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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53화 (외전) (153/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외전 1화

외전 1. 의료 봉사

이사벨은 차를 마시면서 우아하게 카탈로그를 보는 중이었다.

“이것도 예쁘네, 음. 이것도 괜 잖고.”

그녀가 보고 있는 카탈로그에는 젊은 여성을 위한 액세서리가 가 득했다.

“옛날에 시오니가 이런 스타일 을 좋아했는데, 리체도 좋아하겠 지. 일단 이건 색깔별로 주문하고

가뿐하게 보석 쇼핑을 끝낸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구두 카탈 로그를 집어 들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에르안입니다.”

“들어와라.”

이사벨은 구두 카탈로그를 아쉽 게 다시 내려눕으며 눈을 깜빡였다.

에르안이 공손하게 예를 갖춘 뒤 이사벨의 앞에 앉았다.

“다름이 아니고,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래? 말해 보렴.”

“며칠 동안 공작령 일을 좀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아, 그건 싫구나.”

이사벨이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네가 건국제 후에 다쳐서 왔을 때에도, 얼마 전에 쓰러져서 수도에서 치료를 받을 때에도 내가 공작령 일은 다 맡아서 했다. 그 이후에도 페렐르만 자작가에 잘 보이라며 또 며칠 머무는 걸 적극 권장했지.”

그녀의 검은 눈이 차갑게 번득였다.

“그런데 아직도 리체와 결혼 날짜를 잡아오기는커녕, 교제 허락도 못 받아와? 그러고도 내 아들 이냐? 무능력하긴……”

“그게……”

“난 영지 운영이 적성에 맞지 않아. 이렇게 한가롭게 차나 마 시고 리체에게 줄 선물이나 고르면서 빈둥거리는 삶이 적성이란다. 작은 남작령 출신이라고 무시당할까 봐 열심히 일하는 척했지만 사실 생산성 없는 하루가 제일 좋아.”

이사벨은 다시 구두 카탈로그를 집어 들었다.

“그럼 가 봐. 네가 일해. 난 이제부터 쉴 테니까.”

“그래도 아무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에르안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페렐르만 가문 사람들이 저를 대놓고 내쫓지는 않고, 경계는 하지만 어느 정도 받아들이신 것 같습니다. 리체도 계속 설득하고 있고요.”

“증거는.”

“다른 영식들 앞에서 태중 약혼한 사이라고 말하면 딱히 제지하지 않으시는 분위기입니다.”

“거의 넘어왔구나.”

“그렇습니까?”

“내가 이 분야에는 꽤 통찰력이 있단다. 그 증거로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지 않니."

이사벨이 산뜻하게 머리카락을 넘기고,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향후 계획은.”

“그것 때문에 온 겁니다.”

에르안은 깍듯하게 대답했다.

“메일리스 공국에 마력 폭발로 인한 산사태가 일어나서 이번에 국립 의료 연구진에서 봉사 활동을 간다는데, 저도 따라가고 싶습니다.”

“그건 당연하고, 후원은 선점했니? 다른 가문 못 들어오게 해야지.”

“제일 먼저 나선 곳이 신전이라 이미 전액 후원하겠다고 못 박았습니다.”

나름 신에 대한 복수를 소소하 게라도 하겠다고 결심한 에르안은 평생에 걸쳐서 신전이 신의 이름을 칭송하는 일들을 최대한 막을 예정이었다.

“그렇다면 또 영지 일을 내가 맡아야겠구나.”

이사밸은 아까의 단호한 거절을 번복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에르안에게 신신당부했다.

“후원자 자격으로 따라가더라도 절대 거들먹거리며 뒤에 있지 말고 리체 옆에서 딱 붙어 수발 들어라. 알겠니?”

“예, 알겠습니다.”

에르안은 깍듯하게 인사하고 나 갔다.

혼자 남은 이사벨은 잠시 생각 하는 표정을 지으며 창밖에 시선 을 두었다.

“홈…… 메일리스 공국이라........”

아르가가 메일리스 공국에 간다니, 새삼 옛 기억이 떠오르기 시 작했다.

시오니와 아르가, 자신과 케일런이 지금의 리체와 에르안만큼 젊었을 시절.

“좋지 않은 기억이 있을 텐데도 간다는 걸 보니 의사는 의사군. 그 인간 성격에 시리온을 잊을 리 없는데, 공과 사가 나름 뚜렷 한가 봐.”

예전 생각을 하는 그녀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번졌다.

***

“리체, 이거 시킬까? 건강한 사슴의 뿔에서 키운 달팽이 요리.”

“근데 그것까지 시키면 너무 많아 보이는데요.”

“하지만 다 안 먹어 본 것들이 잖아.”

고모와 할아버지가 수도에 올라 왔기 때문에 꽤 오랜만의 가족식사였다.

국립 의료 연구진이 출범하게 된 후, 아빠는 드디어 백작 위를 받았고 나는 백작 영애가 되었다.

나와 아빠는 수도에 있는 백작 저에 머물며 함께 출퇴근을 했고, 고모와 할아버지는 원래의 영지로 돌아갔다.

언제까지나 영 지를 비워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모와 할아버지는 여유가 되면 항상 수도로 올라와 함 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수도에 있는 유명 한 레스토랑을 다니며 가족 식사 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우리는 너무 오래 떨어져 있어 서 네 입맛을 몰라. 최대한 많이 알아야 돼.”

고모가 결국 새로운 식재료로 만든 다소 실험적인 요리들을 모 두 주문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세르이어스 공작성에서도 맛있 는 것은 실컷 먹었다고 몇 번을 말했지만, 고모와 할아버지는 내 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맛의 종류를 다 경험하게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놓친 것이 너무 많다.”

할아버지가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인생에서 처음 과자를 먹는 순간이라든가, 처음 편식을 하는 모습이라든가. 그러니 네가 처음 해 보는 걸 다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야.”

나는 뭔가 마음이 아파져서 바 로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주문을 추가했다.

“..고모, 여기 곰발바닥과 함께 숙성한 화이트 와인 하나 추가해 주세요. 풍미가 대체 어떨지 상상도 가지 않으니까요.”

“아버지, 그리고 세이린.”

아빠는 뿌듯한 얼굴로 냄킨을 펼치며 말했다.

“다들 꼬마 리체가 푸딩을 아껴 먹는 모습을 못 보셨지요? 저는 그걸 보고 푸딩을 더 시켜 주기 까지 했습니다.”

“눈앞에 딸 두고 못 알아본 게 자랑이라고……”

“그래도 이건 자랑 맞는데.”

“나 참……”

고모는 눈을 흩기며 공격을 시 도했지만 결국 한숨을 쉬며 아빠 에게 간절히 덧붙였다.

“어떻게 아껴 먹었는데? 잘게 쪼개서 먹는 거야, 아니면 천천히 우물거리는 거야?”

할아버지 역시 열정적으로 끼어들었다.

“무슨 맛 푸딩이었지? 더 시켜 준 것도 똑같은 맛이었나?”

아빠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니 우스워져서 나는 피식 웃었다.

셋이서 얼마나 나를 위해 주는지, 내가 이 집에서 처음부터 자 랐더라면 버르장머리 없는 안하 무인 영애로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벌써 국립 의료 연구진이 자리 를 잡고 여러 가지 연구 결과를 제국에 선보이기 시작한 지 두 달이 지났다.

두 달 동안 발표한 연구 결과가 이전에 황실 의료 연구진이 20 년간 해 왔던 연구들보다 더 유 용하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고 있었다.

‘국립’ 자가 붙은 단체답게, 우리는 황족뿐만이 아니라 전국 각지의 의사들이 치료하지 못하는 여러 희귀병 환자들도 받았다.

나는 연구도 실컷 하고, 재능도 마음껏 펼치고, 그 와중에 쏠쏠 히 유명해지기도 하고 해서 상당 히 기분이 좋았다.

물론 아빠 역시 그동안 불합리 하다고 생각했던 체계를 다 바꾼 데다가 하루 종일 나와 함께 있 을 수 있어서 굉장히 기뻐했다.

“그나저나.”

고모는 어느새 나온 애피타이저를 내 앞에 덜어 주며 말했다.

“한창 도로가 공사 중이던데, 저거 세트이어스 공작령하고 이어지는 것 맞지?”

“음…… 네.”

아무리 어머님이 영지를 지키고 있다고 해도, 에르안이 언제까지나 공작령을 비울 수는 없었기에 그는 결국 공작령으로 내려갔다.

그 후 즉시 세르이어스 공작령과 수도를 잇는 직선 도로 공사를 시작했다.

원래 세르이어스 공작령과 수도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다만 조 금 돌아가야 했는데 그 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도 시간만 나면 조금이라도 얼굴을 보겠다며 수도에 기웃거리는데, 도로마저 완성되면 매일 같이 오는 것 아니냐며 아빠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이번 메일리스 공국 봉사 활동 에도 유일한 후원자로 나섰더군.”

아빠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 따라오겠지.”

나는 이미 하인을 통해 함께 가 겠다는 쪽지를 몰래 받아 보았기 때문에 아무 말 없이 물만 마셨다.

의료 수준이 별로 높지 않은 메일리스 공국에 큰 산사태가 나서 사람들이 많이 다쳤고, 젠시 공비는 재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산사태의 원인은 마력 폭발이었는데, 그래서 환자들이 여러 가지 합병중을 호소한다고 들었다.

이시더 남작령을 무너트리려는 계획을 세웠을 때도, 재판 때에 도 내게 도움이 되었던 사람이니 당연히 나는 직접 가서 도와주고 싶었다.

물론 내가 간다고 하니 아빠 역시 따라 나섰고, 황실에서도 황족의 부탁이었으므로 쉽게 허가를 해 주었다.

“아빠, 이제 좀 허락해 주시는 게 어때요?”

나는 은근슬쩍 아빠에게 메인 요리를 덜어 주며 눈웃음을 쳤다.

“서로의 목숨을 살린, 어쩌면 저보다도 더한 인연으로 얽히셨는데……”

“리체.”

아빠가 나이프를 딸깍, 하고 내 려놓았다.

“네가 눈웃음을 치고 애교를 부 리다니…. 그 공작에게 배운 게 틀림없구나. 역시 내 딸한테 해로운 존재였어.”

“네?”

“가만히만 있어도 귀여운 네가 그런 웃음까지 지으면, 넌 세상 에서 못할 게 하나도 없어지고 모두가 네 말을 다 들어줘 버려서 아주 거만한 애가 될 거야.”

나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 으며 입을 다물었다.

디엘의 말에 따르면, 지금 아빠 는 ‘에르안을 받아들여야 한다.’ 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받아들이 고 있는데 가슴속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에르안이 아빠를 구해 줬다는 사실 때문에 지금 말로만 싫다 싫다 하고 막상 밀어내지 않는 지경까지 온 것 같았다.

가슴속으로도 받아돌이게 하려면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르거나 아니면 또 다른 사건이 하나 일 어나야 할 둣싶었다.

“그래, 그 공작 일은 천천히 생 각해라.”

할아버지가 와인 잔율 들며 상 황을 정리했다.

이미 천천히 생각해서 시간이 꽤 흘렀다고 대답하려다가 아무 의미 없는 것 같아서 참았다.

하루에 20시간씩 붙어 있겠다며 기대에 차 있던 에르안의 표정을 생각하니, 그날 바로 깨진 그의 꿈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메일리스 공국에는 언제 출발 한다고?”

“3일 뒤요. 아, 디엘도 갑니다. 연구진의 일부만 가는 거라 일손이 꽤 달릴 것 같거든요.”

“아, 디 엘도 가요?”

내가 워낙에 연구진 일로 바빴 기 때문에 디엘도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그래, 이미 출발시켰다. 숙소나 치료소 같은 걸 마련 중일 거다”

나는 분명 디엘에게 ‘리체와 공작님의 숙소를 아주 멀리 떨어트려라’라며 신신당부했을 아빠를 상상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후원을 막고 따라온다는 걸 억지로 떼어 놓지 않는 게 어디 인가.

“그나저나 봉사 활동이라니……. 옛날 생각 나는구나.”

아빠는 턱을 괴고 한숨을 섞어 말했다.

“.....시오니가 그때 내게 고백했는데........”

그때 고모가 나이프로 고기를 썰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말은 바로 해라. 어떤 영악한 놈한테 밀려서 찔찔대는 꼴을 보 다 못한 시오니가 기회를 준 거 잖아. 물론 네놈 껍데기를 애초 에 맘에 들어 하긴 했지만.”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고모? 영악한 놈이라뇨?”

“그냥, 시오니에게 잘 보이겠다며 네 아빠를 대놓고 견제하면서 치사하게 굴던 놈이 하나 있었는…. 아 잠시, 그 인간이 메일 리스 출신 아니었던가? 이름이 아마 시……”

“그만해, 세이린.”

아빠는 도끼눈을 뜨며 짜증을 냈다.

내가 그동안 아빠에게 들어 왔 던 연에담은 모두 즐겁고 아름다운 것이었는데, 고모의 말을 들 으니 어딘가 미화되거나 각색되 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정의는 승리했으니까.”

“음, 아빠가 정의였어요?”

“당연하지. 그 비열한 놈이 시오니의 혼을 뺄 동안, 나는 묵묵 히 죽을 뻔했던 어린 생명을 살 렸다고. 그러니 내가 정의 아니 겠느냐.”

맥락이 없었기 때문에 전혀 알 아들을 수 없었지만, 아빠는 그 이후로 더 자세한 상황은 말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빠르게 눈치철 수 있었다.

아무리 엄마와 결혼에 성공했더라도, 그때의 기억은 아빠에겐 다시 상기하고 싶지 않은 짜중나 는 상황이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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