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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81화 (181/182)

특별 외전 21화

“리체, 혹시 흥미가 있으신가요? 나이 드신 분들 중 자세히 알고 있는 분도 계시긴 할 텐데 한번 자세히 여쭤볼까요?”

에나가 친절하게 말했다. 나는 차분하게 거절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상하게 더 알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이 일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나이 드신 분을 불러왔다가는 서로 민망한 일이 벌어질 듯했다.

친척들이 굳이 내게 이야기하지 않은 걸 보면 누구나 그 일을 아주 우습다고 여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마 내가 기분 상할까 봐 말하지 않은 것 같은데…… 나름대로 배려해 준 셈이었다.

심지어 아버지도 이 일에 대해서는 이제껏 말해 주지 않았는데, 여기서 두고두고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줄은 알고 있었나 보다.

아니, 이곳에 굳이 오지 않겠다고 한 것도 어쩌면 그 일 때문인 건가!

라베리 섬의 모든 사람들이 아빠가 엄마를 지독하게 사랑했다는 데에 아무런 의심이 없다는 것도 그렇고…….

‘이상하게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인데.’

어쨌든 그런 전례가 있었으므로 다들 에르안의 참가를 별 변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였다. 사실 아빠와 에르안의 운동 신경은 하늘과 땅 차이인데 순간적으로 불안해졌다.

서서히 그 화제는 마무리되었고, 에나의 친구 중 하나가 이미 칵테일을 많이 마셔서 벌게진 얼굴로 물었다.

“에나, 왜 이렇게 안 먹어? 매일 칵테일 중에서도 도수 높은 것만 골라 마시던 애가.”

“그냥…… 좀 안 먹히네.”

“왜? 파르딘이 우승 못 할까 봐?”

에나의 친구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 친구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비밀인데, 파르딘은 에나 애인이거든요. 에나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데 스무 살이 되자마자 에나한테 프러포즈했다지 뭐예요.”

“어머, 그렇군요!”

남의 사랑 얘기는 또 재미있는지라 내가 흥미롭게 추임새를 넣었다.

에나가 볼을 붉히며 민망한 듯 중얼거렸다.

“……아직 부모님께서 반대하고 계신지라…… 자랑스럽게 말하기가 좀 그래요.”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파르딘에게는 부모님이 없어서, 동등한 위치에서 저희 부모님을 설득해 줄 어른들도 없거든요.”

“에이, 그래도 오늘은 허락해 주시겠지.”

에나의 친구는 눈을 찡긋하며 칵테일을 들이켰다.

“설마 수영 행사 우승자를 사위로 안 삼으실까.”

나는 대회가 시작하기 전 그 짧은 순간 동안 에나와 그 애인에 대해서 꽤 많은 정보를 알게 되었다. 파르딘의 부표는 5번, 그가 바로 여기저기서 우승 후보로 손꼽던 청년이라는 것까지도.

그동안은 파르딘과의 연애를 숨겨 왔지만, 오늘에서야 정식으로 친구들에게 말한 이유도 바로 모두가 파르딘의 우승을 점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파르딘은 아주 어릴 때부터 에나와 결혼하기 위해 틈만 나면 수영을 아주 열심히 연습한 순정파라고 했다.

“심지어 에나 아버님이 우승자 출신이시잖아. 오늘 파르딘이 우승하면 당연히 받아 주시겠지.”

“근데 넌 왜 이렇게 안 예쁜 옷을 입고 왔니? 단상에 올라서야 될 수도 있는데. 몸매도 좋은 애가 왜 이렇게 포대 자루 같은 옷을 입고 왔대?”

“부모님 앞에서도 잘 어울리는 한 쌍으로 보여야 할 것 아니야!”

친구들이 모두 다 달라붙어 한 소리씩 거들었다.

지금까지는 파르딘이 너무 어리다며 에나의 부모님이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라베리 섬에서 수영 대회의 우승자를 사위로 삼는 것은 엄청난 영예이자 자랑거리였다. 그래서 이번 수영 대회에서 우승을 하여 에나의 부모님에게 인정받는 것이 그 커플의 소망이라고 했다.

나는 그제야 에나가 나와 에르안을 수영 행사에 초청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파르딘이 에나에게 영광을 바치는 그 순간에, 세르이어스 공작 부부도 참석하고 있었다는 것이 나름대로 그들에게 큰 의미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에나가 친구들과 함께 있는 보라색 가제보는 가장 바다와 가깝게 위치해 있었다. 그런데 그 속도 모르고 에르안은 우승을 하겠다며 기어코 출전을 한 것이었다.

이미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아내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겠다는 일념 하나로…….

순간 불안해졌지만 나는 다시 한번 속으로 에르안이 오래도록 수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려 보았다.

‘아무리 모든 운동을 지나치게 잘하고 매일 같이 체력 훈련을 했어도 설마 수영 대회에서 우승을 하지는 않겠지.’

나는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불안감을 꾹 누르며 친절하게 말했다.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꼭 잘되었으면 좋겠어요.”

“고마워요. 사실 좀 간절하거든요.”

에나가 씩 웃으며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손을 잡힌 나는 무의식적으로 마력을 파악하다가 살짝 놀란 뒤 그녀의 손등을 토닥여 주었다.

‘간절할 만하네.’

그 사이 호각이 크게 울리고 대회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에나는 물론이고 내 표정까지 사색이 되기 시작했다.

‘뭐, 뭔데! 왜 저렇게 잘하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에르안은 수영을 정말 잘했다.

아니, 어느 정도 잘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잘할 줄은 정말 몰랐다. 얼마나 잘했느냐면…… 그 많은 참가자들 중에서 파르딘과 호각을 다툴 정도로 잘했다.

처음에는 파르딘이 더 빨랐지만 네 바퀴째부터는 집요하게 간발의 차로 따라붙더니 다섯 바퀴에서는 완전히 앞서고 말았다.

경기가 시작될 때만 해도 모두가 파르딘의 우승을 점치며 왁자지껄하게 떠들었던 우리 가제보에 순간적으로 침묵이 흘렀다.

‘안 돼!’

심지어 파르딘의 지구력이 에르안보다 약한지 속도가 점점 더 떨어지고 있었다. 내가 이 사태를 조금이라도 예상했었다면 절대 내보내지 않았을 텐데 아주 난감했다.

아무리 우리의 추억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남의 결혼보다는!

게다가…… 지금 에나는…….

정적이 흐르던 가제보 안에서 천천히 대화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세, 세르이어스 공작님께서…… 저, 저, 정말 수영을 잘하시네요?”

“어…… 음…… 육지 사람이 저렇게 수영을 잘하는 건 처음 봐요…….”

파르딘과 에르안 외의 다른 참가자들은 너무 차이가 많이 나서 볼 필요조차 없었다.

가제보 안에 있던 다른 아가씨들도 흥미롭긴 하지만 참 난감하다는 얼굴로 에나와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물론 나와 에나의 얼굴은 둘 다 좋지 못했다.

그리고 일곱 바퀴째가 되었을 때 나는 결심했다. 에르안은 여기서 우승하면 안 된다고.

“에나.”

나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에나를 보며 결연하게 말했다.

“걱정 말아요. 파르딘이 우승할 거예요.”

“하, 하지만…….”

바다는 꽤 멀었고 대회는 한창 진행 중이었다. 에나는 ‘뭘 어떻게?’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는 해결할 수 없는 일에 장담하지 않아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나는 확신 어린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일단 종 좀 쓸게요. 이 종 울리면 여기로 웨이터가 오는 것 맞죠?”

에나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종을 울렸고, 가까이 있던 웨이터 하나가 즉시 다가왔다.

“예,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보통은 칵테일을 주문할 용도로 웨이터를 불렀다. 하지만 나는 다른 의도가 있었으므로, 재빨리 웨이터에게 부탁했다.

“저 3번 부표의 남자가 부표를 돌 때, 제 귓가에 손을 대고 뭐라고 속삭이는 척 좀 해 주세요. 끈적이게 웃어주면 더 좋고요.”

“……네?”

“그리고 미리 미안해요. 팔 정도는 잡힐지도 모르는데 괜찮을까요?”

웨이터는 그 황당한 요구에 살짝 얼빠진 표정을 해 보였으나, 내가 재빠르게 금화 하나를 찔러 넣어 주자 눈빛까지 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멱살을 잡혀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계약은 성사되었다.

에르안이 아홉 번째로 부표를 돌아 다시 해안가로 머리를 돌렸을 때, 웨이터는 내 귓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이는 척을 했다.

“어, 어어어?”

그리고 웨이터가 허리를 숙이고 내게 다가오자마자 헤엄쳐 오는 에르안의 속도가 미친 듯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다 놀라서 수군거렸다.

“아직 아홉 번째인데? 마지막 스퍼트를 지금 올리면 어떡해?”

“설마 세르이어스 공작님께서 몇 바퀴 도셨는지 헷갈리신 거야?”

“아니면 애초에 아홉 바퀴라고 알고 계신 건가?”

그리고 에르안은 곧바로 당황한 안내인의 말을 듣지도 않고 백사장을 성큼성큼 걸어 바다에서 아예 빠져나와 버렸다.

“저, 저러면 실격 아니에요?”

“열 바퀴를 못 돌았으니까…….”

관중들은 놀란 눈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숨을 죽인 채 백사장을 성큼성큼 가로지르는 에르안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을 뚝뚝 떨어트리면서 걸어 나오는 에르안의 모습은 색기가 넘쳤으며 심지어 아름다웠으나……. 리체의 곁에 있던 웨이터를 노려보는 표정이 너무 섬뜩하여, 마치 바다 지옥 속에서 걸어 나오는 악마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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