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외전 6화
‘반딧불의 밤’ 행사는 아르가에게 상당히 지루했다.
물론 자정이 되면 일제히 날아 오른다는 메일리스 공국의 반덧 불들을 보는 것도 전혀 기대가 되지 않았다.
“시오니, 다음번에 메일리스 공국에 와. 반딧불의 밤에 초청할게. 한 번에 날아오르는 반딧불 들이 얼마나 예쁜지 몰라. ”
“그래 봤자 벌레들 아니에요?”
“음…… 그, 그래도…… 젊은 남녀 단둘이 그 광경을 보면 사 랑이 이루어진다는데. ”
“메일리스 공국 출산율을 볼 때 근거 없는 낭설인 것 같군요. 돌아가시면 국민의 과학적 사고 함 양을 위해서 그런 헛소문을 가라 앉히는 데에 애쓰도록 하세요. ”
그때에도 개수작이라고 생각하여 기분이 더러웠는데, 그 아들 시리온의 말을 들어 보니 새삼 더 기분이 나빠졌다.
같이 반딧불을 보자는 이야기가 로맨틱한 뜻이었다고…….
아들 시리온이 리체에게 집적댈 때마다 시오니에게 틈만 나면 들 이대던 그놈이 생각나 이가 갈렸다.
하필 이름도 같고, 생김새도 저렇게 유사할 줄이야.
자꾸 저놈에게서 제 아비가 보 이고, 리체에게서 시오니가 보인다.
그렇다면 저럴 때마다 혼자서 표정 관리 못하고 뒤에 가만히 서 있는 에르안에게서는…….
‘미쳤군. 생각을 멈춰야 해.’
아르가는 짜증스럽게 팔짱을 꼈다.
적어도 시오니는 집적대던 그놈 을 단호히 쳐 내기라도 했는데, 리체는 젠시 공비와의 관계를 이 유로 들며 미적지근하게 행동했다.
‘펄펄 날뛸 줄 알았는데 은근히 리체 앞에서는 소심한 모양이지.’
그는 또 다시 에르안을 한 번 흘끗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공식적인 인사를 모두 마치고 이제 반딧불들을 보려고 와글와글한 사람들 속에서 대기 하는 중이었다.
외교적인 이유를 들어 리체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시리온이었고, 에르안은 그 뒤에 서 있는 모양새였다.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시오 니의 뒤에 늘 서 있던 자신의 젊
은 시절이 떠오르며 아르가는 또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나는 작위도 변변찮고, 시 오니와 눈빛만 주고받던 사이라 그렇다고 쳐. 그런데 저놈은 공작 위가 있는 데다가 리체와 연 인 관계면서 대체 왜 저러는 거 야?”
그는 못마땅하게 세 사람을 쳐 다보며 혼자서 생각을 꾹꾹 누르 고 있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한 번에 날아오르는 반딧불들이 얼마나 예쁜지.”
‘그깟 벌레들 가지고 생색은. 제 아비랑 똑같군.’
“백작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기대할게요.”
‘예뻐 봤자 벌레들이라고 대답 했어야지!’
보다 못한 아르가는 성큼성큼 걸어 리체에게 다가갔다.
“리체, 네 얼굴에 뭐가 좀 묻은 것 같다. 가서 거울 좀 보고 와.”
“그래요?”
시리온이 고개를 갸웃하며 끼어들었다.
“어디요? 제 눈에는 예쁨만 묻은 것 같은데……”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그 말에는 도저히 긍정할 수 없는지, 리체는 몸서리를 치며 종 종걸음으로 온갖 소품을 갖고 있을 디엘을 찾아 사라졌다.
아르가가 팔짱을 낀 채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시리온이 에르안 에게 말을 거는 것이 들렸다.
“공작님, 이건 선물입니다.”
“반딧불을 잡아 가둘 수 있는 유리병이죠. 저 숲속에 가면 쉽 게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전 벌레잡이에 취미가 없습니다.”
“글쎄요.”
시리온이 에르안의 손에 억지로 유리병을 쥐여 주며 씩 웃었다.
“모르는 거죠. 자정에 반딧불을 보고 싶어 하는 환자들이 있을 수 있잖아요? 리체 양의 보조라면 환자들의 정서적 측면도 알아서 보살펴야 하는 것 아닌가?”
에르안은 가만히 유리병을 잡은 채 머뭇거렸다.
아르가는 자신도 모르게 ‘가지 마! 저놈은 리체와 단둘이 반딧 불을 보고 헛소리를 속삭일 계획 이야! 재네들한테 반딧불은 여자 꼬시는 도구라고!’라고 외칠 뻔했다.
누가 그 아비에 그 아들 아니랄까 봐, 시오니의 생일에 자신을 멀리 보내 버렸던 것과 똑같은 수법을 쓰고 있었다.
시오니는 그때 아르가에게 먼저 다가와 주기라도 했는데, 지금 상황으로 봐서 리체는 오히려 흔 들리면 흔들렸지 에르안에게 바 로 갈 것 같지가 않았다.
아르가는 에르안의 내적 갈등을 지켜보며 속이 터질 것 같았다.
***
반딧불이 일제히 날아오르는 건 장관일 것 같기는 했지만 딱히 대단히 기대가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안 보 고 가는 것도 웃겨서, 나는 자정만 넘기고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디엘을 만나 거울을 보고 아무 것도 묻어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한 후, 나는 그 참에 디엘까지 끌고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확실히 아빠는 에르안보다 시리온을 싫어하는 것 같아. 그걸 노리는 거지, 너? 근데 대체 왜 처음 본 사람을 저렇게까지 미워 하지? 물론 아빠가 사람을 잘 싫 어하긴 하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뭐…… 다 사정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디엘과 함께 걸어가던 나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깜짝 놀랐다.
에르안이 어디론가 가려고 하는데, 아빠가 그의 손목을 덤석 잡은 것이다.
나와 디엘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둣 멈춰 섰다.
아빠가 짜증난다는 둣이 화를 냈다.
“너 바보냐? 바보야? 어?”
에르안에게 ‘너’라는 호칭에 반 말까지 쓰는 걸 봐서 이성이 잠 시 나간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아주 빈번 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에르안과 나, 디엘마저도 딱히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에 이어진 말들은 우리를 경악하게 하기 충분했다.
“왜 내가 리체의 약혼자다, 넌 리체에게 집적거릴 권리가 없다, 똑바로 말을 못해?”
그 말에는 에르안 역시 깜짝 놀 랐는지 입을 조금 벌렸다.
“대체 뭐가 부족해서 저딴 놈의 눈에 보이는 수작에 물러나느난 말이야! 우리는 결혼을 전제로 한 연인이다, 네가 끼어들 여지 는 없다, 왜 똑 부러지게 말을 못하냐고! 나한테 바락바락 우기던 것의 절반도 왜 말 못하는데!”
“아, 아빠?”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빠가 신경질적으로 외치고 잠 시 씩씩거릴 동안, 가장 먼저 정 신을 차린 사람은 에르안이었다.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지금 저 희 사이를 인정하신 것 맞지요?”
“그래! 인정했다! 인정했으니까 저놈이 집적대는 것 좀 막아!”
“아빠!”
내가 환히 웃으며 달려가자, 아 빠는 내게도 도끼눈을 뜨며 말했다.
“너도 그러는 거 아니다. 멀정히 서로 마음 통하고 있는 사람 앞에 두고 다른 남자가 개수작 부리는 데에 맞장구를 쳐? 시오니는 적어도 그런 애매한 태도는 안 취했어! 대체 누구를 닮은 거야?”
나는 멈춰 서서 잠시 눈을 깜빡였다.
“아, 아빠…… 지금 에르안 편 드느라 저한테 화내신 거예요?”
“……어?”
조심스럽게 묻는 내 질문에 아 빠가 그제야 정신이 좀 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러진 후 였다.
에르안이 재빠르게 아빠의 앞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드디어 저희 사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시는군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리체를 위한 준비된 인재로, 향후 계획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 드리겠습니다.”
에르안은 이때다 싶었는지, 멍 하니 서 있는 시리온을 밀치고 아빠의 앞에 서서 속사포처럼 말 을 쏟아 냈다.
“지금 세트이어스 공작령과 수 도를 연결하는 도로가 완공되면, 마차로 한 시간 내외로 오갈 수 있게 됩니다. 리체가 결혼하면 세트이어스 공작성에서 출퇴근해도 충분할 겁니다.”
“그, 그게 지금……”
“리체가 장인어른과 함께 열심히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제가 공작성에서 열심히 내조하겠습니다. 리체의 건강 관리도 꾸준히 하고 아이도 제가 다 키우고요.”
아빠가 멈칫하며 거친 숨을 내 쉬었다.
아빠 입으로 방금 우리가 결혼 을 전제로 한 연인임을 선언한 탓에 그 말에 거부 반응을 보일 수 없는 둣했다.
“그럼 저는 일단 가 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저희 사이를 인정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정 말 잘하겠습니다.”
“어, 어딜 가요?”
내가 황당해서 묻자, 그는 해사 하게 웃어 보이며 유리병을 들었다.
“반덧불 잡으러.”
“네?”
“르시에게 보여 줄 거야. 네가 계속 마음에 걸려 했잖아. 르시 가 조금이라도 기운을 차렸으면
좋겠다며. 안 그래도 계속 신경 쓰고 있었는데 이 자식이 좋은 방법을 알려 줬어.”
“아……”
“난 네가 조금이라도 원하는 건 다 들어주고 싶어. 그게 내겐 가 장 우선이야.”
메일리스 공국에서도 1년에 한 번밖에 볼 수 없는 절경이라는 데, 지금 그는 내가 마음을 쓰고 있는 어린 환자를 위해 직접 반 덧불을 잡아 돌아간다는 말을 하 고 있었다.
자기 환자도 아니면서, 단순히 내가 그 애의 기운 차린 모습을 보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 ”
아빠가 머리를 쓸었다.
“됐다, 됐어. 내가 졌다.”
“네?”
“저렇게 한결같은 놈인데 내가 어떻게 막아! 그런데 하나 못 박아 두는데, 당장 결혼하라는 뜻 은 아닙니다. 그냥 인정해 준다, 이 정도라고. 알았습니까?”
아빠는 “알았습니까?”라고 물을 때, 안색이 파리해진 시리온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에르안과 나는 신나서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빠!”
“예, 장인어른. 감사합니다!”
흘끗 바라본 디엘이 흐뭇한 표 정으로 어깨를 으쏙했다.
이따가 이 모든 일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제대로 들어야겠다고 다짐하며, 나는 아빠에게 매달렸다.
“기념일로 삼자.”
에르안이 보란 둣이 내 귀에 속 삭였다.
“드디어 허락을 받은 날로 말이 야. 그럼 이제 나는 언제라도 결 혼을 할 수 있게 당장 준비를 시 작하겠어. 그리고……”
더 늦기 전에 르시를 위해 반덧 불을 잡아야 한다면서, 에르안은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디엘 몰레킨 월급 인상해 줘. 세르이어스에서 댈 테니까.”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관문까지 어찌어찌 해결했으니 이제는 정말 당당하게 연애하고 축복을 받으며 결혼할 일만 남았다.
분명히 번복할 수도 있었을 텐 데 그냥 어쩔 수 없다며 콧김을 내뿜고 있는 아빠를 보고, 어쩌 면 아빠도 언제까지나 반대할 수 는 없으니 이런 계기를 기다리고 있었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었다.
아직 반딧불이 날아오르지는 않았지만 최고의 밤이었다.
시리온을 제외하고, 디엘을 포 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해피엔딩인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