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50화
어느 날 갑자기 중앙은행에 넘어가 버린 이시더 남작령에는 잔잔한 혼란이 일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영지는 이제 주인이 없는 거야?”
“남작님이 영지 팔아 버리고 세 르이어스 공작성에 구금되셨다는데, 뭘.”
“그럼 이사벨 님이 오시나? 이사벨 님이 세르이어스 공작님께 반해서 결혼만 성공하지 않았더라도 이사벨 님이 작위를 물려받 았을 수도 있잖아.”
“그러면 훨씬 더 살기 좋았겠 지. 하지만 그런 말은 없는데.”
온갖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지만 정확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 도 없었다.
영지민들은 불안해하며 농사를 짓고 끼니를 해결해 가며 평범한 하루하루를 영위해 갔다.
은근슬쩍 세금 철도 넘어가자 영지의 주인이 없는 게 뭐 그다 지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도 잠시 한 건 사실이었다.
이시더 남작은 그다지 유능한 영주가 아니었기 때문에 딱히 그 공석이 아쉽지 않았다.
하지만 송사나 이웃 영지와의 분쟁 둥의 일을 해결해 줄 사람 이 없어 장기적으로는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영지 괜찮은 것 맞아? 이 시더 남작님도 반역 무리 중 하 나였다며.”
“무슨 배상금 이런 거 내야 하 는 것 아냐?”
“영주 없다고 영지민들보고 내 라고 하면 어떡해?”
온갖 불안했던 소문이 잠재워진 것은 반란군이 모두 진압되고 탈 탈 털려 체포된 늦가을이었다.
은행에서 다시 이시더 남작령을 사들인 새로운 주인이 반란군 색출에 도움이 되었기에 전혀 반역의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공문이 내려온 것이다.
“아, 세르이어스 공작령이랑 비숫한 처분인가 보다.”
영지민들은 한시름 놓았다는 둣 이 유쾌하게 수다를 떨었다.
“거기도 반란군 색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며 프릴리트 영지를 추가로 받았다잖아. 하긴, 세르이어스 공작이 다름 아닌 제 외숙부를 고발했으니 보상을 받을 만하지. 까딱하다가는 연좌제에 걸려 피곤했을 텐데 단숨에 공신이 되다니.”
“페렐르만 자작령도 치피아 영지를 받았다며? 거긴 왜지?”
“거기 영애가 관람탑 테러 사건에서 황태자 전하를 구했대.”
“아, 결국 찾았다는 그 딸이 복 덩이구먼.”
“그럼 우리 영지도 어딘가 넘어 가는 게 절차상 맞는데, 중앙은 행에 넘어가서 처분이 애매해진 모양이야. 대체 누가 사들였을 까?”
차라리 세르이어스 공작령에 넘어가는 것이 살기는 더 좋지 않았겠느냐며 사람들이 떠드는 동 안, 자연스럽게 홀러 들어온 노파가 한 명 있었다.
그녀는 어수선한 사람들 사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다가, 어스름이 지는 저녁 즈음에 몰래 이시더 남작저로 기어 들어갔다.
아무도 지키지 않는 남작저는 황량하고 지저분했지만, 노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둣 저택을 휘젓고 다니다가 어느 방의 먼지 가 쌓인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최고다, 최고야. 날 추워져서 어디로 가나 고민했는데 여기서 좀 개겨야겠다.”
칸시아는 품속에서 거친 빵 하 나를 꺼내 우걱우걱 먹으며 콧노 래를 불렀다.
“귀족 저택이 버려지는 건 흔치 않은 일인데 역시 난 똑똑해. 하인들이 죄 가져가서 아무것도 없 으면 뭐 어때. 노숙에 비하면 황궁이구먼.”
그녀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이시더 남작이 구금되고 저택의 하인들이 모두 도망갔다는 이야 기를 어디서 주워 들었다.
그 이후에도 한참을 별생각 없이 살다가, 날이 추워져 노숙이 힘들어지고 갈 곳이 없어지자 불현듯 생각나서 몰래 들어온 것이다.
누가 쫓아낼 때까지 개길 작정 으로 온 그녀는 한때 웨데릭의 것이었던 침대에서 늘어지게 잠이 들었다.
코까지 골며 숙면을 취하던 그 녀의 잠을 깨운 것은 방울 소리였다.
“칸시아.”
칸시아는 눈을 꾹 감은 채 더 크게 코를 골았다.
“칸시아, 일어난 것 다 알아요.”
“……재수 없긴.”
부드러운 목소리가 타이르듯 방 에 울리자, 칸시아는 그제야 눈 을 번쩍 뜨고 일어나 앉았다.
티실리아 대신녀가 공중에 떠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왔어요. 아무리 신의 뜻이라고 해도 그런 신탁을 내린 후에 마음이 안 좋 았는데.”
“리체 에스텔 얘기하는 거야?”
“이제 페렐르만이죠. 신의 뜻대로.”
“지랄 났네. 병 주고 약 주는 꼬락서니가 진짜 꼴불견이야. 내가 리체라면 평생 신이라는 말만 들어도 침을 뱉고 살 거다.”
“굳이 리체가 안 되어도, 칸시아는 원래 신이라는 말에 기겁하잖아요.”
티실리아는 한때 자신과 함께 막강한 대신녀 후보였던 동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살기에는 신력이 너무나 뛰어나 신전에서 납치하둣 데려온 집시가 바로 칸 시아였다.
그러나 그녀가 신전에서 수련을 받던 도중 “이딴 게 신이라면 엿 이나 먹어라!”라며 고래고래 외 친 뒤 뛰쳐나가 버렸던 충격적인 사건이 여전히 기억 속에 생생했다.
그 당시의 대신녀는 그 사건 이 후, 아무리 신력이 뛰어나도 앞 으로는 신전에 집시를 절대로 받 지 않겠다며 공언했다.
“여하튼 칸시아, 인정하세요. 이번에는 그대가 딱 신의 뜻대로 개입했다는 걸. 그리고 신전으로 돌아와요. 그 넘치는 신력을 마법으로 낭비하기에는 너무 아까 우니까.”
칸시아의 신력이 얼마나 대단한 지, 정반대의 힘인 마법으로 바꾸는 것이 상당히 비효율적인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법을 이 세계에서 가장 잘했다.
티실리아는 만일 칸시아가 그때 신전을 뛰쳐나가지만 않았더라면 당연히 대신녀의 자리는 칸시아에게 돌아갔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대신녀가 되어 신에게 가장 가까울 수 있었던 사람이 저렇게 본성대로 막 살고 있다니…….
“행, 그럼 내가 이렇게 사는 것도 신의 뜻이야. 너희 논리가 그거잖아. 다 신의 뜻.”
칸시아는 귀를 후비며 귀찮다는 둣이 다시 벌러덩 누웠다.
티실리아는 속으로 ‘역시 칸시아가 대신녀가 되는 꼴을 도저히 못 보겠다고 판단한 신의 큰 그림이었나.’ 하고 더 신앙심을 키울 뿐이었다.
“그래서 그 신이 또 뭐래? 또 신탁 같은 거 내려서 리체를 괴롭힐 거래?”
“어머, 신경은 쓰이시나 보네요.”
“뭐, 일단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멀쩡했으면 좋겠어. 아픈 건 싫은데 걔만큼 잘 고치는 애는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제가 살짝 미래 를 본 바…… 이제 행복할 일들 밖에 없으니까요. 신께서도 당분간은 신탁올 내릴 생각이 없으시 고.”
“그래, 좀 닥치고 있으라고 해. 인간들은 알아서 잘 산다고.”
칸시아가 하품을 하며 몸을 뒤 척였다.
“특히 그 애, 리체는 확실히 알아서 잘 살걸.”
“그건 그런 것 같군요. 그럼 칸시아…… 리체 양을 만나면 다시 한번 제가 미안했다고 전해 주세요”
“당분간 만날 일 없어. 난 이제 금지된 마법도 안 하고 아주 건강해.”
“글쎄요. 그건 모르는 일이죠.”
“내가 그딴 부탁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할 말 있으 면 직접 해. 그런 간질간질한 소 리 전해 주는 거 취향 아냐. 나 진짜 안전할 거야. 그렇게 알고 있어.”
티실리아는 몸을 아예 돌려 버린 칸시아의 지저분한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방울 소리를 딸랑이며 사라져 버렸다.
***
“160만 골드라니, 10만 골드 아 까워 죽겠어……”
“은행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정 아까우면 내가 20만 골드 줄까?”
“나중에 나한테 아빠랑 같이 경제 교육 다시 받아요.”
나는 툴툴거리며 에르안과 함께 이시더 남작령으로 향하고 있었다.
중앙은행은 이시더 남작령을 담보로 150만 골드의 어음을 발행 해 주었다.
그런데 경매 매물로 나왔을 때에는 최저 금액이 160 만 골드였다.
내가 한숨을 쉬며 160만 골드를 어쩔 수 없이 외치자, 아무도 나 와 경쟁 입찰을 붙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참았으면 가격이 더 내려갔을 것이라는 생각에 두고두고 후회가 되었다.
경매가 처음이었고 이시더 남작령을 너무 갖고 싶은 마음에 결과적으로는 10만 골드를 손해 본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속상해했지만 아빠도 에르안도 그 정도 돈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전혀 공감해 주지 않았다.
“괜히 에르안과 같이 가서……”
우리는 마차 안에 단둘이 있는 상태였고, 에르안은 옆에 앉아서 내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경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아깝다는 생각에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 경매장에 함께 간 에르안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갖고 싶어? 그럼 그냥 귀찮은 데 바로 300만 골드 불러 버려. 내가 사 줄게.” 같은 쓸데없는 소리만 속삭인 것밖에 없었다.
이곳은 어머님의 친정이라 내가 멋대로 처분하는 데에 처음엔 마음에 걸렸지만, 어머님은 별달리 미련이 없어 보였다.
이시더 남작령을 어떻게든 내 손에 넣은 것은 단순히 내 소유의 영지를 늘리려는 의도가 아니 었기 때문에 어쨌든 다행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디엘과 함께 가는 건데.”
“리체, 그렇게 애인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건드리면 어떡 해.”
에르안이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내 품에 파고들었지만, 워낙에 덩치가 큰 사람인지라 결 국 내 몸이 뒤로 넘어가는 꼴만 되고 말았다.
이제 에르안은 완전히 건강해진 데다가 공작성을 노리는 사람들도 없어졌으니 진짜 나와 아빠 같은 고급 인력이 주치의로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아빠와 나의 사표를 수리했고, 내가 직접 면접을 봐서 나이가 지긋한 새로운 주치의를 맞았다.
거기까지는 괜찮은데, 그 이후 에르안과 내가 보내는 시간은 압도적으로 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함께 있을 때 더 절실해 질 수밖에 없었다.
‘아빠, 죄송해요.’
에르안과 함께 이시더 남작령에 간다고 했을 때, 아빠는 연구진 면접 때문에 바빠서 도저히 쫓아 올 수가 없었다.
신분을 막론하고 실력 순으로만 뽑겠다는 공문을 내려보내자마자 각 지역에서 지원자가 넘쳐 났기 때문이다.
아빠는 맨 처음 공작성에서 날 봤을 때처럼 하나하나 면접 질문을 하다가 그 난이도에 맞는 사람들을 뽑는 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난이도 조정, 그에 따른 재면접, 기출 문제 유출에 따른 면접 문제 변형……. 아빠의 일은 끊임 없이 쏟아졌다.
물론 불평불만이 가득한데도 얼 굴에 미소가 만연한 걸 봐서 아 빠는 이 일을 즐기고 있는 게 틀림 없었다.
나 역시 면접을 본 뒤 통과한 상태였지만, 아직 다른 면접자들의 일정이 끝나지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시더 남작령을 방문하기에 딱 좋은, 여유 있는 시간이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는 이상 더 는 관리인 한 명 두지 않은 채로 이시더 남작령을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대충 하인을 시켜 소식을 전하 긴 했으나 한 번쯤은 직접 가는 게 맞았다.
아빠가 에르안과 동행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펄펄 날뛰었지만 나를 과보호하기 시작한 아빠의 눈에 에르안보다 더 실력이 뛰어난 호위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결국 내가 “아빠, 에르안하고 데이트 한 번 허락해 준다고 말했잖아요! 내가 똑똑히 들었어 요!” 라고 말한 뒤에야 허락을 받 을 수 있었다.
사실 그 이후 단둘이 있는 시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경매장 가는 건 데이트가 아니잖아요. 업무예요, 업무.” 등의 이유를 들 어 이리저리 빠져나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혼잣말을 하곤 했다.
‘딸자식 키워 봤자 소용 없……. 아, 키우지는 않았구나.’
출발하기 직전까지도 아빠는 에르안하고 반경 lm의 거리를 유 지하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지금은 거리라는 게 없는 수준이었다.
“아, 잠깐만……”
“응, 잠깐만.”
어느새 집요하게 달라붙기 시작 한 에르안을 살짝 밀어내며 말했지만, 그는 전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직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목덜미에 연이어 이어지는 입맞 춤이 간지러워 내가 몸을 뒤틀었다.
“예뻐서 그래.”
성의 없는 대답과는 별개로 그 의 입술이 더 대담하고 세심하게 달라붙었다.
순식간에 시야가 창밖에서 마차의 천장으로 바뀌고, 결국은 캄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