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82화 (182/182)

특별 외전 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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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수영 대회는 파르딘의 우승으로 끝났다. 1위를 하던 에르안이 아홉 바퀴째에 경기를 포기하고 내가 있는 가제보로 성큼성큼 들어와 웨이터의 팔을 잡아챘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라베리 섬의 웨이터들에 대해 지나치게 경계하고 있던 그를 폭발하게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이 아주 섬뜩해서 다리가 덜덜 떨렸다고 웨이터는 아주 나중에서야 진술했다.

그 사이 파르딘은 안정적으로 열 바퀴를 돌아 우승을 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에나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에르안은…… 음, 그 물속에서도 저한테 시선을 계속 두고 있을 거라서요.”

“그, 그게 가능한가요? 보통 전력으로 수영할 때에는 밖이 잘 안 보이는데.”

하지만 에르안에게는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대체 왜……. 웨이터가 용납할 수 없을 만큼 집적거린 것도 아닌데요.”

하지만 에르안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금화 하나를 받은 웨이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도망쳤고, 나는 에나에게 빠르게 덧붙여 속삭였다.

“그래도, 아기 이야기를 하기 전에 부모님께 허락받고 싶은 것 아니에요?”

에나의 눈이 커졌다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훌륭한 의사는 다르네요. 친구들 모두 몰랐는데요.”

칵테일을 안 마실 때부터 조금 의심은 했지만 아까 손을 한 번 잡히면서 마력의 운용을 보고 확신했다.

아직 완전히 초기라 어지간히 훌륭한 의사 아니고서야 손 한 번 잡고 난 뒤 알아챌 수는 없겠지만, 내게는 가볍기 그지없는 진찰이었다.

그렇게 수영 행사는 모두의 해피 엔딩으로 끝났다. 에나도, 파르딘도, 그들의 결혼을 확실히 허락해 준 에나의 부모님에게도, 아주 재미있는 구경을 한 관중들에게도, 누군가에게 좋은 일을 하며 뿌듯해하는 내게도, 금화를 받은 웨이터에게도.

아, 에르안에게도 확실한 해피 엔딩이었다.

“미안해요, 에르안. 하지만 에나의 사정이 너무 절실했는걸요.”

“아냐, 리체. 그 와중에 우승해서 너를 난감하게 할 뻔했는데 다행이지.”

나중에 사정 설명을 모두 듣고 난 에르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했다며 내 볼에 입을 맞추었다.

“맞아요. 이것만 해도 좋은 추억이잖아요.”

나는 상냥하게 말하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수영하는 당신이 멋있는 건 확실히 알았거든요.”

내 말에 만족스러워할 줄 알았던 에르안은 오히려 짓궂게 웃었다.

“근데 우승은 못 했으니…….”

그가 눈을 접어 보이면서 느긋하게 칭얼거리는 목소리를 해 보였다.

“위로는 받아야 할 것 같은데.”

“네?”

“너무 부끄러우니, 둘이서 은밀하게.”

어느새 나른한 눈빛 속에 새카만 욕망이 넘실거렸다.

결국 나는 깔깔거리며 웃어 보였다. 역시 에르안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남자였다.

“사실 난 여기서 정말 미칠 것 같거든.”

“뭐가요?”

“이런 원피스를 입고 있는 네가 너무 예뻐서……. 그래서 다른 남자들도 널 보면서 말도 안 되는 욕망을 품을 것 같아.”

“아니, 여기 사람들은 다 이런 거 입고 있는데 뭐가요. 진짜 생각하는 거 이상해.”

“알고 결혼했잖아, 리체.”

에르안이 짙게 웃어 보이며 내 허리를 감았다.

“나 좀 이상한 거.”

그날 밤 기꺼이 단둘이서 은밀하게 오랫동안 내 위로를 받은 에르안은 우승보다도 행복한 밤이라며 나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물론 에르안에게 이 일은 굳이 돌아가서 말하지 말자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그동안 외가의 친척들마저 필사적으로 지켜 온 장인의 아주 작은 자존심을 보존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외전 10.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

사랑하는 엄마에게.

엄마, 처음으로 편지를 써요. 리체예요. 이렇게 펜을 든 건 별게 아니라, 오늘이 바로 ‘부모님의 날’이기 때문이에요. ‘부모님의 날’에는 처음 글자를 배운 아이들이 부모님께 편지를 쓰곤 하잖아요.

올해 유리아가 우리에게 편지를 써 주었답니다. 글자를 배우자마자 즉시 ‘부모님의 날’ 편지를 졸업한 세드리안보다는 조금 늦었죠. 작년에도 도전했는데 철자를 너무 많이 틀려서 인정해 주지 못하겠다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올해는 정말 완벽한 철자로 써 왔더라고요. 어머님께서는 엄청 웃으시면서, 에르안도 여섯 살 때 ‘부모님의 날’ 편지를 완벽하게 썼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그것만 해도 또래보다는 상당히 빠른 편이죠. 세드리안이 저를 닮아서 지나치게 똑똑한 거고요.

물론 철자는 완벽했지만 내용은 작년에 비해 조금 의아한 부분이 많았어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엄마 아빠’라는 말 대신 ‘나름 인간적인 우리 엄마 아빠’라는 말이 들어가 있더라고요.

자식들 앞에서만큼은 완벽하고 싶어 했던 에르안은 몹시 좌절했는데…… 아마 우리가 라베리 섬에 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봐요.

어머님이 요새 세드리안과 유리아의 얼굴을 볼 때마다 좀 민망해하시는 게, 분명히 어머님과도 관계가 있는 것 같아서 깊게는 알아보지 않았어요.

어쨌든 유리아에게 편지를 받고 나서 기분이 참 묘하더라고요. 세드리안 때에는 유리아에게도 받을 테니까 그저 기특하기만 했는데, 이제 이 편지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좀 찡하기도 하고요.

동시에…… 저는 ‘부모님의 날’에 아무에게도 편지를 쓰지 않았던 게 기억났어요. 그때는 너무 어려서 그런지 ‘없는데 뭐 하러 써. 날 버렸다면 원하지 않으실 테고 돌아가셨다면 읽을 수 없을 텐데.’라고 생각했는데 괜히 지금 좀 서러워지더라고요.

아빠한테 쓸까 하다가, 아빠한테 쓰면 3박 4일 동안 엉엉 우시며 식음을 전폐하실 것 같아 그만두었어요. 그리고 라베리 섬을 갔다 와서 그런지 요즈음 엄마 생각도 많이 나고 해서요.

아빠가 그 말도 안 되는 수영 행사에 참가했을 때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저처럼 황당해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할 정도셨을까요?

그 답을 영영 들을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어요. 어쩌면 이 세상에서 우리 둘만 나눌 수 있는 대화였을 텐데 말이에요.

만일 그 나쁜 사람들이 우리 가족을 노리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종종 이 주제로 에르안과 이야기를 나누곤 하는데요, 에르안은 어쨌든 결국 우리는 결혼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요.

우리는 태중 약혼한 사이고, 엄마와 어머님은 절친한 사이시니 어릴 때부터 자주 보았을 거라고요. 일찍 만나면 일찍 만났을수록 에르안은 저를 엄청 좋아했을 거고 어머님하고 합심해서 어떻게든 빨리 저랑 결혼할 수 있도록 노력했을 거래요.

음…… 그 나쁜 사람들이 없었다면 에르안의 인성도 처음부터 아주 훌륭했을까요?

어릴 때부터 방치당하지 않는 것은 물론 나쁜 사촌에게 휘둘리지도 않았을 테고, 성격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사춘기 시기에 혼자 멀리 떨어져 있을 필요도 없었을 테니 말이에요. 그렇다면 아빠의 반대도 극심하지 않아서 결혼이 조금 더 쉽지 않았을까…….

이 이야기를 아빠한테 해 보았는데, 아빠는 ‘어쨌든 너랑 결혼하는 놈이면 일단 다 극도로 싫어했을 거다’라고 하더라고요. 인성이 좋은 놈이면 좋은 놈이라서 어디 호구 잡히지 않을까 하며 걱정했을 거라고요. 참 까다로우시죠? 아마 엄마랑 최초의 부부 싸움을 했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도 하셨어요.

그런 걸 보면 엄마는 에르안을 좋아했을 걸 알고는 있나 봐요. 물론 그런 상상을 하면 조금 슬프긴 하지만…… 아무리 상상한다고 해도 현실이 될 수는 없겠죠.

엄마. 비록 에르안은 여전히 좀 이상하고 아이들도 슬슬 부모의 단점을 알아차린 모양이지만, 그래도 저는 아주 행복해요.

한때에는 제 스스로가 아주 원망스러웠어요. 괜히 제가 엄마 아빠에게 와서, 엄마도 돌아가시고 아빠도 슬프게 해 드린 것 같아서요.

하지만 제가 자식을 낳아 보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걸 바로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엄마도, ‘태어나서 미안해’ 같은 말보다 다른 말이 듣고 싶을 거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요.

엄마, 저는 너무 행복해요. 이 말을 하는 게 죄송하다는 마음이 들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엄마가 가장 제게 바라고 있을 말 같아서 떳떳하게 할게요.

에르안은 한결같이 저를 너무, 지나치게, 과할 정도로 사랑해 주고요…… 여전히 잘생겼어요. 아마 나이가 들어도 잘생길 것 같아요. 게다가 어머님과 아버지, 고모와 할아버지도 늘 건강하게 제 옆에 있어 주세요.

제국의 모든 사람들이 천재 의사 리체를 다 알아요. 워낙에 공적이 뛰어나서 이번에 제국에서 표창장을 받았을 정도니까요.

다 엄마 덕분이에요. 엄마가 저를 필사적으로 살려 주셔서 제가 이렇게 멋진 삶을 살게 되었어요.

바구니에 실려 내려간 엄마 아빠의 작은 아기는 세르이어스 영지 구석의 보육원에서 나름 잘 살아남아서, 많은 생명을 구했답니다. 제 자랑 같지만 사실 전 엄청난 일을 한 거죠. 반란이 일어났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테니까요.

사실 제가 착하고 이타적이어서 세르이어스 영지를 떠나는 대신 에르안을 구하기 위해 공작성에 들어온 거잖아요. 그때 그냥 도망갔다면, 아마 제 삶은 아주 많이 달라졌겠죠. 엄마에게 이렇게 편지도 못 썼을 거예요.

만일 그때부터 지금까지 제 삶이 하나의 이야기라면, 그때 도망가지 않은 대가로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 이야기가 이토록 떳떳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엄마, 수정 구슬에서 엄마의 얼굴을 보고 난 다음에 내내 생각했어요. 어쩌면 엄마가 하늘에서 걱정하는 마음으로 저를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다고 말이에요. 아니, 꼭 그럴 것 같더라고요. 사실 의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걸 믿고 싶을 만큼 감성적이게 되었답니다.

사실은 많이 보고 싶어요, 엄마.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그래요. 많은 사람들이 엄마를 소중하게 기억하면 기억할수록.

하지만 엄마가 보고 싶은 만큼 저는 더 열심히, 행복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면서 오래오래 살게요.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혹시나 우리가 만나게 되면 엄마 덕분에 참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고 자랑스럽게 고백하면서 꼭 안아 드릴게요.

우리의 이야기는 그렇게 마무리가 되어 또 다시 새롭게 시작될 거예요. 서로 닿을 수 없는 다른 세상에 있지만, 그동안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봐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를 보고 계시는 그곳이 어디든, 어느 상황에 계시든 꼭 행복하세요. 사랑합니다.

열세 살의 리체보다

훨씬 더 감성적이게 변한

리체 올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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