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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78화 (178/182)

특별 외전 18화

* * *

리체의 임신을 알게 된 후, 공작성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담담한 사람은 리체뿐이었다.

“출근은 나중에 해라. 완전히 안정기가 되면 말이다.”

아르가는 안정기까지 연구실에 나올 생각도 하지 말라며 곧바로 긴 휴가를 내주었다.

“음…… 이 모빌, 예쁘긴 한데 좀 더 돈을 처바른 것 같은 디자인은 없을까?”

이사벨은 아이를 위한 각종 쇼핑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공작성에 아기 물건이 쌓이기 시작했다.

“에르안, 정신 차리렴. 한 대 때려 줄까? 대체 왜 그런 얼빠진 표정이니?”

에르안은 누가 봐도 어딘가 이상한 표정을 짓고 다녔는데, 이사벨이 진지하게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냥…… 그냥 천국에 있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나중에 그 말을 듣게 된 아르가는 ‘다행히 죽지는 않은 것 같다. 죽어서 천국을 갈 것 같은 인간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평가했다.

어쨌든 모두가 난리인 와중에, 리체는 초기 입덧을 시작했다. 아주 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잠이 많이 오고 기운이 없어 많은 시간을 침대에서 보냈으며 조금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리체, 뭐 먹고 싶은 건 없니? 입덧은 어때?”

이사벨과 에르안은 리체의 침대맡을 열심히 지켰다. 이사벨이 묻자 리체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매일 똑같아요. 음, 먹고 싶은 건…… 포도?”

“잠시만 기다려.”

지금이 전혀 포도 철이 아니라는 건 에르안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곧바로 달려 나가려는 에르안을 붙잡으며 리체가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아니에요. 생각해 보니 딸기인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잠시만 기다려.”

“아닌가? 귤인가?”

“셋 다 가져올게. 잠시만 기다려.”

세 과일 모두 다른 계절에 난다는 것 역시 에르안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리체가 기왕 모둠 과일을 섭취하는 김에 다섯 개를 채워 보겠다며 에르안을 붙들고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이사벨은 간절하게 기도했다.

“제발 리체 닮은 딸…… 제발 리체 닮은 딸…….”

네 번째 과일로 바나나를 고른 리체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머님, 아들일 것 같아요.”

“아들?”

“네, 그냥 느낌이 그래요.”

다섯 번째 과일을 기다리느라 얌전히 손을 모으고 서 있던 에르안은 아들이든 딸이든 일단 좋아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그 사이에 청소를 하던 하인 하나가 끼어들었다.

“아마 딸일 거예요, 마님.”

“응?”

리체가 반문하자 하인이 자신 있게 말했다.

“뭉게구름이 많이 뜨는 달에 임신을 하면 딸이래요. 요새 하늘에 뭉게구름이 아주 많아요.”

“……응? 무슨…….”

리체는 어이없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대기의 상태와 아이의 성별이 무슨 상관이야. 의학적 근거 있어?”

“의학이 밝혀내지 못한 진실이죠. 아, 임신 중 비가 오는 날마다 하루 종일 굶으면 아이가 순해진다는 말도 있잖아요?”

하인의 말에 리체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아이의 성별까지는 그럭저럭 가볍게 낭설로 치부했던 리체가 ‘하루 종일 굶는다’라는 말까지는 그냥 넘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 헛소리는 대체 어디서 도는 건데?”

“그냥 평민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인데요?”

“말도 안 돼.”

리체가 분개하며 말했다.

“나도 평민이었는데 그런 말은 들은 적도 없어.”

하인은 ‘그건 그저 친구가 없어서 그렇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난감한 얼굴로 웃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속설들이 ‘의학이 밝혀내지 못한 진실’이라며 떠돌고 있다니…… 너무 끔찍해. 심지어 비 오는 날마다 임산부를 굶기다니, 그게 무슨 잔혹한 일이야?”

리체는 거의 알레르기 반응이라도 일으키는 것처럼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하인이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하지만…… 진짜 진실일 수도 있잖아요?”

“무슨 소리야? 진실이라면 나 같은 천재가 모를 리 없잖아. 당장 생각 바꿔. 아무래도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의학적 근거 없는 잘못된 속설> 책이라도 보급하자고 해야겠어…….”

처음으로 리체는 자신이 정말 의학적 근거 없는 낭설에 몹시 취약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 그대로 속이 답답해져 왔던 것이다.

“세상에, 생각할수록 너무 화가 나…… 다른 것도 아니고 임산부의 건강이 달려있는데 그런 낭설이 돌다니…….”

그녀의 안색이 불편하다는 것을 재빨리 눈치챈 에르안이 빠르게 끼어들었다.

“리체, 화내지 마. 응? 얼른 다섯 번째 과일이나 생각하자.”

결국 리체는 고심 끝에 다섯 번째 과일을 수박으로 결정했다.

다섯 가지 과일 모두 어떻게든 구해 온다고 방을 나선 에르안은 즉시 하녀장과 집사를 불렀다.

“사용인들 다 교육 똑바로 시켜. 다 물갈이하고 싶은 거 간신히 참았으니까.”

에르안은 더 냉랭한 얼굴로 몇 가지 더 욕설을 섞은 험악한 말을 내뱉었다. 리체의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얼굴과는 딴판이었다.

물론 저 꼴을 처음 보는 게 아닌 하녀장과 집사는 아주 오랜만에 에르안의 쌩한 얼굴을 본다고 생각했다.

요즈음 평상시에도 실실 웃고 다니는 에르안이 저런 싸늘한 표정을 지을 정도면 리체의 심경을 누군가 손톱만큼 건드렸을 게 뻔했다. 손톱보다 더 많이 건드렸다면 이 정도로 끝났을 리가 없으니까.

“절대로 리체 앞에서 의학적 근거가 없는 잡소리 같은 걸 내뱉지 않도록 해. 조금이라도 리체에게 스트레스를 준다면 내 친히 가만두지 않을 테니.”

밑도 끝도 없는 지시였지만 하녀장과 집사는 곧바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적어도 세르이어스 공작령에서는 임산부에 관한 비의학적인 낭설을 아무도 믿지 않도록 단단히 단속해. 의학 교육을 했는데도 그딴 말을 지껄이는 용감한 자들이 있으면 친히 내 앞으로 끌고 오고.”

그리고 사라지는 에르안의 뒷모습을 보며 ‘나름 성격이 많이 좋아지셨네요. 이 정도로 끝나다니.’라고 서로 속삭였다.

* * *

수정 구슬의 상을 본 유리아와 세드리안은 다소 충격받은 얼굴로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첫 임신에 들뜬 성 분위기는 둘째 치고……. 자기가 천재라며 곧바로 하인의 생각을 당장 바꾸라고 하는 사람이 리체고, ‘잡소리’ 같은 상스러운 단어를 내뱉는 사람이 에르안이라니.

사실 칸시아와 이사벨의 눈에는 그저 평범한 광경이었지만, 늘 다정하고 현명한 부모의 모습만 알고 있던 아이들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리체의 짜증과 에르안의 막말……. 생각하지도 못했던 모습이었다. 언제나 다정하고 상냥한 모습만 보여주던 그들의 부모님이…… 지금…….

“얘들아, 잠시만.”

이사벨이 황급하게 상황을 수습하려고 애썼다.

“이때는 리체가 임신을 해서…… 우리 모두 완전히 긴장해 있던 시절이란다. 리체도 예민하고, 에르안도 신경질적이고…….”

물론 유리아와 세드리안은 이미 충격을 많이 받은 상태였다.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짓밟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지.”

칸시아가 휘파람을 불며 산뜻하게 말했다.

“완벽한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겠니, 이것들아. 그 요망한 공작 놈이 돌아와서 땅을 치고 슬퍼하면 좋겠군. 아주 보람 있는 하루였다.”

아이들이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 있는 동안, 칸시아는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워하며 유리아와 세드리안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검지로 살짝 밀쳤다.

“이 맹랑한 것들, 그리고 세상 일은 다 너희들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법도 이참에 배워두렴.”

“자, 잠깐!”

주섬주섬 수정 구슬을 챙기며 자리를 뜨려고 하는 칸시아의 손목을 이사벨이 다급히 잡았다.

“아무리 그래도 공작성 사용인의 물건을 훔치려고 했던 대가는 치르고…….”

아이들이 그제야 기대에 찬 눈으로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부모님에 대한 기대는 깨졌어도, 지금 곁에 있는 이사벨에 대해서는 신뢰가 가득하다는 눈빛이었다.

하긴, 다들 이 공작성의 철통같은 질서를 처음 세운 사람이 이사벨이라고 했으니까.

아무리 일을 안 하려고 빈둥거리고 있다고 해도, 이사벨은 여전히 우아한 맹수와도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온 공작성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정말이지 냉철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은퇴한 노마님…….

“오호라.”

칸시아가 심술 궂게 웃었다.

“이 상황에서 혼자 계속 완벽한 할머니 위치를 지키시고 싶다 이건가?”

칸시아는 이사벨을 약올리듯 수정구슬을 건성으로 한 번 더 쓸었다. 그리고 이사벨조차 깜짝 놀랄 영상이 짧게 재생되었다.

“결혼해 주세요! 제가 정말 잘할게요. 전 공작님이 좋단 말이에요. 결혼해요, 네? 결혼해 줄 때까지 진드기처럼 달라붙어서 안 떨어질 거야! 이사벨은 진드기! 절대 안 떨어지는 진드기!”

바로 에르안과 비슷하게 생긴 검은 머리의 남자의 등에 매달리고 있는 젊은 시절의 이사벨이었다.

“아악! 그만!”

이사벨은 화들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고 아이들은 충격에 빠진 얼굴로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는 고고하며 나른하기 그지 없었던 할머니가……. 지금, 유리아도 안 하는 콧소리를 내고 있다고?

“분명히 과거는 한 번밖에 못 본다며! 마력이 꽤 드는 일이라고 아까 그랬잖아!”

이사벨이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그걸 믿었어? 남동생한테도 뒤통수 맞아놓고서는 아직 순진하시네.”

칸시아는 키득거리며 수정구슬을 더 높이 쳐들었다.

젊은 이사벨의 목소리가 정원에 울렸다.

“사랑은 같은 곳을 함께 보는 거라고 들었어요. 우리 지금부터 한 시간 동안 저 흰 벽을 함께 바라보고 있을까요? 어허, 자기, 고개 돌리지 말아요! 이사벨도 저기 바라보고 있잖아요! 심심하다고요? 이사벨 그럼 생각을 하면 되잖아!”

자기 자신의 이름을 3인칭으로 부르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저 사람이…… 냉혈한으로 유명한 우리 할머니…….

아이들은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젊었을 적의 이사벨이 어마어마한 미인이라는 것으로는 도저히 수습이 안 되는, 눈 뜨고는 못 봐줄 광경이었다.

물론 그 광경을 가장 볼 수 없었던 사람은 이사벨이었다.

“그만해! 그만! 얼른 가! 가란 말이야!”

“분명히 당신이 가라고 했수? 나 간다?”

“아니, 잠깐만…….”

망설이는 이사벨의 말에 칸시아가 또 한 번 수정 구슬을 휙, 훑었다.

정말이지 얄밉게도, 상대는 나오지 않고 이사벨의 얼굴만 잔뜩 클로즈업하여 나왔다.

“당신 오늘은 검은색 옷을 입는 게 좋겠어요. 이사벨의 새카맣고 사랑스러운 눈동자를 늘 떠올릴 수 있게 말이에요.”

그 시절을 모르는 사용인들조차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이 든 사용인들이 ‘아, 원래 노마님께서 선대 공작님께 꽤 집착하긴 했었다. 공작님은 마님을 닮았지.’라고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사벨의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생각나도록 은색 커프스 단추를 하고…….”

세드리안과 유리아가 참담한 얼굴로 이사벨의 은발과 검은 눈을 바라보았다.

이사벨은 도저히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안 돼! 제발 그만해!”

칸시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샐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하려면 아무래도 내가 가는 수밖에 없겠는데?”

“제발 가! 제발…….”

이사벨이 허겁지겁 손을 내저을 동안, 칸시아는 휘파람을 불며 여유롭게 자리를 떠났다. 아이들에게 짓궂게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거란다, 요 온실 속에서만 자란 녀석들아. 알겠니?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 믿으면 안 돼.”

그리고 이사벨마저 가라고 한 칸시아를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멍하니 모두가 충격에 빠져 있었다. 칸시아가 떠난 정원에 꽤 오래도록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나중에 유리아가 하고 있던 루비 머리핀이 없어졌다는 걸 알았을 때에는 칸시아가 이미 뒤를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떠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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