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외전 16화
“어쨌든, 그럼 우리는 잘 다녀올게.”
리체가 다시 한번 세드리안과 유리아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다음에는 우리 가족 모두 함께 가자꾸나.”
“네!”
리체와 에르안은 갑작스럽게 라베리 섬에 가게 되었다. 리체의 외가 쪽 먼 친척이 결혼식을 하게 되었는데 리체 부부를 초청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데려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절대적인 거리가 너무 멀어서 어린 아이들에게는 무리한 여행이 될 듯하여 두고 가기로 한 것이다.
심지어 라베리 섬까지 가려면 꽤 오랜 항해도 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들은 성에 두고 가는 것이 맞았다. 이사벨 역시 ‘내가 잘 봐 줄 테니 걱정 마라’라고 호언장담하기도 했고, 성 내부에는 워낙에 아이들을 잘 돌봐 주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렇게 야무진 아이들을 두고 리체와 에르안은 공작성을 비우고 장기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나름대로 아이들이 꽤 커서 그나마 두 부부가 함께 이동하기로 한 것으로 둘 다 성을 비우는 건 처음이었다.
“별일 없겠죠? 어머님도 계시고, 아버지도 종종 와 본다고 하시니까요.”
공작성을 나서면서 리체가 걱정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 딱히 문제 될 손님이 오는 일정도 없고, 국가적으로도 별 행사가 없고.”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딱히 별 변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별다른 일이 일어날 리가 없어. 정말 세세한 것까지 확인했잖아.”
“그건 그렇죠.”
리체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나서 머쓱한 듯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아이들이 너무 우리를 우상화하는 것 같지 않아요? 뭐, 하긴 아직 어리니까…….”
“난 나쁘지 않은데.”
에르안은 씩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오히려 애들이 진실을 알아 버리면 더 슬플 것 같아. 애들 앞에서는 완벽한 아빠이고 싶어서.”
“지금으로 봐서는 그런 날이 올 것 같지가 않네요.”
리체는 그를 보며 마주 웃어 보였고, 둘을 태운 마차는 평온하게 계속 길을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며칠 뒤.
“어휴, 요새 사람들은 참 정이 없어.”
더러운 옷을 입은 집시 하나가 낡아빠진 천 가방을 메고 공작성 앞에 도착했다.
“대체 왜 요즘 애들은 야바위를 안 하는 거지?”
다소 심술궂은 인상에 길게 땋아 내린 흰 머리카락, 그 와중에 나름 반짝이는 눈빛을 가진 칸시아였다.
에르안과 리체는 공작성에 아무런 변수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칸시아야말로 그 누구의 예측도 벗어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툴툴거리며 중얼거렸다.
“나름 사기는 쳐도 삥은 안 뜯겠다는 신념이 있었는데.”
물론 그녀의 신념은 종잇장처럼 얄팍했기 때문에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것이었다.
원래 그녀는 돈이 떨어질 때마다 자유 도시에 가서 젊은이들을 야바위로 등쳐 먹었는데, 요즈음에는 호기롭게 응하는 호구들이 극히 드물어졌다.
“정말이지 말세야, 말세. 젊은이들이 예전 같지 않아.”
칸시아는 슬프게 중얼거렸다.
“일확천금도 안 노리고 성실하게 저축이나 하며 산다고. 대체 나라가 어디로 가려고 다들 이 모양 이 꼴인 거야?”
요즈음 젊은이들은 한탕을 노리는 패기가 없다며 아무리 한탄을 해 봐도 소용이 없었다.
얼마 전 제국에 아주 유능한 황태자비가 들어서면서 제국 청년들은 각종 제도를 발판 삼아 꿈과 희망을 가지고 성실하게 자기 관리에 임하기 시작했다.
결국 불쌍한 할머니인 척 구걸을 해 보았지만, 요즈음은 거지들도 아주 성실했기 때문에 늙은 것만으로는 사람들의 주머니를 열 수 없었다.
“할머니, 눈 먼 척이라도 해야 돼요. 요새 살기가 얼마나 팍팍한데요. 그리고 할머니는 행색만 더럽지 하나도 불쌍해 보이지 않는데요.”
옆 구역의 거지 소년에게 노하우를 전수 받아 눈 먼 장님인 척을 해 보았지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눈 감고 있는 게 답답해서 때려치우고 말았다.
“그럼 얼굴이라도 서비스 정신을 발휘해 보세요. 상냥하게 미소 지으면서 ‘당신의 작은 관심이 사람 하나를 바르게 만들 수 있습니다’라고 굽신거려 보세요. 특히 아이들에게 인자한 할머니처럼 웃어주시고요.”
자신을 바르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는 건 꽤 괜찮았지만, 미소를 짓는 건 정말이지 못 할 일이었다. 특히나 그녀는 아이들을 몹시 싫어했는데 그들에게 인자하게 웃어준다는 건 더더욱 끔찍했다.
“아니면 꽃이라도 파세요, 할머니. 저기 꽃시장 옆 쓰레기장을 잘 뒤져 보면 꽤 괜찮은 게 나오거든요? 하루 지났다고 거짓말 하면서 싼값에 준다고 하면 은근히 팔려요.”
칸시아는 그 말을 듣고 이제 더 이상 빌어먹는 일도 못 해 먹겠다고 생각했다.
그 거지 소년이 말한 것 중에 재미있어 보이는 건 ‘하루가 지났다고 사기 치는 것’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모두 다 노동을 해야 해서 싫었다. ‘신성한 노동의 가치’를 강조하는 신전의 교리에 진저리를 치는 그녀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그 거지 소년은 국가에서 시행한다는 ‘빈민 구제 노동 사업’에 지원하여 성실하게 제과제빵 교육을 이수하러 떠났다. 물론 칸시아는 관공서에서 ‘당신도 성실하게 살 수 있습니다’라는 팻말을 들고 사람들이 몰려오자마자 도망가 버렸지만.
“제기랄, 점점 더 생산성 없는 거지들한테 팍팍한 세상이 오고 있어. 거리의 거지들이 희망을 찾아 일자리를 갖고 성실하게 산다니…… 나라가 왜 이렇게 살기 좋아졌어? 짜증나게.”
그러나 어쨌든 먹고는 살아야 했고, 그래서 결국 그녀는 ‘삥은 안 뜯겠다.’라는 신념을 단번에 버리고 세르이어스 공작성으로 향한 것이다.
몇 년 전 그녀가 세르이어스 공작성에 왔을 때처럼, 일단 문지기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먼저 말을 걸었다.
“누구신데 자꾸 이 앞에서 알짱거리시는 겁니까?”
칸시아는 그녀를 당장 쫓아내 버리고 싶어 하는 얼굴의 문지기를 보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리체 에스텔 보러 왔는데.”
그녀가 삥을 뜯겠다고 결정한 사람은 리체였다. 어쨌든 자신의 도움을 받아서 아버지를 찾았기 때문이다.
물론 칸시아가 선의로 리체를 도와준 건 아니고 어쩔 수 없이 해 준 일이기는 하지만…….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찾아오기가 편했다. 리체가 칸시아를 은인 대하듯이 잘해 주었다면 칸시아의 성격상 침을 뱉고 도망갔을 테니까.
칸시아는 언제나 등쳐 먹기 편한 상대를 좋아했다. 배를 채우는 것만큼이나 즐거움을 채우는 것도 중요했는데, 보통 그녀의 즐거움은 남들을 골탕 먹이는 데에서 생성되곤 했으니까.
“리체 에스텔?”
문지기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고 칸시아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 리체 에스텔한테 가서 전해! 칸시아 로즈에터가 왔다고!”
지난번에 ‘리체 에스텔’이라는 이름을 대고 나서 공작성에 들어갔던 기억이 있는지라 칸시아는 아무 생각 없이 소리쳤다.
그러나 젊은 문지기는 미간을 찌푸리며 오래도록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리체라면 마님의 이름이기는 한데, 리체 페렐르만도 아니고 리체 세르이어스도 아니라 조금 의아했기 때문이다.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문지기에게 칸시아가 버럭 화를 냈다.
“아, 그 갈색 머리에 초록색 눈, 빠릿빠릿하게 생겨서 아주 머리가 도록도록 잘 굴러가는 애 있잖아!”
문지기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지나치게 맞아떨어지는 묘사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막 동의하기도 힘든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공작 부인인 리체는 지금 부재중이었다. 하지만 부재중이라고 해서 쫓아내도 되는 사람인 걸까?
“지난번에도 왔었다고! 너처럼 새파란 애 말고 경력직 없어?”
“음…… 지난번이라면 언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칸시아는 손가락으로 대충 숫자를 세어 보더니 자신 없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게…… 어…… 7년 전인가, 8년 전인가? 아닌가? 9년인가?”
대답은 시원찮았지만 결론은 확실했다. 당연히 그때 근무하던 문지기들은 모두 승진하여 공작성 안의 관리인이 되었다.
결국 문지기는 이 더러운 행색의 집시에 대해 상부에 보고하는 아주 안전한 선택을 하기로 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윗선에 보고하고 오겠습니다.”
“그래? 그럼 잠시만 이리로 와 봐. 이걸 보여 주면 더 일이 쉬워질 테니까.”
칸시아는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고, 문지기는 무슨 증표라도 있는 것 아닐까 싶어서 엉거주춤 그녀의 곁에 다가갔다.
그때였다.
“뭐 하는 거야?”
또랑또랑한 목소리와 함께 단단한 목검이 그대로 칸시아의 손목을 후려쳤다.
“끄악!”
칸시아의 비명 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은팔찌가 뚝 떨어졌다.
문지기가 기겁해서 그 팔찌를 주워 들었다. 황급히 팔목을 보니 순식간에 비어 있었다.
“아니, 이 할머니가 언제 내 팔찌를!”
“언제긴 언제야. 가까이 올 때 바로 작업 시작하던데.”
그리고 칸시아의 소매치기를 현장에서 잡은 유리아가 당당하게 말했다.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 흔한 소매치기니까.”
문지기는 다시 은팔찌를 주우며 칸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는 분노하기보다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할머니, 뭘 좀 모르시는 분이네……. 다른 곳도 아니고 세르이어스 공작성 안에서 범죄를 저릴러요? 아니, 동료 소매치기들이 귀띔도 안 해줬답니까?”
문지기가 손으로 목을 슥 긋는 손짓을 해보이며 안쓰럽다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사벨 세르이어스 마님 시절부터 공작성은 물론 공작령에도 범죄가 뚝 끊겼어요. 그걸 몰랐단 말이에요?”
“내 영지도 아닌데 그걸 내가 왜 알아야 돼?”
칸시아가 퉁명스럽게 적반하장으로 투덜거렸다.
“세르이어스가 작은 범죄에도 어떻게 대응하는지 소문이라도 들었다면 지하 감옥같은 참혹한 결말은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지하 감옥? 거기 밥은 주나? 사실 감옥은 익숙해서 말이야.”
태평하게 귀를 쑤시는 칸시아를 보며 문지기가 혀를 찼다.
“줄 리가 있습니까? 물 한 모금도 안 줍니다.”
“아, 잘 사는 영지인데 그렇게 박하게 군다고? 와, 있는 것들이 더 하네. 그럼 안 가! 안 간다고!”
당당한 칸시아의 말에 유리아가 선득한 얼굴로 싸늘하게 말했다.
“그건 당신이 결정할 게 아닐걸. 범죄자 주제에 어디서 큰 소리야?”
“아니, 쬐끄만 게 어디서 벌써부터 좀도둑을 경멸하는 표정을 짓고 있어! 엉? 그러다가 아주 고지식하고 올바른 어른으로 크겠어?”
“헛소리 들어주지 말고 당장 끌고 가. 내가 동행한다.”
유리아는 곁에 있던 기사들에게 차갑게 일갈했고 칸시아는 결국 그들의 손에 이끌려 공작성 안으로 질질질 끌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