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60화 (160/182)

외전 8화

외전 3. 꿈보다 더 좋은

“오늘 컨디션은 어때?”

“나쁘지 않아요. 걱정 마세요. 세드리안은요?”

“할아버님이 오실 때까지 디엘이 놀아 주고 있어.”

나는 침대에 누워 에르안에게서 블루베리를 받아먹고 있었다. 임신 초기라서 극히 조심해야 할 시기라 나는 출근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공작성에 누워 있었다. 사실 출근을 안 한 지는 꽤 되었는데, 세드리안을 낳고 나서 반년도 되지 않아 둘째를 임신했기 때문이다.

연년생이라니……. 세드리안을 낳을 때 충격적으로 아팠던지라 다시 진통을 겪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끔찍했다. 하지만 요새 가만히만 있어도 예쁜 세드리안을 생각하면 또 다른 꼬물거리는 아기가 생기는 것도 좋았다.

아이의 이름은 전적으로 고모가 지어 주기로 했고, 결국 고모는 자신의 이름과 한 글자는 같아야 한다며 세드리안으로 결정했다.

아이 할아버지의 이름을 미들네임으로 삼아서, 우리의 첫 아이 이름은 세드리안 케일런 세르이어스가 되었다. 물론 그 이름에 아빠는 몹시 반대했지만 ― 아드리안 아르가 세르이어스로 하자! ― 둘째의 이름 작명권을 가진다는 조건으로 극적인 타협을 이뤄 냈다.

“다른 것 먹고 싶은 건 없어? 여전히 과일만 먹고 싶어?”

“네. 그런데 이렇게까지 대륙 전체에서 오만 가지의 과일을 조달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새콤한 거라면 뭐든 괜찮아요.”

“더 입맛에 맞는 게 있을 수도 있잖아.”

블루베리를 다 먹이고 나서 에르안은 복숭아를 깎기 시작했다.

“또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

세드리안을 임신했을 때,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니 존재조차 몰랐던 희귀한 짐승들의 고기까지 구해 왔던 것이 떠올랐다. 심지어 굽기까지 천차만별로 구워서 가장 맛있는 걸 골라 보라고 하는 바람에 결국 백 몇 가지의 서로 다른 고기 맛을 봐야 했었다.

에르안이 포크로 집어 준 복숭아 한 조각을 먹으며 의학 서적을 팔랑팔랑 넘기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되겠니?”

할아버지가 세드리안을 안고 걸어와서, 나는 정색을 하며 소리쳤다.

“할아버지! 관절도 안 좋으신데 아이 안지 마세요! 세드리안, 얼른 내려 와.”

에르안이 재빨리 세드리안을 받아 안았다.

할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내가 너무 안고 싶어서 그랬다. 디엘도 말렸는데…….”

“요새 몸이 좋아지신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조심하셔야 해요.”

“알았다, 알았어.”

하지만 할아버지의 사랑은 이제 나에게서부터 세드리안으로 완전히 옮겨갔기 때문에, 내 말이 소용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중에 또 세드리안이 안아 달라고 칭얼거리면 “허허허, 안아 줄게.”라고 하시며 안아 들어 올리실 것이 뻔했다.

“요 녀석, 천재 같아.”

할아버지는 세드리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소리가 나면 돌아보고, 새로운 걸 보여 주면 뚫어지게 쳐다보고…….”

“그건 모든 아기들 공통인데요, 할아버지.”

“그래도 우리 세드리안은 뭔가 다르다.”

이제 막 목을 가누기 시작했지만 아직 혼자서 앉지도 못하는 아기의 토실토실한 볼을 두드리며 할아버지가 흐뭇하게 말했다.

“우리 리체도 그랬겠지. 아들은 엄마를 많이 닮는다고 하던데.”

“그래요, 에르안?”

에르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난 외형적으로는 눈 빼고 다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는데…….”

“성격은요?”

“글쎄, 어머니는 좀…… 극단적인 면이 있지 않나?”

그 말에 할아버지와 내가 눈빛을 교환했다. 아들이 엄마를 닮는다는 가설은 확실히 그럴듯했다. 아직 성격을 알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면 우리 세드리안의 인성에도 아직 희망은 있었다.

“뭐…… 세드리안도 눈만 저를 닮고 나머지는 다 에르안을 닮았으니까…….”

나는 에르안의 품에 안겨서 그의 옷깃을 잡고 있는 세드리안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벌써부터 기다란 다리가 확실히 에르안을 닮았지만, 초록색의 동그란 눈만은 나를 닮았다.

“그럼 유모를 거부하고 디엘에게만 매달리는 건 뭐지?”

에르안이 세드리안을 껴안으며 날카롭게 물었다.

그 말에 대답한 사람은 할아버지였다.

“역시 우리 증손자는 천재다.”

“네?”

“누가 자기 수발을 제일 잘 들어 줄지 본능적으로 아는 거야.”

“아…….”

에르안은 내 앞에 늘어놓은 온갖 과일들을 보며 참담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노력하는데도 아직도 내가 디엘보다 못하다면…….”

그의 아련하던 눈빛이 점차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리체의 수발을 가장 잘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방법은 이제 한 가지뿐…….”

“그러니까 세드리안이 천재인 거죠!”

나는 에르안의 목소리에 살기가 어리기 전에 재빠르게 끼어들었다.

“디엘이 이제 챙겨 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바로 빈틈을 노리는!”

“그래, 그래. 천재라니까. 내가 뭐랬니.”

할아버지가 흐뭇하게 세드리안에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세드리안의 작은 손이 할아버지의 검지를 감싸는 것을 보느라 우리에게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우리 둘째도 만만치 않게 똑똑하겠지? 아들이면 이번에는 장인어른 뜻대로 이름을 아드리안이라고 지어야 될 것 같은데.”

“딸이에요.”

나는 아직 나오지 않은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에르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응? 아직 성별 모르지 않나?”

“그냥 알아요. 딸일걸요.”

꾸자마자 순식간에 잊어버려 아이들의 외모조차 흐릿했지만, 그래도 예지몽에서 아들 하나 딸 하나였던 것은 확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임신 초기, 앞으로 겪어야 할 일들이 많다는 건 세드리안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점차 몸이 무거워질 테고 막달에는 숨이 차서 걷는 것도 힘들게 될 것이다. 거기에 아이를 낳을 때에는 정말 끔찍하게 아프겠지.

세드리안을 낳을 때 소리를 지르다가 마지막에는 에르안의 머리카락까지 쥐어뜯었다. 그리고 의료 연구진에 복귀하면 무조건 산통을 완화하는 약물을 만들어야겠다고 진심으로 다짐했다. 그 복귀가 둘째 아이 때문에 좀 미뤄질 것 같긴 하지만.

세드리안을 낳고 나서 나는 살짝 울었는데 엄마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축복, 응원을 받으면서 견디더라도 힘든 것이 출산인데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불안함에 떨면서 나를 낳았을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러면서도 끝까지 나를 살리려고 한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게, 엄마 몫까지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살기로 한 번 더 결심했다.

내가 같은 입장이어도 세드리안에게 그런 행복한 삶을 바랄 것 같으니까.

* * *

“리체, 벌써 퇴근이냐?”

“봐주세요, 아빠.”

나는 우는 소리를 해 보이며 실험복을 벗었다.

“벌써 열흘째 야근이잖아요. 저도 가정이 있다고요.”

“하지만 네가 내 딸이라고 해서 특혜를 받는다고 다른 연구원들이 생각하면 어떡…….”

“근무 일지 보실래요? 제 초과 근무 시간이 가장 많아요.”

“……흠.”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애들이 엄마 얼굴 잊어버리게 생겼다고요. 맨날 잘 때 들어가서.”

아빠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눈치챈 나는 더 과장되게 한숨을 쉬어 보였다.

“그래서 어제 저녁에도 제 몫의 실험은 다 해 놓았는데.”

내가 애처롭게 말하자, 연구원 중 하나인 샤롯이 거들어 주었다.

“여기서 세르이어스 부인이 특혜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백작님. 수많은 연구 결과가 그 증거고요.”

샤롯의 지원까지 받은 나는 의기양양하게 아빠를 쳐다보았고, 아빠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오늘은 일찍 가 봐라.”

“감사합니다!”

아빠라고 해서 내 바람을 들어주고 싶지 않은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빠는 내 연구 실적이 혹시라도 자신과의 혈연관계 때문에 객관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다음 연구진 수장은 당연히 내가 될 텐데 괜히 세습처럼 보이는 건 우리 둘 다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슬쩍 웃는 아빠의 얼굴을 보고 나는 빠르게 실험복을 벗었다.

날이 한창 밝을 때 퇴근하는 것은 오랜만이라, 마차를 타고 달리는 길이 설렜다. 오늘은 세드리안의 네 번째 생일이었고 그래서 정말 최대한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 싶었다.

“어머, 리체.”

공작성에 도착하니 어머님이 달려 나왔다.

“이렇게 일찍 온다는 말은 없었잖니?”

“아빠한테 졸랐어요. 세드리안하고 유리아는요?”

“아까 전에 에르안이 데리고 나갔어.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이 있지만 앵두를 따러 간다고 하던데, 생각나는 곳이 있니?”

“네, 알 것 같아요.”

내가 에르안과 함께 어린 시절 올랐다가 대신 뱀에게 물렸던 그 동산임에 틀림없었다. 확실히 그곳에는 앵두나무가 많긴 했으니까.

나는 숨 돌릴 틈도 없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에르안과 아이들을 찾아 나섰다.

오늘 아침에 보고 나왔는데도 얼른 보고 싶은 내 사랑하는 가족들.

하늘이 파랗고 높았다. 아직 네 살인 세드리안의 발걸음이 느려서 나는 그들을 빠르게 따라잡을 수 있었다. 너무 큰 에르안과 너무 작은 아이들 둘의 실루엣이 눈에 보이자마자, 나는 잠시 멈추어서 그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에르안이 푸른 잔디밭에 도착해서 안고 있던 유리아를 내려놓았다. 푸른 잔디밭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리고 에르안은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엄마! 엄마!”

세드리안이 나를 먼저 발견하고 작은 발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

제 오빠를 따라 유리아 역시 달려와 내게 폭 안겼다.

“오늘 늦는다며?”

제법 또박또박하게 세드리안이 말해서, 나는 아들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며 대답했다.

“세드리안 생일이라 일찍 왔지.”

“세드리안은 좋겠네. 이렇게 빨리 엄마도 보고.”

어느새 다가온 에르안이 내 이마에 입 맞추며 씩 웃었다.

“물론 그런 의미에서는 내가 더 좋고 말이야.”

“네?”

“안 그래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아침에 봤는데…….”

“눈에 안 보이면 보고 싶은 거지. 난 아직 20시간의 꿈을 버리지 못했어.”

문득, 나는 이런 내용의 꿈을 꿨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파랗고 높은 하늘, 푸르른 잔디밭, 사랑스러운 아이들…….

그 외에는 모든 게 흐릿해서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아도 좋았다. 어차피 그 꿈에서보다 훨씬 더 행복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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