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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70화 (170/182)

특별 외전 10화

외전 7. 유리아의 연회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제 소개부터 하도록 할게요. 저는 유리아 이렌느 세르이어스라고 합니다.

새카만 머리카락은 아빠를 닮았고 녹색 눈은 엄마를 닮았어요. 오빠랑 똑같이요. 싫어하는 것은 시금치와 우유고요, 좋아하는 것은 디엘과 포도예요. 점점 인생이 힘들어지기 시작하는 나이인 여섯 살이랍니다.

“오빠, 놀자.”

“한 시간 전에 놀았잖아, 유리아.”

요즈음 상당히 무료해요. 한 살 위의 오빠, 세드리안이 글자를 익히고 나서 점점 더 저랑 놀아주지 않거든요. 오빠는 매일같이 이따만 한 책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 있어요.

“난 이거 마저 다 읽어야 해.”

“뭔데, 그게?”

“「약물학 개론」.”

“왜 이렇게 재미없는 책을 보는 거야? 응?”

그림책이라면 같이 즐겁게 볼 수 있을 텐데, 글씨가 빽빽한 「약물학 개론」이라니 함께 놀 여지가 없잖아요.

“그건 말이야.”

오빠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대답했어요.

“내가 천재라서 그래. 엄마를 닮았거든.”

그건 지겹도록 들은 말이었어요.

오빠는 엄마와 외할아버지를 닮아서 천재인 거래요. 하긴, 우리 엄마인 리체 시오니 세르이어스는 진짜 천재예요.

이참에 엄마 자랑을 조금 해도 될까요? 엄마는 지난달에 황실에서 모범 표창장을 받았답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무슨 전염병 예방에 큰 공로를 세웠대요.

이상하게도 ‘아……. 표창장에는 안 좋은 기억이 있는데. 이번엔 받아도 되겠지.’라며 혼자 중얼거리긴 했지만, 어쨌든 굉장히 영예로운 거래요. 손님을 잘 받지 않는 세르이어스 영지에서 크게 연회를 열기로 한 만큼이요.

모든 제국에 <리체 시오니 세르이어스 황실 모범 표창장 기념 연회>가 성대하게 열린다는 것이 소문날 정도였어요. 그 연회가 바로 내일이네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면 신나긴 할 것 같은데 사실 감이 잘 안 와요.

하지만 디엘이 ‘연회에서는 쿠키가 종류별로 잔뜩 있다’라고 말해서 기대 중이기는 해요. 엄마는 치아 건강과 영양소의 균형 어쩌고 하면서 제게 쿠키를 많이 주지 않거든요.

“오빠아, 너무 심심해서 배가 아픈데.”

“심심해서 복통이 일어나는 경우는 없어.”

제가 징징거려도 오빠는 친절하지만 냉정하게 끊어 내 버렸어요.

“배가 아프다면 다른 이유에서일 거야. 정확한 증상이 어떤데?”

“그, 그냥 아파…….”

“동공의 흔들림을 보아 거짓말 같은데. 그리고 그냥 아픈 게 어디 있어. 자세히 말해 봐. 일단 열은 없고.”

저는 결국 오빠의 방에서 나와 버리고 말았어요. 이럴 줄 알았다면 오빠한테 글자를 가르치지 말라고 진작 떼를 쓸 걸 그랬어요. 그전에는 하루에 스무 번씩 의사 놀이를 해야 해서 좀 지치긴 했었지만 지금보다는 나았어요.

오빠 방에서 나온 뒤 잠시 고민하던 저는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어요.

흥, 세드리안. 너 말고도 놀 사람은 많다고.

“어? 유리아 아가씨.”

제가 토끼 인형을 안고 나타나자 연구실에 있던 디엘이 환히 웃으면서 저를 안아 들었어요. 오빠도 저도 어릴 때부터 유모보다 훨씬 더 따랐던 사람이 바로 디엘이랍니다.

“또 세드리안 님이 안 놀아 주셨어요?”

“응, 책 본대.”

“하긴, 세드리안 님은 요새 저와도 안 놀아 주시지요.”

“디엘, 나도 글자 배울까?”

저는 디엘의 무릎에 앉아서 칭얼거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면 세드리안처럼 막 「약초학 개론」 이런 거 보면서 재밌어 할 수 있어?”

“음…….”

디엘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대답했어요.

“원래 대충 대답해 드릴 수도 있지만, 아가씨는 특별하니까 솔직히 말씀해 드릴게요.”

“내가 뭐가 특별한데?”

“이건 많은 사람들이 잊은 사실이지만, 사실 아가씨는…….”

디엘이 아무도 없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중대한 사실을 말한다는 듯이 목소리를 깔았어요. 저 역시 두근두근해서 들고 온 토끼 인형을 꽉 안았죠.

“……제 친구의 딸이랍니다.”

세상에.

저는 놀라서 눈을 깜빡이며 디엘을 멍하니 바라보았어요.

“제가요, 그러니까 리체 님의 친구였다고요. 그것도 몹시 인정받는 친구.”

“와…….”

“여전히 리체 님은 저를 매우 신임하시죠. 여전히 중요한 일은 제게 부탁한답니다.”

새삼 디엘이 너무 대단하게 보였어요.

저는 감동해서 중얼거렸어요.

“그런데 여기 있을 수 있다니, 정말 굉장해. 아빠가 엄마한테 중요한 남자를 살려 두다니…….”

“저도 제가 굉장하다고 생각합니다.”

디엘은 자랑스럽게 말했어요.

“하지만 그만큼 제가 두 분의 사랑을 많이 도와드렸거든요. 여러모로 진정한 친구죠. 다소 물질적인 대가가 있기는 했지만.”

“그럼 있잖아, 디엘.”

저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어요.

“디엘은 사랑 안 해? 왜 결혼 안 해? 나이 많잖아.”

“아가씨의 기준에는 많겠지만 그렇게까지 많은 건 아닙니다.”

디엘이 정색하며 대답했어요.

“그리고 사랑은 합니다. 원래 좀 좋아했었는데, 뒤늦게서야 제 진정한 마음을 깨달은 상대가 있거든요.”

“와, 진짜? 누군데?”

“돈이요. 원래 좋아했지만, 많아지니 더 좋아졌습니다.”

“…….”

“제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해 주신 세르이어스 공작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디엘을 바라보았어요.

돈하고는 놀 수도 없고 얘기도 할 수 없는데 왜 돈이 좋은 걸까요? 게다가 어지간한 인형들보다도 못생겼는데 말이에요.

하지만 엄마는 항상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굳이 이상하다고 하지는 않았어요.

“이야기가 좀 돌아왔지만, 어쨌든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가겠습니다.”

“응.”

“아가씨는 나이에 비해서 몹시 영특하신 편이지만, 별로 의료 서적을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아요.”

“왜?”

“세드리안 님과는 여러모로 다르니까요. 세드리안 님이 여섯 살 때에는 글자도 모르면서 온갖 약초를 외우고 다니셨습니다.”

그건 맞는 말이에요. 오빠는 제가 기억하는 순간부터 별별 풀떼기 이름은 다 외워서 중얼거렸으니까요. 물론 그럴 때마다 모두가 ‘세드리안은 리체를 닮은 천재다!’를 외치곤 했어요. 특히나 외할아버지는 페렐르만의 피가 진하게 흐른다면서 ‘연구원장 3대 세습…….’ 같은 말을 했지요.

“하지만 아가씨는 아니잖아요.”

저는 부정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어요. 제 눈에 풀들은 다 그게 그거였고 딱히 외우고 싶지도 않았거든요.

“나는…… 역시 엄마를 안 닮았나 봐.”

저는 시무룩해져서 중얼거렸어요.

제국민이라면 ‘전염병에서 제국을 구한 리체 시오니 세르이어스’라는 이름을 모두 알고 있어요. 그리고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엄마를 사랑해요.

할머니는 매일같이 엄마의 드레스며 장신구를 주문하느라 바쁘고, 외할아버지는 엄마 이름만 나오면 자랑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세요.

그 중 가장 압권은 우리 아빠인데, 아빠는 정말…… 후…….

어쨌든, 그러니까 오빠와는 달리 제가 엄마를 닮지 못했다는 건 너무 서글픈 일이었어요.

“모든 사람이 의학 천재일 필요는 없지요, 아가씨. 솔직히 저는 한 세대에 한 명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디엘은 부드럽게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어요.

“그리고 아가씨의 가족은 리체 님 말고도 많잖아요? 누구를 닮았어도 뛰어나실 겁니다. 진짜로요.”

저는 눈을 깜빡이며 디엘을 바라보다가 그의 무릎에서 풀쩍 뛰어 내렸어요. 디엘의 말대로라면 제가 닮은 누군가가 있을 것 아니겠어요?

“알았어.”

저는 결연하게 주먹을 쥐어 보였어요.

“내가 닮은 다른 가족들을 찾아볼 거야. 그래서 오빠한테 말해 줄 거야!”

디엘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렇게 저는 ‘오빠는 엄마를 닮았지만, 나는 누구를 닮았다고!’라고 소리쳐 줄 때의 ‘누구’를 찾아 떠나기로 했답니다.

다시 복도로 나온 뒤 저는 한 층 위에 자리한 가장 큰 방으로 향했어요. 이사벨, 그러니까 우리 할머니의 방이요.

“유리아!”

노크를 하고 들어가니 카탈로그를 보고 있던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 저를 꼭 안아 주었어요. 할머니는 키가 훌쩍 큰 데다가 눈매도 날카로워서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기만 해도 무섭다고 막 그러더라고요.

“할머니랑 같이 케이크 먹을까? 응?”

하지만 저는 한 번도 할머니가 무서운 적이 없었어요. 늘 맛있는 것도 많이 주시고 친절하게 안아 주시거든요.

“안 그래도 부르려고 하고 있었단다.”

할머니는 저를 꼭 끌어안고 속삭였어요.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솟구치기 시작했어요.

“네게 커다란 리본은 잘 안 받는 것 같아.”

이럴 수가. 저는 불안한 눈으로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어요.

할머니가 보고 있던 카탈로그는 아이들 드레스에 관한 것이었어요.

“하, 할머니?”

“물론 연회는 내일이라 새로 만들라고 하지는 못하겠고…… 장식만 다시 조합해 봐야겠다.”

내일 연회 때 입을 드레스는 할머니가 한 달도 전에 직접 골라 주셨었어요.

그때도 거의 하루 종일 옷을 입어 봤었는데! 연회가 내일이라고 방심했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요.

“아무래도 리체와 비슷하게 입는 게 귀엽겠지? 리체와 뭘 통일하면 좋을까.”

저는 결국 할머니와 함께 오래도록 장식을 고른 뒤에야 케이크를 하나 얻어먹을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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