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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80화 (180/182)

특별 외전 20화

* * *

젊은이들이 1년 내내 고대하는 행사답게, 수영 대회가 벌어지는 해안가는 아주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에메랄드빛의 바다가 밀려드는 하얀 백사장에 색색깔의 가제보 천이 펄럭였다. 내리쬐는 햇살 아래 수영복을 입은 남자들이 구릿빛 피부를 뽐내며 몸을 풀고 있었다. 솔직히 꽤 장관이었다.

그리고 에르안이 그 수영 대회에 참가한다는 것을 알아챈 건 바로 대회 당일이었다.

“이, 이,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에르안?”

나는 수영복 차림의 에르안을 보며 당황해서 물었다.

“리체, 난 남부에서 5년을 보냈어.”

에르안의 잘 짜인 근육이 햇빛 아래에 반짝거렸다. 새파란 바다를 뒤에 두고 에르안이 소년처럼 짓궂게 웃었다.

“수많은 해적들을 바닷속에 처넣기도 했고 말이야. 바다 수영은 자신 있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나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내가 당황한 이유를 순서대로 정리하여 말했다.

“일단 참가 신청은 모두 끝났다고 들었는데요.”

“돈과 권력이면 이깟 비공식적인 행사에 참가자 한 명 늘리는 건 일도 아니야.”

“그리고 보통은 미혼의 남성이 기억에 남는 프러포즈를 위해 참가한다고 하던데요.”

“그렇다고 해서 기혼의 남성이 참가하지 말라는 법은 없더라고.”

“보통은 스무 살 전후의 남자들이 많이 출전하는 것 같던데요.”

“그건 그냥 관습일 뿐이지 공식적인 나이 제한이 있는 건 아니더라.”

에르안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보아하니 외부인이 참가하는 게 처음 같지도 않더라고. 주최측에서 딱히 난감해하지도 않던데?”

“……정말요?”

“그렇다니까. 리체, 잘 생각해 봐. 여기에서 평생의 추억거리를 가져갈 기회잖아?”

나는 그제야 에르안이 이 행사에 부득불 참석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냥 그런 물질적인 걸로 기념하기보다는…… 여기서만 만들 수 있는 특별한 추억이 더 기억에 남는 법이니까요.”

그래, 결국 내가 잘못한 것이다.

에르안은 내 말을 절대로 흘려 듣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선명하게 기억해서 문제였다.

“별다른 건 없고…… 그래도 많은 사람들 앞에 자신의 레이디에게 영광을 바칠 기회가 주어지지요. 그것만 해도 커플들에게는 평생의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겠어요?”

에나가 그 소리를 했을 때부터 에르안은 이미 결심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섬의 젊은이들처럼 편안한 수영복 차림을 하고 있는 에르안을 보며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제국의 대귀족, 세르이어스 공작께서 이렇게 망측한 차림으로 평민들도 신청하는 대회에 전력을 다해 참가하다니…….

‘완전 보기 좋은걸.’

나는 햇살에 반짝이는 에르안의 단단한 몸을 빠르게 눈에 담으며 말했다.

“라베리 섬 젊은이들이 그래서 1년 내내 기대하는 행사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건 그 인간들 사정이고. 난 라베리 섬 남자들이 아주 마음에 안 들더라고. 엿 먹일 수 있다면 아주 좋지.”

“하지만 그래도…….”

“왜, 내가 우승할 것 같아? 그래서 그래?”

에르안은 여유롭게 말했다.

“그럼 나를 이기면 될 일이야. 그럼 그들에게도 평생의 추억거리가 되겠지. 세르이어스 공작을 이겼다고.”

듣고 보니 또 맞는 말이었다.

라베리 섬은 어쨌든 바다로 둘러싸인 곳이었고 이곳의 젊은이들은 숨 쉬듯이 수영하며 살았다. 그러니 몇 년간 수영이라고는 해 보지 않은 에르안이 무조건 우승한다고 할 수도 없었다.

물론 이 많은 남자들 사이에서 몸은 압도적으로 좋다만…….

나는 단단한 에르안의 몸을 다시 한번 눈짓한 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왜, 리체.”

그리고 내 눈빛을 놓칠 에르안이 아니었다.

“멋있어?”

그가 긴 눈꼬리를 유혹적으로 휘어 보이며 한 발자국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여하튼 그는 내 시선이 그에게 닿을 때를 놓치지 않았다.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그에게서 벌써부터 바다의 청량한 냄새가 느껴졌다.

“우승하고 오면 더 멋있겠지?”

장난스럽게 웃는 에르안의 얼굴에서 아주 오랜만에 호승심이라는 것이 번득였기 때문에 나는 굳이 말리지 않기로 했다.

생각해 보니 에르안보다 훨씬 젊은, 스물을 갓 넘긴 청년들이 대다수인데 설마 에르안이 우승하겠나 싶어서였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에르안이 우승해서 라베리 섬의 남자들을 모두 실망시키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것조차 유난으로 느껴졌다.

“우승 못 해도 위로해 줄게요.”

여러 변수를 생각해서 합리적으로 결론을 내린 나는 그의 어깨를 도닥여 주며 빙긋 웃었다.

“그러니까 살살 해도 돼요.”

“네가 다른 수영하는 남자들에게 눈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만 열심히 할게.”

“참석할게요, 에나. 아주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제가 수영을 전혀 못하다 보니, 수영하는 남자들을 보면 참 멋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러고 보니 에나의 앞에서 그런 소리도 했었다. 아주 그냥 에르안보고 수영하라고 떠민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내가 너무 허술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에르안과 재미있는 추억이라도 쌓을 겸 나는 힘내고 오라고 그의 볼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위험한 건 아니지요?”

혹시 몰라서 내가 걱정스럽게 묻자 에르안이 싱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응, 깊은 데까지는 가지도 않는다더군. 저기 부표들 보이지? 저기까지 왕복을 열 번 하는 거래.”

“열…… 번이요?”

절대적인 속도도 중요하지만 지구력도 큰 변수가 될 만큼 상당한 거리였다.

게다가 왕복이라니, 심지어 지루할 것 같은데…….

“나는 3번 부표야. 듣자 하니 5번 부표를 배정받은 남자가 강력한 우승 후보라던데.”

그러니까 부표를 하나씩 배정받아서 해안선까지 왕복을 하는 형식인 것 같았다.

“여섯 달 전에 스무 살이 되었다나. 어쨌든 애송이지.”

어쨌든 그 강력한 우승 후보는 에르안보다 한참 젊다는 뜻이었다.

그때 선수들을 부르는 호각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고, 에르안은 내 뺨에 한 번 더 입을 맞추고 하얀 백사장을 달려갔다.

* * *

“리체! 어서 와요.”

약속한 대로 에나가 있는 보라색 가제보로 들어가자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이해 주었다.

“안녕하세요, 에나.”

나 역시 반가운 어조로 인사했다.

“말씀하셨던 것처럼 정말 행사가 크네요.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요.”

가제보 안에는 에나 외에도 몇 명의 아가씨들이 경기 시작 전부터 칵테일을 마시며 즐겁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라베리 섬은 좁았기에 나 역시 거의 다 한 번씩은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눈인사를 주고받으며 그들 사이에 끼는 것은 별일이 아니었다.

에나의 친구 중 하나가 나를 보며 먼저 살갑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세르이어스 공작님도 참가하신다면서요.”

“그러게요…… 저도 오늘 알았네요.”

나는 머쓱한 얼굴로 웃었다.

스무 살의 청량한 남자들 속에 20대 후반의 유부남이 부득불 끼었다는 게 또 새삼 민망했다. 에르안이 수영복까지 입고 준비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귀빈이라며 초대해 준 에나에게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가제보에 있던 여인 중 하나가 재미있다는 듯 덧붙였다.

“인상이 좀 무서워서 다가가기가 힘들었는데 굉장히 유쾌하신 분인가 봐요! 이런 행사도 즐기시고 말이에요.”

유쾌……하다기보다는 좀 나한테 미쳐 있는 것뿐인데 그런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행사를 즐긴다기보다는 진심으로 우승을 노리는 눈빛이었는데…….

물론 모두가 다 에르안의 우승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어쨌든 수영만큼은 섬에서 나고 자란 남자들이 훨씬 더 잘할 것이라고 누구나 다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 한 명도 예의상으로라도 ‘공작님이 우승하실 수도 있겠네요.’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뭐, 외부인이 수영 행사에 참가한 게 처음은 아니에요.”

에나가 태연하게 말했다.

“꽤 오래전에도 한 번 있었다고 들었어요. 그 사람도 유부남이었다고 들었는데.”

“어머, 정말요?”

“저희 부모님이 하는 말을 예전에 엿들은 적이 있어요. 아마 그 남자가…… 라베리 섬 여자들에게 수영 대회 우승자들이 영광을 바치는 게 굉장한 의미라는 이야기를 어디서 듣고 나서 막 떼를 써서 억지로 참가 명단에 자기 이름을 집어넣었대요. 아내한테 뭐든지 해 주고 싶다나?”

아주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그런 쓸데없이 미친 열정을 가진 사람이 또 있었단 말인가!

에르안이 주책맞은 것 같아서 속으로 민망해하던 나는 다행이라는 듯 반색을 했다.

“그렇군요. 에르안이 처음이 아니었다니…….”

아까 에르안도 외부인이 참석한 게 처음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저 아무렇게나 대는 핑계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에르안 말고 또 그런 짓을 하는 외부인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지어 떼까지 써서 억지로 참가 명단에 집어넣었다니 정말 선구적인 진상이었다.

‘어쩌면 다행이지. 그 진상 분이 계셔서 에르안이 좀 묻혔을지도…….’

내 표정이 자연스럽게 풀어지기 시작했다.

“유부남에 외지인, 갑작스러운 참가…… 참 에르안과 비슷한 사람이네요.”

“네, 아내가 라베리 섬 출신이라서 잠시 놀러 왔다가 참석했다고 들었어요. 30년 전인가? 하도 오래전 일이라 다들 자세히는 모르는데…….”

에나가 기억을 더듬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30년 전 일이라니 당연히 잘 모를 만도 했다.

나름 라베리 섬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인지 옆에서 그녀의 친구가 거들었다.

“나름 체격이 좋아서 다들 기대했는데, 결국 꼴등 했다지!”

“맞아. 그 후에 대륙 사람들 몸이 아무리 튼튼해도 수영하고는 별개라는 걸 알게 되었다며.”

아, 그런 전례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에르안의 참가를 그냥 재미있는 일 정도로 치부하면서 담담하게 반응했던 거구나.

체격만 보자면 에르안은 수영이 아니라 철인 3종 경기에 나가도 쉽게 우승할 것 같은 외양이었으니까.

“대륙 사람이 참가한 것 자체가 아주 드문 일이라서 나름 재미있는 사건이었다며.”

에나와 친구들이 재잘재잘 떠들었다.

나는 화제가 에르안에게서 옮겨간 게 다행스러워서 함께 깔깔대며 웃었다. 모두가 에르안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 게 오래전 그 남자 덕분이라고 생각하면 그 사실이 아주 고마워질 지경이었다.

“음…… 근데 그 남자가 되게 훌륭한 의사였다던가? 체격에 비해 딱히 몸 쓰는 직군은 아니었었나 봐.”

낄낄거리며 에르안만큼이나 주책인 그 유부남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내 얼굴이 살짝 굳었다.

잠시, 의사……라고?

“외알 안경도 그때 바다에서 잃어버렸다고 들었어! 아주 웃겼지.”

“근데 처음부터 처졌는데도 불구하고 아내를 위해 완주하셨다며.”

대략 30년 전의, 라베리 섬 출신의 아내를 둔, 대륙의 체격은 좋지만 운동 신경은 영 꽝인 남자……. 심지어 외알 안경을 쓴 의사……. 근성 있는 팔불출…….

객관적으로 볼 때 그런 사람이 둘이나 있을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고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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