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외전 5화
아침도 거르고 늦잠을 잔 다음 치료소에 나오자, 에르안이 재빨리 다가왔다.
“리체, 여기 오랜지 주스와 사과 한 쪽, 그리고 갓 구운 빵. 오늘 아침 안 먹었다며.”
“네, 졸려서요.”
밤늦게까지 안 재운 사람이 누군데.
에르안은 천연덕스럽게 눈썹을 치켜올려 보였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힘든가 보다. 잠시, 가방 들어 줄게. 아, 빵 부스러기 때문에 성가셔? 내가 받쳐 줄게.”
나는 그의 빠릿빠릿한 시중을 받으며 작게 하품을 했다.
그 꼴을 보고 있기는 싫지만 또 딸이 아침을 거르는 것도 싫었던 아빠가 못마땅하게 우리를 쳐다 보다가 불쑥 말했다.
“거…… 공작님도 얼굴색이 별로 좋지는 않은데.”
그 이유는 아마 디엘의 얼굴색 이 나날이 좋아지는 이유와 똑같 을 것이다.
그때, 타이밍 좋게 시리온이 말 끔하게 차려입고 등장했다.
“리체 양, 오늘도 아름다우시군요. 아, 이 빵 너무 뻑뻑할 것 같 은데.”
그 바람에 뭐라고 대답하려던 에르안의 얼굴이 어쩔 수 없이 굳었다.
“아침 식사가 부실한 것 같으니, 점심시간에 저와 함께 시내 에 다녀을까요? 해산물 코스 요 리를 아주 잘하는 곳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당 장 입에 들어가는 빵이지 먼 미 래의 점심 약속은 아니라고 말하 려다가, 디엘의 충고가 생각나 생긋 웃었다.
“어머,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에르안은 묵묵히 내가 빵을 다 먹을 때까지 오렌지 주스 컵을 들고 있었다.
소매 안쪽의 팔에 핏줄이 선 것 을 보아 기분이 상당히 나쁜 둣 했지만 어쨌든 잘 참아 내는 둣 했다.
“크흠, 큼! 빨리 먹어라, 리체. 순회 가야지. 그리고.”
아빠는 시리온의 시야를 막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점심 식사는 당연히 나와 해야 하는 거다, 알겠지?”
“아…… 네, 그럼요.”
“해산물 코스는 무슨. 메일리스 음식이 다 거기서 거기지.”
다분한 지역 차별적 발언을 하 고 난 뒤 아빠는 빠르게 나를 잡아 끌었다.
에르안이 때를 맞춰 건넨 오랜 지 주스를 마시고 나서,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잠시만요, 아빠. 르시부터 볼게요. 아무래도 제일 어린 환자라 마음이 쓰여서.”
“이쪽이야, 리체.”
에르안이 재빨리 길을 비켜 주 며 말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꼭 보육원에 있을 때 함께 지 내던 애들 같아서……”
“아”
“르시도 보육원에 가게 될 테니 까요. 부디 무사히 건강해졌으면 좋겠는데.”
“근데 아이가 계속 우울해하니 걱정이다.”
아빠 역시 마음에 걸리는 둣 중얼거렸다.
“기분이 좀 나아져야 기운 내서 치료도 더 잘 받아들일 텐데 말하지만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애에게 억지로 기운차리라고 강 요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축 늘어 진 르시에게 가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이라도 기운을 차리면 정 말 좋겠는데……’
에르안이 건네준 깃펜으로 르시의 상태를 기록하며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있잖아.”
아빠가 화장실에 간 틈을 타, 에르안은 재빨리 다가와 속삭였다.
“솔직히 말하면 백작님이 나를 너무 싫어하시는 걸 다 이해하면 서도 가끔은 서운했단 말이야.”
나는 그가 무슨 소리를 할지 예 상되어 피식 웃고 말았다.
“근데 요새는 하나도 서운하지 않아. 찬양하고 싶어져.”
물론 내게 집적대는 시리온을 볼 때마다 에르안은 분노를 감추 느라 애써야 했다.
하지만 그가 참지 못하고 나서 기 전에 아빠가 극도의 혐오감을 표출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리온이 계 속해서 내게 말을 걸고 돼먹지 못한 수작을 거는 이유는 내가 모질게 쳐 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디엘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나는 애매한 태도를 유지하며 그럭저럭 잘 받아 주는 중이었다.
예를 들어 그가 어디 함께 가자 고 하면 혼괘히 따라 나선다거 나, 선물을 주면 기쁘게 받는다거나.
나를 칭찬하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그에 대해서 간단히 칭찬해 준다거나.
“사실은요. 처음 본 순간, 한눈에 반했습니다.”
약혼자가 있는 상대에게 썩 떳떳하지 못한 말을 해도 정색하지 않고 난감한 둣 웃어만 보였다.
“어머님의 유언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리체 양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야죠. 틀에서 벗어나 리 체 양이 진정으로 원하는 상대를 선택하세요.”
이런 헛소리에도 “그래야 하려 나요.” 같은 모호한 대답만 했다.
물론 아빠가 중간에 꼭 끼어드 는 바람에 대화는 절대 길게 이 어지지 않았다.
시리온이 아빠의 반대를 딱히 의식하지 않은 것은, 약혼자인 에르안에게도 아빠가 딱딱하게 굴었기 때문이었다.
엄마의 유언이 걸린 약혼자에게 도 그런데 당연히 자신에게도 딱 딱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아빠가 은근슬쩍 내게 못마땅함을 내비 치기까지 했다.
“넌 왜 저딴 놈이 집적대는데 냉정하게 쳐 내지를 않아?”
“좋은 마음으로 봉사 활동 왔는 데, 외교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아요.”
“아니, 하지만……”
“저는 젠시 공비님과의 관계도 있고요. 그리고 전 시리온이 싫지 않아요. 나름 생긴 것도 괜찮고 저한테 잘해 주잖아요.”
“리체, 그게 무슨 소리냐? 넌 세르이어스 공작이 뒤에서 마음 고생을 하는 게 안 보여?”
“어머, 아빠! 에르안이 걱정되세요?”
“말이 심하네, 딸.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수 있지? 내가 그깟 놈을 왜 걱정해!”
잘은 모르겠지만, 디엘이 말한 효과가 이런 것인 듯했다.
물론 디엘은 하루가 다르게 살 이 오르며 에르안을 위해 준비해 둔 모든 것들을 본인이 누리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내일이 ‘반딧불의 밤’ 이라지.”
에르안은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반딧불의 밤’은 메일리스 공국 의 행사 중 하나로, 그날 밤에는 호수 근방에 반딧불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아름다운 전경을 만든 다고 했다.
분위기가 상당히 로맨틱해서 남 녀가 함께 붙어서 반딧불들을 바 라보면 단단한 연인이 된다는 속 설까지 돌았다.
물론 그 속설이 아니더라도 1년 에 한 번씩밖에 없는 이 아름다 운 밤을 즐기겠다는 것이 전체적 인 여론이었다.
이 ‘반딧불의 밤’에 대한 메일리 스 공국 사람들의 열의는 대단해서, 환자들 중 몇 명은 반드시 자신이 그 호수에 가야 한다고 우겼다.
그중 한 명이 르시였다.
“르시가 반딧불을 너무 보고 싶어 했는데, 어디로 이동할 수 있 는 상태도 아니고 차가운 밤공기 를 쐬는 것도 해로워서 안 된다고 했어요. 마음이 안 좋네요.”
하필 이 지역에서 벌어지는 반 덧불의 밤 행사에, 아빠와 나는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치료소에 입원하지 않은 사람들 이 많이 몰려온다며 시리온이 그때 우리를 공식적인 자리에서 소 개할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제국과 메일리스 공국의 화합을 널리 알리기 위해 꼭 필요한 절 차라고 했다.
특히나 의료 연구진에서 상징성 이 큰 페렐르만 부녀는 반드시 참석하여 인사를 해야 한다고 덧 붙였다.
“반딧불이 아무리 예뻐 봤자 별로 기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 런 거 보려고 여기 온 건 아니니 까.”
“그래도 외교적인 문제가 걸려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젠시 공비 의 면도 세워 줘야 하고. 도옴 받은 게 있잖아.”
그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우리 사이에 시리온이 끼어들었다.
“리체 양.”
그는 에르안의 살기 어린 눈빛 에 처음엔 옴찔했다.
하지만 에르안이 표정만 살벌할 뿐 전혀 자신의 언행에 끼어들지 않자 마음 놓고 할 말을 다 하는 상태였다.
“내일 ‘반딧불의 밤’ 행사 개요 는 받아 보셨습니까?”
“네, 디엘이 갖다 주었어요.”
“굉장히 볼 만할 겁니다. 이런 절경은 메일리스 공국이 아니라 면 볼 수가 없어요.”
“아…… 그런가요.”
“거기에 돌고 있는 속설은 알고 계시죠? 매일리스 공국에서는 ‘반딧불을 같이 보러 가자’라는 말이 굉장히 로맨틱한 뜻……”
시리온은 그 말을 다 끝마칠 수 없었다.
아빠가 다가와서 내 팔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뭐 하시는 겁니까?”
“‘반딧불의 밤’ 설명을……”
“저한테 하시죠. 굳이 제 딸한테 하지 마시고.”
나는 슬쩍 에르안의 표정을 보았다.
그는 아주 흡족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