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외전 12화
* * *
온갖 마차들이 공작성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어요.
공작성에서 이렇게 손님을 많이 받는 것은 처음이라 저와 오빠는 성벽에 매달려서 구경하기에 바빴어요.
“흠, 저 사람 걸음걸이가 많이 이상해. 오스모 증후군이나 칼리카스 병의 후유증 같은데.”
물론 오빠는 한 사람 한 사람 뜯어보면서 온갖 질병의 이름을 읊기에 바빴어요.
“그걸 멀리서 본다고 바로 알아?”
“응.”
오빠가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긋 웃었어요.
“난 천재거든.”
“…….”
거기에 대꾸하지 못해서 억울해 죽을 것 같았지요.
하지만 공작성에 온 손님들 중에는 또래 아이들도 많아서 곧 몹시 신이 났어요. 오빠는 책을 마저 본다면서 방으로 들어가 버려서 다른 아이들의 얼굴도 보지 않았지만요.
저는 새로 만난 아이들과 정원을 뛰어 놀면서 숨바꼭질도 하고 술래잡기도 하면서 오랜만에 즐거웠답니다.
“세르이어스 공녀님, 나중에 저희 저택에도 놀러 오세요.”
심지어 꽤 귀엽게 생긴 바라스 공작 영식은 저를 초대까지 했어요.
“공녀님이 좋아하는 케이크를 잔뜩 준비해 놓으라고 할게요.”
물론 저는 이런 상황에 모두 대비가 되어 있었어요. 연회 날짜가 잡혔을 때부터 아빠가 철저하게 교육시켰거든요.
“유리아, 만일 연회 때 또래 남자애가 너한테 잘해 주면 이렇게 대답해라.”
“어떻게 하는 게 잘해 주는 건데요?”
“음…… 너를 초대한다거나, 맛있는 걸 준다거나, 귀엽고 예쁘다며 칭찬하면서 옆에 붙어 있거나. 어쨌든 그런 놈이 나타나면…….”
바라스 공작 영식은 아빠가 말한 세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하는 남자애였어요.
그래서 저는 아빠가 가르친 대로 대답했어요.
“아, 그런데 제가 세르이어스 공작성을 나가는 순간부터 아빠가 옆에 붙어 있을 거라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그 말에 바라스 공작 영식의 표정이 굳었어요. 하긴, 우리 아빠가 인상이 좀 더럽긴 하지요. 잘생긴 것과 별개로요. 심지어 엄마와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볼 때 미간을 확 찌푸리면 엄청 무서워 보여요.
“특히나 영식들의 초대에는 무조건 동참하시겠대요.”
아빠의 가르침대로 말하자 바라스 공작 영식이 몹시 갈등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어요.
저는 마지막으로 덧붙였어요.
“그리고 저는 잘생긴 애들 좋아해요. 신분하고 상관없이요.”
바라스 공작 영식의 그저 그런 얼굴이 구겨졌고 저는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어요. 오후가 되자 치장을 하러 유모에게 끌려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확실히 이사벨 님께서 안목이 좋으시네요. 리본을 떼니 훨씬 더 나아요.”
다들 제가 너무 귀엽다며 탄성을 질러 댔지만 저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어요. 예쁜 옷은 불편하기만 하고, 아까 마저 끝내지 못한 술래잡기나 하고 싶었거든요.
그때 제 방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렸어요.
“유리아!”
“외고모할머니!”
바로 세이린 외고모할머니였어요!
외고모할머니는 언제나처럼 멋진 가죽 바지에 기다란 검을 찬 차림새였어요.
“오늘도 아주 귀엽구나. 내가 유리아를 위해 선물을 하나 사 왔지!”
“…….”
“왜 하나도 기대가 안 된다는 표정이야? 다들 왜 그래?”
저를 포함해서 모든 하녀들이 담담한 표정으로 외고모할머니를 바라보았어요. 왜냐하면 외고모할머니는 저나 엄마를 위해 이것저것 선물을 사 오시지만 거의 대부분이 별로였거든요. 끔찍하게 프릴이 많이 달린 원피스라거나, 심각하게 사실적으로 생긴 드라큘라 인형이라거나.
특히나 패션에 민감하신 할머니는 ‘대체 이런 흉측한 건 어디서 구해 오는 거니?’라며 한숨을 푹푹 쉬셨어요.
“유리아를 위해 특별히 사 온, 민달팽이 피규어 세트다! 아주 귀엽지.”
“가, 감사합니다.”
하녀들마저도 이제 불쌍하다는 듯이 저를 바라보았어요.
외고모할머니는 뿌듯하게 미소 짓다가 덧붙였어요.
“그런데 유리아, 혹시 네 오빠를 위해 사 온 선물도 하나 받을래?”
“네? 뭔데요?”
“어린이용 검이야. 7세 이상에게 권장되는지라 너는 내년에 사 주려고 했는데…….”
외고모할머니는 제게 검을 내밀면서 말했어요.
“아까 세드리안의 방에 들렀다가 걔가 약초학 책 읽고 있는 걸 보고 그냥 나와 버렸잖아.”
외고모할머니의 표정에 혐오감이 스쳤어요.
“아르가 놈 어린 시절이 생각나지 뭐니.”
“네?”
“아르가 놈이 어린 시절부터 의학 서적만 파고 들면서 재수 없는 소리를 해 댔거든. 딱 세드리안처럼.”
“음…… 엄마도 그러지 않았을까요?”
“보지는 못했지만, 너희 엄마는 그래도 귀여웠을 거야. 하지만 세드리안은…… 묘하게…….”
외고모할머니가 턱을 긁으면서 옅은 한숨을 쉬었어요.
“리체보다는 아르가 놈을 닮은 것 같단 말이지. 내가 그 불쾌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이름에 ‘세’ 자도 집어넣었는데 말이다.”
“저기, 외고모할머니.”
“왜?”
“외고모할머니는 왜 외할아버지를 미워하세요?”
“미워하는 건 아니고 그냥 꼴 보기 싫은 것뿐이야. 평범한 오누이 사이지.”
외고모할머니는 빙긋 웃으며 말했어요.
“그래도 또 혈육이라고 질질 짜거나 시무룩한 모습을 보면 화가 난단다. 욕해도 내가 욕해야 된다, 뭐 이런 거지. 너와 세드리안은 근데 사이가 좋지 않니?”
“요새 오빠가 이상해요.”
이상한 일이었어요.
엄마와 아빠, 할머니에게는 말하지 못한 속마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어요. 아마 오빠가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어서 그런 것 같았어요.
“원래 저한테 되게 잘해 줬는데 글자 배우면서 책만 보고 있어요. 어쩌다 같이 놀아도 환자 얘기밖에 안 해서 재미도 없고요.”
“저런.”
외고모할머니가 심각하게 미간을 찌푸렸어요.
“그거 초장에 잡지 못하면 아르가처럼 되는데 큰일이군. 그러다가 사명 의식 같은 게 생기기 시작하면 결국 평생 손해 보는 인생을 사는 거야.”
“외고모할머니는 의학 싫어하세요?”
“내가 좋아하는 건 남을 다치게 하는 거지, 다친 걸 치료하는 게 아니다.”
제 질문에 외고모할머니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어요.
“나는 풀떼기만 보면 멀미나. 막 검으로 다 베어서 없애고 싶어져.”
저는 저도 모르게 외고모할머니께서 주신 아동용 검을 꼭 쥐었어요. 아무래도 제가 닮은 사람을 찾아낸 것 같았답니다.
“저기, 외고모할머니.”
“왜?”
“저, 검 가르쳐 주세요!”
“지금?”
외고모할머니의 눈이 커졌어요.
“연회가 두 시간 안에 시작할 텐데?”
역시 안 되겠구나 싶어서 어깨를 축 늘어트리는데 외고모할머니가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어요.
“아주 좋구나! 딱 좋은 타이밍이야! 나와, 얼른!”
하녀들은 저희를 막지 못했답니다.
저는 그래서 드레스 차림으로 검을 들고 종종종 외고모할머니를 따라 나섰어요.
“유리아! 여기서 뭐해?”
연회가 시작하기 직전, 엄마가 저를 데리러 정원까지 오셨어요. 저는 외고모할머니에게 검을 배우고 있는 중이었고요.
“리체, 미안하다.”
외고모할머니는 진심으로 엄마에게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어요.
“아무래도 넌 이제 내 사랑을 받는 1순위에서 밀려날 것 같아.”
“네? 그게 무슨 소리…….”
“이제부터 내 1순위는 유리아야. 미안해.”
엄마는 상처 받았다기보다는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어요.
“이렇게 잘 키워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엘리자베스를 키우던 시절 이후 처음이야.”
“엘리자베스가 누구예요?”
“내가 열 살 때 기르던 장수풍뎅이.”
순간 외고모할머니에게 숨겨진 딸이라도 있나 싶었는데 아니었더라고요.
엄마는 제 검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어요.
“……고모? 혹시 유리아한테 검을 가르치셨어요? 유리아는 아직 어린데…….”
“나 안 어려요.”
저는 혹시라도 엄마에게 검을 빼앗길까 봐 꼭 끌어안고 단호하게 말했어요.
“여섯 살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