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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51화 (151/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51 화

“항구부터 가고 싶어요.”

이시더 남작령에 도착한 뒤 여 관에 짐을 풀고, 나는 곧장 다시 마차에 올라타 마부에게 행선지 를 말했다.

엄마의 고향인 라베리 섬에 가 려면 무조건 들러야 하는 이시더 남작령의 항구.

‘아니, 이제 더 이상 이시더 남

작령도 아니지만.’

“날씨가 좋지 않은데 괜찮으시 겠습니까? 알아보니 항구는 10월 부터 닫혔다는군요.”

“네, 잠시 보기만 할게요.”

“허 참…… 아직 겨울의 초입인 데 바닷가로 갈수록 날씨가 완전 히 한겨울이군요. 그렇게까지 북 쪽도 아닌데.”

마부의 중얼거림에 대답해 준 사람은 길을 가던 영지민 중 하 나였다.

“시브리해를 끼고 있어서 그렇

“시브리해? 라베리 섬을 둘러싼 바다 말씀이신가요?”

내가 흥미가 돋는다는 둣이 묻 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베리 섬의 아름다옴을 시기 한 신이 1년의 반을 차가운 바닷 바람 속에 싸여 있도록 했답니다. 라베리 섬사람들이 대륙에 그 아름다움을 쉽사리 자랑하지 못하게 말이에요.”

“아주 못되어 먹은 신이네요.”

“뭐, 예전에 알아보기는 했지만 말이에요. 어쨌든 감사해요.”

굳이 항구에 가겠다는 건, 라베 리 섬을 멀리서나마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영지를 물려받았던 엄마의 남동생도 후사 없이 10년 전에 요절했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은 엄마의 삼촌이 영주로 있었고, 그래서 라베리 섬에는 내 직계 식구들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를 찾기 위해 떠돌기 전까지 는 아빠가 정말 엄마의 가족들에 게 잘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고 할지라도 엄마의 고향 을 한 번은 가고 싶었다.

혹시 몰라 방문해도 괜찮겠냐는 서신을 보내자, 겨울철에는 풍랑 때문에 오기가 힘들 테니 나중에 꼭 오라는 답신이 왔다.

영주님 역시 시오니의 귀여웠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으며, 그래서 이 모든 전말에 정말 분 노했고, 이제는 나를 정말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라베리 섬은 대륙과도 다른 식 생을 가져 몹시 아름다우니 반드 시 와서 즐기라는 추신까지.

하지만 마부의 말은 현명했다.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비바람이 강하게 부는 것이 난리도 아니었다.

시야가 흐릿했지만 어떻게든 라 베리 섬의 흔적이라도 보겠다고 우산을 쓴 채 나선 나는 오히려 졸딱 젖어 버리고 말았다.

“……내년 봄에 갈 수 있다고해도, 그래도 멀리서나마 보고 싶었는데.”

“그래?”

에르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희 뿌연 하늘을 보았다.

내가 원하는 건 다 들어주고 싶 어 하는 에르안이었지만 비바람 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어이구, 비바람이 점차 거세지 는데요. 이런!”

마부의 모자가 날아가고 말들이 푸릉거리며 재채기를 했다.

“아…… 제가 괜히 항구에 가자고 해서.”

“무슨 소리야. 너는 잘못 없어. 속 좁은 신 때문이지.”

에르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뒤 왼쪽으로 난 길로 손가락질을 해 보였다.

“저쪽으로 가면 가까이에 이시 더 남작저가 있다. 출발해.”

외숙부의 영지라 어릴 때 한 번 온 적이 있다며 에르안이 이시더 남작령 자체가 초행인 마부에게 갈 길을 알려 주었다.

“이시더 남작저? 왜요?”

원래 잠시 들렀다가 다시 수도 로 빠르게 돌아갈 생각이어서 이시더 남작저에 갈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내가 의아한 듯 묻자 에르안이 내 머리카락의 물을 꼭 짜 주며 말했다.

“이렇게 쫄딱 젖어 놓고 어떻게 오랜 시간 또 마차를 타겠어? 게 다가 마부와 말들도 좀 쉬어야 할 것 같고.”

그 말은 사실이어서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비어 있겠죠?”

“아마도? 관리 상태는 엉망일 테지만 일단 숨 좀 고르고 갈 수 는 있을걸.”

에르안의 말처럼, 얼마 가지 않 아 이시더 남작저가 보였다.

평범한 귀족 저택이었으나 정원 에 잔디가 우거진 것을 보아 오 랫동안 사람 손이 닿지 않은 둣 했다.

다행히 마구간은 정돈이 잘 되어 있는 편이어서 마부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에르안과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가니, 깨진 유리병과 액자 둥이 나뒹굴었고 그나마 돈 될 만 한 장식품들은 하나도 눈에 보이 지 않았다.

복도가 감감해서 등불을 하나 켠 채로 에르안과 단둘이 터벅터벅 걷는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엉망이 되어 무너져 가고 있는 남작저가 이시더 남작의 말로를 상징하는 것 같아서였다.

에르안은 능숙하게 지저분하기 그지없는 저택 안에서 비교적 깔 끔하고 고풍스러운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어머니가 결혼하기 전에 쓰던 방이래.”

역시 하인들이 집을 나가며 이것저것 다 가져가서 그런지 엉망진창이 었다.

하지만 갖고 나가기에 쉽지 않 은 커다란 침대와 몇 겹의 침대 시트는 그대로였다.

옷장을 열어보니 드레스는 한 벌도 없었지만 값이 나가지 않는 낡은 수수한 실내복 몇 벌과 목 욕 가운은 기적적으로 남아 있었다.

“저쪽이 욕실이니 먼저 씻어. 따뜻한 물이 아직까지 잘 나올지는 모르겠……. 음?”

갑자기 위층에서 쿵쿵 소리가 들려와 에르안이 순간 말을 멈췄다.

나는 살짝 놀라서 미간을 찌푸 렸다.

“혹시…… 누가 있는 건 아니겠지요?”

“설마. 이 구석진 바닷가의 낡 은 저택에 누가 있겠어. 쥐겠지.”

“홈……”

일단 온통 비에 젖어 슬슬 체온 이 떨어지고 있었기에, 나는 살짝 찜찜한 마음을 뒤로 하고 에 르안이 알려 준 욕실로 들어갔다.

에르안이 걱정한 것과는 달리 따뜻한 물은 괄괄 잘 쏟아졌다.

상수도는 마법사들이 관리하는 데, 아마 애초에 오랜 기간 계약을 해 놓은 듯했다.

따뜻한 물에 천천히 몸을 씻고, 어머님이 아가씨 적 입었을 것 같은 실내복을 걸치고 나가니 이 미 다른 욕실에서 씻고 나온 에르안이 방까지 깔끔하게 청소하 고 있었다.

그 역시 못 보던 실내복을 하나 걸치고 있었는데, 다소 그에게 작아 보이는 것이 아마 다른 방 에서 가져온 듯했다.

“어? 에르안, 청소할 줄도 알아 요? 다 아랫사람이 하지 않나.”

“그래서 하잖아.”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리체 아랫사람인 내가.”

내가 뭐라고 대답하려는데, 또 위층에서 정체불명의 쿵쿵 소리 가 들려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나와 에르안은 잠시 서로를 바 라보다가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제야 미심쩍은 둣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감기 걸리면 어떻게 해, 리체. 한겨울에 머리카락도 안 말리고 나왔네.”

나는 대충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닦은 뒤 그대로 나온 상태였다.

“한겨울은 아닌데.”

“날씨는 한겨울이잖아.”

“보육원 출신이라 그냥 대충 두 는 거에 익숙해서 그래요. 말리 는 것도 귀찮잖아요.”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네가 아 프면 내가 너무 겁나서 안 돼.”

에르안이 시트를 한 겹 벗겨 내 어 깔끔해진 침대에 앉아 있는 데, 그가 다가와 부드럽게 내 머 리카락을 쓸었다.

“귀찮으면 내가 해 줄게.”

귀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저택에 여성용 향유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원래 입고 있던 옷 주머니 속에서 작은 병에 담긴 향유를 꺼내 내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기 시작했다.

“이런 것도 가지고 다녀요?”

“네가 내 체향이 좋다고 했던 날 썼던 향수를 늘 이렇게 향유 형태로 가지고 다녀. 언제라도 바를 수 있게 말이야.”

그의 손길이 너무 부드러워서 이상하게 마음이 노곤해지는 기 분이었다.

머리카락에 그의 체향이 가득 감기고, 귀나 목 뒤에 그의 손가 락이 노골적으로 지분거렸다.

“다른 귀찮은 거 뭐 없어?”

“네?”

“내가 다 해 줄게. 네가 귀찮은 모든 일들.”

그가 내 귓가에 대고 말해서 숨 결이 간지러웠다.

“혹시 씻는 건 안 귀찮아?”

“뭐라고요?”

내가 펄쩍 뛰며 뒤를 돌아보는 데, 그의 엄지손가락이 내 목을 타고 내려가 음푹한 쇄골을 살살 눌렀다.

어깨를 움찔하는 것과 동시에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막 이베리아에서 돌아온 이후, 작정하고 나를 꼬드기던 눈웃음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다소 작아서 단추 몇 개를 풀어 헤친 셔츠 안으로 그의 단단한 몸이 보였다.

“왜, 이상한 생각 했어?”

“……그런 의도가 다분한 말씀 이셨어요. 하지만 지나치게 이상 한 생각은 안 했어요.”

“이왕 하는 거 진하게 해. 억울 하지라도 않게.”

그가 미끄러운 손바닥으로 내 귓가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너 아주 오래오래 씻을 동안 기다리면서……”

목소리가 점점 더 낮아지고 느 려졌다.

열이 오른 숨이 목덜미에 오락 가락했다.

“난 안 억울하게, 정말 많이 상상했거든.”

“……네?”

“여기 우리 둘뿐이잖아. 안 그 래?”

“진짜!

얼마 전까지 열심히 청소를 하던 모습이 무색하게 그의 목소리 가 지나치게 농염해졌다.

나는 무심코 손을 들어 짜증을 냈다.

“가슴 때리면 단단해서 네 손이 아파. 여기 때려.”

그런데 에르안이 재빨리 뺨을 가져다 대서 나는 살짝이라도 때 리지 못하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절대로 아프면 안 돼, 리체……. 그런 경험은 한 번이면 된단 말이야.”

“그런 경험?”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경험 말이야.”

다시 그가 부드럽게 나를 꼭 끌 어안았다.

“사실 네가 비 맞을 때 또 감기 라도 걸릴까 봐 얼마나 겁이 나 던지.”

“최근까지 쓰러져 계신 건 에르안인데.”

지금은 아주 건강해서 비바람을 맞아도 멀쩡하지만, 좀 뛰었다는 이유만으로 며칠간 그림처럼 누워 있었던 사람은 에르안이었다.

그때 속이 탔던 걸 생각하면 나 역시 에르안이 아픈 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난 후회 안 해. 네 가족을 지 켰고, 어쨌든 데이트 허락도 받 고 말이야. 결혼을 허락받으려면 몇 번 더 굴러야겠지만.”

“다시는 구른다는 소리 하지 말 아요. 진짜 끔찍하니까.”

“음…… 내가 더 끔찍했을걸.”

에르안은 속눈썹을 내리깔고 중 얼거렸다.

“네가 나 대신 뱀에 물리고 누워 있던 그때.”

그건 너무 오래전 얘기였다.

“그때 알았어. 네가 이미 내 세상이 된 걸 말이야……”

“아주아주 옛날 일 아니에요?”

“내가 지병이 있다는 게 그때만 큼 싫었던 적이 없었어……. 네 가 깨어날 때까지 제정신이 아니 었다고.”

정신이 들었을 때 내게 매달리 다시피 했던 꼬마 에르안이 떠올라서 나는 살짝 입술을 떨고 말았다.

새삼 우리가 지나온 시간이 서로로 가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천천히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다가갔을 때였다.

광!

천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다시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쥐 같은 게 낼 수 있는 소 리가 아니었다.

“……이 윗방은 웨데릭의 방이야.”

그가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난 네가 내 눈앞에 있으면 위 층에서 별 이상한 잡것들이 텝댄스를 추더라도 상관없지만…… 네가 집중을 못하면 얘기가 달라 지지.”

우리의 시간을 방해했다는 이유 만으로, 다정하기 그지없었던 그 의 눈매에 살기가 번득이기 시작 했다.

“갔다 올게. 기다려. 저게 짐승이든 사람이든 귀신이든 더 이상 찍 소리도 못하게 해 놓고 올 테 니까.”

“가, 같이 가요!”

나는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혼자 있으면 무서워요.”

밖에는 비바람이 불고 있고, 불이 다 꺼진 복도만이 펼쳐진 이 텅 빈 저택에서 나 혼자 에르안을 기다릴 생각을 하니 저절로 무서워졌다.

“그럼 그렇게 해.”

에르안은 세상 다정하게 웃어 보이고는 내 손을 잡고 이를 갈며 위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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