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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63화 (163/182)

특별 외전 3화

* * *

에르안은 정박 중에 의식을 잃은 리체를 안아 들었다. 몇 번이고 리체가 예고했고, 또 행동 지침까지 명확히 일러 주었지만 순간 머리가 하얘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공작님.”

에르안이 항구에 내리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의사가 바로 달려왔다.

“연락은 받았습니다. 공작 부인께서 편찮으시다고요.”

사실 에르안은 지켈을 시켜서 이미 배에서부터 비둘기를 날린 터였다. 다행히 배에는 비상용 비둘기가 한 마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비둘기를 보낸 곳은 이르비아의 왕궁이었다.

짧은 메시지였지만 왕궁에서 이 쪽지를 받아 든 셀리아나는 바로 의도를 알아챘다. 시간 맞추어 왕궁의를 보내라는 소리였다. 그러므로 그는 이르비아의 땅을 밟자마자 이르비아 왕궁의를 만날 수 있었다.

리체는 ‘이르비아에 도착하면 귀족가의 주치의를 부르겠지’라고 예상했지만 틀린 셈이었다. 그는 배에서부터 왕궁의를 대기시켜 놓은 것이다.

“이걸 보여 주라고 하던데.”

에르안은 리체가 주었던 쪽지를 왕궁의에게 전달했다.

왕궁의는 쪽지를 보며 감탄했다.

“이럴 수가. 정말 체계적으로 정리를 잘하셨군요.”

그가 안심하라는 듯이 에르안을 보면서 웃어 보였다.

“심지어 증상에 따른 마력 주입량까지, 보는 의사가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소견을 첨부하셨어요. 혹시 공작 부인이 의사인가요?”

“……아주 훌륭한.”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칼카라스 꽃잎의 후유증인데, 남부에서는 긴 항해를 할 때 일부러 섭취하는 약초이기도 합니다. 뱃멀미를 하느니 차라리 정신을 놓고 있다가 도착하겠다는 사람들이 꽤 많거든요.”

에르안은 불안한 마음을 꾹 누르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신혼여행 중에 원래 묵기로 한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사용인에게 말했다.

“S급 비둘기 10마리를 데려와. 수도로 보낼 거야.”

“10마리……나요? 게다가 S급 비둘기는 정말 비싼데요. 기본적인 훈련도 훈련이거니와 엄청 빠르니까…….”

S급 비둘기라면 한 마리만 써도 가격이 상당했다. 이르비아의 왕족마저도 쉽게 쓸 수 없었다.

“예산 한도는 없다.”

그리고 그는 리체에게 받아서 이미 베껴 놓은 쪽지를 그대로 아르가에게 보냈다. 리체가 이 정도는 해도 된다고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 * *

리체가 신혼여행을 떠나고 며칠 뒤, 아르가는 페렐르만 자작저에서 비둘기 열 마리를 받았다. 에르안이 보낸 것으로, 내용을 읽어 보니 리체가 뱃멀미를 해서 과도한 약초 섭취로 소소한 쇼크가 온 것 같았다.

비둘기 열 마리는 각각 그동안 리체가 섭취한 약초의 양이 정확히 적혀 있었다. 심지어 S급으로, 급하기는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었다.

“흠, 리체가 정리해 놓은 것이군.”

아르가는 비둘기 중 두 마리에게 쪽지를 써서 보냈다.

사실 의사가 붙은 건 아니니까 관찰 일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별것 아닌 흔한 증상이라고 해도 딸이 걱정되었기에 ‘만의 하나’를 생각하며 보낸 쪽지였다.

그 이후 에르안에게 온 비둘기는 한 마리였다.

아르가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관찰 일지를 쓰긴 썼군. 옛날에 리체가 쓰는 걸 본 적이 있나……. 아니면 선상 의사가 곁에 있었나?”

그리고 짧게 써서 비둘기를 보냈다.

그 후…… 아르가는 퇴근길에 하늘을 뒤덮은 비둘기 떼를 보았다.

“뭐야? 비둘기들이 왜 갑자기 떼로 다녀?”

그는 순간 불안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비둘기 떼가 와르르르 페렐르만 자작저의 창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설마…… 설마 이 미친놈이…….”

아르가가 미친 듯이 뛰어서 자신의 방에 들어갔을 때였다. 비둘기 떼가 쪽지를 하나씩 매달고 온 책상, 책장, 침대와 의자에 떼를 지어 앉아 있었다.

“……이게 무슨…….”

아르가는 쪽지 몇 개를 뜯어보고 혀를 찼다.

“취침 시각과 기상 시각, 물을 마신 양은 그렇다고 쳐도 잘 때 뒤척인 횟수……. 이런 건 왜 적어 둔 거야?”

아르가는 쪽지를 하나하나 펴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에르안은 의사가 아니었고 그래서 의학적 소견을 반영하지 않은 ‘관찰 일지’를 말 그대로 줄줄 써 내려간 것이다.

“이렇게 적을 정도면…… 잠을 자기는 잤나…….”

이건 뭐, 정말 24시간 내내 리체를 관찰한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아르가는 별 이상 없을 걸 알면서도 에르안의 쪽지를 모두 펼쳐서 순서대로 하나하나 맞추어 보았다.

“괜찮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불안하군. 자식 일이니…….”

그에게 제발 세르이어스의 주치의로 남아 달라고 빌었던 이사벨의 심정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뭐…….”

그는 비둘기 한 마리에게 [별 이상 없음]이라는 쪽지를 매달아 보내면서 중얼거렸다.

“정말 리체를 사랑하고 아끼는 건 확실한 것 같군. 이미 알고 있긴 했지만.”

그리고 방 안을 가득 채운 S급 비둘기들을 보며 소리쳤다.

“가, 이제! 다 가!”

* * *

에르안은 정원에서 비둘기를 받아 [별 이상 없음]이라는 쪽지를 받아 들고 나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제국까지 왕복을 세 번씩이나 한 S급 비둘기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에르안을 보았다. 지쳐서 에르안의 방까지 못 오고 정원에 앉아 울어 대는 바람에 그가 여기까지 나온 것이었다.

리체가 쓰러진 지 벌써 나흘째였다. 그는 S급 비둘기의 발에 금화를 하나 쥐여 줬고, 정원에서 널브러져 있던 S급 비둘기는 금화를 쥐니 기운이 생겼다는 듯이 힘차게 날아올랐다.

“뭐…… 다행이군.”

에르안은 핼쑥한 얼굴로 다시 리체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비어 있는 침대를 확인하고 화들짝 놀랐다.

“공작님.”

때마침 트레이를 끌고 온 하녀 하나가 상냥하게 말했다.

“공작 부인께서 일어나셨어요. 지금 씻고 계세요. 제게 식사를 부탁하셔서 주방에 갔다 오는 길이에요.”

“이, 일어났다고?”

“예. 공작님께서 비둘기를 발견하고 내려 가시자마자 눈을 뜨셨어요.”

에르안이 잠시 비둘기를 보고 정원으로 간 사이에 리체가 일어난 것이다. 그는 순간적으로 비둘기를 하인에게 가져오라고 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하녀가 그의 얼빠진 표정을 보면서 말했다.

“아, 혹시나 공작님께서 오시면 마님께서 전해 달라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뭔데?”

에르안의 목소리는 이미 갈라져 있었다.

“아주 정상이니 걱정 마시라고요. 그리고…….”

하녀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씻을 때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에르안은 당장 욕실로 들어가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리고 얌전히 리체의 침대맡에 앉아 마음을 가다듬고 기다렸다. 너무 걱정했다는 티를 내면 리체가 또 민망해할 것 같아서 표정까지 관리하면서 말이다.

리체는 씻고 나와서 그런 에르안의 모습을 보고 혼자서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안절부절못했을 것이 뻔한데 꾹 참고 기다리는 것이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에르안, 내가 뭐랬어요.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요.”

리체는 에르안에게 안기며 등을 토닥였다.

리체보다 한참 덩치가 큰 에르안이었지만 그는 리체에게 안긴 채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잔뜩 쉰 목소리로 천천히 속삭였다.

“나는…… 진짜…… 조금만 걱정했…… 네가 시키는 대로…… 잘했…… 흐윽.”

에르안은 끝내 눈물이 뚝뚝 떨어져서 말을 못 이었고, 리체는 그의 등을 쓸어 주며 이제 괜찮다고 몇 번을 속삭였다. 그리고 아주 나중에서야, 리체는 엄청나게 빼곡한 관찰 일지의 존재를 알았다.

“관찰 일지…… 이런 걸 왜……. 쓰는 법도 안 배웠으면서…….”

“너도 썼다며. 혹시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봐 일단 다 기록했어. 뭘 기록하고 뭘 기록하지 않아도 되는지 몰라서.”

그 관찰 일지의 내용이 쪼개져서 이르비아의 모든 S급 비둘기가 과로를 했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그 비둘기들은 충분한 대가를 받아서 꽤 행복해했다는 것도 말이다.

“좀…… 엉망이지. 그냥 버려.”

에르안은 관찰 일지를 보며 민망한 듯 중얼거렸지만 리체는 고개를 저으며 가방 깊숙한 곳에 단단히 챙겼다. 그리고 돌아갈 때, 리체는 뱃멀미가 심한 이르비아 사람들의 전략대로 칼카라스 꽃잎을 미리 먹고 정신을 잃은 채 항해할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음…… 에르안, 이게 뭐죠?”

“이르비아 왕국에 요청했어. 군함이야. 이 배는 굉장히 커서 어지간한 사람들이라면 뱃멀미를 안 한대.”

“어…… 이런 걸 우리가 써도 돼요?”

“충분한 대가를 치렀으니 걱정하지 마.”

그렇게 리체는 난생처음으로 군함에 올라탔다. 그러면서 잠시 공작 부인이 아닌 주치의로 돌아가서, 이 비용은 에르안의 정신 건강 값이라고 생각하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에르안.”

다행히 리체는 군함에서는 멀미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에르안의 머리카락을 쓸면서 공작가의 예산을 위해 절대 아프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충분한 대가라는 게 뭐예요? 군함 빌리는 데 어마어마한 돈이 들었을 것 같은데.”

“아.”

에르안은 씩 웃으면서 말했다.

“누가 없는지 안 보여?”

리체는 그제야 출발 때와는 다르게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음을 의식했다.

“지, 지켈을…… 공주님에게 버리고 오신 건가요?”

“버리고 온 건 아니고 강제 휴가를 좀 줬지. 싫어하는 척했지만 하루 종일 거울만 보고 있더군.”

에르안은 슬쩍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지켈은 이제 놓아주어야 될 때가 온 것 같아. 사실 예전에 놓아줬어야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그들의 신혼여행은 새로운 커플을 탄생시키며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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