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외전 9화
웨데릭이 놀러온 날, 함께 자리해 있던 리체는 곧바로 에르안에게 웨데릭의 말을 듣지 말라고 조언했다. 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이며, 정 외롭거든 자신이 놀아주겠다는 것이었다.
“에르안 님, 제 첫 임상을 망칠 셈이세요? 일단은 저를 믿어 주셔야지요!”
어딘가 갑을이 바뀐 것 같았지만, 그래도 리체는 절대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웨데릭은 가끔 오지만…… 리체는 항상 같은 층의 가까운 방에 있으니까.
“저랑 같이 잘해 봐요. 네? 저 지금 나름 사명감에 엄청나게 불타거든요? 첫 환자는 평생 못 잊는다고 하니까요!”
리체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조금 더 튼튼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에르안은 리체가 시키는 대로 식사도 잘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책도 잘 읽기로 했다.
‘첫 환자는 평생 못 잊는다고 하니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본인도 뿌듯하겠지.’
에르안은 누군가 자신에게 그런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이 처음이었다.
저번보다 훨씬 나아졌다며 웃고 있는 리체를 보면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리체가 양부모님을 보러 몰레킨 저택에 간다고 했을 때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일이면 돌아온다고 하니까…….
아무리 ‘부모님의 날’이라고 해도, 이사벨은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오늘 영지 내에 무슨 재판이 생겼다고 해서 새벽부터 나간 것이다. 그런데도 이사벨보다 리체의 빈자리가 훨씬 더 크게 느껴졌다. 리체가 없는 성안은 그저 허전하게만 느껴졌다.
“이건 웨데릭 형이 매일 나한테 주는 과자인데 너도 마차를 타고 가면서 먹을래? 이거 먹으면 배도 안 아프고 머리도 안 아파.”
“네? 그런 과자는 세상에 없는데요. 일단 줘 보세요.”
특히나 처음으로 세르이어스 성을 떠나는 리체에게 큰맘 먹고 선물을 주었는데 리체의 반응이 심상치 않아서 더 마음에 걸렸다.
“다녀와서 내일 제가 자세히 한번 봐 볼게요.”
웨데릭이 아주 비싸고 값진 것이니까 아무에게도 주지 말라고 당부한 과자인데…….
그렇게 수상하면 그냥 다시 달라고 하려고 할 때였다.
“이것 때문이라도 예정보다 좀 빨리 와야겠네요.”
에르안은 그대로 입을 다물고 웃으며 리체를 보냈다. 덕분에 조금이나마 빠르게 리체를 볼 수 있다면 그 과자는 충분한 가치를 다 한 셈이었다.
“리체…….”
에르안은 책을 읽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얼른 와…….”
웨데릭도 이렇게 간절히 기다려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어느새 그 작은 조수가 그의 마음에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아르가 역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리체의 방에 있는 테이블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그 방은 사실 그의 잃어버린 딸을 위해 이사벨이 공작성 안에 마련해 준 것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유용한 조수에게 늘 비어 있던 방을 주었지만.
사실 ‘부모님의 날’ 자체는 그에게 더 이상 슬픔이 되지 못했다. 자식들에게 편지를 받는 부모들이 부러울 여유도 없었다. 그저 하루라도 빨리 찾고 싶다는 다급함이 워낙에 컸으니까.
깔끔하게 정리된 방을 보면서 아르가는 혼자 피식 웃었다.
‘그 애가 공작성을 비운 게 처음인가.’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그 소녀가 몰레킨 저택으로 사라져서 그런가, 오늘 공작성은 유난히 썰렁했다.
아무리 몸이 안 좋다지만 에르안도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고, 이사벨도 티타임에 아무도 부르지 못해 시무룩했다. 그리고 자신 역시…….
‘늘 비어 있던 방인데 이상하게 오늘 더 넓어 보이는군.’
그때였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어…… 자작님?”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방에 들어왔다가 깜짝 놀란 리체가 눈을 크게 떴다.
아르가 역시 놀라서 물었다.
“너, 오늘 분명히 디엘이랑 몰레킨 저택에서 자고 온다고 하지 않았냐?”
“아, 저녁 식사만 하고 저만 왔어요.”
리체는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서도 ‘왜 제 방에 계세요?’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이곳의 주인이 원래 누구인가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그냥…… 여기가 더 편하고 좋으니까요.”
“뭐, 그렇긴 하지.”
몰레킨 저택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어쨌든 평민의 집이었다. 공작성보다 좋을 리 없었다.
아르가는 별말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럼 편하고 좋은 방에서 실컷 쉬어라. 뭐, 내일 조찬은 함께하도록 하지. 딱히 반갑다는 뜻은 아니야.”
“네. 아, 그리고…….”
휘적휘적 걸어 벌써 방을 나서는 아르가의 옷깃을 리체가 재빨리 잡았다. 그러고는 짧은 편지가 들어 있는 작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아르가의 눈이 커졌다.
“이게 뭐냐? 설마 ‘부모님의 날’ 편지 같은 거냐?”
“아닌데요! 저 그런 거 더 어린 시절에도 안 썼어요. 애도 아니고…….”
리체가 펄쩍 뛰며 부정했다.
“뭐, 음, 그냥 맹세문…… 그런 거죠.”
“그래? 그럼 그 맹세문 좀 보자.”
아르가는 그 자리에서 봉투를 찢어 편지를 확인했다.
편지를 읽은 아르가는 한동안 가만히 서 있더니, 한 번 피식 웃고 리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친자 검사 연구…… 고맙다. 샘플이 필요할 테니 내 걸 언제든지 가져다 쓰렴.”
“네, 그럴게요.”
“어쨌든 ‘부모님의 날’에 편지를 받다니, 내가 대부라도 되어 줘야겠구나.”
“맹세문인데요.”
리체는 민망해서 일단 열심히 우긴 뒤 바로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또……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어서 일찍 온 거예요. 오늘 내에 꼭 이 맹세문을 전달하려고 온 게 아니고요.”
“마음에 걸린다니?”
아르가의 말에 리체는 서랍 속에서 밀봉된 비닐 봉투 하나를 꺼냈다. 보존액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평범한 과자였다.
“이거 웨데릭 도련님이 자꾸 에르안 님께 주시는 과자래요. 뭐 머리도 안 아프고 배도 안 아픈 기적의 식품이라나요. 알고 계셨어요?”
아르가는 심각한 얼굴로 외알 안경을 올렸다. 그러고는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다.
“……그렇게 뭘 먹는지 꼬박꼬박 보고를 하라고 했는데…….”
“제가 간단히 분석을 해 봤는데 시간이 없어서 그런지 조합이 좀 이상하더라고요. 한번 봐 주시겠어요?”
“그러마. 일단 이건 내가 가져가지.”
도전할 것이 생긴 아르가는 곧바로 봉투를 건네받고 인사도 없이 나가 버렸다.
* * *
다음 날, 리체의 그 편지는 아르가의 연구실 책상 중앙에 붙여졌다. 그리고 아침부터 기분 좋은 얼굴로, 이사벨에게 툭하면 ‘마님은 부모님의 날에 이런 것 못 받으셨죠?’라고 시도 때도 없이 묻고 다녔다.
하지만 이사벨은 그 말에 씩씩거릴 새도 없었다.
몇 시간 후, 웨데릭이 전달했다는 과자의 분석을 마친 아르가가 공작저를 싹 뒤집어 놓은 것이었다.
일단 에르안은 치료를 위해 이르비아로 즉시 떠났다. 그리고 이사벨은 그 사건을 파고들어 결국에는 자신도 음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내고 반란군까지 잡아낼 수 있었다. 자신의 부주의로 에르안의 건강을 망쳤다는 죄책감에 이사벨은 내내 울었으나, 제이드의 상태를 알게 된 뒤 ‘내 아들은 그나마 다행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진정할 수 있었다.
“그래…… 리체 덕분에 머리가 저렇게 안 된 것만 해도 다행이지.”
이사벨은 리체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계속 세르이어스 성에 남아 주겠니? 널 놓치고 싶지 않구나.”
리체는 순순히 동의했다.
하지만 에르안도 없고, 그 이후 딱히 할 일이 없어진 리체는 맹세문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친자 검사 연구에 매진했다.
실험 샘플로 아르가의 머리카락과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가 그들이 친부녀라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그로부터 1년 후의 이야기였다.
그때 아르가는 거의 실신할 정도로 행복해했다. 매일 같이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을 감사하며 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제 더 이상 슬픈 일은 내게 없어’라는 말까지 버릇처럼 해 대며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 5년 후의 아르가는 몹시 슬퍼지고 말았다. 치료를 끝내고 이르비아에서 온 에르안과 리체가 순탄한 연애를 시작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