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47화
에르안이 그림처럼 누워 있었다.
“공작님.”
가만히 그의 손을 잡고 평상시 처럼 마력의 흐름을 확인하며 나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사실 오늘은 저한테 정말 중요한 날이에요. 모든 것이 바뀐 채, 새로운 삶을 사는 첫 시작이거든요”
아빠와 할아버지, 고모와 함께 하는 삶.
그리고 사랑하는 내 연인이 있어서 더 이상 혼자가 아닌 삶.
“그러니까 빨리 일어나세요. 오 늘이 가기 전에 꼭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있단 말이에요.”
[나 혼자만 사랑해도 괜찮아. 곁에 둬 주는것만 해도 황송하지. ]
“혼자만 사랑하는 거 아닌데.”
에르안을 실컷 바라보고 있자니, 예전에는 신경 쓰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둘씩 새록새록 떠을 랐다.
지금까지 한 번도 사랑한다고 얘기하지 않았던 것과 지금까지 그를 위해 준 것은 맞지도 않는 500골드짜리 셔츠가 전부였다는 것.
재판 전날, 그와 디엘이 나누었던 대화가 자꾸만 떠올라서 나는 많이 후회했다.
“고통스럽지 않으세요? 사랑의 확신이 없는 미적지근한 상대를 위해 끊임없이 모욕을 참아 내고 매달려야 하는 게. ”
디엘의 눈에도 내가 사랑의 확신이 없는 미적지근한 상대로 보 였나 보다.
그냥, 가족을 찾고 나서 더 중요한 것들에 정신이 없었을 뿐인 데.
나는 표현조차 인색했다.
내가 조금만 다가가도 에르안이 모두 다 채워 줄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상태라면 아무리 곁에 둬도 외로우실 것 같은데요. 사랑이라 게 당연히 보답을 바랄 수밖 에 없는 감정이잖아요. ”
에르안은 그 말을 딱히 부정하지 않았었다.
“미안해요. 확신이 없게 만들어서, 그래서 외로음을 느끼게 해서. 내가 너무 늦었어요. 사실 보 답할 감정은 충분히 내 안에 있었는데 내가 이런 면에서 많이 부족했어요. 표현하지 않는 사랑 은 전달되지 않는 걸 의식하지 못했거든요.”
나는 한숨을 쉬며 그의 머리카 락을 쓸었다.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많이 보 내고 싶었지만, 에르안 님하고도 앞으로 좋은 시간 많이 보낼 건 데요. 그러니까 일어나요.”
다시 한번, 나는 세심하게 마력을 집어넣었다.
매일같이 하는 치료 중 하나였다.
평소보다 더 간절히 오랫동안 그의 손을 잡고 마력을 쏟아 부은 뒤, 그 커다란 손에 가만히 입을 맞췄을 때였다.
문득 입술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마력 흐름에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아……”
그리고 서랍을 뒤져서 디엘에게 챙겨 오라고 신신당부했던 작은 상자를 얼른 꺼냈다.
역시 그는 나를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눈물이 고였다.
오늘은 꼭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찜 이렇게 내 말은 잘 듣는지.
그의 옆에 앉아 두근거리는 심장을 어쩌지 못하고 다시 손을 잡은 채 기다리는데, 예상했던 대로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리체?”
그가 가장 먼저 말한 것은 내 이름이었다.
몇 번 더 확인해도, 그의 모든 신진대사가 정상이었다.
그는 정 신을 잃었던 그 상태 그대로의 외양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고, 정적이 잠시 흘렀다.
“약속했잖아요.”
나는 눈물이 고인 채로 가까스로 씩 웃으며 그의 검은 눈을 마주쳐 주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를 상상하며 몇 번이나 준비한 말이었다.
“꼭 치료해 준다고요. 저는 거짓말 안 한다고요.”
어린 시절에도 이런 말을 많이 했었는데.
“……그랬지. 네 말은 늘 맞고.”
그럴 때마다 그의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에르안은 마치 잠시 자고 일어 난 것처럼 청량하게 웃었다.
우리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한 동안 손에 전해지는 서로의 체온만 느끼고 있었다.
“몸은 멀쩡하시죠? 아마 다 괜찮을 거예요.”
“ 응......”
“불편하신 데 있으면 얼른 말씀 하세요.”
혹시라도 문제가 있나 싶어 내 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에르안이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갸웃거렸 다.
“뺨이 좀 아픈 것 같은데……”
“아.”
에르안의 몸은 그동안 정신을 잃었을 때에 멈춰 있었다.
아빠가 정신 차리라고 미친 둣이 때렸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나는 어설프게 말했다.
“그것도 뭐, 괜찮아지실 거예요.”
단순 찰과상이야 금방 회복될 것이 뻔했다.
“그것 외에는 잠에서 막 깬 것 같고 그래.”
에르안은 자신이 며칠 동안 정신을 잃었다는 것을 믿기 어려운 눈치였다.
나는 꼼꼼하게 그의 몸을 살펴보고 완전히 정상이라는 것을 몇 번씩이나 확인했다.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다소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그동안 자작님께서 내 희생에 감동받아 결혼을 허락한다 거나 하는 그런 말씀을 하시진 않으셨어?”
내게 던진 첫 질문이 아빠 얘기 라니. 어지간히 신경 쓰이는 모 양이었다.
“네, 그런 말씀은 안 하셨어요.”
그의 표정이 무너지기 전에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하지만 데이트 한 번 정도는 허용해 주실 모양이에요. 제가 똑똑히 들었어요.”
“그 정도면 아주 만족스럽군. 구른 보람이 있어.”
“네?”
“몇 번 더 구르면 여행도 함께 갈 수 있겠지?”
그는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트라우마가 생겨서, 메일리스 공국엔 가지 않을 거야.”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하지만 그는 아프지 않겠다고 대답하는 대신,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손가락으로 내 볼을 감쌌다.
“그래도 네가 날 ‘에르안 님’ 이렇게 불러 줬잖아. 안 그래? 어린 시절 이후 처음이야. 아픈 보 람이 있어. 그리고 그냥 ‘에르안’ 이렇게 불러도 되는데.”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깨어나시면 앞으로는 늘 이렇게 부르기로 했으니까, 더 이상 아프지 말아요.”
“뭐?”
“진짜예요. 그리고 사랑한다고도, 에르안 님, 아니 에르안 없으면 못 살 것 같다는 말까지 꼭 하려고 했어요.”
에르안의 얼굴이 갑자기 싹 굳었다.
나는 그의 손을 꽉 잡으며 생긋 웃어 주었다.
한참을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던 그가 떨리는 입술로 조심스레 말했다.
“음…… 리체, 다시 한번 말해 줄래? 내가 꿈꾸고 있나 해서.”
“사랑해요, 에르안. 너무 늦게 말해서 미안해요.”
에르안은 미심쩍다는 둣이 내 팔을 꽉 잡고 간절하게 되물었다.
“리체, 나 멀쩡한 것 맞아? 혹시 곧 죽는데 남은 시간만이라도 행복하라는 마음으로 이러는 건 아니지?”
“저 거짓말 못해요. 아시잖아요.”
그의 얼굴에 서서히 환희가 차 오르기 시작했다.
“아…… 이 순간이 지나가는 게 아쉬워. 평생 지금에 머물렀으면 좋겠어.”
“사랑한다는 말이야 앞으로 자주 해 드리면 되는데요, 뭐.”
“약속했어, 리체.”
그는 어린 시절에 했던 것처럼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보였다.
“평생, 자주 해 줘야 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으니까 말이야.”
“알았어요.”
나는 순순히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물론 손가락을 걸면서 왠지 인생까지 걸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대신…… 이제 에르안은 아주 건강하시니까, 전 주치의 그만둘래요. 제 재능은 공작성을 벗어 나서 더 넓게 쓰여야 한다고요.”
에르안의 표정이 무너지기 전에, 나는 재빨리 그의 손에 준비했던 상자를 하나 쥐여 주었다.
내가 성년이 되던 날, 에르안이 선물했던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직접 끼워 주세요.”
나는 단 한 번도 그 반지를 끼지 않았다.
깊은 생각을 해서 서랍에 보관 해 둔 건 아니고, 그냥 반지를 받았을 당시에 너무 부담스러워 서 일단 넣어 둔 이후에 딱히 꺼 낼 필요성을 못 느꼈었다.
하지만 선물을 준 당사자에게는 상당히 무심한 행동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걸 그를 간호하면서야 느꼈다.
“……어?”
“그 반지를 끼고서, 공작님의 주치의가 아니라 그냥 눈이 맞은 자작 영애로 데이트에 나가고 싶으니까.”
“아……”
“제가 자꾸 에르안을 공작님이라고 불렀던 건 거리감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아직 저희가 고 용 관계여서 그런 거였어요. 에르안이 다치니까 그제야 알겠더 라고요.”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에르안의 얼굴에 금방 화색이 돌았다.
그제야 정말로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 그가 나를 끌 어당겨서, 나는 그의 무릎 위에 앉은 채로 거의 안긴 셈이 되었다.
“맞아.”
그가 눈을 휘어 보이며 웃었다.
등 뒤로 그의 단단한 몸이 느껴 졌다.
“우리를 매어 둘 계약서는 약혼 계약서 한 장이면 충분하지.”
자기가 쓴 것도 아니면서, 그는 그 계약서를 너무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눈이 맞으면 이런 것도 해야 돼.”
서로의 숨결이 섞일 정도로 나 를 품에 안다시피 한 그는 내 볼 과 목덜미 둥지에 연신 입을 맞 추었다.
그리고 내가 간지러음에 몸을 뒤틀 즈음에서야 아주 천천히 내 손을 들어 넷째 손가락에 반짝거 리는 반지를 끼워 주었다.
내 손가락에 천천히 입 맞춘 그 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둣 내 손 을 이리저리 살폈다.
“에르안 님 것은 제가 연구진 들어가서 월급 받으면 그 돈으로 사 드릴게요.”
반지를 끼우고 난 후에도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에게 내가 우물우물 말했다.
그는 내 이마와 볼에 가볍게 입을 한 번씩 맞추고 나서 다시 한번 꼭 끌어안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주치의도 뭣도 아니고, 그럼 우리는 연인인 거지?”
“네, 이제는 그게 우리 사이를 지칭하는 단어겠죠.”
“물론 결혼을 전제로 한 연인 말이야. 나는 언제든 환영이니까, 네가 원할 때면 언제든지 식을 올리는 것.”
분명히 결혼 전제는 내가 제안 한 건데, 에르안이 훨씬 더 강조 하며 말할 때마다 기뻐하는 모양 새였다.
“어, 뭐…… 그렇죠?”
물론 가족들의 반대로 결혼식까 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럼 데이트 말고 이런 것도 해야 돼.”
방금 전까지 의식도 못 차리고 누워 있었으면서 그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가 나를 침대에 밀어 붙이고, 내 양 볼을 부드럽게 잡은 뒤 입 을 맞춰 오는 바람에 나는 더 이 상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내게로 쏟아지는 묵직한 무게에 나는 힘을 빼고 결국 웃어 버렸다.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든든한 가족들도 곁에 있고 사 랑하는 남자도 무사히 눈을 떴 다.
“사랑해, 리체. 사랑해.”
그의 속삭임이 온몸에 쏟아졌 다.
“에르안 님…… 쓰러져 계실 동안 여러 가지 일이 있었는데 ……. 아.”
“나중에 들을래……”
그의 팔이 단단히 나를 옭아댔다.
그가 나를 으스러지게 안는 동안,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오늘 이 시간 즈음에 엄청난 힘을 가진 세계관 최강자 칸시아를 만났다.
열세 살로 돌아가 아예 새로운 삶을 살고, 그 와중에 신탁이 얽혀 버린 내 출생의 비밀도 알았 다.
신이 예언한 대로 나는 반란군 을 막아 냈고, 잃어버린 가족들도 모두 찾았다.
제대로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신비한 꿈도 계속 꿨는데, 이제 는 더 이상 그런 꿈을 꿀 일이 없는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겠지.
모두 다 내가 세르이어스 공작 령을 떠나지 않고 이타적인 선택 을 한 덕분이었다.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나는 내 일부터는 정말로 내 자리에서 나를 위한 삶을 제대로 살아야겠다 고 생각했다.
에르안이 이토록 건강한 걸 보 니 정말로 할 일을 다 한 듯 했고, 지난번에는 실패했지만 이번 사표는 아무래도 받아들여질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