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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66화 (166/182)

특별 외전 6화

대체 왜 막내아들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오나 싶어서 내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내 옆에 서 있던 폴이 소곤거렸다.

“막내아들이 엄청 똑똑하다는 걸 자랑하고 싶은 거야. 원장님이 얼른 받아쳐 줘야 될 텐데. 기분이 좋아져야 입양도 쉽게쉽게 할 것 아니야.”

그러나 폴만큼도 눈치가 없던 우리 원장님은 ‘막내아들이 아주 똑똑하시군요!’ 같은 말을 하지 못하고 전혀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렇군요. 손이 좀 달려도 밥 먹을 시간은 주시겠지요?”

폴은 옅은 한숨을 쉬며 ‘세상에, 여기서 입양 안 할 수도 있겠는데…….’라며 중얼거렸다.

과연 그 분홍 머리의 아저씨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당연하지요. 그런 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우리 아이들은 하루에 한 끼는 꼭 고기를 먹이고 있습니다. 약초 상단이라고 풀만 먹이는 건 아니겠지요?”

“저희 상단의 약초가 아마 고기보다 비쌀 텐데요.”

“그렇다고 해서 채소를 안 먹이는 것도 바람직한 건 아닙니다. 변비에 걸리기 쉽거든요. 특히나 시금치와 브로콜리는 철분이 풍부하여…….”

우리 원장님이 밥 타령만 하고 있는 동안, 엘번 선생님은 난감한 얼굴로 우리를 죽 살펴보고 있었다. 셈을 잘하는 영리한 여자아이를 나름대로 추리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이제 원장님은 성장기 아이들을 위한 이상적인 식단에 대해 긴 강연을 시작하고 있었다.

“리체.”

엘번 선생님은 내게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어떠니? 너는 늘 의원에 가고 싶어 했잖아. 셈도 잘하고 영리하고, 열 살 이상의…….”

“됐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의원 보조하고 약초 상단 보조는 완전 다르거든요.”

내 대답에 옆에 서 있던 폴이 내 등짝을 퍽, 하고 때렸다.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야, 지금 의원 보조하겠다고 입양을 거절해? 저 사람 인상도 아주 물탱이 같아 보이고 좋은데!”

폴은 내가 한심하다는 듯 더더욱 열변을 토했다.

“지금 원장님 연설을 경청하고 계시는 거 안 보여? 타고난 호구인 거야, 가족으로 삼기에 딱이라고!”

“그렇게 좋으면 네가 가든가.”

“난 남자잖아, 바보야.”

“그것 참 안타까운 일이네.”

폴은 그 이후에도 한참 동안 나를 계도하려 들었다. 입양은 엄청난 기회고, 특히나 저런 탄탄한 약초 상단 지부의 막내딸로 들어가는 건 어마어마한 혜택이라고.

“리체, 가족이 생긴다고. 가족이 생기는 거야. 모르겠어?”

“별로 필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원래부터 없었는데? 넌 한 번도 안 먹어 본 음식을 먹고 싶어 하니?”

“너는 네 잘난 맛에 살아서 잘 모르겠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 가족이 있는 건 엄청나게 좋은 일이야.”

“난 힘들고 어렵지 않을걸? 똑똑하고 성실한 데다 사리 분별이 밝아서.”

나는 몇 달 뒤면 열세 살이 되었다. 그렇다면 바로 의원에 취직할 수 있는데, 굳이 약초 상단에서 셈이나 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가족이라는 게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건 너무 막연한 감정이었다. 굳이 진로까지 바꿔 가면서 갖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인생은 네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야. 네가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폴은 어른스럽게 말했지만 나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래도 난 내 한 몸 건사할 수 있는 재주는 있을 거야.”

그렇게 나는 고개를 저었고, 엘번 선생님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원장님은 그 아저씨를 이끌고 주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날, 그 중년의 남성은 아무도 입양하지 못했다. 원장 선생님과 식사를 하면서 건강한 식단을 직접 체험하며 심도 있는 토론을 하다가 밤이 깊어서 그냥 돌아갔기 때문이다.

입양이 아쉽지 않았던 나는 별생각 없이 평범한 하루를 보냈으며, 폴의 조언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다만 영리했기 때문에 그 조언을 가슴에 새기지는 않았어도 내용 자체는 잊지 못했다.

몇 년 뒤, 어느 날 갑자기 반란이 일어났고 곧이어 갑작스럽게 사형 선고를 받았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죽을 날을 기다려야만 했던 감옥의 차가운 밤, 나도 모르게 아주 옛날의 그 조언을 떠올렸다. 똑똑하고 성실해서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오만이 우스웠다.

폴의 말대로 인생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반란이며 황실의 사형 선고는 아무리 내가 영리하다고 해도 피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으니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감옥 안에서 처음으로 가족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을 후회했었다. 이제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그 집안에 입양되었으면 어땠을까……. 약초 상단의 일은 재미가 없었겠지만 그래도 나름 잘했을 텐데.

하지만 그랬더라면 아마 에르안도 아빠도 못 만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우리 아이들도 못 만났겠지.

역시 그때 냉큼 가겠다고 대답하지 않은 건 잘한 일인 것 같았다.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에르안의 손길을 느끼며, 나는 포근하게 잠이 들었다.

* * *

며칠 후.

“디엘! 어서 오렴! 잘 지냈니?”

디엘은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에게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본가에 들른 그의 손에는 쇼핑백이 가득했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얼굴 좀 자주 보이렴. 그게 효도지, 다른 게 효도니?”

디엘의 어머니, 몰레킨 부인이 원망스럽다는 듯 눈을 흘겼다.

“그래도 ‘부모님의 날’에는 얼굴을 좀 비추는구나.”

사실 디엘은 늘 바빴으나, 오늘은 ‘부모님의 날’이었기 때문에 시간을 내어 들른 것이었다.

더 이상 아이가 아니기에 편지를 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겸사겸사 얼굴을 볼 시간을 내기에 좋은 핑계였다.

몰레킨 부인은 한숨을 쉬며 서운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나이가 드니 자식들 얼굴이 얼마나 보고 싶은지 몰라. 너희가 보고 싶어서 매일 밤마다 눈물로 베개를 적신단다. 특히나 너는 열일곱 살 때부터 페렐르만 자작님의 눈에 들어서 제일 먼저 우리의 품을 떠났잖니…….”

“죄송해요, 어머니.”

디엘이 머쓱하게 몰레킨 부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요새 출장이며 일이 좀 많아서요. 아시잖아요, 요새 세르이어스 공작성의 일도 함께 보는 바람에.”

“일이 너무 많으면 그만두는 게 어떠니? 애초에 세르이어스 공작성하고 고용 계약을 한 것도 아니고…….”

“아, 이건 선물이에요.”

“그냥 오지, 뭘 이런 걸 다…….”

“오늘은 ‘부모님의 날’이잖아요.”

“네가 꼬물거리며 편지를 써 준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 그래도 내품에 끼고 키웠던 그때가 정말 그립구나.”

몰레킨 부인은 한숨을 쉬며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이건 수도에서도 너무 비싸서 잘 구할 수 없는 에디나 의상실의 한정판 스카프!

“이, 이, 이건! 세상에, 이거 엄청 비싸지 않니?”

“아, 거기 안에는 옹브뢰 관리실의 피부 관리권도 들어 있어요. 아마 3년 동안은 넉넉히 쓰실 거예요.”

“어머나…… 귀족 부인들만 가는 곳으로 알고 있는데.”

“평민도 받겠다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가격을 올려 드렸지요.”

“하, 하지만 네가 돈이 어디서 나서 이렇게 비싼 걸…….”

관리권을 집어든 몰레킨 부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실제로 관리권에 적혀진 금액이 말도 안 되게 높았던 것이다.

“세르이어스 공작 부인께서 일이 많다며 추가 수당을 듬뿍 챙겨 주셨어요. 저번에 페렐르만 자작님께서 월급 인상도 대폭 해 주셨고요. 세르이어스 공작님도 정말 숨 쉴 때마다 보너스를 주세요.”

디엘은 머쓱하게 턱을 긁었다.

우정과 감사는 돈으로 표현하라는 말을 한 뒤로 리체는 확실히 그 말을 지켜 주고 있었다. 아무리 몰레킨 집안이 꽤 부유한 평민이라고는 하지만, 디엘이 선물한 것들의 액수는 상상도 못할 금액이었다.

“하는 일에 비해 파격적으로 많이 받고 있기는 하죠. 하지만 어머니께서 그만두라고 하시면 효도 차원에서…….”

“아니다.”

몰레킨 부인은 곧바로 대답했다.

“파격적으로 많이 받는다면 거기 있어야지. 그만두긴 뭘 그만둬.”

디엘은 속으로 어머니가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는 것을 눈치챘다. 자신이 아주 많은 돈을 받고 나서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음…… 다음 ‘부모님의 날’에는 그럼 이깟 선물보다는 그냥 어린 시절처럼 편지를…….”

“얘가 다 커서 징그럽게.”

그리고 그 세상에 눈을 뜨면 더 이상 예전과 같아질 수 없는 법이었다.

‘허허.’

디엘은 조용히 웃으며 생각했다.

‘내가 어머니를 닮았었군.’

보너스를 받았을 때 자신의 표정이 꼭 저랬으려나.

“우리 막내, 일단 얼른 들어와. 밥 먹자. 너희 아버지가 너 온다고 열심히 식사 준비를 했단다.”

몰레킨 부인은 아들이 아닌 쇼핑백을 끌어안고 저택 안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막내라니, 제 나이가 얼마인데요. 좀 쑥스러워요.”

“그래도 우리에게 넌 언제나 막내지. 아, 사실은 너 말고 막내가 있을 뻔하긴 했단다.”

“……네? 무슨 소리세요?”

디엘은 완전히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가 눈을 크게 뜨자 몰레킨 부인이 씩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네가 페렐르만 자작님의 곁으로 가고 난 뒤, 상단에 일손이 달리고 나도 좀 적적해서 여자아이 하나를 입양하려고 했거든. 네 아버지는 가까운 보육원에 직접 가기까지 했어.”

“근데 왜 안 하셨어요?”

“낸들 아니?”

몰레킨 부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 보육원에서 식사만 배 터지게 얻어먹고…… 갑자기 음식에 대한 자신의 철학이 바뀌었다며 제2의 인생을 살아 보겠다고 하지 않겠니? 그 와중에 입양은 완전히 잊어버렸지, 뭐.”

아버지가 살기 시작한 제2의 인생이라면 디엘도 잘 알고 있었다. 건강식과 요리에 취미를 붙이게 된 그의 아버지는 그 이후 식료품 유통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으니까.

“어쨌든 충격적이네요, 제게 여동생이 생길 수도 있었다니…….”

“그러게 말이다. 네 성격상 그 애의 수발을 아주 열심히 들어 주었을 텐데 말이다.”

“에이, 어머니. 그게 무슨 소리세요. 전 그 누구의 수발도 들어 준 적 없다고요. 지금 공작 부인께도 순수한 우정과 돈…… 아니, 순수한 우정으로만 대했다고요. 그리고 보육원 하니까 생각나는데, 이번에 공작님께서 보육원 관련 예산을 또 대폭 상향하셨어요.”

“어휴, 그 사람 정말 돈이 많은가 보다.”

디엘과 몰레킨 부인은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식당으로 향했다. 디엘과 비슷한, 분홍색 머리의 키가 큰 아버지가 차려놓은 완벽하게 균형 잡힌 식사를 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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