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외전 7화
외전 6. IF 리체가 몰레킨 집안에 입양되었다면
분홍 머리의 청년, 디엘 몰레킨이 아침부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는 이제 막 열여덟이었으니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막 서 있는 참이었다. 하지만 키가 워낙에 멀대같이 커서 누구나 다 성인으로 보곤 했다.
디엘의 옆에 서 있던 갈색 머리의 소녀가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오랜만에 집에 가는 건데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
그리고 곧바로 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덧붙였다.
“페렐르만 자작님 때문에 그래?”
“……응.”
디엘은 볼을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신경 쓰여 죽겠다는 얼굴로 뒤통수를 긁었다.
“마음이 안 좋네. 날이 날이다 보니.”
오늘은 ‘부모님의 날’이었다. 그래서 아르가의 조수인 디엘은 오랜만에 휴가를 얻어 몰레킨 저택에 온 참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부모님을 보러 온 와중에도 마음 약한 그는 아르가를 계속 신경 쓰고 있었다.
“하필 별다른 스케줄이 없어서 공작저에 머무르시고 있는 바람에.”
“그러게. 하루 종일 공작저에서 혼자 우울해하고 계시겠네.”
그리고 디엘의 옆에서 야무지게 말하고 있는 소녀의 이름은 리체였다. 그들은 지금 세르이어스 공작저에서 몰레킨 저택으로 함께 가고 있는 중이었다.
“차라리 따님을 찾으러 가는 도중이었더라면 좋았을걸.”
리체는 디엘을 올려다보며 착잡하게 말했다.
“그럼 오빠 마음이 좀 편했을 거 아냐.”
그 말에 디엘은 아주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그래?”
“모르겠어.”
리체가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디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너한테 오빠 소리 들을 때마다 감격스러워.”
“뭐야, 그렇게 여동생이 갖고 싶었어? 오빠 소리 하는 내가 그렇게 귀여워?”
“아니야. 그런 귀여움의 감정은 아니고…….”
디엘은 심각하게 말했다.
“뭔가…… 절대로 못 들을 것 같은 그런 호칭을 들은 기분? 좀 헛소리 같다. 그냥 무시해.”
반년 전만 해도 생판 남남이었던 그들이 오누이가 된 사연은 다음과 같았다.
* * *
리체는 몰레킨 집안에 입양이 된 열셋의 소녀였다. 원래는 숫자에 밝다는 보육원 교사의 추천에 따라 페렐르만 약초 상단의 세무 회계 쪽을 맡기로 했었다.
막내딸을 원했던 몰레킨 부부는 <제하 보육원>에서 리체를 보자마자 몹시 마음에 들어 했다. 귀엽게 생긴 아이가 영리하기까지 하다며 여기저기 자랑을 한 건 물론이었다.
원래 막내였던 디엘 몰레킨이 페렐르만 상단의 일을 보기 시작하면서 적적했는데 정말 잘된 것 같다며 몰레킨 부인은 눈물까지 찍어 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려요.”
리체 역시 좀 얼떨떨한 마음으로 몰레킨 저택에서 새 가족들에게 인사를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리체 에스텔에서 리체 몰레킨이 된 것이 아직 얼떨떨했다. 사실은 그냥 보육원을 나와서 마을 의사의 조수로 들어가고 싶었는데, 모두가 ‘몰레킨 집안의 양딸 자리를 왜 거절해!’라며 등을 떠밀어서 반강제로 오게 된 셈이었다.
몰레킨 부부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낯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몰레킨 부인은 가족들을 하나하나 소개시키다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음…… 사실 우리는 막내아들이 한 명 더 있는데, 지금 저택에는 없어.”
“디엘 몰레킨이라고, 세르이어스 공작저 주치의인 아르가의 수족이란다.”
리체도 아르가 페렐르만의 이름은 잘 알고 있었다. 제국 전체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명의였으므로 당연했다.
그가 아주 까다로워서 조수도 아주 자주 바꾼다는 소문도 세르이어스의 영지민이라면 다 알고 있었다.
‘열여섯쯤 되면 나도 지원해 볼까 했었지만.’
어차피 열셋의 꼬마를 받아 줄 것 같지는 않아서, 동네 의원에서 경험을 좀 쌓고 찾아가 보려고 했었다. 그마저도 뭐, 의원에서 자리를 잘 잡으면 굳이 지원하지 않을 생각이기도 했다.
여하튼 생판 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저 흘려듣고 있는데, 몰레킨 부인이 손뼉을 한 번 치며 말했다.
“그래도 디엘 역시 새 가족이 생긴 걸 알아야 하지 않겠니? 아무래도 오랜만에 다 같이 외출을 해야겠구나.”
그렇게 해서 리체는 몰레킨 저택에서 지낸 지 닷새도 되지 않아 바로 세르이어스 공작저에 가게 되었다.
“디엘!”
디엘은 세르이어스 공작성에 있는 아르가의 연구실에 있었다. 그들은 평민이었기에 응접실을 쓸 수 없었고, 당연히 디엘이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몰레킨 부인은 그렇게 연구실에 가서 막내아들이라는 디엘을 꼭 끌어안았다.
“정말 오랜만이구나. 잘 지내고 있니?”
“그저 그렇게 지내고 있어요, 어머니.”
디엘은 다소 지친 얼굴로 말했다.
“업무 강도가 낮지는 않답니다.”
“그래도 할 만하지? 엄살이 좀 있는 네가 이대로 버티는 것만 해도 우리는 아주 몹쓸 곳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단다.”
“엄살이라니요! 그저 고통을 지나치게 참지 않는 것뿐이에요.”
엄살이라는 말에 발끈한 디엘이 화를 냈다.
“지금 정신없이 바쁜 것 안 보이세요? 엘리아 풀과 테타스 꽃잎을 분리 중인데, 이건 정말이지 아주 힘들고 까다로운…….”
물론 몰레킨 부인은 그 징징거림을 다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곧바로 함께 온 갈색 머리의 소녀를 소개했다.
“편지에 썼듯이, 이 아이가 네 새로운 동생이란다. 인사시키러 왔어.”
“아. 네가 리체구나. 반가워.”
리체는 반짝이는 눈으로 연구실을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다가 머쓱하게 디엘과 악수를 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와줄까?”
“……응?”
“엘리아 풀과 테타스 꽃잎을 분리하는 거.”
“아, 너 되게 착하구나.”
디엘은 환히 웃으며 리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괜찮아. 이건 전문 지식이 있어도 몹시 까다롭고 힘든 작업이라서, 선의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란다.”
“착하고 선의가 넘치는 건 맞는데, 그것만으로 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어.”
리체의 야무진 말에 디엘은 살짝 눈을 깜빡였다.
음…… 원래 착한 애가 자기가 착하다고 말을 하던가?
“물에 집어넣으면 좀 쉬울 거야. 엘리아 풀은 물을 먹으면 부풀어서 모양이 확 달라지니까.”
“……어?”
디엘은 미간을 한 번 찌푸렸다. 그러고는 작은 비커에 물을 넣어 엘리아 풀과 테타스 꽃잎을 함께 집어넣어 보았다.
결과를 살펴본 디엘의 눈이 커졌다. 그가 경악한 눈으로 리체를 바라보는데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책에 나와.”
“아니, 대체 어느 책에…….”
“<르누니 기본 약초학> 11장에 있는 각주 24번.”
디엘은 이 상황에서 무엇에 가장 놀라야 할지 잠시 생각해 보다가, 그중 가장 놀라운 것을 말하기로 했다.
“와…… 그 사실을 페렐르만 자작님이 모르실 리가 없는데, 왜 내게 이야기를 안 해 주셨을까?”
그때였다. 연구실 문 쪽에서 냉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분리하면 알려 주려고 했지. <르누니 기본 약초학>은 이미 네가 완독한 책일 텐데?”
30대 중반 즈음의 젊은 나이로 보이는 사람이 어느새 연구실 안에 들어와 있었다.
갈색 머리를 하나로 묶고, 날카로운 인상을 가졌지만 꽤 잘생긴 남자. 리체는 단번에 그가 이 연구실의 주인, 아르가 페렐르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그래도…….”
마치 저승사자를 만난 것 같은 얼굴을 해 보이면서도 디엘은 끝까지 할 말은 했다.
“힌트라도 주셨으면 제가 바로 읽고 알아차렸을 텐데요!”
“하지만 그만큼 기억에서 빨리 지워졌겠지. 개고생을 해야 책은 꼼꼼히 읽어야 한다는 교훈도 남고 말이다.”
“하지만 이거…… 순전히 무게와 생김새로만 분리하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데!”
“그거야 네 사정이고.”
리체는 단숨에 아르가의 성격을 눈치챌 수 있었다. 다들 아르가의 조수를 한다며 들어가서 한두 달 만에 쫓겨 나오는 이유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고.
디엘이 마지막으로 억울하다는 듯이 반박했다.
“하지만 누가 각주 24번까지 외우겠어요!”
“그 꼬마가 읽었잖나.”
아르가가 리체를 바라보며 턱짓을 했다.
디엘은 여전히 억울하다는 얼굴이었지만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리체는 잠시 눈을 굴리다가 디엘의 편을 들어 주었다.
“저는 천재라서 그렇고요.”
잠시 연구실 안에 정적이 흘렀다.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몰레킨 부인이었다.
“그래, 그래. 우리 리체가 몹시 똑똑하다고 보육원 선생님들이 모두 다 그러더구나.”
디엘 역시 소녀의 동심을 깨고 싶지 않았는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쨌든 네 덕분에 개고생 안 하게 생겼어. 정말 영리한 애가 내 동생이 되었네.”
그러나 아이의 동심을 전혀 지켜 줄 생각이 없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르가였다.
“헹, 천재는 무슨. 그런 건 아무에게나 붙는 칭호가 아니다.”
“저는 아무나가 아닌데요.”
아르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눈썹을 치켜올리며 시비를 걸었다.
“건방진 꼬마가 잘난 체를 하는구나. 하지만 이런 건 곧바로 기를 꺾어야 돼. 주제를 알게 해 주는 것이 참다운 어른의 교육이지.”
물론 본격적으로 팔까지 걷어붙이고 서랍 속에서 약초 다섯 개를 신중하게 골라내는 그 모습이 참다운 어른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약초를 다 골라낸 그는 자신만만한 리체의 초록색 눈을 보며 불친절하게 말했다.
“이름을 말해 봐라.”
그리고 리체는 곧바로 대답했다.
“달달이풀, 아람초, 베히꽃, 히라테의 뿌리, 애민들레요.”
아르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다시 한번 벌떡 일어나 이번에는 발돋움까지 하여 맨 위의 찬장에서 다른 약초 다섯 개를 꺼냈다.
물론 대답은 빠르게 나왔다.
“살레꽃, 제비원추리, 데이지아풀, 지카나무의 잎, 명지초의 열매요.”
“너, 너…… 뭐지?”
아르가의 얼굴에 황당하다는 기색이 역력하게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