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64화 (164/182)

특별 외전 4화

외전 5. 어린 시절

“에르안?”

내가 집무실의 문을 노크하고 빼꼼 얼굴을 내밀자마자 서류에 파묻혀 있던 에르안이 환히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리체!”

“간식 가져왔어요. 먹으면서 해요.”

장기 연구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나는 오랜만에 아주 긴 휴가를 받아 공작성에서 계속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가져온 거대한 초코케이크를 보면서 에르안은 순간적으로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곧바로 활짝 웃었다.

“케이크네?”

“네! 초콜릿도 설탕도 팍팍 넣었어요. 건강에는 좋지 않겠지만…… 그래도 달면 달수록 맛있잖아요?”

물론 주방의 모든 사람들이 내게 요리에 재능이 없다고 했다. 음식이 달기만 해도 능사가 아니라고 몇 번을 강조했다.

달면 달수록 좋아하는 내 입맛이 보편적인 건 아니라며 적당히 달아야 한다고도 했지만…… 그래도 에르안은 내가 만든 것들은 모두 다 맛있게 먹어 주었다. 그냥 내가 만들어 준 것이라 열심히 먹는다고 하기엔 남들에게 한 입도 주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 입맛은 비슷한 것 아닐까 싶었다.

“세드리안하고 유리아도 같이 만들었어요. 꽤 힘들었는지 다 만들고 나서는 먹지도 않고 바로 낮잠을 잔다며 들어가 버리더라고요.”

이상하게 세드리안과 유리아는 내가 뭘 만들든 만들 때만 즐거워하고 함께 먹을 때에는 슬금슬금 자리를 비키곤 했다. 뭐, 아빠랑 데이트하라는 깊은 뜻인가 싶었다. 특히 세드리안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말 어른스러웠으니까.

벌떡 일어나 바로 내게 달려올 줄 알았던 에르안은 유혹하듯 씩 웃어 보이기만 했다.

잠시나마 티타임을 가지려면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야 하는데? 차는 안 가져왔으니 하녀에게 차도 가져오라고 해야 하고…….

그러나 그는 설렁줄을 당기는 대신 피곤하다는 듯 살짝 눈을 문질렀다.

나는 순간적으로 뭔가 의심스러워서 종종종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에르안, 어디 아파요?”

에르안은 별 대답 없이 눈썹을 치켜올렸고, 나는 설마 그가 정말 몸이 좀 안 좋은가 싶어 책상 앞에 케이크를 올린 뒤 조심스럽게 그의 뺨에 손을 올렸다.

에르안에게 가까이 가자마자 그가 내 허리를 번쩍 들어 안아 무릎 위에 앉혔다.

“어머!”

순식간에 집무실 책상 의자에 앉은 그에게 어린아이처럼 안기게 된 나는 살짝 눈을 흘기며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그리고 에르안은 정직하게 대답했다.

“개수작.”

가까이서 본 그의 몸은 어디 아프기는커녕 아주 건강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나와 붙어 있자 그 어느 때보다 얼굴에 활기가 돌았고 혈색이 좋았다.

“티타임 하려면 떨어져 있어야 하잖아. 난 이렇게 있고 싶은데.”

하기야, 이런 꼴을 하녀에게 보여 줄 수는 없었다. 아무리 우리가 금슬이 좋은 것을 세르이어스 공작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니까.

나는 살짝 한숨을 쉬며 그의 몸에 기대었다. 그 와중에 몸이 아주 단단했다.

“뭐, 넘어가 드리죠.”

“고마워, 리체.”

에르안은 내 볼과 목, 어깨 등에 뜨거운 입술을 누르며 서글프게 말했다.

“케이크…… 나도 같이 만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가족과의 시간을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에르안 입장에서는 함께 케이크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건 굉장히 슬픈 일이었다.

“그런데 예산안이 좀 급해서…….”

하지만 에르안은 상당히 유능한 공작이었고, 그건 아주 일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그의 건장한 팔 안에 갇혀서 그가 쏟아붓는 입맞춤을 받아 내며 간신히 대답했다.

“당연히 일이 먼저죠. 평상시에 애들하고 시간을 안 보내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가 좀 도와주시면 좋았을 텐데, 서류는 한 글자도 보려고 하지 않으시니.”

“양심이 있다면 어머님께 도움을 청하면 안 되죠.”

“……그건 그렇지.”

에르안이 공작 위를 받고 나서 어머님은 본격적인 사치와 향락의 시기를 보내고 계셨다. 그동안 꼼꼼하게 영지를 관리했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의 일상이었다. 내가 어릴 때, 공작성에 하루가 다르게 시체들이 매달려 있었던 걸 생각하면 더더욱 믿기지 않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렇게 일하기 싫어하시는 분께서 내가 공작 위를 받은 다음에도 일을 하셨으니…….”

나를 반드시 며느리로 삼아야겠다며 에르안을 페렐르만 자작저에 보내시고, 또 에르안이 아파서 정신을 놓았을 때에도 계속해서 어머님께서는 공작령의 일을 봐주셨다. 그러나 에르안이 다 낫자마자 완전한 은퇴를 선언하셨다.

며칠 전 티타임에서 내가 ‘갑자기 일을 놓으시니 허전하지는 않으세요?’라고 물었을 때, 어머님은 각종 보석 카탈로그를 뒤적거리며 태연하게 대답하셨다.

“내가 일하려고 세르이어스 공작과 결혼한 줄 아니? 그 잘난 얼굴 실컷 보고 이 많은 재산 펑펑 쓰려고 온 거지.”

“……네?”

“이 정도 뻔뻔함이 없었다면 고작 남작가 영애가 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수도 없었을 거란다.”

“아버님을 사, 사랑하신 거 아니에요?”

“당연히 사랑했지.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이후 이 미모와 이 재력으로 아무 남자에게도 넘어가지 않은 걸 보면 모르겠니? 근데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굳이 그 사람의 배경을 싫어할 이유가 있나?”

“뭐, 아예 독립적인 사안인 건 맞죠…….”

“그래. 좋은 인간이 좋은 거 갖고 있음 더 좋은 거야.”

뭐 듣고 보니 또 맞는 말이었기 때문에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실지라도 어머님의 아버님에 대한 사랑은 꽤 대단한 것이었다. 내가 처음 어머님을 보았을 때에도 상당히 고혹적인 미인이었지만 관리를 워낙에 열심히 하셔서 어머님은 지금도 엄청난 외모를 뽐내고 계셨다.

그 미모에 그 재력이라면 많은 남자들이 달라붙었을 만도 한데 그 어떤 남자와도 염문설을 내신 적이 없었다. 심지어 아들인 에르안은 어린 시절 오랫동안 남부에 내려가 있어서, 마음껏 다른 남자를 만나 봐도 될 환경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에르안의 말에 따르면 어머님의 책상 서랍 속에는 항상 아버님의 작은 초상화가 들어 있다고도 했었다.

나는 다소 숙연해졌다. 우리 아빠가 엄마를 잃고 나를 찾으려 대륙을 뒤진 만큼이나, 어머님은 아버님을 잃고 난 뒤 영지를 잘 이끌기 위해 어마어마하게 노력하신 것이다.

소중한 사랑을 잃고 나서도 남겨진 것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두 사람의 삶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거겠지…….

내가 혼자 장렬하게 감동하고 있는데 어머님은 눈을 치켜뜨며 덧붙였다.

“그러니 너도 공작령 일 맡아서 할 생각 하지 마. 생고생이다, 그거. 에르안한테 다 맡겨.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 걸 추천한다.”

“음, 지금도 뭐 그러고 있기는 하지만…….”

“내 아들이지만 얼굴은 잘났으니, 그거나 보고 돈이나 쓰면서 살아. 그러기에 아주 좋은 자리 아니니?”

큰 감동에 비해 나름 속물적인 결말이었다.

어쨌든 어머님은 그렇게 공작령의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다. 나 역시 연구 때문에 바빴으므로 공작령 일을 조금도 도와줄 수 없는 처지라 에르안은 혼자 모든 일을 다 해야만 했다. 심지어 보통 공작가의 안주인들이 하는 일조차 에르안이 다 하고 있었다.

“일이 많죠?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

“너는 존재 자체가 도움이야. 이렇게 가끔 찾아와 주면 모든 피로가 다 풀리는 느낌이고.”

에르안은 나를 꼭 끌어안으며 내 목덜미에 깊게 입을 맞추었다.

쏟아지는 밭은 숨결에 솜털이 바짝 서는 와중에도 나는 애써 정신을 차리고 대화를 이어 갔다.

“제가 연구실에 나갈 때에는 퇴근길에 꼭 마중도 나오잖아요. 피곤할 텐데…….”

“무슨 소리야. 네 얼굴 보면 피로가 다 풀린다니까. 너랑 함께 조금이라도 더 있기 위해 나가는 마중인데 그게 왜 피곤해.”

“아니, 그게…… 이론적으로 어쨌든 에너지를 쓰는 거니까 피곤한 건 맞죠.”

“그런가.”

에르안이 성의 없게 대답하며 빙긋 웃은 채 내 눈을 맞추었다.

“그럼 다음 연구 주제로 삼아 보는 게 어때. 왜 에르안 세르이어스는 리체에 관련된 일이라면 에너지를 써도 피로가 풀리는가.”

“무슨…….”

“난 생체 실험도 환영이야. 네가 직접 하는 거라면.”

그가 잘난 얼굴을 들이대며 씩 웃자 간신히 차리고 있던 이성이 살살살 풀어지며 정신이 몽롱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어머님의 말씀은 옳았다. 어쨌든 세르이어스의 유전자는 대단했고 이 잘난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공작 부인의 자리는 좋은 것이었다.

“난 이렇게 해도 피로가 풀리던데…….”

에르안은 내 허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눈웃음을 쳤다.

“한번 연구해 볼래?”

천천히 입술이 다가왔다.

나는 저항할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불만스럽게 속삭였다.

“……지금 이러려고 연구 운운한 거죠?”

“아니.”

에르안이 부드럽게 숨결을 섞으며 내 입술에 대고 말했다.

“지금이라니 완전 틀렸어. 처음부터 마음먹고 있었는데.”

하기야, 아무도 없는 집무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에르안이 나를 가만둘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걸 알면서도 그가 요망하게 쳐 놓은 덫에 걸렸으니 이제 와서 발버둥 쳐도 소용없었다. 뭐 거부할 마음도 없었고 말이다.

나는 그의 무릎에 앉은 채로 가만히 눈을 감고 그를 받아들였다. 내가 만든 초코케이크보다 훨씬 더 달콤한 입맞춤이었다.

내게는 언제나 져 주는 에르안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내가 버거워해도 짐승같이 몰아붙였기 때문에, 곧이어 나는 눈물까지 어릴 정도로 잔뜩 시달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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