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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77화 (177/182)

특별 외전 17화

* * *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칸시아는 지하 감옥에 가지 않을 수 있었다.

“리체 불러와! 리체 불러오라고! 아니면 그 싸가지 없는 공작이라도 데려와! 너희가 나를 이렇게 대우하면 안 되는 거야!”

칸시아는 곧바로 공작성 앞마당에서 뒹굴뒹굴하며 난동을 피웠는데, 마침 세드리안과 산책을 하던 이사벨이 그녀를 알아보고 천천히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어…… 그…….”

이사벨이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칸시아의 이름까지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수정 구슬로 진실을 알려 준 더러운 집시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있었다. 썩 선의로 수정 구슬을 보여준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리체와 시오니의 진실을 알게 해 준 사람이었다. 그러니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음…… 그러니까 당신은…….”

당장 범죄자를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라며 명령하던 유리아도 생각보다 부드러운 이사벨의 태도에 깜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

“하, 할머니?”

그리고 그 얼굴을 보며 칸시아가 유리아에게 혀를 쑥 내밀었다.

“건방진 꼬마야, 알겠니? 세상은 네가 예측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단다.”

그리고 칸시아의 호칭을 고민하던 이사벨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그…… 빌어먹는 집시?”

이사벨은 나름 세드리안과 유리아의 앞이라서 어휘를 신경 쓰려고 했지만 그래도 생각나는 단어가 그것밖에 없었다.

“그래! 드디어 말이 좀 통하는구먼!”

칸시아는 냉큼 일어나 앉았다.

물론 그녀는 이사벨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아주 당당하게 요구하듯 물었다.

“리체 어딨수?”

굉장한 무례였으나 이사벨은 지적하지 않았다. 어쨌든 리체의 친부모를 찾아 준 은인이었기 때문이다.

“리체는 지금 공작성에 없는데……. 무슨 일이지?”

“음.”

리체가 없다는 말에 칸시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렇다면 그나마 안면이 있는, 리체에게 정신 빠져 있던 그놈이라도 만나야 하나……. 예전에 뭔 귀족 저택에서 만난 적도 있으니까.

타깃을 바로 바꾼 칸시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어 물었다.

“그럼 그 가정 교육 안 되어 있던 눈 쭉 째진 공작 놈은?”

물론 이사벨은 그 질문에도 순순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놈도 없는데…….”

칸시아의 얼굴에 본격적인 난감함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여기서 찾을 사람이 없는데.

안면도 없는 사람에게 ‘내가 리체와 아는 사이니까 돈 좀 내놔라.’라고 해 봤자 뭐가 나올 리 없었다.

결국 칸시아는 거의 반 포기 상태로 짜증을 섞어 물었다.

“젠장, 그럼 당신은 누구요?”

이사벨은 리체와 시오니의 얼굴까지 떠올리며 아주 인내심 있게 대답했다.

“가정 교육 안 되어 있던 공작 놈을 낳고 기른 사람이지.”

칸시아는 아, 하고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인상이 아주 센 것이 모자간에 눈매가 꽤 닮아 있었다.

“허허, 눈매를 보니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보통 아닌 놈을 낳으셨군. 힘드셨겠어. 허허허.”

칸시아가 아무리 뻔뻔하다고 해도 이 상황에서 이사벨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낭패였다는 걸 빠르게 판단한 칸시아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세드리안과 유리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으며 혀를 찼다.

“어허허.”

그녀는 허탕 쳤다는 마음으로 아예 몸을 일으켜 완전히 일어섰다. 그리고 헛기침을 하며 돌아섰다.

“뭐, 리체가 없으면 나는 이만. 잘 지내쇼.”

그러나 그대로 사라지려던 칸시아는 단단한 어린이용 목검에 막혔다.

유리아가 눈을 치켜뜨며 단호하게 말했다.

“소매치기를 놓아줄 수는 없어요. 그리고 엄마랑 아는 사이일 리도 없다고요.”

“넌 뭐냐? 눈은 쭉 째져 가지고.”

“……눈 쭉 째진 공작 놈의 딸이다.”

“아.”

칸시아는 이마를 짚으며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인상 한번 더러운 게 그놈을 아주 똑 닮았군.”

이사벨과 에르안, 유리아의 눈매는 3대가 똑 닮아 있었기에 이사벨은 다시 한번 자비의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저 빌어먹을 집시는 리체의 은인이다, 저 거지같은 집시 덕분에 모든 일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이런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 사정을 모르는 세드리안이 고개를 갸웃하며 끼어들었다.

“대체 누구지? 이 정도인데 우리 할머니가 가만두다니……. 확실히 보통 인간은 아니라는 건데.”

“그럼 넌 리체 아들이냐? 똑똑한 척해서 아주 재수 없는 게 네놈은 엄마 닮았구나.”

칸시아는 아이들을 전혀 귀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흥미를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시간이 아까워지기 시작해서 유리아의 목검을 툭, 치며 성의 없게 말했다.

“이거 치워. 날 그냥 안 놓아주면 어쩌려고?”

“도둑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도록 성문에 매달아야지!”

유리아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고 예상 외로 이사벨이 감격한 눈으로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세상에…… 내 손녀가 나를 딱 닮았어…….”

세드리안이 심각하게 덧붙였다.

“어쨌든 공작가 사용인에게 해를 가하려 했으니 유리아의 의견대로 구금하는 게 맞는 것 같아. 엄마 아빠가 없으니까 더더욱 성 관리에 철저해야 한단 말이야.”

아주 두 사람 자식이라고 만만치가 않았다.

하기야, 리체 에스텔 역시 한 번도 칸시아에게 만만히 당해 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어쨌든 우리 엄마와 아빠를 모욕했어.”

유리아가 동의한다는 듯이 앙칼지게 말했다.

“우리 엄마는 그렇게 재수 없지 않고, 아빠는 그렇게 싸가지 없지 않단 말이야! 우리 엄마 아빠는 완벽해!”

“뭐?”

칸시아가 코웃음을 쳤다.

“꼬마야, 그게 무슨 망발이니? 아무리 어린 애라도 그런 틀린 소리 하면 못 써.”

“아빠는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야! 누구에게나 햇살 같은 어른인데! ‘보통 아닌 놈’이라니 그런 모욕을!”

“……햇살? 햇사아아아알? 우와, 햇살이 다 얼어 죽었다.”

유리아의 말을 들은 칸시아는 거의 땅을 구를 정도로 웃어댔다. 그러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이야? 햇살이라니, 요새 햇살들은 다 정신이 나갔나?”

“크흠, 큼.”

이사벨은 칸시아의 눈을 피하며 민망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녀가 생각해도 ‘햇살 같은 에르안’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뒤늦은 가정 교육이 성공해서, 에르안은 따뜻하고 올바르게 산 지 좀 되었네.”

“무슨…… 그러는 척 하는 거겠지! 사람이 어디 쉽게 변해?”

칸시아가 다시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하자 세드리안도 열에 받쳐서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

“아빠 뿐만이 아니야. 감히 우리 엄마에 대해서도 모욕을 해? 우리 엄마는 어느 상황에서도 과한 지식을 자랑하거나 남에게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야.”

“아하하하하하하! 이거 참 재미있네. 웃겨 죽겠어, 정말.”

칸시아는 진지한 세드리안의 얼굴을 보며 또 한 번 배꼽이 빠져라 웃어댔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웃음을 뚝 그치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얘들아, 그럼 내가 신기한 걸 보여 줄 테니 그거나 보고 떨어지거라.”

아무리 조숙한 척을 하고 있어도 애들은 애들이었다. ‘신기한 것’이라는 말에 아이들이 곧바로 반응했다.

“……신기한 거?”

칸시아는 가방을 주섬주섬 뒤져서 수정 구슬을 꺼냈다.

“아…….”

몇 년 전, 그 수정 구슬로 모두의 앞에서 칸시아가 시오니의 죽음을 보여 준 것이 기억나서 지켜보고 있던 이사벨이 숨을 삼켰다.

할머니의 반응을 본 유리아와 세드리안은 더더욱 흥분해서 마른침을 삼켰다.

칸시아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털썩 공작성 앞마당에 다시 주저앉았다. 그리고 부루퉁하게 말했다.

“보고 싶은 과거의 일이 있다면 말해 봐. 하나만 보여 주지.”

“응?”

“얼른 말해. 뭐가 보고 싶어? 이건 마법이야. 아무나 못 하는 거라고.”

순간적으로 세드리안과 유리아의 눈이 마주쳤다. 두 아이는 제대로 된 마법을 보는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뭔가 이상한 건 아닐까 두 아이가 이사벨의 눈치를 살폈으나 이사벨 역시 완전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이사벨은 심각한 눈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또 보여 주는 건가?”

‘또’라는 말에 세드리안과 유리아가 순식간에 굳었다.

그렇다면 할머니는 이미 이 사람의 마법을 본 적이 있는 건가? 아이들이 살짝 패닉에 빠져 있는데 칸시아가 툴툴거리며 말했다.

“대신 아까 소매치기한 거 좀 봐주쇼. 사실 금반지도 있었는데 양심적으로 은팔찌만 슬쩍한 거라우.”

“금이든 은이든, 그건 마땅한 벌을 받아야 할 일이네만.”

그때 세드리안이 마침 정신을 차리고 합리적인 반박을 했다.

“그런 재능이 있으면 왜 그러고 사는데? 이 정도 마법을 할 수 있으면 떼돈을 벌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이 시건방진 꼬마가 뭘 모르는구나.”

칸시아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그렇게 돈 벌어 봤자 뭐가 좋겠니? 난 노력이나 능력으로 돈을 얻고 싶은 게 아니야. 그딴 돈은 의미가 없어.”

“……그, 그럼?”

일곱 살 인생이 정립하고 있던 모든 가치관을 깬 칸시아가 성의 없게 말했다.

“남을 좀 곯려 주면서 돈을 얻고 싶은 거지.”

그러고는 마치 자신이 대화의 우위를 점령하고 있는 것처럼 팩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언제를 보고 싶은데? 딱 한 번만 볼 거야. 마력이 꽤 필요한 일이라고.”

“어, 음, 그게…….”

이사벨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발을 동동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이 기회를 놓치기는 아까운 것 같은데 너무 갑작스러웠다.

다시 보고 싶은 과거의 일이 뭐가 있을까……. 이거? 아님 저거? 딱 하나만 볼 수 있다는데……. 이사벨이 고민할 동안 칸시아가 신경질을 내며 팩 소리쳤다.

“몰라! 내 맘대로 볼 거야!”

“무슨 그런 게 어디 있…….”

이사벨이 항의하려고 하는데 수정 구슬에 상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런 광경을 처음 보는 유리아와 세드리안이 놀라서 멍하니 수정 구슬을 바라보았다.

[리체, 몸조심해. 걷지 마.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내가 안아 줄게. 우리 아기 뭐 먹고 싶은 건 없대?]

지금보다 조금 더 젊어 보이는 에르안이었다. 그의 얼굴에 환희가 가득 차 있었다.

이사벨은 충격에 눈을 깜빡였다. 수정 구슬에 맺힌 상은 바로 세드리안의 임신을 알게 되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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