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54화 (154/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외전 2화

모두가 잠든 밤, 나는 몰래 집 을 빠져나와 후문 앞에 조용히 서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에 타자마자 에르안이 나를 번쩍 들어 안아 무릎에 앉히고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보고 싶었어, 리체.”

“그제도 봤었는데.”

“그래서 넌 내가 안 보고 싶었어?”

“.......그건 아니죠. 보고 싶었어요.”

마차가 어디론가 향하는 동안, 나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몸에 기대어 앉았다.

“너랑 같이 있을 때마다 꿈꾸는 것 같아.”

에르안은 내 눈가에 입 맞추며 말했다.

“이렇게 너와 살결을 맞대고 있 을 때에도.”

다 무너진 관람탑의 잔해 속에서 처음 입 맞추었을 때, 그러니 까 서로 마음이 통했다고 느껴졌 을 때로부터 꽤 한참 지났다.

아빠 때문에 오래 붙어 있지 못 할 뿐이지 연인으로서는 상당히 오래 지났는데 그의 애정 표현은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그런 말 너무 자주하면 부끄러운데.”

“음…”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내 눈가 를 쓸더니 부드럽게 내려갔다.

“진짜 부끄러운 짓 해 볼까?”

우리는 수도가 얼마나 큰지 그 래서 볼거리가 얼마나 많은지 이 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두운 밤 이 순간만큼 은 부드럽게 덜컹거리는 마차 안이 우리 세상의 전부 같았다.

“그런…… 눈으로 보면……”

나는 그의 팔을 잡으며 잠긴 목 소리로 말했다.

“……판단력이 흐려지는데.”

“의도한 거야. 알잖아.”

그의 거친 숨결에 열기 어린 속삭임이 섞였다.

조심스러운 손길 속에서 가끔씩 강하게 밀어붙이는 완력 때문에 생각을 이어 가기 어려웠다.

“20시간 못 붙어 있어서…… 만날 때마다 이러는 거예요?”

잔뜩 긴장한 몸 여기저기에 그 의 체온이 달라붙었다.

“아니.”

나는 익숙한 무게를 견디며 물었다.

그는 달뜬 호흡을 이어 가는 나를 계속해서 얼러 가며 나붓하게 속삭였다.

“언젠가 20시간 붙어 있을 때도 이럴 건데.”

그가 내 허리를 붙들고 올려 주 어서 순식간에 자세가 바뀌었지 만 시야에는 여전히 그의 새까만 눈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결국 마차가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나는 기진맥진해서 거의 그 의 품에 안겨 있는 상태였다.

우리는 아빠의 눈을 피해서 종 종 이렇게 데이트를 나오곤 했다.

맨 처음 나는 에르안에게 언제 까지 이럴 수는 없으니 아빠에게 단호히 말하겠다고 했으나 그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시간 싸음이고, 아빠가 마음이 풀려서 직접 자신을 인정 해 줄 때까지 기다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난 너랑 결혼할 거라서 괜찮 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자신 때문에 간신히 재회한 부 녀간에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다며, 대신 오랫동안 보지 않으면 눈병 날 것 같으니 이렇게 몰래 만나자고 제안했다.

‘아빠, 죄송해요……’

밀회를 위해 백작저의 대다수 하인들을 매수한 나는 다시 한번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리는 밤중에 살롱에 가서 그 림 구경을 하기도 했고, 함께 옷 을 맞추기도 했으며 유명한 과자 전문점에서 야식을 먹기도 했다.

물론 에르안이 모두 특별히 늦 은 시간에 빌려 놓은 것이라 늘 우리밖에 사람이 없었다.

오늘 밤은 예전 건국제 때 함께 전경을 바라보았던 그 언덕에 오 른 참이었다.

“아빠도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 가 필요할 거예요. 아무래도 절 대 안 된다고 펄펄 뛰셨던지라 스스로도 번복하는 걸 받아들일 수 없으시겠죠.”

나는 그의 손등을 쓸어 주며 말 했다.

“시간이 흐르다 보면 분명히 그 계기가 오겠지. 난 절대 안 놓칠테니까 걱정 마.”

에르안이라면 정말 안 놓칠 것 같았다.

“그동안 네가 싫어하는 것만 안 해야지.”

함께 있을 때면 그는 나를 거의 가만히 두지 않고 여기저기 아프 지 않게 물거나 품 안에 가둬서 꼼짝도 못하게 하곤 했다.

견디다 못한 내가 몸을 뒤틀어 도 그는 토닥여 가며 끝까지 자 기 하고 싶은 만큼 나를 안았다.

나는 그의 품 안에 갇혀서 부루퉁하게 말했다.

“그럼 단점 좀 고쳐요. 세상 모 든 남자가 절 좋아하지는 않는다고요. 지난번 베르토 자작이 에 르안 보고 그대로 도망갔잖아요. 중요한 얘기 중이었는데.”

베르토 자작은 함께 의료 연구 진에 속해 있는 동료였는데, 길 거리에서 잠시 얘기를 하다가 에르안을 마주치고 난 후 눈빛만 보고도 그대로 급히 인사한 후 사라져 버렸다.

내 재판 때 벨론이 ‘세르이어스 공작의 약혼녀래’라는 말을 퍼트린 바람에 수도의 모든 귀족들은 모두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 소문을 아빠가 “괜히 다른 놈 집적대면 더 골치 아파져.”라 는 말로 딱히 부인하지 않는 것 이 다행이었다.

“아…… 그래, 고쳐야지……. 근 데 어떻게 널 안 좋아할 수 있 지 ?”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누군가의 약혼녀라고 알려진 여자를 이성 으로 보지 않아요.”

“하지만 일반적이지 않은 남자

도 있을 거 아냐. 난…… 네가 황태자랑 춤을 췄을 때 사실 눈 이 돌아갔다고. 너와 연애 중도 아니었지만 절대 놓아줄 자신이 없었어. 그런 놈이 또 나타날지 도 몰라. 나는 너에 관해서는 다 불안해.”

나는 두 손을 들어 그의 뺨을 감쌌다.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마주보 게 했다.

“불안해하지 마세요. 내가 당신 을 사랑한다는데.”

기분 좋은 봄바람이 살랑거리며 우리를 감쌌다.

“새로 찾은 가족들에게 둘러싸 여서 정말 좋은 것도 맞지만, 연 구도 일도 재미있어서 하루하루 즐거운 것도 맞지만, 무엇보다 에르안과 이렇게 살을 맞대고 사 랑을 얘기할 수 있어서 나 정말 행복해요.”

그는 빨려 드는 둣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약속해요.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주하는 남자에게 질투하지 않겠다고. 나를 믿으면 되잖아요. 예전에 에르안에게도 견고하게 철벽을 쳤는데 다른 남 자한테는 오죽하겠어요?"

우리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흐르 고 그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네 말이라면 다 잘 듣지. 약속할게.”

예전의 귀여운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사라졌지만, 그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왠지 옛날 생각 이 나곤 해서 마음이 몽글몽글해 지곤 했다.

“네가 그런 말까지 해 주면 뭐 든지 다 들어주고 싶잖아. 사실 난 네 눈을 이렇게 바라보고 있 기만 해도 정신을 못 차리겠어.”

“맨날 보면서.”

“그러니까 네 앞에서 언제나 제 정신 아니잖아.”

“알고 있으니 다행이네요. 그래 도 제정신인 척은 해 줘요, 사회 적 지위가 있으니까.”

나는 그의 이마에 내 이마를 갖 다 대며 웃었다.

“메일리스 공국에 가서도 체통을 지키셔야 해요, 아셨죠? 나 일하는 거 너무 많이 방해하지 말고.”

“……거긴 안 좋은 기억이 있는 데. 네가 도망가려고 했던 곳이 잖아.”

“그러니 좋은 기억으로 덮어야죠.”

“음……”

“좋은 일 하러 가니까, 우리에 게도 분명히 좋은 일이 생길 거 예요.”

메일리스 공국에는 분명 일하러 가는 것이지만, 에르안이 함께한다니 더 좋았다.

아무리 바빠도 같은 공간에 함 께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

“리체 양!”

메일리스 공국에 도착하자마자 달려온 사람은 젠시 공비였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의사 몇 명 보내 줘도 되는데, 페렐르만 부녀가 직접 오다니!”

“사상자가 많다고 들었어요. 심 려가 크시겠네요.”

“그래도 내가 제국 출신인 덕에 이렇게 도음도 받고 다행이지. 아, 그리고 이쪽은……”

메일리스 공국을 다스리고 있는 에제트 대공은 본디 일정 때문에 수도에 머무느라 오지 못했다.

그래서 젠시 공비만 산사태 지 역에 내려왔나 했더니, 그녀의 옆에 젊은 남자가 한 명 서 있었

“시리은 주니어 에폰 레이니 백작이야. 대공이 직접 못 와서 미 안하다며, 의료진을 환영하라고 대신 보낸 거야.”

더 자세한 소개를 들어 보니 그 남자는 에제트 대공의 이종사촌 동생이었다.

그래서 젠시 공비와 함께 대공 을 대표하여 온 것이었다.

금발에 녹색 눈을 가진 그는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청년이었는 데, 커다란 안경을 쓰고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먼 길 오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봉사 활동 기간에 제가 현지 책임자로 계속 머물 예정이니 불편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시리온이 먼저 아빠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런데 시리온을 바라보는 아빠 의 눈매가 살짝 새초롬했다.

“시리온 주니어…… 레이니? 혹 시 부친 성함이……”

“예. 똑같이 시리온 레이니 백작입니다.”

시리온이 명랑하게 대답하자, 젠시 공비가 부드럽게 끼어들어 설명했다.

“여기서는 아버지 이름을 따서 아들 이름을 짓는 것이 흔하거든요."

시리온은 내게도 예를 갖추어 손에 입을 살짝 맞추느라 아빠의 표정이 묘해진 것을 눈치채지 못 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