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79화 (179/182)

특별 외전 19화

외전 9. 라베리 섬

“오랜만에 둘이 여행 오니까 좋네요. 옛날 생각도 나고요.”

라베리 섬은 대륙에서 가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에르안과 나는 결혼식에 참석하고 난 뒤에도 배가 뜰 때까지 며칠 머무르기로 했다. 내가 뱃멀미를 하는 체질이었기 때문에 섬에서 충분히 쉬었다 가야 한다는 에르안의 주장 때문이었다.

그것도 맞는 말이었고, 어쨌든 라베리 섬은 자주 올 수는 없지만 내 외가였기 때문에 온 김에 친척들에게 인사도 다녀야 했다.

라베리 섬은 좁아서 사람들끼리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그래서 내 또래의 친구들도 꽤 많이 생겼다. 그렇게 수도에서 벗어나 이런 여유로운 생활을 하다 보니 정말로 살짝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주 오래 머무는 것은 아이들 때문에 안 될 일이었지만 말이다.

“아빠도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러게.”

얼굴도 모르는 친척이었으나 어쨌든 엄마 쪽의 결혼식이었기 때문에 아빠에게도 같이 오자고 했지만, 아빠는 다소 난감한 표정으로 거절했다.

애초에 아빠는 우리가 라베리 섬에 갈 때마다 절대 합류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엄마의 친척들이 아빠에게 적대적인가 했는데 직접 와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좀 안쓰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던데 아빠 혼자서 피하는 느낌이었다.

다들 ‘아니, 그렇게 아내를 사랑하던 사람인데 얼마나 슬프겠냐.’ 같은 반응인 걸 봐서 엄마의 친척들은 아빠가 엄마를 엄청나게 사랑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견이 없어 보였다.

‘아니, 대체 얼마나 절박하게 사랑했으면 라베리 섬 사람들까지 아빠의 순정을 다 알고 있는 거야?’

여하튼 그래서 이번에도 나와 에르안만 라베리 섬에 오게 되었다.

“이거…… 페렐르만 자작저 정원에 있는 나무들과 아주 유사한데?”

에르안은 라베리 섬에서 자라는 특이한 식물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고 내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 저희 어머니가 라베리 섬을 그리워해서 할아버지가 정원 전체를 라베리 섬의 식물들로 채우셨대요.”

“아…….”

에르안이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혹시 부러워? 공작성에 더 큰 규모로 만들어 줄게. 이번 여행을 기념이라도 할 겸.”

“아뇨, 됐어요.”

여기서 고개라도 끄덕였다가는 공작성에 식물원이라도 생길 기세였으므로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런 물질적인 걸로 기념하기보다는…… 여기서만 만들 수 있는 특별한 추억이 더 기억에 남는 법이니까요.”

원래 나는 그런 추상적인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으나, 에르안이 정말 눈이 돌아서 나무라도 뽑아 갈까 봐 일단 되는대로 지껄였다.

“사실 여기는 대륙 어디와도 좀 다르잖아요.”

엄마는 라베리 섬 출신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제국 사교계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고 했다.

그런데 정말 여기 와서 보니 모두가 라베리 섬을 동경할 정도로 확실히 제국의 다른 곳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일단 옷차림부터 확연히 가벼웠는데, 소매가 끈으로만 되어 있는 원피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길거리에서 입고 다닐 수 있는 곳은 전 대륙에서 라베리 섬밖에 없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나도 에르안도 기겁했으나 막상 입고 돌아다녀 보니 더운 날씨에 너무 편하고 시원했다. 그렇게 화려한 꽃무늬가 그려진 끈 원피스를 입고 코코넛 하나를 든 채 해안가를 걷고 있자면 꼭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만 같았다.

“옷부터도 너무 편하고…… 그래서 그런지 더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요.”

당연히 이런 옷을 귀족과 평민이 별다른 차이가 있게 입을 리는 없었다.

의복에서 오는 압박감 역시 생활에 영향을 주는지, 라베리 섬은 다른 지역에 비해 귀족과 평민들 사이에 스스럼이 없는 편이었다.

“너무 자유로워지면 안 돼, 리체.”

에르안은 살짝 못마땅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난 여기 남자 놈들이 너무 미끌거려서 마음에 안 드니까.”

“무슨…… 그냥 저희한테 친절한 거죠.”

“어쨌든.”

남의 섬에 와서 그 특유의 문화를 뭐라고 할 수 없어 크게 난리치고 있지 않지만, 에르안은 이곳의 웨이터들을 특히 마음에 안 들어 했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거나 할 때 커다란 꽃을 귀에 꽂은 남자들이 습관적으로 윙크를 하면 마치 지옥의 문지기 같은 표정을 하곤 했다.

세르이어스의 문지기도 그런 얼굴은 하지 않을 거라고 몇 번이나 말해 봐도 에르안은 그 표정을 고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미 아주 많은 분노를 억지로 꾹꾹 눌러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과 여행 온 귀부인에게 그딴 식으로 대하다니…….”

“그래도 에르안한테도 공평하게 윙크를 해 주잖아요.”

“그게 더 짜증나.”

“뭐…… 그 사람들도 좋아서 하는 건 아닐 거예요.”

에르안의 무시무시한 얼굴을 보며 윙크를 하는 걸 보면 그 윙크가 자본주의적이라는 걸 단번에 통찰할 수 있었다.

이 일에 대해서 외숙부와 한번 얘기해 본 적이 있었는데, 외숙부는 ‘네 아버지도 똑같은 말을 했었지! 눈깔 희번덕거리는 꼴이 아주 웃겼다!’라며 푸하하하 웃기만 했다.

대륙 사람들은 참 예민하다며 서로 낄낄대기까지 했는데, 어쨌든 라베리 섬 사람들에게는 전혀 심각하지 않은 일이라는 뜻이었다. 따라서 에르안이 참는 수밖에 답이 없었다.

물론 에르안은 이런 상황에 정말 면역이 없었다. 수도에서는 에르안이 나를 지나치게 아낀다는 걸 누구나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알아서 모든 남자들이 조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은 워낙에 대륙과 동떨어져 있다보니 그런 소문까지 돌지 않았고, 그래서 지나가는 남자들은 내게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윙크를 해주었던 것이다.

에르안 역시 혼자 못마땅해하면서도 별달리 난동을 피우지 못했는데, 아내의 친정에서 진상짓을 할 정도로 개차반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르안, 혹시…….”

하지만 한결같은 혼자만의 격한 반응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합리적인 추론 하나를 내뱉었다.

“제가 산책을 나올 때마다 함께 나오는 거…… 그 웨이터들 견제하느라고 그러는 거예요?”

“뭐…….”

에르안은 부정하지도 않고 머쓱한 듯 씩 웃었다.

“꼭 저 중 하나는 너한테 집적거릴 것 같아서 마음이 안 놓인단 말이야. 친절한 척하면서 웃고 있지만 이상한 수작이라도 부릴 것 같고, 막.”

과거에 열심히 수작 부렸던 전력이 있어서 그런지 에르안은 더더욱 다른 남자들을 경계했다.

“넌 귀엽고 예쁜 데다가 똑똑하기까지 하니까 아주 불안해.”

“그러는 에르안은요.”

“난 인상이 험악해서 괜찮아.”

“당신은 자기 이해가 참 훌륭해요.”

그렇게 에르안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산책을 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내 또래의 여인 하나가 손을 흔들었다.

“리체! 안녕하세요!”

“어머, 에나!”

다소 펑퍼짐한 원피스를 입고 나타난 에나는 이곳에 와서 내가 사귄 친구 중 한 명이었다. 엄마의 육촌의 사돈 쪽 조카라고 했는데, 결국 남이라는 소리였다. 그래도 사교적인 아가씨라서 나와 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쨌든 붉은 머리카락을 높게 묶은 에나가 우리에게 다가와 싱긋 웃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좋은 시간 보내고 계신가요? 산책 중이신가 봐요?”

“네. 라베리 섬은 정말 아름답네요.”

새파란 바다에는 햇빛이 반사되어 보석처럼 반짝거렸고, 화려한 식물들은 이국적인 색채를 내뿜고 있었다. 왜 그렇게 사람들이 라베리 섬을 최고의 휴양지로 꼽는지 알 것 같았다. 몇 번 오지 않았지만 올 때마다 정말 아름다웠다.

“매일 같이 산책해도 길이 참 좋아요.”

내가 생긋 웃으며 예의 바르게 말했고 라베리 섬에서 나고 자란 에나가 자랑스럽게 웃었다.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노을을 보면서 칵테일을 마시려고 했는데 같이 가시겠어요? 한 잔 사 드릴게요.”

라베리 섬 사람들은 티타임을 잘 갖지 않는 대신 수시로 해안가에서 칵테일을 마셨다.

그러나 당연히 승낙할 줄 알았던 에나가 내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아, 괜찮아요. 사실 몸이 조금 안 좋아서요. 그런데 산책도 좋지만, 혹시 내일 작은 행사에 구경 오실 생각은 없으세요?”

칵테일을 함께 마시는 건 곧바로 무산되었지만 화제는 금방 옮겨갔다.

“작은…… 행사요?”

“내일 바다 수영 대회가 있답니다. 라베리 섬에서는 나름 꽤 큰 행사예요.”

“어머, 바다에서 수영을 하는 건가요?”

나는 즉시 흥미가 생겨서 두 손을 모은 채 물었다.

에나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네. 젊은 남자들이 1년 내내 고대하는 행사라 꽤 볼 만할 거예요.”

“그렇군요. 혹시 어마어마한 상품이라도 걸려 있나요?”

“별다른 건 없고…… 그래도 많은 사람들 앞에 자신의 레이디에게 영광을 바칠 기회가 주어지지요.”

순식간에 실망하는 내 표정을 보며 에나가 급히 덧붙였다.

“그것만 해도 커플들에게는 평생의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겠어요? 라베리 섬에서는 정말 의미가 있는 행사라서, 평생 우승자와 그 영광을 받은 레이디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니거든요.”

보아하니 젊은이들의 혈기 넘치는 행사인 듯했다. 에나는 볼까지 붉혀 가며 적극적으로 말했다.

“세르이어스 공작 부부께서 와 주신다면 아마 우승자와 그 영광을 받을 레이디까지 아주 기뻐할 거예요.”

뭐, 객관적으로 보면 라베리 섬에서 세르이어스 공작 위를 가진 우리는 극도의 귀빈이기는 했다. 워낙 자유로운 분위기의 사람들이라 아주 깍듯하게 대하지 않았을 뿐이지 모두 우리를 존중하고 있었다.

나는 에나의 호의에 감사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참석할게요, 에나. 아주 재미있을 것 같아요.”

“아…… 혹시 제가 부인께 성가신 부탁을 한 건 아니겠죠? 다른 일정이 있으시다거나…….”

“아뇨, 전혀요. 그리고 정말 흥미가 생기는데요? 제가 수영을 전혀 못 하다 보니, 수영하는 남자들을 보면 참 멋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럼 그때 저희 가제보에 오실래요? 함께 구경해요!”

그리고 나는 에나와 다른 신변잡기적인 대화를 나누느라 에르안이 눈을 빛내고 있는 것을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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