 마지막 관문 앞에서 열쇠를 잃어버린 것처럼 가루모스는 망연자실해 했다. 그때 팔 하나를 잃어버린 괴물 부하가 추위를 느끼는지 몸을 떨었다.

“고욤….”

절망 앞에 선 노인은 그 모습에 측은함을 느꼈다.

밤이 내렸다. 그리고 바델국의 한 시골 마을 쥴른엔 격정적인 횃불이 타올랐다.

사실 여부를 떠나 괴물에게 당했다는 일리아의 모습은 혹시 모를 변고에 대비해 마을 장정들을 무장케 했고, 하룻길에 있는 작은 도시에서 황급히 날아온 마법사와 말을 타고 달려온 스물 남짓 기사들은 마을의 외곽을 돌면서 어둠 속을 살폈다.

영주가 내일 오후쯤 도착한다고 했고 상황에 따라 멀리 구릉지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을 이동할 수도 있다는 연락을 받은 터였다.

그리고 만에 하나 범인일지 모르는 제릭은 마을 외곽에 있는 철제 창고에 가둬 놓았다.

히엔이 죽을지도 모른다며 상처를 치료하게 해 달라 애원했지만 마을 장정들은 제릭에게 물 한 모금 주지 않은 채 창고 안에 던져 놓았고, 이는 촌장과 함께 마을의 대소사를 주도하고 있는 일리아의 아버지 블런을 의식한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 갔고 눈물처럼 글썽이는 별 하늘 아래 온 마을은 슬픔에 잠겼다.

이따금 일리아의 집에서 비명 같은 여인의 통곡이 터져 나왔고, 그때마다 횃불이 몸을 뒤채며 잠 못 드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후려쳤다.

“대체 이게 어찌 된 변고인고….”

“그러게 말이야.”

노인들은 마을의 쉼터에 앉아 담배 연기를 뿜었다.

온갖 종족들이 뒤엉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바다 건너 벨차라키 대륙과 달리 인간족이 역사의 주류가 된지 오래인 이곳 아후란에선 드래건은 이미 동화 속의 이야기이고 요정의 모습 또한 깊은 산속에서나 찾을 수 있을까 했다.

“괴물이라니….”

오래 산 노인들이 하늘의 만월을 향해 허허로운 눈빛을 비추는 그때, 마을의 외곽 창고 안에선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제릭이 사막에서 샘물을 찾듯 그 달빛 향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으으으….”

왼손의 손가락들은 제멋대로 휘어졌고 오른손의 손등은 금방이라도 뼈가 튀어나올 듯 부풀어 있었다. 그런 모습으로 제릭은 철제 바닥을 긁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끝내 달빛 아래 얼굴을 내놓으니 그 모습이 처참했다. 어디가 눈이고 어디가 입술인지 분간이 안 될 만큼 터져 버린 얼굴은 마치 멍빛 반죽만 같았는데….

하지만 밝은 달이 상처를 어루만지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달빛을 빨아들이며 제릭이 그 생명력을 호흡하자 이내 가슴이 진동하며 두 눈이 떠졌다.

“일리아….”

핏빛 옹달샘이 그 눈앞을 뒤덮으며 다시 악몽이 시작되었다. 설레는 대관식을 꿈꾸던 한 소년은 두 손의 붉은 왕관을 떨어뜨렸고, 그 붉은 빛에 얼굴이 잠긴 사랑하는 이는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창고 밖에서 몽둥이를 들고 이 비극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장정 넷은 느닷없이 들려온 꺽꺽 숨넘어가는 소리에 창살문으로 달려들었다.

쾅!

순간 철제문이 종잇장처럼 날아가며 장정 넷이 모조리 나뒹굴었다. 그리고 창고 안에선 늑대인간으로 화한 제릭이 울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일리아….”

너부러진 장정 넷은 아연실색 꼼짝도 못 했고, 그저 일리아의 집을 향해 멀어지는 늑대인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후, 비명 소리와 외침이 악몽 같은 밤하늘을 깨우며 마을의 온 횃불들이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마을 외곽을 순찰하고 있던 기사들은 황급히 말을 달려 모여들었고, 장정들은 몽둥이와 창과 칼을 들고서 일리아의 집으로 올라오는 길목을 막았다.

만월의 빛을 받으며 털이 부수수한 제릭이 진정 괴물 같은 모습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기다란 송곳 같은 열 손가락과 날카로운 눈빛과 톱날 같은 이빨이 살기 가득 번뜩거렸다.

“으어어!”

제릭은 괴성을 지르며 장정들을 향해 돌진했다. 날아드는 창과 칼과 몽둥이를 우람한 주먹으로 후려치며 내달았다.

찌르는 창끝을 개의치 않았고 베어가는 칼을 맨몸으로 부딪치며 나아갔다. 눈물을 날리며 장정들을 뚫고 나가자 검을 든 기사 스무 명이 길을 가로 막았다.

하지만 그들도 제릭을 막지 못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힘 앞에 기사들은 말과 함께 사방으로 나가떨어졌고, 주먹질 한 번에 동강난 검신엔 창백해진 얼굴만이 비쳤다.

뒤늦게 날아온 늙은 마법사의 화염 공격도 안개처럼 치워 버리고 선홍빛 벼락도 얼음처럼 깨뜨려 버리니 괴성을 지르는 늑대인간을 도무지 멈춰 세울 길이 없었다.

“마법력을 튕겨 내는 늑대인간이라니… 들어 본 적이 없다….”

노마법사는 넋 나간 듯 손을 놓아 버렸다.

제릭은 그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일리아의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곳에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은 얼어붙어 버렸다.

괴물….

제릭이 말한 괴물이 지금 제릭의 모습으로 나타나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멈춰라!”

일리아의 아버지 블런이 앞으로 나섰다. 뒤따라 온 장정들과 기사들이 마당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제릭은 가슴을 떨며 애원하는 눈빛을 흘렸다. 그러나 블런의 안광 역시 이미 이성을 떠나 불길에 사로잡혀 있었다.

“네가 괴물이었구나.”

제릭은 아니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저 눈물만 쏟아졌다.

“네가 일리아를 죽인 괴물이었어.”

“아아….”

제릭은 도리질을 했다. 그때 마당에 몰려든 기사 스물이 일제히 화살을 쏘았다. 하지만 모두 나뭇가지처럼 튕겨 나고 제릭은 망연히 도리질을 했다.

“아아아….”

자신은 괴물이 아니라고, 일리아를 죽인 그 괴물이 아니라고 도리질을 하며 펑펑 우는 모습에 블런은 불길 같은 분노를 내질렀다.

“너는 괴물이야! 네가 우리 딸을 죽인 바로 그 괴물이야! 나를 죽여라! 나를 죽이지 않고선 결코 일리아를 데려가지 못한다! 죽여라! 나를 죽여!”

블런은 두 팔을 벌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제릭은 고개를 숙인 채 그를 밀어냈고 그 작은 손짓에도 블런은 옆으로 동그라지고 말았다.

제릭은 울음을 터트리며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늑대인간의 모습에 집 안에서 여인들의 비명 소리가 솟구쳤고 기사와 장정들은 소리를 지르며 제릭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모든 공포와 비명과 몸짓들은 곧 하나둘 움직임을 멈췄다. 일리아의 석상 앞에 엎드린 늑대인간이 너무도 서럽게 울었기 때문이었다.

일리아를 만지지도 못한 채 두 손을 바들바들 떠는 제릭은 아무리 괴물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너무도 비통해 보여 그 누구 하나 소리를 내지 못했다.

무거운 침묵과 한 늑대인간의 오열이 집 안에 들어찬 가운데 마을 사람들은 제릭이 괴물로 변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일리아를 해쳤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을 통곡하던 제릭은 어느 순간 괴성을 지르며 집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기사들이 쏘아 대는 화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산을 향해 사라졌다.

히엔이 제릭을 소리쳐 불렀지만 어둠이 삼켜 버린 늑대인간은 더 이상 찾을 길이 없었다. 그저 달빛 아래 애절한 괴물의 울음소리가 이 비극으로부터 아득히 멀어지고 있었다.

십 년 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