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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74화 (174/182)

특별 외전 14화

“어쨌든 천재는 좋은 거란다, 공녀. 시대가 천재 황태자비를 원하는 바람에, 가문이 한미해도 내가 황태자비의 자리까지 올랐지 뭐니.”

황태자비는 또 한 번 크게 웃더니 길을 가르쳐 줘서 고맙다며 한 번 더 인사하고 우리를 지나쳐 사라졌어요.

솔직히 그녀가 말하는 말들을 다 이해는 못 했지만 하나는 마음속에 남았어요. 천재는 좋은 거라고…….

하긴, 엄마도 천재였고 오빠도 천재라고 다들 말하니까 좋은 거겠죠.

“디엘…… 나도, ‘나는 천재니까’ 이 말 해 보고 싶어.”

디엘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한숨을 쉬며 대답했어요.

“왠지 거대한 운명의 그림자가 느껴지네요.”

“왜?”

“제가 지금껏 천재들의 수발…… 아니 부탁을 들어주면서 살아 왔거든요. 3대 째에서는 그걸 탈피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오빠의 방에 도착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오빠는 외할아버지와 온갖 의학 책을 보면서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어요. 심지어 오빠는 머리 손질도 안 한 데다가 옷도 평상복이었어요.

디엘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어요.

“음…… 세드리안 님? 왜 아무런 준비도 안 하셨죠?”

“외할아버지하고 책 한 권만 같이 본다고 하다가…….”

“예, 그 진상과 패악이 눈에 훤하군요……. 전전긍긍하고 있는 하녀들을 내쫓는 페렐르만 자작님이…….”

디엘은 한숨을 쉬며 말했고 저는 아주 살짝 과장을 보태어 새초롬하게 말했어요.

“엄마가 걱정하고 있어. 엄마 축하 연회인데 늦었다고.”

“뭐라고? 이런! 리체가 걱정을 하고 있다니!”

그 말에 화들짝 놀라 반응한 사람은 외할아버지였어요.

“어떡하지? 어휴, 내가 주책이었구나……. 내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아서 내 딸의 연회를 망치다니…….”

“망친 것까지는 아닌데…….”

벌떡 일어나 허둥지둥하는 외할아버지를 보며 저는 속으로 생각했어요.

외할아버지 닮았다는 말을 듣는 것도 썩…… 좋은 것이 아니라고 말이에요.

“가자, 가자!”

“하, 하지만 세드리안 님은 연회 준비도 못했는데!”

디엘이 걱정스럽게 끼어들자 오빠는 고개를 저었어요.

“아냐, 나중에는 나도 저런 표창장을 받을 거라서 최대한 빨리 참석할래. 엄마 인사말 들어야 한단 말이야.”

그렇게 우리는 허겁지겁 다시 연회장으로 향했답니다.

* * *

연회장에 도착했더니 슬프게도 엄마의 환영 인사말은 막 끝나 있었어요. 오빠가 제대로 준비도 안 하고 달려온 보람도 없게 말이에요.

생각해 보니 저희가 오빠를 데리러 가면서 황태자비님을 만나는 바람에 시간이 꽤 지체되었지 뭐예요. 게다가 심지어 연회장에 있던 또래 아이들이 모두 보이지 않았어요.

아까 같이 놀던 아이들과 다시 놀 생각에 기뻤는데 다들 어디 갔는지 몰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아빠가 친절하게 말해 주었어요.

“아이들은 모두 정원으로 갔단다. 거기서 뛰어 놀고 싶다던데.”

“아, 정말요? 저도 갈래요!”

저는 좋아서 소리쳤어요. 안 그래도 오후에 술래잡기를 하다가 헤어졌는데 마저 하고 싶었거든요.

“술래잡기해야지!”

“그러면 검은 두고 가, 유리아. 계속 그렇게 들고 다니다가 잃어버리려고.”

“싫어. 안 두고 갈래.”

엄마가 걱정스럽게 말했고 저는 절대로 검을 놓을 수 없다면서 고개를 저었어요.

“그러면 유모한테 가서 고정용 허리띠라도 매 달라고 하자.”

제가 고집을 부리자 아빠가 빙긋 웃으며 저를 안아 들었어요.

저는 아빠에게 안겨서 세드리안을 바라보며 말했답니다.

“먼저 정원에 가 있어. 따라갈 테니까.”

세드리안 역시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어요.

디엘이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세드리안은 ‘아이들끼리 노는데 어른을 데려갈 수는 없지.’라며 근엄하게 말하고 혼자 연회장을 나섰어요. 심지어 ‘나는 일곱 살인걸.’이라는 말까지 덧붙이고 말이에요.

저는 다시 방에 올라가서 유모를 졸라 허리춤에 검을 단단히 매달았어요.

“뭐, 아이들은 연회장 밖에서 뛰어 노는 것이 훨씬 재미있겠지요.”

제게 열심히 춤 예법을 가르쳤던 유모는 피식 웃으면서 제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었어요.

아빠가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어요.

“이 나이대 애들이 연회장에서 얌전히 있을 리가 있나. 나름대로 연회를 즐기면 되는 거지.”

그렇게 저는 허리춤에 검을 차고 신나서 정원으로 뛰어 갔어요.

아빠가 데려다준다고 했지만 어른을 데려갈 수는 없다는 오빠의 말이 떠올라서 거절했어요. 여섯 살도 나름대로의 체면이 있단 말이에요.

하지만 저 멀리서 아빠가 몰래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지요. 어휴. 아빠는 과보호가 너무 심해요……. 진짜로요.

그런데 정원에 막 도착했을 때였어요.

“거짓말 마, 네가 세르이어스 공자라고?”

아이들 무리가 오빠를 둘러싼 채로 따지고 있었어요.

“정복도 안 갖춰 입고, 머리도 산발인 네가?”

오빠는 아까 오후에 아이들끼리 놀 때 오지도 않았고, 지금도 연회 준비 치장이 하나도 안 되어 있는 상태였어요. 그러니 아이들이 오빠가 세르이어스 공자라는 것을 믿어 주지 않는 상황인 듯 했어요.

“웃기는군.”

오빠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어요.

“설마 세르이어스 공자를 사칭하는 간 큰 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순하게 생긴 초록색 눈은 엄마를 닮았지만, 기본적으로 오빠는 아빠를 닮아 키가 컸어요.

순간 모두들 오빠의 섬뜩한 말에 서로 눈치를 보았답니다.

아무래도 제가 가서 도와줘야 할 것 같았어요.

저는 종종종종 달려가며 소리쳤어요.

“다들 왜 이래! 뭐 하는 거예요?”

오빠의 바로 앞에 서 있던 바라스 공작 영식이 흠칫 놀라 저를 바라보았어요.

그는 잠시 갈등하는 표정을 짓더니 오빠를 향해 더 으름장을 놓았어요.

“설마 너, 얼굴이 반반해서 세르이어스 공녀님의 총애를 받는 사용인인가?”

저는 입을 떡하니 벌리고 말았어요. 제가 아까 잘생긴 사람이 좋다고 했더니 이상한 오해를 한 모양이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남을 막 사칭하면 안 돼!”

“하…… 멍청하면 입이라도 다물고 있을 것이지. 하긴, 그 정도의 지능도 없는 거겠지만.”

“이게!”

세상에, 그러고 나서 바라스 공작 영식이 오빠의 멱살을 잡아채지 뭐예요?

오빠는 맨날 책만 봤기 때문에 싸움을 잘할 리가 없는데!

순간 제 머리 속을 스친 건 외고모할머니의 말이었어요.

“그래도 또 혈육이라고 질질 짜거나 시무룩한 모습을 보면 화가 난단다. 욕해도 내가 욕해야 된다, 뭐 이런 거지.”

요새 내게 소홀했다고 해도, 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오빠가 맞는 건 싫었어요.

그래서 저는 허리춤의 검을 빼어 들고 재빠르게 검집 채로 바라스 공작 영식의 팔을 쳐 내고 그대로 허리를 가격했어요. 오늘 외고모할머니에게서 배운 그대로 말이에요.

“감히 세르이어스 공자의 멱살을 잡아?”

제가 오빠의 앞을 가로막은 채로 씩씩거리며 물었어요. 바라스 공작 영식을 포함한 아이들은 물론이고 오빠도 너무 놀란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죠.

“유, 유, 유리아?”

오빠는 멍한 얼굴로 물었어요.

“검은…… 검은 언제 배웠어?”

하지만 저는 그 말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어요. 저 멀리서 저를 몰래 따라오고 있던 아빠마저도 달려왔거든요.

아빠 역시 깜짝 놀라서 다른 아이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제 어깨를 잡은 채 물었어요.

“유리아? 분명 이 검은 오늘 선물로 받았다고 하지 않았어? 언제 그렇게 연속 초식까지…….”

“아.”

저는 어깨를 으쓱하며 씩 웃어 보였어요. 그리고 당당하게 말했지요.

“저는 천재니까요.”

그 말에는 오빠마저도 반박하지 못했답니다.

그날 이후, 아빠와 외고모할머니의 사이가 좀 더 나빠졌어요. 서로 제 검술 실력이 자신을 닮았다고 싸우기 시작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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