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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55화 (155/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외전 3화

시리온은 우리의 뒤에서 일단 경계의 눈빛을 하고 있는 에르안 에게도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아, 세트이어스 공작님이시죠? 봉사 활동 지원단을 꾸리시는 데 후원을 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후원을 해 주시지 않아도 저희가 비용 정도는 마련할 수 있는데……”

“아닙니다. 메일리스 공국에 도움이 되어 기뽑니다.”

에르안은 딱딱하지만 어쨌든 예 를 갖추어 대답했다.

간단히 모두 인사를 나누자 아 빠가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자, 그럼 얼른 이동하지요. 혹 시라도 일분일초가 급한 환자가 있을지도 모르니.”

얼마 걷지 않아서, 디엘이 이미 주도해서 설치해 놓은 간이 치료 소가 보였다.

디엘은 마차에서 짐꾼들이 옳기 고 있는 약초의 물량을 파악하다가 우리를 발견하고 반갑게 다가 왔다.

“무사히 도착하셨군요. 고생 많 으셨습니다.”

“어차피 곧 저녁 시간이니 괜히 여독을 푼다며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한 시간이라도 환자를 보려 고 하는데.”

“예, 저쪽이 진료소입니다. 저기가 백작님, 그 옆자리가 리체 님, 그리고 차례대로……”

어차피 순회 진료를 봐야 하겠 지만, 일단 우리를 위해 마련해 둔 좌석을 일러주던 디엘이 맨 마지막으로 에르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세트이어스 공작님께서 는 저기 앉으시면 됩니다.”

“……저기?”

“예, 후원자님이시니, 가장 좋은 상석에서 바다 전경을 보시면서……”

디엘이 가장 위쪽에 마련된 좌 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천막에 푹 신한 의자, 각종 옴식이 있는 테이블, 그리고 하인 하나까지 서 있었다.

게다가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아름다운 메일리스 공국의 바다 까지 한눈에 보였다.

디엘이 정말로 신경 써서 마련 한 게 틀림없는데도 에르안은 별 로 감흥이 없는 둣 고개를 모로 꼬았다.

“한마디로 나는 할 게 없다는 얘긴가?”

내가 보기엔 에르안은 정말 진 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것 같은데, 디엘의 눈빛이 애처롭게 나 를 바라보았다.

결국 나는 디엘을 대신해 부드 럽게 말해야 했다.

“할 게 없다기보다는, 에르안은 의학적 지식이 딱히 없으니까 쉬 고 있으라는 뜻이지요?”

에르안은 내 말에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그럼 디엘 몰레킨은 의학적 지식이 있나? 의사가 아닌 건 마찬 가지인데.”

"아니, 거기서 제가 왜……”

“넌 그럼 이제 뭐 할 건데?”

“저야 뭐, 이제 리체 아가씨와 페렐르만 백작님을 따라서 이런 저런 보조를 하겠죠? 아무래도 환자를 옮기거나 짐을 챙긴다거나 하는 역할의 사람이 필요하니.....”

디엘이 주늑 든 목소리로 우물 거리자 에르안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럼 그걸 내가 해야겠군.”

“네?”

“너나 나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리고 힘은 내가 더 잘 쓸 것 같은데.”

“음…… 그럼 저는……”

“딱히 갈 데 없으면 네가 저기 앉아 있어.”

에르안은 자신을 위해 마련된 상석을 가리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 되겠군.”

그래서 디엘은 졸지에 상석에 앉아 어색하게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옴료를 마시며 이국 의 푸른 바다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에르안, 저것 좀 옮겨 주세요.”

“이 환자 옷 벗겨 주시고 상처 소독 좀 해 주세요.”

“간이침대 좀 정리해 주세요. 이 환자 곧 옮겨야 해요.”

“일지 좀 가져다주실래요? 아,  그 김에 시약병도 세 개.”

에르안이 나와 붙어 있기 위해 디엘의 역할을 자처했다면 그것 보다 더 좋은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냥 졸졸 쫓아다니는 건 정말이지 이 바쁜 시기에 방 해만 되었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디엘은 본인이 휴양 온 기분은 다 내고 있었고, 에르안 은 난생처옴으로 누군가의 수발 을 들고 있었다.

물론 그 누군가가 나였기 때문 에 그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영애, 뭐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그가 내 지시를 듣고 시약을 가지러 조금 멀리 간 사이, 시리온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젠시 공비는 다시 수도로 돌아 갔고 그가 남아서 이런저런 편의를 봐 주고 있었는데, 그는 에르안만 없으면 내게 와서 말을 걸곤 했다.

“아, 네. 잘 챙겨 주셔서 감사해 요.”

“혹시 제국에 비해서 부족한 건 없으십니까? 뭐든 말만 하시면 제가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다 좋은 걸요.”

“하긴, 저희 아버지도 젊었을 때 제국에 계셨는데 메일리스 공국과 별 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더 살기 좋지요. 메일리스 공국은 지리상으로 조금 외 지긴 하지만 철광석 둥 천연 자원도 풍부하고, 역사적으로 큰 비극도 없었으니까요.”

“아, 그렇군요. 메일리스 공국의 장점 잘 들었습니다. 별로 궁금 하지는 않았지만.”

슬슬 환자를 보는 데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나는 얘기가 길어 질 것 같아서 거리를 두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대화를 멈출 생각 이 없어 보였다.

“세르이어스 공작과는 태중 약혼 사이라고.”

“어떻게 아셨어요?”

“몰레킨 군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시리온은 물결치는 금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부드럽게 웃었다.

“어머님의 일방적인 결정이라, 페렐르만 자작님께 아직 허락을 못 받았다는 것도요.”

“뭐, 다 사실이긴 한데……”

“페렐르만 영애께서는 정말 마음이 여리시군요.”

그가 내 눈을 보며 안경을 치켜 올렸다.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아, 그럼 하지 마세요. 굳이 안 하셔도 돼요.”

그는 내 말을 무시하고 안타까운 어조로 물었다.

“어머님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공작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계신 겁니까?”

사실 관계 몇 개만 보면 그렇게 추론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내가 차분하게 돌아서서 본격적으로 대답하려는 찰나 였다.

“리체!”

우리 둘의 사이를 가로 막은 사람은 다름 아닌 아빠였다.

“르시 칼로니가 통중이 심한 것같다.”

“예?”

“어린애니까 더 견디기 힘든가 봐. 가서 진통제 좀 주사해 줘.”

그 정도 진통제라면 아빠가 바로 주사할 수도 있는데, 아무래 도 아빠는 내가 젊은 남자인 시리온과 이야기하는 것이 싫은 모 양이었다.

“같이 가죠, 페렐르만 영애.”

시리온이 싱긋 웃으면서 따라붙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저는 리체 양의 초록색 눈동자를 처음 봤을 때부터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답니다.”

‘뭐야, 이 맥락 없는 직진은?’

나는 젠시 공비를 떠올리며 최 소한의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네? 백작님도 눈이 초록색이시 잖아요. 뭘 새삼……”

“그러니까요.”

그는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아 빠를 적극적으로 피하며 말을 걸었다.

“내가 갖고 있는 예쁜 걸 함께 갖고 있는 사람이니까……”

내가 몸서리를 치며 말을 끊으 려고 할 때, 아빠가 고개를 핵 돌렸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네?”

“어디서 내 딸한테 수작이시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아빠가 이토록 공격적인 것을 처음 봐서 깜짝 놀랐다.

물론 에르안을 끔찍하게 싫어하 긴 했지만, 그건 다 과거의 악연 때문이었다.

수도에서 새로운 영식들이 내게 말을 걸거나 작은 호감을 표시하 는 것이 보이면 경계의 눈빛만 보낼 뿐 이렇게 대놓고 짜증을 내지는 않았다.

“세르이어스 공작을 탐탁지 않 게 여기신다고 들었습니다.”

상당히 온순한 인상이라고 생각 했는데 역시 사람 속은 알 수가 없는지, 시리온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는 어떠실지……”

“절대 싫습니다!”

내가 끼어들 여지도 없었다.

아빠가 혐오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헛꿈 꾸지 말고 내 딸에게서 관심 끄십시오. 진짜 소름 끼치 게 싫으니까.”

저 멀리 에르안이 시약 상자를 들고 오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러고 보니 메일리스 공국을 위한 봉사 활동인데 에르안은 열심히 일하고 시리온은 내 옆에서 기웃대기나 하고 있었다.

“선생님……”

그러나 그 모든 생각이 내가 맡 고 있는 환자 중 가장 어린 르시 를 보니 즉시 멈췄다.

이제 막 아홉 살이 되었다는 르 시는 이번 산사태에서 부모를 잃 었고, 본인도 상당한 부상을 입었다.

“너무 아파요....”

산사태로 인한 물리적 부상에, 마력이 폭발하면서 생긴 부작용이 심각했다.

“자꾸 열이 오르면 안 되는 데……. 르시, 밥도 잘 챙겨 먹고 푹 쉬어야 돼. 최대한 좋은 생각을 좀 해 보고.”

나는 진통제를 주사하며 조곤조곤 말했다.

이 어린애에게 최악의 상황이 닥칠까 봐 걱정스러웠다.

“네……”

진통제를 맞은 뒤 꼬물거리다 잠들어 버린 르시를 보며 나는 잠시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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