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외전 11화
* * *
따뜻하게 데워진 우유를 마시면서 저는 할머니를 흘끔 바라보았어요. 할머니는 여전히 카탈로그를 보며 고심 중이셨어요.
“아무래도…… 리체의 구두도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보석을 더 붙이라고 할걸.”
“할머니.”
저는 대뜸 물었어요.
“할머니는 오늘 하루 종일 카탈로그만 봤어요?”
“아니.”
할머니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어요.
“아침에는 침대에서 뒹굴뒹굴했고 점심 먹고 나서는 살짝 낮잠을 잤지. 이제 막 시작한 거야.”
“그럼 이제 제가 가면 뭐 하실 거예요?”
“새로운 카탈로그들 좀 보고, 사교계 가십 잡지나 볼까 하고 있단다.”
“…….”
“난 그동안 너무 열심히 살았어. 이제 쓰레기 한량처럼 살 거야. 남은 인생 소비만 하면서 살 거라고.”
“하, 할머니?”
“오늘 밤에도 ‘나는 오늘도 아무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았다’라고 되뇌며 흐뭇하게 잠들 거야.”
생산이니 소비니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는 개념이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어요.
저는 그동안 열심히 산 할머니의 모습을 몰라요. 그러니까 늘 저렇게 빈둥거리는 모습만 본 것이나 마찬가지죠.
오빠에게 ‘오빠는 천재인 엄마를 닮고, 나는 뒹굴뒹굴하는 할머니를 닮았어!’라고 소리치고 싶지는 않았어요. 인생이 조금씩 힘들어지고는 있지만 아직 저는 꿈 많은 여섯 살이고 쓰레기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제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챈 할머니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황급히 말했어요.
“하지만 유리아, 난 정말 옛날엔 열정적으로 살았어. 진짜야. 너희 아빠만큼은 아니지만 영지 일도 잘했고.”
할머니는 눈을 굴리며 중얼거렸어요.
“그러니까 영지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흉악한 놈들은 끝까지 추적해서 싹 다 목을 따고……. 아니야, 네게 이런 말은 교육에 좋지 않지.”
아빠가 어릴 적 영지를 맡으셨다고 어렴풋이 들은 것 같은데 그 시절 이야기인 모양이에요.
하지만 제게 그 시절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고 빠르게 판단하신 할머니는 화제를 재빨리 돌렸어요.
“그래. 내가 이시더 남작 영애이던 시절…… 네 할아버지에게 첫눈에 반하고 말았지 않겠니?”
“네?”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끈질기게 매달렸단다. 아마 에르안도 그랬을 거야.”
아빠 이름이 나오자 더 이상 들을 필요조차 없어졌어요.
저는 더더욱 할머니를 닮았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아졌어요.
아니, 오히려 나중에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할머니와 아빠처럼 될까 봐 좀 걱정까지 되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할머니의 방을 나오고야 말았답니다.
다음 행방을 고민하던 저는 잠시 망설이다가 도도도도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어요.
“너희 아빠만큼은 아니지만 영지 일도 잘했고.”
엄마는 누구나 아는 천재였지만, 아빠는 누구나 인정하는 좋은 영주라고 들었어요.
오빠가 엄마를 닮은 천재 의사가 되고, 저는 아빠를 닮은 훌륭한 영주가 된다면 그것도 좀 괜찮은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는 아빠를 보러 가기로 했답니다.
사용인들 몇 명에게 물으니 아빠는 연회 준비 때문에 연회장에 가 있다고 하지 뭐예요? 미리 연회장 구경이나 하면 좋겠다 싶어서 제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어요.
* * *
연회장에 들어서자 제 눈이 번쩍 뜨이게 되었어요. 평소의 그 쓸데없이 넓은 공간이 아니고, 반짝반짝하는 장식이 여기저기 달려서 마치 그림책에 나오는 요정의 숲 같지 뭐예요.
사용인들이 북적이면서 복잡하기 그지없는 가운데, 저를 발견한 아빠가 순식간에 달려와 저를 안아 들었어요.
“유리아!”
순식간에 시야가 확 높아졌어요.
“미리 왔구나. 내일 완성된 모습을 보면서 좋아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아빠의 낮은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저는 히히 웃으며 매달렸어요.
아빠는 저를 안은 채로 일하기 시작했어요.
연회장에 있는 데도 사람들이 자꾸 와서 아빠에게 말을 걸었어요.
“이레피스 자작 건은 지난번 내가 말한 대로 처리하고, 기사단 배치는 3안으로 바꿔.”
아무래도 세르이어스 영지가 넓고 아빠가 워낙에 꼼꼼하게 관리하는 터라 늘 바쁘다고 유모가 그랬었어요. 그래도 아빠는 제가 놀러 갈 때마다 한 번도 귀찮은 내색이 없답니다.
“밀수 단속은 차주 중으로 나가는 걸로 일정 짜 봐.”
아까 저를 안아 들었을 때의 다정함과는 정반대로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아빠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어요.
“쥐새끼 같은 밀수꾼들은 이번에 내가 직접 처단할 테니 철저히 준비해.”
나는 아빠에게 안겨서 흐뭇하게 웃었어요.
사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요? 서늘하고 진지한 어조, 명확한 명령, 가만히만 있어도 느껴지는 위압감……. 역시 아빠를 닮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어요. 특히나 오빠가 엄마의 뒤를 잇는다면 이 영지는 제가 물려받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그래서 검은색 머리카락 말고도 저 혼자만 아빠를 닮은 점을 찾아보기로 했어요.
“아빠.”
저는 아빠에게 매달려서 말했어요.
“아빠는 여섯 살 때 어땠어요?”
“음, 자주 아파서 매일 침대에 누워 있었던 것 같아.”
지금의 아빠는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튼튼했기 때문에 상상이 잘 가지 않았어요.
“그냥 잘 기억나지도 않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어린 시절이지.”
저 역시 아주 튼튼해서 여섯 살의 아빠와 유사한 점은 없다고 봐야 했어요.
아빠는 나른하게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어요.
“그래서 열세 살부터의 기억만 좀 명확한데.”
“열세 살 때는 다 나았어요?”
“아니.”
아빠가 커다란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어요.
“네 엄마를 만났지.”
아아, 역시 엄마를 생각하고 있기에 저런 표정이 되어 버린 것이었어요.
“……이야기하다 보니 보고 싶군. 퇴근까지 얼마나 남았지?”
아빠는 갑자기 심각해져서 옆에 서 있던 지켈에게 급하게 말했어요.
“지켈, 세르이어스에서 제일 빠른 경주마를 리체의 마차에 배치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경주마를 마차에 달면 타는 사람의 멀미가 엄청날 것 같습니다만.”
“그럼 세르이어스에 있는 모든 공방에게 투자해야겠어. 경주마를 달아도 멀미가 나지 않는 마차를 개발하라고.”
그러니까 엄마의 출퇴근 시간을 줄이겠다는 것에 갑자기 꽂힌 아빠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다급하게 말을 쏟아 냈어요.
“그럼 당연히 마차 내부는 훨씬 더 아늑해야 하고…… 마차 내부 디자이너도 알아봐야겠군. 경주마를 다룰 수 있는 마부도 고용해야겠고. 물론 장기 프로젝트가 될 것 같으니 차근차근 시작해야겠지. 아, 아예 망아지부터 키워 볼까?”
“상당히 장기 프로젝트일 것 같습니다만…….”
“리체의 출퇴근 시간이 10분이라도 짧아진다면 10년이 걸려도 좋다.”
“…….”
저는 아빠의 간절해 보이는 얼굴을 흘끗 본 뒤 결심했어요. 남들이 저더러 아빠를 닮았다고 하면 왠지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 같았거든요.
일을 아무리 잘하고 외모가 멋있어도 엄마 이름만 나오면 정신 못 차리는 것이 누구에게나 눈에 보이잖아요. 저는 아빠 같은 남편을 얻는 건 괜찮아도 아빠 같은 부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러고 보니 할머니가 연애도 열심히 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빠는 할머니를 닮은 걸까요?
“내려 줘요, 아빠.”
“응? 벌써?”
저는 시무룩해져서 아빠의 품에서 내려왔어요.
아빠는 저렇게 엄마를 좋아하니, 저보다도 오빠를 훨씬 더 좋아하겠죠. 왜냐하면 오빠는 엄마를 닮았으니까요.
저는 그날 밤 너무 속상해서 엄마가 퇴근하고 나서도 자는 척을 하면서 방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답니다. 엄마 아빠가 자는 척을 하는 제 머리카락을 쓸어 주면서 볼에 뽀뽀를 해 주어도 모른 척했어요.
성은 내일 있을 엄마의 표창장 축하 연회를 위해서 밤늦게까지 바빴지만 연회조차도 별로 기대되지 않았어요. 누구나 오빠를 보면서 ‘역시 리체 님을 닮아 천재군요!’를 외칠 게 뻔해서요.
저는 할머니도 닮기 싫고, 아빠도 닮기 싫고…….
역시 언제까지나 행복한 어린 아이로 남아 있을 수는 없는 법이었어요.
저는 세상 불행한 여섯 살이 되어서 한숨을 푹푹 쉬며 잠들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