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외전 5화
* * *
얼마 뒤, 에르안은 만족스러운 포식자처럼 웃고 있었고 나는 완전히 지쳐서 그의 단단한 몸에 기대어 있었다.
“많이 힘들어?”
“……네.”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로 숨을 몰아쉬던 내 눈에 띈 것은 책상 위에 있던 그의 예산안이었다.
단정한 글씨체로 정리된 서류에 ‘보육원 지원금’이 적혀 있었다. 다른 영지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의 큰 금액이었다.
나는 가만히 그 예산안을 바라보았다. 보육원 명단에는 내가 지냈던 <제하 보육원>도 있었다.
새삼 내가 세르이어스 영지 구석에 있는 보육원 출신이었다는 것이 실감났다. 지난가을에도 인사를 드린다며 직접 다녀왔었는데 건물이 아주 새것처럼 반짝였던 것이 기억났다.
내 시선이 닿은 곳을 눈치챘는지 에르안이 조용히 말했다.
“보육원 생활은 어땠어? 많이 힘들었어?”
“아뇨.”
나는 냉큼 대답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사실 어머님께서 자금 횡령이나 뭐 그런 것들에 되게 엄격하셨거든요. 그 당시 지원금을 가로채고 아이들을 학대했던 근처의 보육원 원장을 크게 벌하신 사건이 있었어요. 그래서 뭐, 세르이어스 영지의 보육원들은 그런 일들하고 거리가 멀었지요.”
어머님의 통치는 잔인하기는 했지만 효과는 아주 확실했다. 몇 번 중간 관리자들 사이에서 피바람이 부니 아랫사람들이 살기에는 아주 좋아졌던 것이다.
물론 부작용은 있었다. 세르이어스 영지의 보육원이 아주 괜찮다는 소문을 듣고 다른 영지에서도 부모들이 자식을 데려와 세르이어스의 보육원에 버렸기 때문이다.
자식을 버릴 때 나름대로의 배려를 했나 보다며 선생님들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던 것이 기억났다. 머릿수가 많아지다 보니 지원금은 항상 빠듯했고 그러니 꼭 필요한 데에만 예산을 쓸 수밖에 없었다.
“굶거나 못 배우는 일 없이 나름 괜찮게 살았어요. 저희 원장님은 다른 건 몰라도 먹을 건 잘 먹여야 한다는 주의여서요. 다만 그래도 보육원은 보육원이니 썩 넉넉하게 자라지는 못했지만요.”
아주 오랜만에 해 보는 어린 시절 회상이었다. 심지어 보육원의 일은 아빠에게도 잘 말하지 않았다. 괜히 마음만 아파할 것 같아서였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달달한 디저트 같은 건 아주 특별한 날에나 먹을 수 있었어요. 원장님께서는 성장기의 아이들에게는 그런 것보다 고기와 곡식과 우유가 더 중요하다고 하셨거든요. 맞는 말이죠.”
“…….”
“그래서 세르이어스 공작성에 왔을 때 달콤한 것들을 잔뜩 먹을 수 있어서 그게 참 좋았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으며 에르안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그의 표정이 이상하게 굳어 있었다. 약간 슬픈 눈으로 초코케이크를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음…… 이런 이야기 싫으신가요? 좀 우울하죠?”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그가 고개를 저으면서 나를 더 꼭 끌어안았다.
“아니, 아니야. 다만…….”
그는 다소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말을 이었다.
“네 어린 시절에 대해서 생각보다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게 실감 나서.”
“뭐, 열셋부터 공작성에서 지냈으니 그때도 어렸죠. 보육원에서 지내던 시절이야 뭐, 길지도 않았고.”
“…….”
“설마 동정하시는 건 아니죠? 저는 나름대로 잘 지냈어요.”
아무래도 에르안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서 나는 살짝 졸린 와중에도 계속해서 덧붙였다.
“예를 들어 ‘부모님의 날’에도, 괜히 부치지 못할 편지 같은 걸 쓰면서 울지 않았어요. 다 알고 있는 의학서를 온종일 읽었는걸요.”
제국에서는 ‘부모님의 날’에 보통 아이들이 부모님께 감사 편지를 써서 꽃과 함께 전달하곤 했다. 그리고 보육원 친구들이 훌쩍거리면서 보내지 못할 편지를 쓸 동안, 나는 단 한 글자도 쓰지 않았었다.
“글쎄, 리체.”
한참동안 침묵하던 에르안이 부드럽게 내 몸을 쓸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다 알고 있는 의학서를 하루 종일 읽은 게…… 어쩌면 편지를 쓴 것보다 더 슬퍼했다는 뜻 아닐까?”
음, 그런가.
나는 노곤해져서 스르르 눈을 감았다. 어느새 잠이 와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에르안이 조심스럽게 나를 안아 소파에 눕혀 줄 동안 나는 아주 옛날에 있었던 꿈을 꾸었다. 오래도록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던 보육원 시절의 꿈이었다.
* * *
아주 어린 아기일 때부터 보육원에서 자랐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보육원에서 잘 적응하며 지냈다. 엘번 선생님이 내가 네 살 즈음인가 다섯 살 즈음에 혼자서 글을 깨쳤다는 말을 했는데, 실제로 나는 글을 배운 기억은 없지만 언젠가부터 책도 혼자 읽었다.
“원장 선생님, 지원금은 그대로인데 아이들이 두 배로 늘어서…….”
“성에다가 연락했는데 내년부터는 지원금을 늘려 준대. 올해 겨울은 일단 버텨야 하는데……. 일단 먹을 것부터 사.”
<제하 보육원>의 원장님은 애들은 잘 먹여야 한다는 철칙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럼 남은 예산으로는 옷과 비누를…….”
“무슨 소리야? 옷이야 좀 기워 입어도 되고, 씻는 거야 조금 참아도 돼. 하지만 성장기는 다신 돌아오지 않으니, 그 돈으로 고기나 더 사.”
다시 말하지만 우리 원장님은 꽤 합리적이고 좋은 사람이었다.
“얘네들은 열셋이 되면 어쨌든 독립해야 될 처지야. 그 후에는 알아서 자기가 자기 밥벌이를 하게 될 텐데, 우리 밑에 있을 때까지는 최대한 몸에 좋은 것을 많이 먹여 놔야지. 어릴 때부터 배고프게 살면 세상에 대한 분노가 쌓여서 안 돼.”
열셋이면 충분히 어딘가의 보조나 조수, 혹은 도제로 들어갈 수 있는 나이였다.
일손이 달리거나 전문적인 인력이 필요한 곳에서는 항상 보육원에서 똑똑한 아이들을 추천받곤 했다. 손재주가 좋은 애들은 공방이나 화실에 가고, 튼튼하거나 몸을 잘 쓰는 애들은 용병단에 들어갔다. 이도 저도 아닌 애들은 귀족가의 수습 하녀로 들어가기도 했다.
물론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내 진로를 정한 상황이었다. 나는 아주 똑똑하고 기억력도 좋은 데다가 의학 서적 읽는 것도 좋아해서 당연히 의원의 조수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제하 보육원>은 조금 허름하고 옷이 잘 제공되지 않아 계속해서 물려받아 입어야 했지만 나름 도서관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도서관에 있는 기부 받은 어린이용 의학책들을 섭렵하면서 지냈다. 내게는 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한정된 자원에서 움직이는 보육원에서 모든 게 다 좋을 수는 없었다.
“크흠, 영리하고 예쁜 아이를 입양하고 싶은데.”
아주 가끔, 입양을 하고 싶다며 보육원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부모가 없는 우리에게는 나름 엄청난 기회였다. 아무리 보육원이 나쁘지 않다고 해도, 우리는 매끼 줄 서서 밥을 먹어야 했고 하루에 두 번 이상 씻을 수가 없었으니까.
잠도 여러 명이서 함께 자야 했고 한 명이 아파서 밤새 울기라도 하면 그 방의 모두가 잠을 설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아기 때부터 보육원에서 지내서 몰랐으나, 가족과 함께 지내다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곳에 들어온 아이들은 가족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매일 같이 말했다.
“예, 보시고 마음에 드는 아이가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럴 때마다 원장님은 자랑스럽게 우리를 내밀었지만 입양을 원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낡아빠진 옷에 다소 꾀죄죄한 몰골, 심지어는 나름 살도 잘 올라서 썩 불쌍해 보이지도 않는 안색…….
그랬다. <제하 보육원>의 단점은 입양 비율이 현저하게 낮다는 것이었다.
“어, 음…… 일단 막 눈에 띄는 운명적인 아이는 없군요.”
우리 모두가 다 비슷한 꼴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결국 입양을 하러 온 남자는 난감한 얼굴로 우리를 죽 둘러보다가 원장님을 향해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혹시 추천해 주실 만한 아이는 없을까요?”
“흠, 영혼의 울림이 오는 아이가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면 원하시는 조건을 먼저 말씀해 주시죠.”
원장님이 심각한 얼굴로 제안하자 남자가 냉큼 대답했다.
“일단 저희는 딸이 없어서 여자아이였으면 좋겠습니다.”
“여자아이 말씀이시군요, 음…….”
“그리고 열 살 이상이었으면 합니다. 우리 아이들과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면 어울리기 힘들 것 같아서……. 아, 저희는 약초 상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입양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냥 하루 빨리 나이가 들어서 직접 의원에 취직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입양을 하겠다며 사람들이 찾아올 때에는 상당히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른 아이들에 섞여서 존재감 없이 서 있곤 했다. 어설프게 농가 같은 곳에 입양되었다가는 양이나 치다가 의학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 것 같아서였다.
게다가 가족이라는 게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에 별로 필요하다는 생각도 못 했다. 그냥 막연히 나는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회귀 전에 내가 가족을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열심히 돈을 모아 성인이 되자마자 의원을 차린 이유이기도 했다.
“저희가 평민이기는 해도 페렐…… 아, 이렇게 말하면 잘 모르겠지요. 어쨌든 제국에서 가장 큰 약초 상단의 지부 중 하나를 맡고 있답니다.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별 관심 없이 서 있던 나는 ‘약초 상단’이라는 말에 다소 솔깃했다. 의학과 약초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제야 여자아이를 입양하고 싶다며 찾아온 중년의 남성을 자세히 보았는데, 키가 훌쩍 크고 분홍색 머리의 선한 인상을 가진 아저씨였다.
“우리 막내아들이 이제 열일곱인데, 워낙에 똑똑해서 상단주님의 눈에 들었지 뭡니까. 그래서 지부에 손이 달려요. 그러니 셈을 잘하는 영리한 아이였으면 좋겠군요.”
아저씨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치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