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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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봄빛이 완연한 제달라스산엔 싱그러운 초록과 울긋불긋한 꽃들이 만발했다.

그리고 산길을 뛰어다니며 검술을 연마하고 있는 쌍둥이는 올해 열일곱 살이지만 또래에 비해 덩치가 훨씬 커 위압적이기까지 한 라람과 차람 형제였다.

서로를 향해 실전인 양 목검을 휘두르며 맑은 타격음을 날리는 건 내년 봄 국왕 직속인 근위대에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이합!”

“타하!”

아침에 올라와 오전 내내 시원한 산 공기를 마시며 검술을 수련한 쌍둥이는 정오 무렵 싸온 점심을 먹기 위해 중턱의 약수터로 향했다.

“와아, 열심히 했다.”

“그러게. 온몸이 팔랑거리는 느낌이야.”

어깨에 걸친 목검과 이마의 땀방울을 스쳐 가는 봄바람이 더없이 상쾌했다.

“시험에 합격하겠지?”

“당연히 합격해야지. 우리 때문에 고생하시는 부모님과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동생들을 위해서라도 꼭 근위대에 들어가야 해.”

“수도에 가면 예쁜 아가씨들도 많을 테니 일찍 결혼도 하자. 가정이 안정돼야 돈도 모으고 살림도 는다고 하잖아.”

“그렇지. 아무튼 전국 각지에서 힘깨나 쓰고 검술깨나 한다는 사내들이 다 모일 테니 정말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할 거야.”

“솔직히 우리 정도의 실력이면 근위대에 못 들어갈 리 없잖아. 안 그래?”

“후후, 두말하면 잔소리지.”

쌍둥이는 작은 집에 자신들까지 열두 명이 복잡하게 살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며 희망을 부풀렸다. 그런 힘찬 걸음으로 약수터 근처에 왔을 때였다.

“어?”

“어!”

누군가가 아니 무언가가 길을 가로막았고 그 무언가를 향한 쌍둥이의 표정은 놀람으로 흔들렸다. 가슴 속에서 고동 소리가 이는 걸 느끼며 형인 라람이 속삭였다.

“오크잖아.”

동생 차람이 손에 든 점심 보자기를 땅에 내려놓으며 미소 지었다.

“세상에….”

이야기로 듣고 책에서 그림으로만 본 오크가 실제로 나타나 자신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혹시 잘못 본 게 아닐까 연방 눈을 깜빡여도 저만치 앞에 작은 돌도끼를 들고 있는 땅딸막한 생명체는 의심할 여지없는 오크였다.

형인 라람이 어깨에 걸친 목검을 앞으로 내리며 말했다.

“기회일까?”

동생 차람도 목검을 움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야. 저 오크를 잡으면 근위대엔 시험을 보지 않고도 당장 들어갈 수 있어.”

쌍둥이의 눈망울이 빛났다.

오크 고욤은 완벽히 똑같은 두 표정을 번갈아 보며 뭉툭한 돌도끼를 흔들었다. 열일곱이지만 키와 덩치가 거의 두 배에 이르는, 그것도 쌍둥이를 어떻게 쓰러뜨려 그 영혼을 취할 것인가.

“나를 잡고 싶은가?”

고욤이 말문을 열자 쌍둥이는 눈을 크게 뜨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말을 한다.”

“오크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우리말을 할 줄 아는가 봐.”

“신기하다. 목소리도 뭔가 부드럽고 말이야. 책에서는 돌을 바위에 긁는 목소리라고 했잖아.”

“아무려나 상관없어. 목소리가 부드럽든 말든 분명 오크니까.”

동생인 차람이 목검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고욤은 목소리가 부드럽든 말든 오크라는 말에 감정이 상하는 걸 느끼며 미소 지었다.

“그래, 덤벼라. 오늘 너희 두 녀석의 영혼을 내가 가져가야 하니까.”

쌍둥이는 동시에 주춤했다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 그것참 다행이네. 우리도 오늘 꼭 너를 잡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거든.”

형인 라람이 먼저 돌격 자세를 잡았다. 오크 고욤도 손도끼를 쥐고 눈을 치떴다. 인간 여자가 되고픈 욕망과 상대에 대한 두려움이 눈앞에서 불꽃처럼 튀려 했다.

그때였다. 고욤이 돌도끼를 휘두르려는 자세를 취하자 쌍둥이의 눈이 번뜩였고 그 순간 고욤은 오른손의 도끼 대신 왼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를 동생인 차람에게로 던졌다.

돌도끼에 집중하고 있던 차람은 느닷없이 날아온 돌에 인중을 맞아 버렸다. 피가 터졌고 움찔한 차람의 입가엔 핏빛이 낭자했다.

어처구니없는 공격을 당한 쌍둥이의 얼굴에 찰나 공포심이 스쳤다. 보란 듯 고욤은 천천히 뒷걸음을 쳤고 그 따라오라는 몸짓에 쌍둥이의 공포심은 이내 분노로 화했다.

고욤이 바라던 바였다. 그 분노는 바로 쌍둥이를 죽음의 길로 이끌 견인줄 같은 것이었으니까.

“오크!”

형인 라람이 땅을 박찼다. 한발 늦게 동생 차람도 목검을 꼬나 쥐고 달렸다. 고욤은 달리기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함정이 기다리고 있으니 상관없었다.

‘조금만 따라와라.’

고욤은 짧은 다리로 내달리며 뒤를 돌아왔다. 분노 때문인지 쌍둥이들의 속도가 예상보다 빨랐다. 자칫하면 잡힐 것만 같았다. 이를 악물고 함정을 향해 내달리는 그때 기합 소리가 들리더니 형인 라람이 땅을 박차고 하늘을 날았다.

분노는 고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동력을 발생시켰고 라람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꽂히며 목검을 휘둘렀다.

“이야!”

검 끝이 고욤의 어깨를 스쳤다. 그 충격에 고욤은 다리가 꼬이며 확 엎어지고 말았다. 라람은 두 눈을 번뜩이며 달려들었고 고욤은 낭패스러운 얼굴로 재빨리 일어나 돌도끼를 쳐들었다.

투학!

목검의 힘에 밀려 고욤을 휘청 물러났다. 그때 뒤늦게 달려온 동생 차람이 고욤을 향해 목검을 치올렸다. 고욤은 몸을 뒤로 젖혀 피했지만 곧바로 형인 라람의 목검이 가슴을 찔렀다.

‘윽!’

밀려 나가는 고욤을 동생 차람의 검이 달려와 이마를 후려쳤다. 피가 터지며 고욤은 지난 가을 낙엽이 깔린 비탈을 굴러떨어졌다.

낙엽 범벅이 되어 평평한 곳으로 내려온 고욤은 품 안으로 손을 넣어 마법구슬을 찾았다. 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았다. 빠져 버린 모양이었다.

‘이런….’

그런 고욤 앞에 눈 깜짝할 사이 라람과 차람이 뛰어 내려와 목검을 쳐들었다. 고욤은 입을 벌린 채 쌍둥이를 쳐다봤다. 끝이었다. 마법구슬이 없으면 도망칠 수도, 가루모스에게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아….’

고욤은 두 눈을 이글거리고 있는 쌍둥이를 번갈아 쳐다보고는 이내 절망적인 표정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름다운 인간 여자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 이렇게 끝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벼락처럼 떨어질 쌍둥이의 목검에 낙엽처럼 쓰러질 자신을 상상하며 눈물이 차올랐다.

그때 쌍둥이의 형인 라람이 머리 위로 치켜든 목검을 천천히 내렸다.

인중이 깨지고 치아까지 부러진 차람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 까닭은 고욤의 이마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피의 색깔 때문이었다.

“붉잖아.”

“오크의 피 색깔은 갈색이라고 했는데….”

쌍둥이가 차례로 내뱉은 그 말에 고욤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 얼굴 위로 눈물도 함께 굴러 내렸다.

그 모습이 무척 이채로워 쌍둥이는 어느새 전의를 뒤로 한 채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넌 대체 뭐냐? 오크 아니냐? 오크면서 왜 피 색깔이 우리처럼 붉지?”

라람이 물어 온 그때 고욤의 눈에 잃어버렸던 마법구슬 묶음이 보였다. 다름 아닌 동생 차람의 가죽신 바로 뒤, 낙엽 속에 숨어 있었다.

고욤은 희망의 빛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난 오크가 아니야.”

오크의 모습을 한 오크가 자신이 오크가 아님을 주장하니 쌍둥이는 혼란스러워했다. 고욤은 이마의 피를 만져 그 붉은 빛깔을 내보였다.

“내 피가 너희들이랑 같은 것처럼 난 인간이야.”

“인간이라고?”

“어떻게 네가 인간이지? 넌 누가 보아도 분명 오크잖아.”

차람이 목검으로 고욤의 얼굴을 가리켰다.

고욤은 천천히 도리질을 했다.

“난 인간과 오크 사이에서 태어났어. 겉은 오크지만 내 영혼과 핏빛은 사람이야.”

양측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 하프오크가 있다는 건 알지만 실제로 보니 마치 인간이 오크의 탈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더구나 지금 눈앞의 오크는 완벽한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고 그 목소리 또한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쌍둥이는 머뭇거리듯 서로를 돌아본 후 형인 라람이 기억을 더듬어 물었다.

“좋아. 네가 오크든 인간이든 그건 네 문제니까 상관없어. 하지만 네가 아까 말 한대로 우리의 영혼을 가져가야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자, 말해 봐. 왜 우리의 영혼을 노린 거지? 어디서 왔고 또 누가 시킨 거야?”

“어서 다 불어.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당장 네 목뼈를 부러뜨려 영주님께 가져갈 테니.”

아무래도 살아날 길이 보임에 고욤은 한숨을 쉰 후 열망을 담아 말했다.

“난 사람이 되고 싶어.”

“뭐?”

“난 인간 여자가 되고 싶어. 아름다운 인간 여자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쌍둥이는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하며 눈을 끔뻑였고 고욤은 낙엽 속에서 빛나고 있는 가루모스의 마법구슬을 곁눈질했다.

하얗게 빛나는 건 가루모스의 동굴로 공간이동을 하는 데 쓰고, 붉게 빛나는 건 화염, 검게 빛나는 건 순간 암흑, 그리고 투명하게 빛나는 건 짧은 공간이동에 쓰는 마법구슬이었다.

고욤은 라람을 쳐다보았다.

“내가 인간이 되려면 너희들의 영혼이 필요해. 그래서 너희를 찾아온 것뿐이야.”

쌍둥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서로를 돌아보았고, 바로 그때 고욤은 번개같이 몸을 던져 차람의 발 뒤쪽으로 손을 뻗었다.

깜짝 놀란 쌍둥이의 목검이 머리와 등을 후려쳤지만 손에 쥔 마법구슬을 놓치지 않았고, 옆으로 한 바퀴 구른 뒤 재빨리 투명 구슬을 깨뜨렸다.

‘공간이동!’

마음속 외침과 동시에 고욤의 모습이 사라졌다.

“어?”

“뭐야!”

쌍둥이는 놀라 주위를 돌아봤고 직후 비탈 위쪽 길에서 고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다. 어서 올라와라.”

그 말과 함께 고욤은 낙엽을 흩뿌렸고 쌍둥이가 당황하는 사이 뒷걸음질을 쳐 시야에서 사라졌다.

“올라가!”

“놓치면 안 돼!”

근위대의 갑주를 찰 수 있는 희망이었다. 둘은 낙엽이 쌓인 비탈을 뛰어올라 다시 길 위에 섰다. 저만치에 그 오크가 돌도끼를 들고 서 있었다.

“안 되겠군. 잠깐 불쌍해 보여 좋게 데려가려 했는데 이젠 안 되겠어.”

“피가 붉어도 오크는 오크일 뿐이야. 사람을 물어 죽이는 늑대도 피가 붉어. 너는 인간을 잡아먹는 짐승일 뿐이야.”

고욤은 짐승이란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뒤돌아 뛰었다.

“도망가?”

“뛰어!”

쌍둥이도 땅을 박찼고 고욤은 바로 앞으로 다가온 함정을 내다봤다. 검은 돌 여러 개로 표식을 해 놓은 곳에 노란색 마법구슬이 보였다. 힘껏 달려가 구슬을 밟아 깨뜨리면서 훌쩍 뛰어넘었다. 착지와 동시에 발밑이 물렁해지는 걸 느끼며 앞구르기로 자리를 피했다.

‘됐어!’

데굴데굴 구르다 휙 몸을 일으키니 아니나 다를까 쌍둥이가 바로 뒤쪽 함정에서 달음질을 멈춘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뭐야? 왜 이래?”

“어? 어어!”

땅이 늪으로 변하고 있었다. 두 발은 이미 정강이까지 빠져들고 있었고, 아무리 힘을 내 다리를 꺼내려 해도 빨아들이는 힘을 이겨 낼 수 없었다.

얼굴이 붉어진 쌍둥이는 금세 허리까지 빠져들었고, 고욤이 함정 앞에 서서 비죽 웃는 그때는 가슴을 지나 목까지 들어가 버렸다.

“살려 줘.”

라람의 말에 고욤은 함정의 끝부분에 박혀 있는 조그마한 단검을 뽑았다. 그러자 늪이 거짓말처럼 굳어 버렸다.

쌍둥이는 땅 위로 머리와 두 팔만 내놓은 모습이 되었고, 일순 서로의 위치가 바뀌어 버린 현실 앞에 오크 고욤은 환희를 내뿜었다.

“어때? 기분이 어때? 짐승이 만들어 놓은 덫에 걸린 느낌이 말이야.”

동생 차람은 파랗게 굳어 입도 뻥긋 못했고 형인 라람은 목검을 휘둘러보려 했지만 팔꿈치가 땅속에 박혀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때 오크가 이마의 붉은 피를 닦으며 다가왔다. 손에 쥔 돌도끼를 들어 올리자 라람이 놀라 입을 벌렸다.

“자 잠깐!”

“사 살려 줘. 사과할게. 제발 살려 줘. 집에 부모님과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동생들이….”

퍽!

고욤의 돌도끼가 동생 차람의 이마를 내리쳤다. 피가 불끈불끈 솟아 그 얼굴에 흘러내렸다. 라람이 사색이 다 된 얼굴로 그런 동생을 돌아보았고, 차람은 흘러내리는 피를 입바람으로 불어 내며 다시 고욤을 쳐다보았다. 눈물이 뜨거웠다.

“살려 줘….”

“네 피도 붉구나?”

고욤의 대답이었다.

“나도 붉어. 그리고 난 아름다운 인간 여자가 되고 싶어. 너희들의 영혼이 필요해.”

봄빛이 완연한 하늘 아래 쌍둥이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석상으로 변했다. 그리고 두 영혼은 별빛으로 화해 오크의 손에 들린 가죽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이제 둘.’

마지막 두 개만 더 찾으면 인간 여자가 될 수 있었다.

* * * * * * *

고욤은 하프오크였다. 반인간 반오크….

오크가 인간 여자를 겁탈해 태어난 생명체. 그런데 보통은 인간과 오크의 외모가 섞이고 성격과 지능 또한 뒤섞이는데 반해 오크 고욤은 지능이 거의 인간 수준이었다. 한마디로 오크의 외모를 가진 인간 여자와 같았다.

그러나 고욤은 태어나자마자 산속에 버려졌고 그걸 산적들이 가져가 재미 삼아 짐승처럼 키웠다. 그리고 몇 년 후 오크의 습격을 받은 산적들이 전멸하면서 고욤은 동족들의 다정한 표정을 따라 발카람의 깊은 산악지역 오크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고욤은 천부적인 인성으로 도저히 오크와 함께 살 수가 없었다. 어리석고 더럽고 거친 오크의 세계 속에서 인간 여성의 감성을 지닌 고욤은 점차 외톨이가 되었고, 결국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배척을 받아 인간과 오크의 경계 지역에서 살게 되었다.

점점 인간 세계를 동경하며 사람들의 마을을 구경하기도 했지만 오크를 닮은 모습으로는 결코 그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때론 약초꾼들과 마주쳐 돌 세례를 받고, 때론 마을 아이들이 만들어 놓은 덫에 걸려 짐승처럼 두들겨 맞고, 또 어떤 때는 사냥꾼에게 쫓겨 화살 여러 개를 몸에 매단 채 절벽을 굴러떨어지기도 했다.

또 다른 산적들에게 붙잡혀 개보다도 못한 모욕과 매질과 갖은 궂은일을 몇 년간 하다가 도망치기도 했는데….

그러면서 쌓인 울분과 증오로 차라리 죽음을 택하려 지하 동굴 속을 하염없이 걷던 중 가루모스를 만난 건 어쩌면 운명이었을까.

가루모스는 고욤의 영혼이 오크가 아님을 한눈에 알아보았고 이어 달콤한 제안을 했다. 열 가지 심부름을 해 주면 소원을 이루게 해 주겠다는 것.

가루모스는 고욤의 마음속 여성의 모습을 허공에 투영시켰고, 숲에서 훔쳐본 어느 귀족 아가씨의 모습을 늘 마음에 담고 있던 고욤은 그 모습으로 탈바꿈시켜 주겠다는 가루모스의 약속에 모든 운명을 걸기로 했다.

“고욤, 힘을 내라. 내가 다시 세상으로 나가는 날, 너의 간절한 소망도 이루어질 테니까.”

오크를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영혼이 인간인 하프오크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에라도 가능했지만 가루모스는 고욤에게 그 희망만을 안겨 줬다.

“나와 함께 꿈을 이루자꾸나.”

“꿈….”

“그래, 너와 나의 꿈.”

한때는 세상을 움켜쥘 뻔했던 늙은 마법사의 눈웃음에 오크 고욤은 꿈만 같은 희망이 부풀었다.

밤하늘에 달빛이 밝았다.

고욤은 땅속 깊고 깊은 동굴에서 나와 어두운 숲길을 걸었다. 한참을 걸어 당도한 곳은 폐허만 같은 숲속의 궁전….

한때는 화려했을, 그러나 이젠 모두 꿈처럼 사라진 모습들이 먼지와 지난 가을의 낙엽들 아래 적막했다.

‘설렌다….’

무너져 내린 벽들과 훤히 열린 천장들….

휘어져 올라가는 계단 위로 수많은 하늘의 별들이 소곤거렸다.

‘이제 마지막 영혼 둘….’

고욤은 왕좌에 앉아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보았다. 보석을 뿌려 놓은 것만 같은 천공 위에 마음속의 꿈을 떠올려 보였다.

‘아름다운 인간 여자….’

꿈이라도 좋았다. 그저 이 순간의 설렘이 행복하기만 했다.

‘여왕….’

상상만으로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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