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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62화 (162/182)

특별 외전 2화

* * *

나는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고 속이 울렁거려서 계속 누워 있는 상태였다. 배를 타 본 적이 없어서 내가 뱃멀미를 하는 체질이라는 것도 몰랐다.

아빠가 예전에 나를 찾으러 여기저기 쏘다닐 때에 뱃멀미를 했다는 소리는 못 들었으니 사전에 별로 걱정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나는 뱃멀미를 ‘좀’ 하는 정도도 아니었다.

뱃멀미에 좋다는 약을 아무리 먹어도 효과가 미미했다. 그 정도 효과라도 없으면 더 죽을 것 같았지만 말이다. 이 정도면 진짜 뱃멀미를 아주 심각하게 하는 셈이었다. 항상 건강하고 튼튼했던 내가 이렇게 특이할 정도로 뱃멀미를 하는 체질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리체, 돌아가자.”

뱃멀미 이틀 차에 에르안은 축 늘어진 내 손을 꼭 붙잡은 채 말했다.

“남부로 가는 것보다 돌아가는 게 더 빨라.”

“지금 바다 한복판인데 어떻게 돌아가요?”

내 힘없는 질문에 에르안이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배를 돌리면 되지.”

“……이 배에 저희만 타고 있는 건 아닐 텐데요.”

“원하는 만큼의 물질적인 보상을…….”

“에르안.”

남부에서 제멋대로 자란 탓에 인성 교육이 아직 덜 된 에르안에게, 보육원에서 자랐어도 착하고 올바르게 자란 내가 차근차근 말했다.

“시간은 돈으로 살 수 없어요. 절대 안 돼요.”

“하지만 네가 이렇게 아픈데…….”

“돌고래를 볼 수 있게 해 주신 노부인 생각나죠? 조카의 결혼식에 참석 못 하게 할 셈이에요?”

“…….”

에르안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내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서글프게 말했다.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

당장이라도 배를 돌리고 싶지만 내 뜻을 거역할 수 없어서 참는다는 표정이었다.

“정말,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나도 너처럼 천재 의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지금처럼 간절한 적이 없어.”

그의 걱정 가득한 눈을 보면서 나는 피식 웃고야 말았다.

항상 아픈 사람을 걱정하고 치료하는 건 내 몫이었는데.

“너는 내가 아파할 때마다 어떻게든 고쳐 줬는데, 나는 너무 무력해.”

“에르안. 천재 의사도 뱃멀미는 못 고쳐요. 그러니 그만 마음 아파해요. 물이나 좀 주고요.”

에르안은 의학 지식은 없지만 수발은 또 잘 들었다. 내 한마디에 그는 찬물부터 미지근한 물, 더운 물과 뜨거운 물까지 준비해 왔다.

“사실 뱃멀미보다 더 걱정되는 게 있어요.”

나는 미지근한 물을 마시며 말했다.

“뱃멀미를 가라앉힌다고 지금 빈속에 독한 약초를 많이 먹고 있거든요. 그렇다고 안 먹기에는 제가 너무 괴롭고…….”

에르안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여 가며 경청했다.

“그런데 이 정도 양이면 갑자기 쇼크가 와서 제가 정신을 잃을 수도 있거든요?”

“……뭐?”

“그렇게 되면 너무 놀라지 말고 의사를 불러서 이 쪽지를 주면서 처치하라고 하세요. 별로 어려운 건 아니에요.”

나는 힘겹게 옆에 두었던 쪽지를 건네었다. 거기에는 내가 지금까지 복용했던 약초의 목록과 양이 날짜별로 잘 정렬되어 있었다.

“별거 아니니까 절대, 절대 너무 놀라지 마세요. 아셨죠?”

만일 내가 쓰러지면 에르안이 어떻게 될지 눈에 선했기 때문에 나는 거듭해서 부탁했다.

“알았어, 걱정 마.”

에르안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안 놀라고 네 말대로 처치 잘 할게. 마음 편히 먹고 어서 누워.”

물론 그 차분함을 믿기란 참 어려웠다. 에르안 세르이어스는…… 지금 내가 뱃멀미를 한다고 승객이 가득 찬 이 배를 돌릴 생각까지 했던 사람이었다.

“에르안.”

“응.”

“혹시라도 제가 남부에 도착한 뒤 쓰러지면, 그 지역의 모든 의사를 불러 모은다거나 하지 마세요. 쉬운 처치라서 거의 대부분의 의사가 잘 조치할 수 있거든요.”

“……응.”

대답이 좀 늦은 걸 봐서 딱 봐도 ‘부를 수 있는 모든 의사를 불러 와.’라며 명령했을 것이 뻔했다. 그리고 그 ‘모든 의사’에 속할 수도 있었던 평민 의사 출신인 나는 세심하게 지시했다.

“또,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무조건 살려’ 같은 대사도 하지 마세요. 그 정도로 심각한 쇼크는 아니니까요. 제가 민망해요.”

“……응.”

또 다시 대답은 좀 늦었다.

분명히 불치병에나 읊을 대사를 할 것 같다는 내 예상은 이번에도 맞아떨어졌다. 물론 에르안은 자신이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의사를 부르겠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아는 에르안이라면 이르비아의 친한 귀족가에 부탁하여 실력이 보장된 주치의를 부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쇼크가 오면 아무리 처치를 잘 해도 3일에서 5일 정도는 앓아누울 수밖에 없어요. 절대로 의사를 닦달하지 마세요.”

“리체.”

에르안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미어진다는 표정을 하며 고통스럽게 말했다.

“정말 의사를 불러서 네 옆에 두고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면 돼? 그런데 너무, 너무 불안하면 어떻게 해? 3일이 지나도 안 깨어나면?”

“음…….”

그것은 아주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에르안은 내가 발만 헛디뎌도 안절부절못하는데 정신까지 잃고 있으면 자신이 정신을 잃을 게 뻔했다. 아무래도 ‘그냥 아무 의사에게나 던져 놔’라는 내 현실적인 조언은 에르안에게 약간 잔인한 당부인 것 같았다.

“그럼 차라리 아빠한테 비둘기를 보내세요.”

나는 안심하라는 듯이 그에게 웃어 주며 말했다.

“아빠는 이게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후유증이라는 걸 잘 알 테고, 아빠가 괜찮다고 하면 에르안도 안심할 거죠?”

비둘기는 아주 짧은 쪽지만 전달할 수 있는 대신에 속도가 일반 서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빨랐다.

에르안은 그 외에도 내 지시를 몇 개나 숙지한 뒤 밤이나 낮이나 지극 정성으로 나를 간호했다.

“옛날에, 아주 옛날에.”

밤이 깊어지면 선실에 난 커다란 창으로 은하수가 보였다. 아픈 건 아픈 거고, 쏟아지는 별빛이 예쁜 건 예쁜 것이었다.

“너무 아팠던 밤, 네가 밤새 내 손을 잡아 주었지.”

그 별빛을 등에 지고 에르안이 속삭였다.

“사실 네 손을 잡는다고 해서 나아지는 건 아니었지만, 낫는 것 같다고 거짓말을 할 정도로 든든하고 좋았어.”

그때 나보다도 몸집이 왜소하고 비리비리했던 소년이 이렇게 건장해져서, 이제는 내 손을 잡아 주고 있었다.

“다음 날 눈을 뜨지 못할까 봐 밤이 무서웠어. 너는 밤보다도 무서운 것들에게서 나를 지켜 준다고 했었고, 너만 옆에 있다면 정말로 나는 밤이 하나도 겁나지 않았지.”

나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지만 살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리체, 너를 너무 사랑해. 내 걱정조차도 짐이 될까 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손을 잡아 주는 것밖에 없지만.”

나는 에르안의 손을 꼭 잡고 대답했다.

“에르안, 있잖아요.”

에르안의 새카만 눈이 고요하게 나를 응시했다.

“지금껏 살면서 딱 한 번 이렇게 아파 본 적이 있어요.”

나 역시도 잊고 살았을 만큼 아주 옛날 이야기였다.

“열두 살, 보육원에서…… 상한 음식을 먹고 밤새 배탈로 힘들었었거든요.”

“응.”

“한밤중에 선생님들의 잠을 방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도움도 안 되는 룸메이트들을 깨울 수도 없어서 혼자 내내 숨죽여서 끙끙 앓았어요.”

“……왜 그랬어.”

“그냥 보육원 생활은 원래 그래요. 어지간하면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해요. 그래서 그 날 밤, 혼자 아팠는데…… 그게 되게 서럽더라고요.”

“…….”

“그 이후 저는 제 건강에 몹시 철저해서 한 번도 안 아팠어요. 아플 때 혼자 있는 건 정말 서글프더라고요.”

나는 씩 웃으며 에르안의 볼을 쓰다듬었다.

“……누군가가 옆에 있는 상태에서 아픈 건 처음이에요. 물론 아픈 건 너무, 너무너무 싫지만 그때 어린 에르안의 밤을 지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

“지금 제가 몸은 아프지만, 혼자 아플 때보다는 비교도 안 되게 마음이 충만하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는 밤마다 조곤조곤 그런 얘기를 했다.

“돌아가면 그 시절 관찰 일지를 봐야겠어요. 에르안이 하도 건강해져서 잊고 있었는데.”

“관찰 일지?”

“환자를 보며 관찰 일지를 쓰는 건 주치의의 기본이지요. 어린 날 에르안에 대한 기록을 다 해 놓았어요. 돌아가면 같이 봐요.”

“……그래. 같이 보자.”

서로가 없었던 각자의 밤과 함께 했을 때의 추억 같은 것들을 서로 말해 주었다. 내 항해는 첫날 빼고는 엉망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완전히 나쁜 것만도 아니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남부에 도착해서 땅을 밟기 직전에 쇼크로 쓰러지고 말았다.

나는 쓰러지는 와중에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있지는 않겠지……. 에르안이 내 말을 들어서 평범하고 무난하게 넘어가겠지…….’

괜히 무고한 남부 의사들에게 폐를 끼칠 순 없었기 때문이다. 시야가 캄캄해지는데도 내 몸을 받아 드는 에르안의 손길이 느껴져서 어느 정도 안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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