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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59화 (159/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외전 7화

외전 2. 프러포즈

“리체, 정말 오랜만이구나.”

“어…… 일주일만인데요.”

“그러니 엄청나지. 매일같이 붙어 있을 때도 있었는데.”

어머님은 한숨을 쉬며 내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나는 잠시 휴가를 내어 세르이 어스 공작성에 들른 참이었다.

수도와 세르이어스 공작령을 잇 는 도로가 완성되어 이제 마차를 빠르게 달리게 하면 한 시간 좀 넘게 걸릴 정도로 거리가 줄었다.

물론 에르안은 미친 둣이 흑마 를 몰아 전속력으로 달려서 훨씬 더 빠르게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늘 마차를 타고 편하게 다녔다.

“그런데 에르안이 지금 없는데…… 연락하지 않고 왔니?”

“네, 일부러 연락 안 하고 왔어요.”

나는 3일 전부터 에르안이 정예 기사단과 함께 공작령 순회를 나 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오늘 오후에나 돌아올 것이다.

“줄 게 있어서요. 그런데 좀 멋지게 주고 싶었어요.”

어머님은 내 계획을 듣더니 탄 성을 질렀다.

“그래, 리체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 그리고……”

“그리고요?”

“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해야겠구나. 아, 바빠지겠어”

“공부라뇨?”

어머님이 뭘 공부할지 대답을 들은 나는 눈을 깜빡이며 어색하게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머님…… 에르안이 오면, 부탁드릴게요.”

어머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슬프게 중얼거렸다.

“정말 너는 에르안에게 너무 아깝구나.”

“알고 있어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니 참사랑이죠.”

***

에르안은 오후의 햇볕이 따사롭 게 정원을 비출 때 공작성에 도착했다.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이사밸 에게 간단히 귀환 인사를 하러 갔더니 이사벨은 평소보다 훨씬 많은 카탈로그를 옆에 쌓아 두고 있었다.

“어머니, 다녀왔습니다.”

“그러니?”

그가 얼핏 시선을 던지자 이사벨은 황급히 한 더미의 카탈로그를 모두 테이블 아래로 치워 버렸다.

에르안은 겨우 맨 앞의 카탈로 그에 새겨진 연도가 2년 전 것임 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별일 없었지?”

“네, 그럼 쉬세요.”

“잠깐. 난 별일이 있었단다.”

이사벨은 에르안에게 쪽지 하나를 건넸다.

“나가면 펼쳐 보거라, 즉시.”

에르안은 어리둥절한 채로 작은 쪽지를 들고 이사밸의 방을 나왔다.

나오자마자 이사벨의 말대로 쪽 지를 펼쳐 본 에르안의 눈이 커 졌다.

[우리가 처음 만난 장소로 오세요.]

리체의 필적을 그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에르안이 날 둣이 달려 난간을 뛰어 넘었다.

맨 처음, 웨데릭 앞에서 풀 죽 어 있던 그에게 거침없이 다가오 던 갈색 단발머리의 소녀를 떠을 리는 그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달려가서 그때 그 정원의 한복 판에 도착한 그는 암전히 놓여 있는 어린이용 라켓과 공을 발견 했다. 그리고 그 위에 놓인 곱게 접힌 쪽지까지.

[이제 상대도 안 되겠지만, 그래도 공놀이 하고 싶으실 땐 언재 나 함께 해 드릴게요.]

에르안은 거의 호흡곤란이 오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귀여운 짓을 하면 어떡 하라고…”

황급히 넘긴 쪽지 뒤편에는 또 다른 말이 쓰여 있었다.

[에르안과 제가 함께 딸기를 나 누어 먹었던 곳으로 오세요.]

그는 또 긴 다리로 뛰어 단숨에 아름드리나무가 그늘진 동산 위 를 올랐다.

딸기 두어 개가 담긴 접시와 함 께 역시 쪽지가 곱게 접혀 있었다.

[어릴 때 먹여 달라고 칭얼대셨던 거 기억나세요? 남들 안 볼 땐 가끔 먹여 드릴게요.  추신, 이제 손가락 할는 것도 허용해 드림.]

성인이 되고 난 뒤 자신이 먼저 좋아한다는 말은 못하고 계속 비 언어적 표현으로 유혹했던 그때 가 떠올라 에르안은 피식 웃었다.

“이제 손가락 정도 허락해서 될 일이 아닐 텐데.”

[에르안이 고백한 곳으로 오세요.]

쪽지의 뒤쪽에는 또다시 그가 가야 할 행선지가 적혀 있었다.

그는 머리가 쨍하니 울리는 것 까지 느끼며 리체의 연구실로 향했다.

그녀가 페렐르만 자작저로 급히 간 이후, 주인을 잃고 얌전히 시간이 멈춰져 버린 그 연구실에 가끔 그 혼자 들어가서 밤을 지 새웠다는 걸 알긴 아는지.

그가 사표를 발견하고 찢어 버렸던 그 서랍 안에 작은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상자를 열자 안은 텅 비어 있고 쪽지 하나만 덩그러니 들어 있었다.

[이제 찢어 버린 사표 대신 다른 문서로 우리 관계를 규정할 때가 오지 않았을까요?]

[늘 함께 잠들던 곳으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을 예쁘게 꾸며 서 오세요.]

뒤편의 지시 사항을 읽은 그는 재빨리 거울 앞으로 갔다.

리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라면 그의 얼굴이었다.

머리를 한 번 더 다듬고, 옷차 림은 이상하지 않은가 다시 확인 하고, 혹시나 여독이 묻어 있을 까 봐 얼굴도 꼼꼼히 뜯어보았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기분으로 그의 방에 들어갔을 때, 리체가 환히 웃으며 그의 침대 위에 앉 아 있었다.

“잠깐만요!”

그녀를 보자마자 와락 끌어안으려던 그를 재빠르게 저지하며 그 녀는 그의 손을 이끌어 차분히 자신의 옆에 앉혔다.

그녀는 작은 손으로 그의 양 볼을 감싸더니 싱긋 웃었다.

“예쁘게 잘 준비해서 오셨네.”

“더 예쁘게 할 수 있었는데 너무 급해서.”

“그럴 것 같았어요.”

그와 한동안 눈을 마주치고 있 던 그녀는 천천히 그의 왼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그의 넷째 손가락에 반 짝이는 반지를 끼워 주었다.

에르안은 연구실에 있던 빈 상 자 안에 원래 들어 있던 것이 이 반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 반지를 너무 비싼 걸 사셨 더라고요. 가격 맞추느라 월급모으는 데 오래 걸렸어요.”

리체는 일전에 의료 연구진 월급을 모아서 반지를 사 주겠다고 에르안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아무 말도 없기에 에르안은 그녀가 그 약속을 잊은 것 같아 살짝 서운했지만 부담이 될까 봐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 는 상태였다.

“아니…… 진짜 아무거나 사 줘 도 되는데……”

“안 되죠. 평생 낄 건데.”

그가 반지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둣이 중얼거리자 리체가 야무 지게 말을 이었다.

“저랑 제 가족들 때문에 눈치 보느라 평생 프러포즈 못하실 것 같아서 제가 하는 거예요.”

에르안은 속으로 자신의 멍청함 을 다시 한번 탓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아는 리체 가 반지에 대한 약속을 잊을 것이라고 생각하다니.

“지금 당장은 무리고, 1년 뒤 딱 오늘 결혼하는 것 어때요? 지금까지도 많이 기다리신 것 알아요.”

“나는…… 나는 다 좋지……”

그는 얼떨떨하게 대답하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어떡하지. 네게 고백할 때, 나 는 너무 급해서 이렇게 멋지게 못했는데.”

“맞아요. 마음의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는 사람한테 대뜸 반 지만 내밀고.”

“네가 성년을 맞는 걸 너무 간 절히 기다리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 엄청 참느라고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 거 참는다고 안 죽어요. 어쨌든 전 급할 거 없어서 천천히 준비했어요. 당연히 받아 줄 거 아니까 긴장하지도 않고. 그러니 마음고생까지 치면 들인 공 은 비슷할 거예요.”

똑 부러지는 리체의 말에 에르 안은 결국 또 웃어 버리고 말았다.

“물론 어머님도 도와주셨고요.”

“아, 그래서……”

“아까 어머니가 3년 전 카탈로그를 쌓아 두고 있더라고."

“네…… 웨딩드레스를 공부하신다고 하셨어요. 3년 전 것부터 꼼꼼히 봐야 유행 흐름을 알 수 있다고요.”

웨딩드레스를 입은 리체를 상상 만 해도 너무 좋아서, 에르안은 온몸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이건, 마지막 쪽지.”

리체는 수즙게 쪽지 하나를 직접 건네주었다.

[이제 수많은 밤 동안 함께 잠 들어요. 그러면 밤보다도 무서운 것들로부터 서로를 지켜 줄 수 있지 않겠어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 공 작성에서 함께했던 나날들이 머 릿속에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이 넓고 외로운 방에서도 맞잡은 리체의 작은 손만 있다면 모든 것이 괜찮아지던 그때와 지금 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이 여자가 에르안에게는 세상 그 자체였으니까.

“내일 데려다줄게.”

그는 리체의 갈색 머리카락을 쓸며 속삭였다.

“오늘 밤도 옆에 있어 줘.”

“어린 시절처럼요?”

“아, 안 되지.”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꾹 누르 며 그가 웃었다.

“이제 손만 잡고 못 자.”

평생 기다릴 수도 있다고 했지만 문득 남은 1년이 새삼 고통스 러워졌다.

에르안은 리체가 숨이 막힌다고 버둥거릴 때까지 그녀를 놓아주 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살결을 마주하고 난 뒤의 대화가 꿈결처럼 이어졌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갈까요?”

“메일리스 공국만 빼고 어디든.”

“결혼식 준비는 번거롭지 않겠죠? 사실 그런 거 신경 쓰기에는 일이 바쁜데.”

“어머니가 알아서 하시겠지.”

“그건 그래요. 사실 생일 파티 때도 좋았어요.”

“엄청 행복할 것 같아. 상상도 안 되는군. 그날 널 보고 너무 좋아서 기절하면 어떡하지?”

“제가 잘 응급 처치 해 드릴게요. 결혼 첫날부터 과부 될 수는 없으니까요. 기절하실 때 머리만 조심하세요.”

1년 후의 일이지만 상상을 나누는 것만 해도 온 밤을 새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래를 생각하는 두 연인의 달 콤한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여기서 바로 식사를 할 수 있게 해 줄게. 년 아침잠이 많고 아침엔 많이 먹지도 않으니까.”

“아, 좋아요.”

“그리고 내가 수도까지 늦지 않 게 매일 데려다줄게. 당연히 퇴근할 즈음에도 데리러 가고. 아무리 늦게 퇴근해도 외박은 안 돼. 나 잠 못 자.”

“아빠가 좀 서운해하시겠지만, 그래도 평상시에는 아빠랑 계속 같이 근무하니까 받아들이실 거예요.”

“그럼. 나도 눈물을 머금고 20 시간을 포기했는데. 뭐”

에르안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인생이 다 내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겠지.”

“그래도 행복한 인생 아니에요? 제가 있으니까.”

“당연하지”

부드러운 손길이 다시 한번 허리를 감았다.

“그리고 앞으로 더 행복할 날들만 남았겠지.”

외전 2. 프로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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