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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46화 (146/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46화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하.”

그때 아빠가 황급히 옷을 갈아 입고 응접실에 들어왔다.

평상시에 끼고 다니던 외알 안 경도 없고, 크라바트가 살짝 비 뜰어져 있는 것을 보아 나와 제이드 황태자가 단둘이 있는 게 어지간히 싫었던 모양이었다.

“아냐. 내가 빨리 왔는데, 뭐. 리체 양에게는 진심을 다해 사과 했어.”

제이드 황태자는 나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고개를 푹 숙였다.

“혹시 부족하다면.....”

“아뇨, 안 부족해요. 충분히 애달픈 그 마음을 받아들였습니 다.”

나는 더 이상 대화를 반복하는 것이 싫어 황급히 대답했다.

아빠 역시 나와 제이드 황태자 의 대화를 막고 싶은지 진지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전하, 그나저나 제계도 할 말 이 있으시다고……”

“아, 응.”

제이드 황태자는 턱을 쓸면서 말했다.

“내가 이번 일로 정말 깨달은 게 많아.”

조심스럽게 응접실에 들어와 아빠의 외알 안경을 조용히 전달해 주던 디엘이 흠칫 놀랐다.

“그동안 나는 모든 걸 다 내가 이겨 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 거든. 그건 사실이지만, 그러는 와중에 상처 받는 사람들이 생긴 다는 걸 알았어.”

“오, 맞아요.”

나는 감탄하며 대답했다.

“본격적으로 반란이 일어났다고 해도 당연히 황태자님이 다 쓸어 버리셨겠지만, 그 와중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다쳤을 거예요. 선량하게 살다가 휩쓸려서 사형 선고 받는 피해자도 분명 있었을 거고요.”

그게 바로 나였다.

“맞아. 그래서 몹시 후회했어. 세르이어스 공작이 충심으로 내게 반란을 알려 줄 때 그 충언을 무시하지 말걸.”

“네, 잘하셨어요.”

“그래서 난 이제 결정했어.”

디엘은 그 결정이 두려우면서도 궁금해서 차마 나가지도 못하고 문가를 서성이고 있었다.

나와 아빠 역시 반쯤은 불안한 마음으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가 예전에 독을 섭취하는 바 람에 조금 부족해졌다는 걸 인정하고, 영리한 사람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듣겠다고. 많은 분야를 뛰어난 전문가에계 맡길 거야. 물론 충심이 보장된 자들로 말이야. 그리고 스승을 들여서 다시 공부도 하려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한다면 어쨌든 최악은 면하는 거니까.

“예, 제국의 미래가 다행히 아주 어둡지는 않군요.”

“그래서 말인데.”

제이드 황태자는 아빠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황실 의료 연구진을 해체하려고 해. 케인즈 경이 그러는데 사실상 하엘던 황자의 끄나풀과 다름없었다고 하더군.”

“예, 그랬습니다. 옛날부터 조금만 들이받아도 어떻게든 내쫓았지요.”

아빠는 지긋지긋하다는 둣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의학이 국가 복지에는 엄청 중요하니까, 자작이 그 총 책임을 맡아 줬으면 해.”

“총책임이요?”

“19년 전의 연구진들이 그러는데, 다들 하엘던 황자보다는 페텔르만 자작의 실력이 더 뛰어났다고 하던데.”

“그건 그렇습니다.”

“페렐르만 자작가의 영애가 반란군의 실마리를 잡아 줬으니 충심도 보장되었고, 실력은 말할 것도 없잖아.”

제이드 황태자의 말에 아빠의 볼이 씰룩이는 것이 보였다.

젊은 시절 아빠는 백작 위도 백작 위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도음이 되겠다는 사명감과 능력을 펼쳐 보고 싶다는 인정 욕구 때문에 연구진에 들어갔을 것이다.

내가 바로 그런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빠가 지금 얼마나 설렐지 상상이 갔다.

그래서 나는 재빠르게 끼어들었다.

“음…… 이왕 해체하고 다시 만들 거면 조건이 필요해요.”

“옹? 뭔데, 리체 양?”

“황실 의료 연구진이 아니라 국립 의료 연구진이었으면 좋겠어요. 황실을 위한 게 아니고 나라를 위한 거니까요.”

“그게 그거 아냐?”

“좀 달라요. 나중에 공부하시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어쨌든 더 좋은 방안이랍니다.”

“나를 구해 준 리체 양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알았어.”

“그리고 신분보다는 실력 위주 로 구성했으면 해요. 평민이어도 귀족보다 더 똑똑할 수 있으니까요.”

나는 한때 평민의 신분으로 사 냥 대회에서 무시당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당차게 말했다.

“아빠가 직접 뽑으면 될 거예 요. 아빠는 세르이어스 공작성에 서 사람을 많이 뽑아 봤거든요. 천재도 한눈에 알아보시고요.”

“아.”

아빠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누구 딸이기에 이렇게 똑똑하 고 야무질까. 아, 그 사실을 이미 모두가 다 알아서 더 말할 수 없는 게 슬프군.”

제이드 황태자는 ‘전문가의 뜻을 따르겠다.’라는 말답게 내 이 야기에 모두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리체 양도 당연히 영입 대상이겠지?”

“당연하죠.”

아빠의 목소리에 화색이 돌았다.

“출근해서 하루 종일 같이 있을 겁니다. 딸과 함께하는 의학 연 구 토론이라니, 너무나 신나는군 요.”

나 역시 내 능력이 만인에게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정말로 좋은 제안이었다.

애초에 아무것도 몰랐던 옛날에도 황실 의료 연구진에 들어가고 싶었으니까.

게다가 아빠와 함께 연구한다니,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 를 저었다.

“지금은 말고요. 공작님이 무사히 일어날 때까지는 지켜봐 드리고 싶어요.”

“뭐, 그거야 알아서 하도록 해. 아, 그리고 리체 양의 부탁 말인 데… 어머님께서 꼭 들어주고 싶어 하셔.”

“백작 위요?”

“응. 아마 연구진의 총책임자로 임명받을 때, 백작 위까지 한꺼번에 내려질 계획이야. 미리 알고 있어.”

“아…… 리체, 이런 것까지 챙겨 주지 않아도 되었는데.”

아빠가 새삼 감동받았다는 둣이 한숨을 섞어 말했다.

“저도 자작 영애보다는 백작 영애가 좋으니까요. 그리고……”

나는 야무지게 대답했다.

“나를 찾아다니느라 포기했다던 백작 위까지 아빠에게 줄 수 있어서 뿌듯해요.”

제이드 황태자와 아빠는 새로운 국립 의료 연구진의 구성과 계획 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 다.

아빠의 출근을 생각하면, 수도 에 자작저를 마련한 것이 결과적 으로는 잘된 셈이었다.

나는 중간까지만 듣고 있다가, 에르안의 상태를 본다는 핑계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디엘이 몰래 쫓아오며 속삭였다.

“어떻게 보면 엄청난 해피엔딩인 것 같은데……”

그는 여전히 말꼬리를 흐리며 곁눈질을 하면서도 조잘거렸다.

“공작님도 네 친부가 자작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앞으로 착하고 부드럽게 살기로 결심하셨다 며…. 마님 께도 효도한다고 하 셨다던데…. 아, 참. 지켈 경이 자신이 못했던 인성 교육을 시켜 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해 달라고 했는데 까먹고 있었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니라 나 를 둘러싼 상황이 참된 깨달음을 얻게 한 거지만, 뭐 그게 그거였다.

“황태자님도 드디어 몸으로 부딪치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걸 아셨나 본데, 자신이 부족하니 남 의 머리를 쓰겠다고 생각한 것도 참 다행이지……. 형한테 뒤통수 도 맞고, 사랑하는 여자한테 차 이기도 하면서..”

“그래, 다 내 덕분이야.”

나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능과 인성이 각각 부족했던 두 남자가 어쨌든 나로 인해서 모자란 부분을 채우기로 결정했 다니 말이야.”

***

아빠는 그날 이후로 바빠졌다.

새롭게 국립 의료 연구진을 구성하기 위한 일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보고 싶다며 할아버지가 자작저에서 올라오셨다.

자작령은 공작성과는 달리 규모가 작아서 몇 달 정도는 자작저를 비워도 된다고 했다.

호아킨 단장님 덕분에 페렐르만 자작령은 반란군이 휩쏠 때에도 다행히 무사할 수 있었다.

“이런, 리체.”

수도의 새로운 자작저에서 흙길을 더 자주 밟게 된 할아버지는 페렐르만 자작령에서보다 더 건 강해지셨다.

“한 수만 물러 주면 안 되겠니?”

“안 돼요.”

머리 쓰는 건 질색이라는 고모가 산책을 나가는 오후 시간, 나는 할아버지와 늘 체스를 두곤 했다.

“시오니는 한 번씩 물러 줬는데. 체스 실력은 시오니를 꼭 빼 닮아서 왜 그건 안 닮았을까.”

“성격은 아빠 닮아서요.”

달콤한 체리 케이크를 먹으면서 할아버지와 체스를 둘 때면 항상 내가 이겨서 딱히 재미는 없었다. 하지만 소소한 행복이 몰려 오곤 했다.

아빠는 매일 저녁 돌아와서 의 료 연구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어차피 내가 근무할 곳이라며 쐐기를 박아 두는 것도 잊 지 않았다.

체스를 끝내고 문득 달력을 보 니 오늘은 내가 회귀했던 날이었다.

무심하도록 좋은 가을날에, 지하 감옥에 갇혀 혼자 억울하게 죽음을 기다리던 그날.

“할아버지.”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혹시 제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면 어쩌실 거예요?”

“감옥에 갇힐 때까지 가만히 있 지 않을 거다. 어떻게 해서든 그 전에 빼내지.”

할아버지는 이상한 걸 묻는다는 둣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그래도 갇혀서 사형 선고 를 받으면, 찾아와는 주실 거죠?’ 라고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너무 뻔한 대답이 돌아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황실 근위대의 벨론이 나를 체포하려고 할 때, 기겁을 하며 내 앞을 막아서던 가족들을 생각하니 정말 괜한 질문이었다.

체스판을 정리하면서 창밖을 보니 고모가 노란 모자를 하나 들 고 신나서 걸어오고 있었다.

고모가 저런 꽃 달린 예쁜 모자 를 쓸 리 없으니, 분명히 내 선물일 것이다.

고모는 가끔 저렇게 수도를 돌아다니며 밑도 끝도 없는 선물을 사 와서 저녁 식사 때에 스윽 내밀곤 했으니까.

내게는 평범한 하루였지만, 그 래서 더 가슴 뛰는 오늘이었다.

이제 내일부터는 정말로 한 번 뿐인 삶을 살게 되는 거니까.

“리체, 어디 가니?”

“공작님께 가요.”

“한 시간 뒤에 간다고 하지 않았니? 한 판 더 해도 될 것 같은 데.”

“그냥, 그냥요. 이따 저녁 먹고 다시 한 판 해요.”

그냥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는 얘기는 하지 않고, 나는 충동적 으로 에르안이 누워 있는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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