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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48화 (148/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48화

에필로그

“안 돼.”

에르안은 캔버스를 보더니 고개 를 저었다.

“이것밖에 못 그려? 리체는 이것보다 훨씬 귀여워. 다음.”

디엘이 즉시 대답했다.

“다음은 레이빌 오스트람이라는 화가로, 메로폰 공작가와 전속 계약을 맺고 있으며 이스트 국왕의 초상화로 유명합니다.”

“들여보내.”

나는 에르안이 툭, 하고 던져 버린 캔버스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벌써 열두 명째였다.

다 내가 가족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는 말을 한마디 해서였다.

할아버지의 위시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 가고 싶었기 때문에 그건 내 1순위였다.

어떻게든 좋은 화가를 섭외하겠다며 고모와 할아버지 앞에서 호언장담한 그는 가장 단순 무식한 방법을 선택했다.

거액을 주어 유명한 화가를 모두 초청해 일단 나를 그리게 한 다음, 자기 마음에 들 때까지 교 체하는 것이었다.

그 일올 하느라, 그는 깨어나서 지금까지 공작성에도 가지 않고 수도에서 화가 면접을 보는 중이었다.

물론 어머님은 자신이 공작령 일을 다 하고 있을 테니 무조건 최선을 다하라는 서신을 보내왔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지 않을까요?”

나는 열의에 불탄 그에게 조심 스럽게 물었다.

“제가 보기엔 다 잘 그리는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디테일에서 차이 가 엄청난데. 여기 봐. 네 속눈썹 은 이 각도보다 더 올라가야 하 고, 귓바퀴는 살짝 더 접혀야 해.”

“아…… 저도 난생처음 알게 된 사실인데요.”

“나는 딱 보면 알아. 믿고 맡 겨.”

에르안은 싱긋 웃으며 내 머리 카락을 쓸어 넘겼다.

“열심히 해서 페렐르만 자작가 에 어떻게든 잘 보여야 돼. 그래 야 다음 초상화를 그릴 때에는 나도 들어가지.”

“어머님이랑 에르안도 이참에……”

나는 이제 그를 ‘에르안’이라고 불렀다. 에르안은 내가 이름을 불러 줄 때마다 기쁜 기색을 숨 기지 못했다.

“아, 우리는 이미 세르이어스 초상화 건에 대해서는 합의를 봤어.”

“어떻게요?”

“너와 함께 그리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고.”

에르안과 어머님의 사이는 극도 로 좋아져서 요새는 분위기가 상 당히 부드러웠다.

문제는 둘의 화제가 언제나 똑 같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하면 페렐르만 가문의 비위를 맞추고 나를 꼬드겨서 하 루라도 빨리 결혼을 하게 하느 냐, 그 주제가 아니면 둘은 거의 긴 대화를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자기 죽기 전까지만 그리면 된다고, 부담 갖지 말래.”

“아, 그래요?”

“근데 내가 속 좀 썩여서 오래 살 것 같지는 않다고도 전해 달 래.”

결국 부담을 가지라는 얘기였다.

에르안은 예전에 들었던 자기 부모님의 연애사를 가끔 들려주 곤 했다.

어머님이 아버님을 쟁취한 이야 기를 들으면 내 미래는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변방의 남작 영애가 딱히 접점도 없었던 대귀족인 세르이어스 공작과 결혼하는 게 보통 연애사는 아니었다.

물론 그 연애사를 아빠도 다 아니까 그렇게 에르안을 경계했을 것이다.

“다음 초상화를 그릴 때에는 아 이도 있었으면 좋겠다.”

디엘이 다음 화가를 부르러 간 사이에, 에르안은 내 옆에 다가 와 눈을 접어 웃었다.

“딸 하나, 아들 하나. 네가 얘기 한 대로.”

“그걸 기억해요?”

“너처럼 천재는 아니지만,  네 얘기는 모두 기억해.”

그가 내 손을 잡고 속삭였다.

그때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떨어져! 떨어지라고! 떨어져!”

아빠의 고성에 우리는 그대로 눈치를 보며 손을 놓았다.

“내가 백 번 봐줘서 당분간 머 무는 건 허락했지만 붙어 있는 꼴은 못 봐!”

“아버님, 저희는 서로의 목숨을 구해 준 끈끈한 사이……”

“아버님이라고 부르지 마! 자작 님! 자작님이라고 불러! 공과 사 를 지키라고!”

아빠는 공과 사를 지키라면서 에르안에게 반말로 소리쳤다.

물론 공작인 에르안이 아빠를 자작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지 만, 우리가 문제 삼을 일은 아니 었다.

어머님의 말에 따르면, 어차피 아빠는 허락할 수밖에 없는데 최 대한 강짜를 놓는 것이니 마음껏 분이 풀리도록 놔둬야 한다고 했다.

어떻게 그걸 아시냐고 했더니 “나와 케일런의 연애사를 눈으로 보았으니 결국 끝이 어떻게 될지 누구보다도 더 잘 알 거다.”라고 대답했다.

과연, 아빠는 가끔가다가 “케일 런, 옆에서 볼 땐 재미있었는데…… 내 딸 이야기가 될 줄은 몰랐지.”라고 중얼거리며 회한에 젖은 눈을 하곤 했다.

“저기……”

그때 문이 열리고, 디엘이 고개 를 빼꼼 내밀었다.

“다음 화가분이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아빠가 아직도 진정되지 않은 목소리로 한마디 하고는, 구석에 놓인 캔버스를 보며 미간을 찌푸 렸다.

“이건 뭐야? 왜 왜 우리 리체를 이렇게 못생기게 그려 놨어?”

내 눈에는 다 잘 그리는 것 같 은데 아빠는 못마땅하다는 둣이 투덜거렸다.

“속눈썹 각도와 귀 끝이 이상합 니다. 제가 돌려보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렇군. 잘했어.”

“다음 그림도 최선을 다해 검토 하도록 하겠습니다.”

“……크홈.”

아빠는 팔짱을 끼고 에르안과 내 사이에 끼어 앉았다.

그래서 다음 화가 후보로 들어 온 레이빌 오스트람은 덜덜 떨면 서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에르안이 난리친 보람이 있어 서, 그가 선별한 화가는 그림을 기가 막히게 잘 그렸다.

다행히 온 대륙을 뒤지기 전에, 레이빌 오스트람이 에르안의 까다로운 눈에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낸 것이다.

나는 아빠와 고모, 할아버지에 둘러싸여서 얌전히 앉아 있었다.

가족 초상화에 쓰라며 어머님은 우리 네 명에게 완벽하게 어울리는 옷을 보내 주었다.

흰색과 초록색이 섞인, 단아하 면서도 고풍스러운 데다가 가족의 통일성을 보여 주는 디자인이 었다.

고모와 아빠는 이런 걸 받으면 다 마음의 짐이라면서 직접 온갖 옷을 사들였다.

하지만 결국 나에게 제일 잘 어울리는 옷은 어머님이 보내 준 것이라는 데에 동의하고야 말았

아빠는 고개를 저으며 이마를 짚었다.

“3단 케이크를 먼저 보냈을 때 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똑같은 자세를 계속 취하고 있 는 것은 일반인에게는 물론, 고 령의 할아버지에게는 꽤 힘든 일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무조건 함께 앉아 있겠다고 고집 올 부리셨다.

“할아버지, 정말 괜찮아요. 할아 버지부터 그리라고 하고, 먼저 올라가셔도…”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순간인데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다.”

할아버지는 꼿꼿하게 앉은 채로 내 손을 꼭 잡았다.

“할아버지.”

나는 할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서 조용히 속삭였다.

“다음 초상화를 그릴 때에는 제 손 말고, 증손자랑 증손녀 손 잡으셔야 해요.”

어떻게 만난 가족인데, 부디 오 래오래 사셨으면 했다.

이제 아빠도 나도 늘 곁에 있을 테니까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다들 힘드시니까, 쉬지 말고 열심히 그리도록 해.”

에르안은 레이빌의 둥 뒤에서 적나라한 압박을 가하는 중이었다.

저래도 되나 싶었는데, 예상 외로 에르안의 편을 든 사람은 디엘이었다.

“평균 시세의 다섯 배를 부르셨 다고 하는데……”

디엘은 걱정스러워하는 내게 아 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러면 저런 감시 정도는 받아 도 되지 않나……”

“음, 디엘? 지나치게 자본의 노 예가 된 것 같은데.”

“많은 돈은 짜릿하더라고……. 그런 의미에서 페렐르만 충성, 충성.”

친딸을 찾은 기쁨에 아빠가 디 엘에게 돈으로 엄청난 보상을 해서 그런지, 디엘은 갑자기 물질 만능주의에 휩싸인 영혼이 되었다.

‘사실 몇 년 치 연봉을 한 번에 주었으니 그만두어도 될 법한데.’

그는 페렐르만 상단이 마음에 든다며 늘 끗꿋하계 우리 저택에 머물렀다.

돈을 받아 기쁜 것과는 별개로 어쨌든 페렐르만을 좋아하는 건 확실했다.

그렇게 완성된 초상화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들었다.

아빠는 사본을 하나 더 부탁하여, 수도에 있는 자작저와 페렐 르만 영지의 자작저에 각각 걸었다.

그 외에도 레이빌은 내 초상화 를 아주 작게 축소하여 몇 개나 그려야만 했다.

“24시간 붙어 있을 수는 없으니 까.”

아빠와 고모, 할아버지는 손바 닥만 한 내 초상화를 나누어 가 지며 말했다.

“떨어졌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곁에 없을 때도 계속 봐야지.”

아빠는 내 초상화를 회중시계에 넣고 의료 연구진 일 때문에 바 쁠 때마다 늘 열어본다고 했다.

아직 제대로 꾸려지지 않은 의 료 연구진 때문에 아빠는 상당히 바빴던 것이다.

다 때려치우고 가족과의 따뜻한 시간을 보낼까 고민하기도 했지 만, ….

어쨌든 나와 함께 평생 연구하 려면 첫 단추부터 잘 꿰어야 한다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언젠가 나도 그 연구진에 출근 하게 되면, 지금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 보내고 있는 할아버지, 고모와 떨어지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고 있는지 할아버지도 고모도 소중하게 내 초상화 를 각자의 지갑이나 목걸이 등에 넣어 두었다.

초상화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기억할 일이 많은데 앞으로 얼마나 소중한 시간들이 쏟아질지 짐작 도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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