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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49화 (149/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49화

“리체, 그거 아니?”

아빠는 예전에 있었던 황실 의료 연구진들이 남겨 둔 연구 자 료나 희귀한 의학서 둥을 가져와 종종 나와 함께 토론하곤 했다.

그리고 잠시 쉴 때마다 엄마와의 연애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두 분 사랑의 결실인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너희 엄마가 내게 먼저 고백했단다. 의학서에 빠져 여자도 잘 모르고 성질마저 더러운 남자지만 자꾸 생각이 난다고.”

“……그게 고백인가요? 그래서 아빠는 뭐라고 했어요?”

“그런 말을 해도 나는 당신이 좋다고 했지.”

“엄마가 먼저 고백한 거 맞아요?”

“그마저도 조금 더 있다가는 좋다는 말까지 뺏길 것 같아서 내가 황급하게 한 거야. 그래도 우리는 참 로맨틱하지 않니? 이사벨이 케일런을 처음 보았을 때 말이다, 내가 옆에 있었는데.......”

아빠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케일런한테 대뜸 그러더구나. 올해 안에 좋은 여자 만날 운명인 것 같다고. 그게 자기 자신을 뜻하는 거였지. 생각해 보니 선전 포고였어. 올해 안에 널 쟁취 하겠다, 뭐 이런. 만남부터 아름다웠던 우리와는 비교가 안 돼.”

별달리 차이도 없는 것 같은데, 아빠는 선을 분명히 그었다.

그러고 나서는 눈을 느릿하게 감으며 중얼거렸다.

“네 엄마의 시체를 직접 부검할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그때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져 내린다는 뜻을 알 것 같더구나. 이제 정말로 시오니가 없는 삶을 받아 들여야 하는데, 그게 너무 무서워서 내일이 오는 게 싫었지.”

나는 눈물을 참으려고 애써야 했다.

“하지만 분명히 출산은 했고, 하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 되고…… 딸이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순간 시오니를 따라가지 않을 수있더구나.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로만 같은 놈이 하는 거짓말이 간절했겠지. 물론 이사벨의 동생이라 당연히 믿었지만.”

아빠는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 며 말했다.

“너를 너무 많이 보고 싶었고, 해 주고 싶은 말이 참 많았단다.”

대체로 모두에게 성질을 부리는 얼굴이었지만, 내게 옛날 얘기를 해 줄 때만큼은 아빠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다정해졌다.

“너의 존재만으로 나는 미치지 않고 살 수 있었어. 어딘가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너는 나를 살렸다. 정말 고마워.”

나는 아빠의 모든 말들을 가슴 속에 깊이 새겼다.

수없이 상상 해 온 그 어떤 가족보다도 최고였다.

***

지켈은 기사단의 현황을 에르안 에게 보고하는 중이었다.

에르안은 병력의 상태를 꼼꼼하 게 확인한 후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병력은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지. 까딱하면 독립 공국 만들 생각해야 하니까.”

그 ‘까딱’이 리체에 달려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지켈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수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황태자가 유능한데 무능하기도 하다는 말이 돌아서 영지를 지킬 힘이 있으면 손해는 아닌 것 같았다.

에르안은 수도에 있는 페렐르만 자작저에서 맨 위층에 있는 구석진 방 하나를 받은 상태였다.

미운 정이라도 쌓으라며 거기 최대한 붙어 있으라는 이사벨의 말마따나, 그는 아르가의 구박 아닌 구박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

어쨌든 그가 이렇게 또 멀쩡히 잘 살아 낸 데에는 아르가의 피도 한몫했으니까.

이제 초상화 핑계가 끝났으니 또 어떤 핑계를 대어 머물고 있 으려나…….

일단 수도의 자작저에는 호위 기사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없어서, 에르안은 세르이어스 공작령 에서 기사 몇 명을 추려서 머물 게 했다.

전혀 모르는 용병을 고용하는 것보다는 리체와 서로 잘 아는 사이인 세르이어스 기사단이 낫 지 않느냐는 의견에 결국 아르가 마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 던 것이다.

‘이렇게 차근차근…… 스며드는 전략이군.’

지켈은 에르안의 길쭉한 눈매를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수고했다. 아.”

그에게 고개를 한 번 숙이고 나가려는 지캘과 한 무리의 기사단을 에르안이 불러 세웠다.

“이거 하나씩 먹고 가려면 먹고 가든가.”

그가 내민 것은 쿠키 상자였다.

“아까 하녀가 전달해 주던데.”

지켈은 에르안이 드디어 소소한 먹을 것까지 나눠줄 정도로 인성 이 좋아졌나 싶어 속으로 리체에 게 감사했다.

타인에게 엄청나게 무관심하고, 이렇게 배려심이 넘치는 대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예, 감사합니다.”

그는 쿠키 상자를 들고 뒤에 있던 기사 몇 명과 하나씩 나눠 먹 었다.

모양은 그럴 둣 했으나 한 입 베어 먹는 순간 너무 달아서 굳이 더 먹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 았다.

설마 맛이 없어서 자신들에게 나누어주었나 싶은 생각이 들어 다시 그의 인성에 대해 고민해 볼 때 즈음, 에르안이 고개를 모 로 꼬고 말했다.

“어때? 나는 단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먹어 보지는 않았는데.”

그때였다.

조심스럽게 노크 소리가 들리고, 리체가 들어왔다.

리체를 보는 에르안의 얼굴에 순식간에 환희가 가득 들어찼다.

“리체!”

“아빠 출근하셨고, 고모는 산책 하러 가셨고, 할아버지는 낮잠!”

한집 안에서 이게 무슨 짓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에르안을 계속 머물게 하는 걸 보면 결국 둘의 사이를 허락하긴 할 텐데…….

그래도 알콩달콩하며 비밀 연애 아닌 비밀 연애를 이어 가고 있 는 두 사람을 보면 나름 마음이 따뜻해져서, 지켈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아, 쿠키는 받아 보셨어요?”

“어?”

“하녀 편에 몰래 보냈는데.”

리체가 수줍게 볼을 붉히며 말 했다.

“직접 만들었어요. 맨날 이런 건 받아서 먹기만 했으니까.”

리체의 말에 지켈을 비롯한 기

사들의 표정이 단박에 굳었다. 에르안이 차갑게 중얼거렸다.

“……뱉어, 당장.”

“그런데!”

리체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이렇게 나누어 드시다니, 정말 보기 좋네요. 맛은 어때요? 내 입맛에는 괜찮았는데.”

“……마저 먹어도 돼.”

에르안이 이를 악물며 잇새로 작게 내뱉었다.

“맛있습니다. 공작님께 자주 만들어 주세요. 최대한 많이요. 이 정도 달기가 아주 적당한 것 같 습니다.”

지켈은 대표로 즉시 대답하고, 살짝 복수하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지켈과 기사들은 재빠르게 사라졌다.

“사실 또 줄 것이 있어서 왔어요.”

리체는 발랄하게 에르안에게 다 가가 손을 내밀었다.

에르안이 놀란 표정으로 받아 든 것은 리체의 작은 초상화였다.

“아빠가 잔뜩 주문했거든요. 그 중 하나를 빼돌린 거예요. 아빠를 너무 사랑하지만, 엄마 아빠의 연애사를 들을 때마다 제가 다짐하는 게 있어요.”

“뭔데?”

“연인과도 마음껏 사랑해야 한 다는 거요. 엄마 아빠도 젊을 때 진하게 사랑하셨던데요. 그러니 까 성년이 되자마자 결혼했겠지만”

“그 길을 따라가지 못해 아쉬워……. 그런데 이 그림 정말 예 쁘네.”

그는 홀린 둣이 손바닥 안에 들 어가는 작은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가 고른 화가의 작품이라서 그런지, 밝고 귀여운 분위 기가 가득한 리체의 얼굴이 생생 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늘 간직해야겠다.”

회중시계 안에 초상화를 소중히 집어넣는 에르안을 보며 리체가 깔깔거리고 웃었다.

“아빠도 회중시계 안에 넣던 데!”

“지금은 역효과일 것 같고, 시간이 지나면 조심스럽게 말해 봐. 유대감을 쌓게 말이야.”

에르안은 리체를 번쩍 들어 무 릎에 앉히고,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맨 위충이라 올라오긴 불편하 지만, 전망 하나는 끝내 주네요.”

리체는 그에게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도는 번잡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재밌는 것 같아요. 저 티타임 초대장도 엄청나게 받았어요.”

“그래?”

“재판 때 상당히 인상적이었다나.”

“혹시 뭣도 모르는 영식 놈들에 게서 온 건 없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에르안의 가늘어진 눈을 보며 리체가 눈을 깜빡였다.

“왜냐하면 남자한테 온 건 아빠 가 다 버렸거든요. 어차피 저도 영식들과 친분을 쌓을 생각은 없 어서 별달리 관여하지 않았어요.”

“그것도 나중에 조심스럽게 감사 인사를 표현해야겠군. 유대감 쌓일 건 넘쳤어.”

“그래도 티타임은 하나씩 가 볼 거예요. 나중에 의료 연구진에 출근하게 되면 바쁠 것 같으니 까.”

“거긴 휴일도 없나?”

“당연히 있겠죠. 하지만 휴일엔 에르안과 같이 보내야 하지 않겠 어요?”

“……그거 알아, 리체?”

에르안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넌 마음먹으니까 연애도 잘해. 사람 마음 너무 설레게 하고.”

“별거 아닌 말이었는데.”

“그럼 내가 쉬운 남자인가 봐.”

“공작님으로서는 쉽지 않았는 데, 남자로서는 쉬웠죠. 인정할게 요.”

“신기하네.”

에르안이 씩 웃었다.

“난 네가 주치의로서는 너무 쉬 웠어. 무조건 믿으면 되니까. 하 지만 여자로서는 너무 어려웠거든 ”

“균형이 맞는 걸 보니 천생연분 인가 보네요.”

“나 또 설레. 어떡해?”

리체가 깔깔 웃는 것을 보고, 에르안은 진심이라며 그녀의 손 을 자신의 심장에 가져다 대었다.

멍하니 보고만 있어도 이렇게 가슴이 뛴다고 말하면 더 쉬워시 려나.

그녀 인생에서 자신 만큼은 가 장 쉬운 것이 되어서 조금의 고 민조차 할 필요가 없었으면 좋겠 는데.

“뭘 어떡해요. 좋으면 됐지.”

“좋긴 좋아.”

24시간 중 20시간을 붙어 있겠 다는 소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 았지만 그래도 함께 있을 수 있 다는 사실이 마냥 좋았다.

무엇보다 좋은 건, 리체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인다는 것 이었다.

가족들과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 는 모습도, 나중에 본격적으로 의료진이 출범하기 전에 더 공부 해 놓겠다며 대륙 구석의 희귀한 의학책을 읽는 모습도 다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있을 때에 도 반짝이는 초록색 눈에 기쁨이 가득했다.

“리체.”

“네?”

“얼마나 행복해?”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리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왜요?”

“그냥.”

에르안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 은 채, 눈을 맞추며 말했다.

“네가 행복하면 안도가 돼.”

아직 남은 길은 많았다.

이미 어느 정도 열린 것 같지만 페렐르만 사람들 마음의 문도 아 직 더 열어야 했고, 그래서 마음놓고 하루 종일 붙어 있을 연애 도 해야 했고, 얼른 결혼도 해야 했다.

그래도 그의 곁에 있는 그녀가 행복하기만 하다면 그 모든 건 급하지 않았다.

“음, 얼마나 행복하냐면……

리체는 오래 생각하지도 않고 상냥하게 대답했다.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과거로 되돌려 준다고 해도 똑같이 살만큼 행복해요.”

“왜? 조금 더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조금 더 잘 살겠다고 조금이라 도 미래를 바꿨다가 혹시라도 잘 못되어 지금의 행복이 달아날까 봐서요. 더 행복한 건 상상하기 힘들 만큼, 그만큼 소중하고 꿈 결 같은 날들이에요. 아, 아니다.”

“응?”

에르안의 가슴에 파고들어 볼을 부비며, 리체는 즐겁게 속삭였다.

“아예 그냥 돌아가지 않는 걸 선택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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