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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68화 (168/182)

특별 외전 8화

그는 그 이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의학 지식을 물었다. 리체가 지금 막 디엘에게 인사를 온 입양된 여동생이라는 건 전혀 고려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리체 역시 반쯤은 즐거워하며 착착 대답해 냈다. 거의 30분에 가까운 문답이 끝나고 나서야 아르가는 외알 안경을 들어 올리며 진지하게 물었다.

“너, 너, 너…… 이런 걸 다 어떻게 알지?”

“전 천재니까요. 말씀드렸잖아요.”

리체가 그 말을 할 때, 디엘은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딱히 만난 지 얼마 안 된 리체의 편을 들어서는 아니고, 그저 아르가의 당황한 얼굴을 보는 게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몰레킨 부인도 빙긋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아이 역시 아르가의 눈에 띈 것이 분명했다.

늘 디엘의 얼굴을 못 본다고 불평했지만, 몰레킨 부인은 페렐르만 상단에서 자신의 자식이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게 좋았다. 이 기세라면 리체 역시 열여덟 즈음에는 페렐르만 상단의 요직으로 발령 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아르가는 결론을 냈다.

“너, 세르이어스 공작성에서 내 조수가 돼라.”

그 말에는 디엘도 몰레킨 부인도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막 입양되어 오늘 가족에게 인사 온 열세 살짜리 아이를 본인의 조수로 삼는다니…….

리체도 놀랍다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네?”

아르가는 디엘을 흘끗 보고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여기 디엘도 머무르고 있으니까 적응도 쉽겠지.”

리체는 눈을 굴리며 몰레킨 부인의 눈치를 살짝 살피고 중얼거렸다.

“하, 하지만 양부모님께서…….”

“그럼 넌 그 숫자 놀음이나 하겠다는 거냐? 이 천재 의사의 밑에서 지내는 것 대신? 어? 그 재능을 썩힐 거야? 천재는 천재 의사한테서 배워야지!”

뜻밖의 호통이었다.

몰레킨 부인은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아르가가 리체를 곧바로 조수로 받아들이는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늘 실종된 딸을 찾느라 바빴다. 그래서 영리한 조수를 늘 찾고 있었다. 그 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쉬워도 마구잡이로 반대할 수가 없었다.

“……리체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지요.”

리체가 마음에 들었던 몰레킨 부인은 조금 슬펐지만, 그래도 리체마저 원한다면 굳이 자신의 곁에 억지로 둘 마음은 없었다.

리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저는…… 좋아요. 원래 꿈도 의사였거든요.”

리체는 사실 세무 회계를 맡는 것보다 아르가의 밑에 있는 게 훨씬 더 좋았다. 아르가가 워낙에 뛰어난 의사였기 때문에, 그의 밑에서 조수로 지냈다는 건 엄청난 경력이었다. 게다가 이 연구실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너무 멋있었다. 희귀한 약초가 척척 나올 때부터 이미 이 연구실에 반한 셈이었다.

“당연하지! 잘 결정했다!”

아르가는 리체의 어깨를 두드리며 뿌듯하게 웃었다.

“세르이어스 공작성에서 지내. 좋은 방도 줄 테니까 말이야.”

리체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 디엘이 아주 작게 ‘별로 좋은 선택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뭐, 잘 지내보자.’라고 속삭였다.

그렇게 리체는 몰레킨 부부에게 입양되고 난 뒤 며칠도 되지 않아 세르이어스 공작성으로 거주지를 옮기게 되었다.

디엘에게 처음 인사를 간 자리에서 결정된 사실이므로, 그녀가 실제로 몰레킨 부부와 지낸 시간은 굉장히 적었다. 결국 그들은 서류상으로는 가족이 되었으나 곧바로 떨어져서 가까워지려야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리체는 아르가가 준 ‘좋은 방’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바로 아르가의 실종된 딸을 위해 공작 부인인 이사벨이 마련해 준 방이었다.

그 방은 심지어 소공자인 에르안의 방과도 가까웠다. 리체는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몇 번이나 그 일에 대해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아르가가 워낙에 투덜대는 성격이라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아예 앞으로도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아르가와 점점 더 가까워지면서 더더욱 민망한 이야기는 하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 * *

그 이후 디엘과 리체는 상당히 친해졌는데, 함께 세르이어스 공작성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반년 뒤. 두 사람은 ‘부모님의 날’을 맞이하여 오랜만에 몰레킨 저택으로 함께 가는 중이었다.

가면서도 둘은 계속 아르가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르가가 사라진 딸에 대해 얼마나 맹목적인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그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필 ‘부모님의 날’이라…….”

디엘이 연거푸 걱정을 하자, 리체는 눈을 굴리다가 옅은 한숨을 쉬었다.

“뭐, 어쨌든 우리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없으니까.”

그녀는 공과 사가 나름대로 분명한 성격이었다. 그들이 아르가와 그 잃어버린 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었다.

“그리고 뭐…… 에르안 공자님도 마님께 편지 같은 건 안 쓸 텐데 말이야. 그러니 상대적 박탈감은 느끼지 않으실 거야.”

에르안과 이사벨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녀들에게 듣기로는, 에르안은 이제 열셋이지만, 단 한 번도 이사벨에게 ‘부모님의 날’에 편지를 쓰지 않았다고 했다.

“뭐, 물론 그렇겠지. 차라리 너한테 편지를 쓰고 있으면 모를까.”

디엘은 조용히 긍정했다.

실제로 에르안은 리체를 상당히 가까이했다. 사촌 형 웨데릭보다도 요즈음은 더 친하게 지내곤 했다. 리체로서도 에르안은 실제로 그녀가 맡은 첫 환자나 다름없었으므로 그를 돌보는 데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오고 나서 에르안 공자님이 나한테도 너무 친절해. 늘 의기소침한 도련님인 줄 알았는데.”

디엘은 씩 웃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내가 네 오빠라서 잘 지내고 싶은가 봐.”

“좋은 일이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공자님과 오빠 사이에는 관심이 별로 없지만.”

“왜.”

디엘이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공자님 은근히 무섭게 생겼어……. 밉보이기라도 한다면 노려보실 때마다 오금이 저릴 거야.”

“그럼 뭐, 잘 지내서 다행이고.”

리체는 성의 없게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오빠는 편지 썼어? 오랜만에 부모님을 뵈면서 말이야.”

“안 썼지. 난 열여덟이라고. 그런 건 애들이나 쓰는 거야.”

디엘은 으스대며 리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썼어?”

“그런 건 애들이나 쓰는 거라며.”

리체가 야무지게 받아쳤다.

“보육원에서는 열셋 넘으면 독립해.”

리체는 서류상 몰레킨 부부의 딸이었다. 그리고 디엘을 따라 ‘부모님의 날’에 같이 몰레킨 저택으로 온 것도 맞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부모님의 날’ 편지를 쓸 수가 없었다. 펜을 들어 본 건 사실이지만 정말로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이건 내가 못된 애라서는 아니야.’

더 이상 묻지 않는 디엘을 보며 리체는 혼자 조용히 생각했다.

‘그냥…… 부모 자식의 정을 느끼기엔 함께 지낸 시간이 너무 짧으니까…….’

사실 닷새도 채 같이 지내지 않았는데 편지를 쓰기가 좀 어색했다. 그래도 공작성에서 받은 월급으로 큰 꽃바구니를 들고 가는 중이었다.

‘사실 함께 지낸 시간은 세르이어스 성의 사람들이 훨씬 더 길지.’

리체는 자신을 매일 같이 아껴 주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처방이 마음에 든다며 그녀에게 툭하면 원피스니 간식거리니 하는 것들을 보내 주는 이사벨.

늘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다니며 그녀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건강을 되찾아가는 중인 에르안.

그리고…… 늘 툴툴대지만 ‘너한테 버리는 거야, 알았어?’라며 이것저것 안겨 주는 아르가.

“저기, 오빠.”

리체는 조심스럽게 디엘을 불렀다.

“오늘 자고 갈 거지?”

“응, 휴가는 내일까지잖아.”

디엘은 멀뚱하게 대답한 뒤 눈을 잠시 깜빡이다가 무언가를 눈치채고 씩 웃었다.

“하지만 넌 오늘 밤에 공작성으로 돌아가는 것도 괜찮겠다. 밤에 에르안 공자님이 찾으실 수도 있고…….”

괜히 에르안의 핑계를 댔지만, 사려 깊은 디엘은 리체가 어느 곳을 더 편하게 느끼는지 곧바로 알아채고 덧붙인 것이다.

“부모님은 아쉬워하겠지만, 그래도 넌 고용된 입장이니 어쩔 수 없잖아.”

리체는 머쓱하게 웃었다. 그리고 조용히 ‘고마워, 오빠.’라고 속삭였다. 디엘은 왜인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 * *

한밤중, 세르이어스 공작성.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는 방이 있었다. 바로 세르이어스의 소공자, 에르안의 방이었다.

“음…… 그러니까 엘리벨리즘의 뜻은…….”

에르안은 오랜만에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하는 중이었다. 원래는 머리 아프니까 공부는 하지 말라던 웨데릭의 말을 따라서 책을 멀리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아르가의 조수, 리체가 오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에 에르안은 리체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조수들보다 더 어려서 조금 황당해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 없어. 어차피 왜 아픈지도 모를 것 아니야.”

그러나 그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리체에게 부루퉁하게 한 번 말했을 때, 리체는 야무진 얼굴로 말했다.

“열심히 하다 보면 알 수도 있죠. 전 천재니까요. 열셋에 조수로 스카우트된 거 보면 모르시겠어요?”

원래도 썩 겸손한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아르가가 직접 조수가 되기를 부탁했다고 하니 리체는 매사에 아주 당당했다.

“그래도 고작 열셋이잖아. 환자를 본 경험도 얼마 없을 것 아니야.”

“그럼 공자님은 제 첫 환자인 셈이네요! 언젠가 그게 공자님께 아주 영광이 될 수 있도록 제가 앞으로도 잘 살아야겠네요. 공자님도 분발해서 꼭 나으세요.”

리체의 그 자신만만한 말을 듣고 있다 보면 정말로 리체와 함께 성장하며 자신의 병도 나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 에르안은 점차 리체에게 정을 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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