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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56화 (156/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외전 4화

“시오니, 네 초록색 눈동자는 너무 예뼈.”

“백작님 눈도 녹색이잖아요. 너무 입에 발린 소리 아니에요?”

“예쁜 걸 공유하고 있는 사이라고 하면 안 되나?”

“안 돼!”

아르가는 눈을 번쩍 뜨고 벌떡 일어났다.

낯선 천장을 보고 나서야 지금 그가 메일리스 공국에 봉사 활동을 왔다는 것을 인지했다.

밤늦게까지 환자들을 보느라 몹 시 피곤한 건 사실이었다.

그 와중에 20년 전의 꿈을 꾸는 건 또 무슨 일인지…….

“그 빌어먹을 자식의 아들놈을 봐서 그렇지. 아주 똑같이 컸군.”

아르가는 다시 이불을 덮으며 이를 갈았다.

“여자 보는 눈까지 닮다니, 소 름끼치게.”

20년 전, 제국 국경 근방의 활 화산이 터져 비슷한 봉사 활동을 간 적이 있었다.

워낙에 큰 사고라서, 그때 라베 리 섬의 시오니도 왔고 메일리스 공국의 시리온도 왔었다.

시오니와 자신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어떻게든 방해해 보겠다고, 시리온은 별별 수를 다 썼다.

그래서 봉사 활동 기간 내내 얼마나 짜증났는지.

번번이 아르가를 견제하던 그가 가장 최악으로 굴었던 때가 생생 히 기억났다.

“어떡하죠, 페렐르만 자작? 월리엄을 살리려면 벨포 시약이 필 요할 것 같은데 그걸 제가 여관 에 두고 왔네요. ”

“무슨 여관입니까?”

“오는 길에 들렀던…… 에스포 시 지역의 가장 큰 여관. ”

그날은 시오니의 생일이었다.

봉사 활동 중이라 대단한 파티 는 못 열어도 젊은 영애들과 영 식들이 조출한 파티를 열기로 한 저녁이었다.

그러나 아르가는 자신의 환자였 던 작은 소년을 살리기 위해 시 리온의 수를 뻔히 알면서도 먼 길을 떠났다.

결국 아이를 살렸고, 그 결정에 전혀 후회는 없었지만 시오니와 는 완전히 끝나겠구나 싶어 돌아 오는 입맛이 썼다.

심지어 시리온과 단둘이 있는 시오니를 발견하고 발걸음을 돌 리려는데...”

“페렐르만 자작은 네게 호감이 전혀 없어, 시오니. 이것 봐. 네 생일 저녁인데도 얼굴 한 번 비 추지 않잖아”

“호감은 내가 있으니까 상관없는데요. ”

“뭐?”

“생일을 같이 못 지냈으면 생일 다음 날을 같이 지내면 되죠. 어, 아르가!”

“……시오니?”

“마침 잘됐네. 할 말이 있어.”

다 포기하고 의기소침해 있었는 데 그녀의 말에 얼마나 기쁘고, 마치 정의가 승리한 것 같던지.

“대체 젊은 날의 아르가 페렐르 만은 왜 그랬을까. 대놓고 시오 니와 서로 좋아하는 관계다! 네 놈이 낄 자리는 없다! 아주 선언 을 해 버렸어야 했는데.”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고 시오니 에게 직진하는 시리온을 보며 속 만 끓였던 때가 떠올라 그는 괜 시리 신경질을 냈다.

요즈음 시리온 놈의 아들 시리 온을 보자 그때의 그 짜중이 계 속해서 몰려오는 둣했다.

“끔찍하게도 닮았군. 젠장.”

싸구려 멘트는 물론이고 은근히 하는 일 없이 어슬렁거리며 여자 에게 들이대기만 하는 것까지 완 전히 판박이였다.

“그런데 세르이어스 공작은 왜 또 답지 않게 온순한 거야? 나 참.”

에르안은 리체가 출발하기 전에 당부한 대로, 일에 방해되지 않 게 쓸데없는 질투를 하지 않고 있는 중이었다.

그 사실을 까닿게 모르는 아르 가는 한 번 크게 혀를 차고 머리 끝까지 이불을 덮어 썼다.

***

“아빠는 주무셔?”

“네, 불 꺼진 걸 몇 번이나 확 인했으니……”

디엘이 소곤거리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는 나와 에르안의 밀회를 위 해 숙소로 잡고 있는 저택 구석 에 작은 공간율 마련해 둔 참이었다.

“여 기입니다.”

과연 디엘은 상당히 유능해서, 에르안이 발코니에서 훌쩍 뛰어 내리면 바로 도달할 수 있는 곳 에 테이블과 의자 둥을 마련해 두었다.

나 역시 아빠 방을 통과하지 않 고 지나갈 수 있는 복도가 있어서 둘이 몰래 만나는 것은 별달 리 어려옴이 없을 듯했다.

“잠시. 네 방은 어디지?”

“저는 저쪽 맞은편 방입니다.”

“몰래 내 방과 바꿔. 발코니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던데.”

“예? 하지만 공작님 방은……”

아무리 디엘이 우리 아빠의 최 측근이라고 해도 평민이니 아주 좋은 방을 가질 리가 없었다.

당연히 에르안에게는 이 저택에 서 가장 좋은 방을 배정해 놓은 상태였다.

“그래도 이 방이 리체와 더 가 깝잖아. 백작님 몰래 바꾸도록 해.”

“거기 네가 잔뜩 뭘 준비해 놨 던데 네가 다 쓰고.”

잠시 엿들은 바로는 에르안의 방은 넓고 전망이 탁 트인 것은 물론이고 호화로운 목욕 제품과 각종 비싼 식음료들을 시간마다 바꾸도록 지시해 놓은 것 같았다.

“알았어?”

잡아먹을 것 같은 에르안의 시선에 디엘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 였다.

가똑이나 자신의 일은 에르안이 다 해서 매일같이 상석에서 팔자 좋게 앉아 바다나 바라보며 이것 저것 먹고 있는 상태라 디엘의 얼굴색은 매끈했다.

이제부터 아마 더 매끈해질 것 같았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

“잠깐, 디엘.”

나는 에르안과 나를 두고 재빠 르게 떠나려는 디엘을 붙잡으며 말했다.

“너 시리온 님에게 필요 이상의 정보를 넘졌던데? 나와 에르안이 태중 약혼 사이라는 것부터 아빠 가 반대한다는 것까지.”

“꼬치꼬치 캐물어서 어쩔 수 없었고……. 나는 평민이라 거짓을 고할 수 없었을 뿐이고……”

디엘은 에르안의 눈을 피하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르안이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다가 낮게 말했다.

“앉아.”

“……네?”

“앉으라고.”

“하지만 자리가 두 개……”

“내 자리에 앉아. 도망가려고 하지 말고.”

디엘은 에르안의 눈치를 보다가 결국 푹신한 방석이 깔려 있는 의자에 엉거주춤 앉았다.

에르안은 팔짱을 낀 채 난간에 기대어 서서 서늘한 눈으로 물었다.

“그래, 그 겁도 없는 안경잡이 가 리체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물 었다고?”

“네”

“호감이지?”

“……네.”

“알겠다.”

나는 곧바로 자리를 뜨려는 에 르안을 간신히 불잡았다.

“어디 가요?”

“그 안경잡이한테.”

“가서 뭐 하게요?”

“눈이 아닌 다른 곳도 안 좋게 만들어 줘야지.”

에르안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이미 입가가 굳은 상태였다.

“감히 남의 약혼녀한테 집적거려?-”

일하는 데 괜히 질투하느라 방해하지 말라던 내 말 때문에 오 랫동안 참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혹시라도 외교적인 문제로 번질 까 봐 나는 그를 끌어안다시피 해서 멈추게 한 다옴 디엘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빠가 그 사람을 지나치게 싫어하시는 것 같던데. 혹 시 둘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이 있기는……. 페렐르 만 백작님은 처음 볼 때부터 그 분을 싫어하셨는데……. 아, 잠 깐.”

디엘의 푸른 눈이 순간 가늘어 졌다. 무언가를 회상하고 있는 듯했다.

“시리온……. 시리온이라.”

“왜? 뭐 들은 것 있어?”

“예전에 상단 사람들이 떠드는 걸 들은 적 있어.”

디엘은 완전히 깊게 생각에 잠 겨서, 내게 예전처럼 반말을 썼다.

“아……. 맞아. 기억이 나는 것 같아.”

“그래? 그럼 얼른 말해.”

“안 말하는 게 결과적으로는 좋을 것 같은데. 리체 너 연기 못 하잖아.”

“옹?”

“잘만 하면 이게 엄청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아!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힐끔 에르안의 눈치를 본 디엘 은 정신이 들었는지 다시 말꼬리를 흐렸다.

“두 분 다, 그냥 그 백작님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시게 둬 보세요. 리체 님은 좀 받아 주시고, 공작님은 그냥 두고 보시고요.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은 데요.”

에르안과 나는 잠시 멍하니 있 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디엘이 저렇게 확신에 차서 말하는 걸 보니 무언가가 있긴 있 는 것 같았다.

어차피 에르안이 그의 다른 곳 을 좋지 않게 만들었다가는 외교 문제로 번질 것 같아 말리려고 했었다.

나야 뭐, 헛소리하는 걸 한 귀 로 듣고 한 귀로 홀리면 되는 일이니 별로 어렵지 않았다.

“난 연기 잘해.”

에르안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사정을 다 알아도 돼. 내게만 말해.”

“안 돼요.”

내가 끼어들었다.

“혹시라도 이걸 나중에 아빠가 알게 된다면 배신감에 휩싸일 수 도 있잖아요. 우리는 최대한 사 정을 모르는 채 행동하는 게 만 약을 위해서라도 좋겠어요.”

“음…… 하지만 그놈이 집적대 는 걸 네가 받아 주고, 난 모른 척한다라……”

“밑져야 본전이잖아요. 뭐 평생 그렇게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에르안.”

나는 그의 손등에 내 손을 얹었다.

“나 믿죠? 설마 제가 그 미끌미끌한 인간에게 넘어가겠어요?”

“……리체.”

에르안이 한숨을 쉬며 내 머리 카락을 매만지기 시작하자, 디엘 이 벌떡 일어났다.

“전 이만, 그럼 가 보겠습니다,

“디엘!”

나는 에르안의 팔을 잠시 밀어내며 웃었다.

“고마워. 도와줘서.”

“글쎄, 이건 그냥 제 생각인데, 아마 페렐르만 백작님께서도 포 기할 만한 계기가 생겨야 오히려 더 마음이 편해지시지 않을까 해서……”

그는 머쑥하게 뒤통수를 긁었다.

“그리고 공작님 덕분에 너무 많이 편하게 지내고 있어서요. 저 는 염치가 있어서, 제가 뭔가 받 은 만큼은 꼭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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