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75화 (175/182)

특별 외전 15화

외전 8. 칸시아와 아이들

“자, 세드리안.”

어느 볕이 좋은 오후였다. 리체와 에르안은 여행 준비를 모두 마치고 난 뒤 정원 앞에서 아이들과 작별 인사 중이었다.

에르안은 아들의 눈을 마주치며 진지하게 말했다.

“길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우리 한 번 마지막으로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는 법을 확인해보자꾸나.”

“네!”

“엄마 아빠가 없을 때 예상치 못한 가신들이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세드리안은 엄마를 닮은 총명한 녹색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할머니에게 가요! 그리고 ‘슬프게도 이제 일을 하셔야 할 때가 왔어요!’라고 말해요.”

“혹시 그런 말을 했는데도 할머니가 늦장을 부리며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니?”

“한숨을 푹 쉬면서 ‘어쩔 수 없이 할머니의 사랑스럽고 연약한 손자가 저 늑대 같은 가신들 앞에서 비참하게 휘둘려야겠군요.’라고 서글픈 목소리로 중얼거려요.”

“아주 좋아.”

에르안은 흡족하게 웃은 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엄마 아빠가 없을 때 어딘가 아픈 것 같으면?”

“주치의한테 말하고 혹시 모르니까 외할아버지께 편지를 써요. 어차피 편지를 받자마자 달려오실 테니 증상은 굳이 안 써도 괜찮아요.”

“또…… 엄마 아빠가 없을 때 곤란하면서도 처리하기 까다로운 일이 생기면?”

“디엘을 불러요.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 귀찮아하는 내색을 보이면 ‘엄마는 우정을 꼭 표현하는 사람이야.’라고 말해요.”

“그렇게 말했는데도 아주 급한 일이 있다며 망설이면 어떡할 거냐?”

“그러면 ‘아마 아빠는 고마움을 엄마보다 몇 배로 표현하지 않을까? 아마 숫자가 클 텐데.’라고 고개를 갸웃거려요.”

“아…….”

에르안은 감탄하며 아들을 꼭 끌어안았다.

“우리 아들 왜 이렇게 똑똑하지?”

물론 세드리안은 에르안의 감탄에도 태연했다.

“그렇게 태어났으니까요.”

세드리안은 외양상으로도 리체를 꼭 닮아 있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에 선명한 초록색 눈, 다소 동글동글하게 귀염상인 외모까지.

거기에 어릴 때부터 의학 쪽으로 상당한 재능을 보여서 아르가는 세드리안을 볼 때마다 ‘리체가 어린 시절에 이랬겠구나.’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또래보다 기억력이나 응용력이 좋잖아요. 엄마 아빠가 잠시 외출하시더라도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타고나길 똑똑하게 태어났으니까.”

“엄마 아빠만 외출해서 섭섭하지는 않고?”

“다 어른들의 사정이 있는 거니까요. 같이 가면 좋겠지만 기다리면 또 함께할 수 있으니 괜찮아요.”

어른스럽게 대답하는 세드리안을 놓아주며 에르안이 씩 웃었다. 또박또박 말하는 게 어릴 때의 리체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리체를 꼭 닮은 그의 아들은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자존감이 높고 아주 조금 뻔뻔한 것까지 몹시 귀여웠다.

“자, 그럼.”

에르안은 세르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엄마 아빠가 없을 때 놀러 온 남자애 중 하나가 유리아에게 집적대면?”

거침없이 대답하던 세드리안의 눈동자가 흔들린 것은 그때였다. 리체를 닮아 한없이 선량하게만 보이던 초록색 눈에 에르안을 닮은 섬뜩함이 순간 스쳤다.

“사람을 없애면 안 되는 거죠? 괜찮은 독약 정도는 혼자서도 만들 수 있는데…….”

한없이 태연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그때 유리아의 손을 잡고 방에 들어오던 리체가 기겁하여 끼어들었다.

“세드리안! 의학은 사람을 살리려고 있는 학문이지 죽이려고 있는 학문이 아니야!”

리체는 단호한 얼굴로 세드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훌륭한 의사는 자고로 인류애가 있어야 돼, 세드리안. 에르안 닮은 얼굴 하지 말고 눈에 힘 풀어!”

“……하지만…….”

풀죽은 세드리안의 말을 받아 내 준 사람은 에르안이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세드리안, 아빠한테 연락하면 된단다.”

에르안은 다정한 눈으로 섬뜩한 말을 입에 담았다.

“아빠는 의사가 아니니까 양심의 가책 없이 처단할 수 있거든.”

“어휴, 진짜!”

리체가 에르안의 등짝을 한 번 쳤다.

“당신은 못되게 생겨서 그런 말 하면 농담 같지 않단 말이에요.”

에르안은 간신히 ‘그걸 농담이라고 생각하느냐’라는 말을 삼켰다. 다행히 유리아가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다들 걱정 마세요.”

요즈음 검술을 배우는 유리아는 몸에 늘 지니고 있는 목검을 툭, 쳐 보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어린 시절의 아빠가 검술을 배웠으면 이렇게 잘했을 것 같다며 호아킨 단장님이 매일 칭찬해 주신다고요.”

에르안은 어릴 때에 많이 아파서 열세 살이나 되어서야 검술을 시작했었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호아킨 역시 유리아를 통해 어린 시절의 에르안을 추측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검은 머리카락에 초록색 눈을 가진 유리아는 리체보다는 에르안을 닮아 벌써부터 만만치 않은 것 이상이었는데, 다행히 미모까지 에르안을 닮아 조금 새침해 보여도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물론 호아킨 단장님이 옳은 소리만 하시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유리아가 눈을 굴리며 생각에 잠겨 말했다.

“가끔 좀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하곤 해요. 아빠가 되게 인성적으로 모자라던 시절이 있었다느니……. 진짜 말도 안 되지 않아요?”

리체와 에르안은 유리아의 순진한 얼굴을 보며 잠시 식은땀을 흘렸다.

호아킨의 말은 사실 틀리지 않았다. 에르안은 리체가 아르가의 딸인 것을 알기 전까지는 인성 교육을 받지 못해 조금…… 아니 많이 안하무인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 이후 큰 깨달음을 얻고 새사람이 되었으니 유리아 눈에는 에르안이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에르안은 자식들에게 아주 헌신적이었으므로 유리아가 에르안을 ‘엄마에게는 좀 나사가 빠진 것 같이 구는 사람’이라고는 평가할망정 인성을 의심할 일은 전혀 없었다.

가끔 사용인들이 흠칫하는 것도 그저 에르안이 너무 못되게 생겨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상이 좀 센 건 괜찮지 않나? 그래도 잘생겼는데……. 게다가 인상 센 건 아직 어리지만 유리아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사용인들이 늘 알아서 기었기 때문에 실제로 유리아는 에르안이 아랫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것조차 본 적이 없었다.

“아빠는 진짜 너그럽고 다정하잖아요. 무서운 표정도 진짜 심각할 때만 해요. 엄청 착하고 부드러운 공작님이라고요!”

유리아의 외침에 세드리안도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아이들의 눈에 비치는 에르안은 다정하고 상냥하기 그지 없는 아버지이자, 모난 곳 없는 유능한 공작이었으니까.

살짝 난감해 하는 에르안의 얼굴을 보며 아이들이 더더욱 그의 인성을 의심하지 않고 소리쳤다.

“아빠가 남들에게 함부로 대하고 막말하는 거…… 그런 건 상상할 수조차 없어요!”

“아빠는 긍정적이고 세상을 따스한 눈으로 보는 사람이니까요!”

아이들의 외침에는 엄청난 신뢰가 담겨 있었다. 사랑하는 부모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경과 맹목적인 믿음이었다.

“음, 뭐.”

에르안은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리체와 결혼하고 나서 온 세상이 아름다워진 건 사실이지만…….”

어딘가 자신 없는 말에 아이들이 또 항의하려고 하자 리체가 황급히 말했다.

“뭐, 어릴 때에는 다들 조금 미숙할 수도 있는 법이지. 그렇게 치면 나도 엄청 잘난 척이 심했는걸.”

리체는 어떻게 하면 이 불편한 화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하며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나 역시…… 음, 남들에게 썩 좋은 사람만은 아니었을 거야. 내 말만 옳다고 하는 경향이 있었거든.”

“하지만 옳았을 거 아니에요?”

“응?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어딘가 재수 없어 보이기는 했겠지.”

그 말에 세드리안이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대답했다.

“엄마가 그럴 리 없어요. 엄마는 늘 능력만큼만 실력을 자랑하는 걸요. 그러니까 재수 없어 보일 리는 없다고요!”

보통 사람들은 ‘능력보다 훨씬 겸손해요’라는 말을 듣는다는 건 차마 에르안도 지적하지 못했다.

사실 리체의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그저 어릴 때에는 한낱 어린 조수였기 때문에 실력을 증명해야 하는 때가 많아 스스로 자기 홍보를 해야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나 리체의 실력을 인정했고 따라서 더 이상 ‘전 천재인데요.’ 같은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제국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틀린 말 하는 사람을 관용적으로 포용해 줄 줄도 알아야 했는데 내가 세상 사는 법에 좀 미숙하긴 했어.”

리체가 웃으며 말하자 유리아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엄마는 누구에게나 친절하잖아요. 평민으로 산 적이 있어서 남을 무시하지도 않고요!”

“음…… 그건 평민과 귀족의 문제가 아니었는데…….”

“엄마 아빠는 개인으로만 보면 완벽해요. 진짜예요.”

세드리안은 확신에 찬 어조로 결론을 내렸다.

리체가 난감한 눈으로 에르안을 바라보았으나 에르안은 그저 헛기침만 하고 있었다. 심지어 평소보다도 더 선량해 보이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굳이 진실을 가르쳐 줄 필요는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것만 해도 에르안의 진정한 인성에 대한 결론은 이미 나온 셈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리체도 이제 와서 진실을 알아야 한다며 개차반이었던 아빠의 과거 모습을 가르쳐 주는 게 내키지는 않았다.

“뭐…… 아이들은 보이는 것만 믿는 법이니까.”

리체는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이상하게 양심은 콕콕 찔렸지만, 그래도 아무리 백날 ‘우리는 그렇게 완벽하지 않아’라고 말해 봤자 아이들은 믿지 않을 게 뻔했다. 큰 변수가 생기지 않는 이상, 지금처럼 산다면 아이들의 평가가 달라지는 일도 없을 것 같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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