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52화 (152/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52화

삐거덕거리는 계단을 한 층 오 르고 나니 과연 캄캄하게 이어진 복도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이 하나 보였다.

“저기가 웨데릭의 방이에요?”

대체 누가 다 몰락한 남작저에 서, 그것도 세르이어스 공작성 감옥에 있는 남작 영식의 방에 머문단 말인가?

에르안이 거침없이 걸어가 나를 뒤에 두고 문을 벌컥 열었을 때 였다.

“.........어.......?”

에르안의 어조에서 당황함이 묻 어나서 나는 오히려 더 크계 놀 랐다.

“왜요? 누군데요?”

“이름이 뭐였더라…… 그……”

그의 커다란 덩치에 가려서 방 안이 보이지 않아, 나는 그의 옆구리 사이로 끼어들었다.

내가 바닥에 넘어져 있던 인영의 형태를 확인함과 동시에 에르안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집시?”

“제기랄! 아파! 아프다고!”

나는 버둥거리는 칸시아를 얼른 부축했으나 은근히 무거워서, 결국 에르안까지 동원해 겨우겨우 침대에 눕힐 수 있었다.

대체 왜 여기에 칸시아가 있는 지 얼떨떨했지만 일단 침대에서 굴러떨어져 허리에 큰 부상올 입은 칸시아의 상태부터 확인해야 했다.

“뭐, 엄청나게 다친 건 아니에요. 엄살이 심하시네요.”

“내 나이 되어 봐라, 젠장. 조금 만 부딪혀도 뼈가 부러질 것 같단 말이야. 그리고!”

칸시아는 에르안을 노려보며 말했다.

“칸시아 실로니스야. 빌어먹는 집시라니?”

이쯤 되면 칸시아의 성은 그때 그때 변하는 것이 확실했다.

“가만히 좀 있어 봐요. 지금 갖고 있는 약초가 없어서 처방은 못하지만, 마력 흐름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세심하게 조정하 면……”

“잠깐, 리체.”

에르안은 내 손목을 부드럽게 잡으며 저지했다.

“그거 당장 안 해 줘도 생명에는 지장 없는 거 맞지?”

“네? 그거야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이 집시, 분명히 들어올 때 마음과 나갈 때 마음이 완전히 다른 타입이야.”

“그것도 그렇죠.”

나와 에르안의 대화에 칸시아가 버럭 화를 냈다.

“이것들이 아픈 늙은이 앞에 두고 뭐 하는 거야!”

“그것보다 먼저 물어보지.”

에르안이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대체 당신이 여기 왜 있는 거지? 무단 주거 침입 아닌가?”

“너희는 왜 있냐, 그러면! 나랑 뭐가 다른데?”

칸시아가 질세라 소리쳤다.

“일단 이곳은 내 외숙부의 저택이었고, 그 부자는 내 성에 구금 되어 있지.”

에르안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리체는 매물로 나온 이 영지를 구매한 당사자야. 그런데 당신은?”

“……그럼 돈 내놔.”

칸시아는 뚱하게 중얼거렸다.

“여기 수도, 내 마력으로 유지되고 있는 거라고. 빤빤한 낯짝 보아하니 씻은 거 같은데 당연히 이용료 내야지. 안 그래?”

“아니, 다 떠나서 여기에는 왜 있는 거예요?”

당당하게 손을 내미는 칸시아에 게 내가 어이없다는 둣이 물었더니, 그녀는 허리가 아파서 끙끙 대면서도 열심히 대답했다.

“날씨가 추워지잖아. 이제 나이 들어서 노숙도 힘들어. 귀족저 하나가 오랫동안 비어 있다기에 잠시 머문 것뿐이야. 그게 잘못이야? 엉?”

“……여기, 저랑 완전 관계 깊은 곳이잖아요. 그때 칸시아도 수정 구슬에서 다 봤잖아요.”

“넌 너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 간다고 생각하는구나.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네 과거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 그 정도 사연 없는 인간이 어디 있담. 그냥 묵 기에 편한 곳이라 온 거야.”

하긴, 칸시아 정도면 훨씬 더 자극적인 일들을 많이 겪었을 테니 애초에 신경도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나저나 그럼 넌 여길 왜 샀 는데? 내가 여기 좀 있어 봐서 아는데 영 별로야. 저 바다 봐. 신이 심술을 부려서 미쳐 날뛰고 있잖아. 혹시 네 영지로 두려고 샀어? 너 사기당한 것 같아.”

사기당한 것 같다고 말하는 칸시아의 어조가 걱정스러운 것이 아니라 고소하다는 듯했기 때문 에, 나는 새침하게 대답했다.

“아뇨. 전 제 능력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모든 욕구가 채워지기 때문에 또 다른 영지 같은 거 필요 없어요.”

“그럼 여기는 왜 샀는데?”

“라베리 섬으로 가는 항구가 있으니까, 라베리 섬과 연결된 대륙의 유일한 길목이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라베리령으로 삼촌에게 드리려고 해요.”

“미쳤어? 땅을 왜 공짜로 줘? 그리고 삼촌이라고 믿으면 안 돼.”

칸시아는 에르안을 손가락질하며 거침없이 말했다.

“얘네 봐. 외숙부가 조카를 죽이려고 하고, 조카는 그 외숙부를 가뒀다고! 개막장 아냐?”

“……개막장 집안에 대한 친절한 설명 참으로 고맙군. 굳이 한 번 더 말 안 해도 모두가 알고 있는데 말이야.”

에르안이 담담하게 받아쳤다. 나는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혹시라도 라베리 섬에서 대륙을 오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계 엄마의 경우가 나쁜 전례로 오르내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

“남의 영지를 거쳐야만 대륙과 이어질 수 있다는 게 라베리 섬 입장에서는 하나도 좋지 않잖아요. 그냥, 제 외가를 위한 작은 선물이에요.”

“조심해라, 그렇게 핏줄한테 막 퍼 주다가 호구 잡힌다. 어쨌든 이제 내 허리나 고쳐 줘.”

“리체가 왜?”

에르안이 나와 칸시아 사이를 가로막은 뒤 눈썹을 치켜 올렸다.

“당신의 요통을 치료해 줘야 할 이유는 없어. 게다가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 둘의 달콤한 시간을 방해한 인간이라면 정말로 가 만두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올라 왔다고.”

“너희가 바닥과 나의 달콤한 시간을 방해했다는 생각은 안 하 니?”

전혀 달콤해 보이지 않았는데 지기 싫어하는 칸시아는 바득바득 우겼다.

하지만 에르안이 한 수 위였다.

“그럼 다시 바닥과 함께하게 해 주지. 우리도 오래 머물지는 않 을 테니 여기서 즐거운 대화는 마무리하자고.”

그는 정말로 칸시아를 다시 바닥에 내팽개칠 기세로 성큼성큼 침대로 걸어갔다.

칸시아가 짜중을 내며 손을 내 저었다.

“이런 젠장! 대체 나한테 왜 이래? 이 정도 다친 거 고치는 건 재한테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맞아요, 에르안. 그냥 별거 아니예요”

“치료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 야. 대가를 좀 치르라는 얘기지.”

나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에르안에게 무슨 속셈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세상에, 허리가 다쳐서 끙끙대 는 노파를 상대로 안 고쳐 준다며 협박할 수 있는 젊은이는 흔 치 않을 것이다.

물론 허리가 다친 와중에도 하 나도 안 불쌍해 보이는 노파도 흔치 않을 테고.

하지만 에르안이 칸시아에게 원 하는 게 대체 뭐가 있을까 궁금 하긴 했다.

“무슨 대가?”

“당신이 최고의 마법사라며.”

“그런데?”

“그럼 부탁 하나만 들어줘.”

“행, 내가 어디 남의 부탁 들어 줄 사람인가.”

“글쎄, 신이 싫다며.”

“그건 맞지.”

“나도 엄청 싫어하거든. 리체에게 상처를 줘서.”

나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천벌이라도 받는 건 아닐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비바람이 신의 심술이라지? 라베리 섬의 아름다움을 시기 한?”

“원래 속이 좀 좁더라고. 어쩔 수 없어.”

“그럼 저 비바람…… 멈출 수 있어? 신의 뜻을 한번 어겨 보자고”

에르안은 눈을 휘어 보이며 살살 구슬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남한테 신탁 말하라는 것보다 훨씬 더 신을 엿 먹이는 방법 아닐까? 응?”

“못해. 마법이 만능은 아냐. 저 비바람을 걷어 내고 사시사철 맑게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이라니, 양심이 있나?”

“잠시만 멈추면 돼. 5분 정도, 그것도 못해? 그 정도로 신이 최 고의 마법사보다 강해?”

“……젠장, 3분 정도는 가능해.”

칸시아는 몸을 꿈틀대며 중얼거렸다.

“그럼 내 허리 고쳐 주는 거야. 알겠어? 제기랄, 귀찮게……”

“당연하지. 리체는 나와 달라서 무조건 약속은 지켜.”

나는 영문을 몰라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칸시아가 눈을 감 고 이상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에르안이 나를 끌고 창문으로 다가갔다.

거짓말처럼 빗줄기가 약해지고 파도가 가라앉더니, 구름마저 걷 혀서 노을이 지고 있는 바다가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와…… 진짜 사기다. 칸시아 능력 진짜 무엇……’

그리고 맑아진 시야 저 너머로 라베리 섬이 작게 보였다.

내 절반의 피가 유래한 곳이었고 엄마의 고향이었다.

이로서 정말로 내 뿌리를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멍하니 섬을 바라보고 있자니, 칸시아의 마력이 다했는지 다시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며 하늘이 흐려졌다.

“에르안…… 이걸 보여 주려고……”

“난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지 해 주고 싶어.”

에르안은 내 목 뒤에 입을 맞추 고 속삭였다.

라베리 섬을 보고 싶었다는 내 중얼거림 한마디를 잊지 않고 어떻게든 이루어 주다니. 이 남자 는 어찜 이렇게 한결같을까.

“정말 뭐든지 어떻게든, 앞으로도 계속.”

에르안이 다정하게 내 어깨를 감쌌다.

“그러니까……”

그때 칸시아가 퉁명스럽게 끼어 들었다.

“젠장,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사람이 챙긴다더니 내 재주로 둘 이 뭐 하는 거야? 설마 평생 독 신으로 산 내 앞에서 아름다운

사랑의 확인 이딴 거 하고 있는 상황은 아니겠지.”

그래서 나 역시 대꾸해 주었다.

“치료는 제가 하고 마법은 칸시아가 부리는데 생색은 에르안만 내는 상황인 거죠. 그래도 그 요 망함이 매력 아니겠어요?”

“이제 내 허리나 고쳐! 최강 마법사면 뭐 해, 아픈 데에는 장사 없는데!”

“알았어요.”

나는 칸시아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저희도 올라오기 전에 하던 거 있거든요. 마저 해야 되니까 얼 른 고쳐 드릴게요.”

그 말에 에르안의 얼굴이 환하 게 빛났다.

우리가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걸 보고, 칸시아가 밑도 끝도 없 이 중얼거렸다.

“앞으로 행복할 거라고 하더니 만, 결국 진짜인가 보군. 망할 신 같으니라고.”

나를 향해 돌아 눕는 칸시아의 눈에 왠지 심술이 아니라 안도가

묻어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정말 로 최선을 다해 그녀의 허리를 고쳐 주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복도가 감 감한 낡은 저택에서 머무는 것이 다였지만 어쩐지 정말 기분 좋은 나들이었다.

에르안과 함께라면 앞으로의 나들이가 다 이럴 것만 같았다.

-FIN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