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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45화 (145/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45 화

에르안이 재판정의 방청석 자리 에 앉아 세이린에게 말했다는 처분이 바로 이것이었다.

[리체의 실력이야 그들이 더 잘 알고있을 테니 생겼다고 하면 반신반의하면서도 믿을 수밖에 없겠죠. 감옥에 가둔 채 평생 고문에 힘겨워 하면서, 자살하지 않고 이걸 잘 버티면 자식을 볼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속이세요. 기간이야 페렘르만 자작이 리체 를 찾아 헤맸던 19년 정도로 해 도 좋고.]

당연히 이스엘라는 임신을 하지 않았다.

리체 역시 처방하면서 딱히 큰 효과는 없을 것이라고 덧붙이기까지 했으니까.

[그리고 19년 후, 당신이 고문을 잘 버티지 못해서 죽였다고 하면 되겠군요. 딱 하엘던이 리체에게 덮어씌우려던 누명이지 않습니까. 리체 때문에 자작 부인이 죽었다는 것. ]

오랜 시간을 괴롭힌 뒤 끝에 그 시간의 허망함을 알려 주는 것.

아르가가 당한 것까지 합쳐 갚아 주는 방법이었다.

고문이야 황실 감옥에서 이루어 지는 것들로 제이드에게 요청할 셈이었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인데도 그 19년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 기에 아르가는 몸을 한 번 부르 르 떨었다.

그리고 나중에 사실은 그 애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허탈할지.

아니면 영원히 알려 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제가 1년마다 한 번씩 가겠습 니다. 딸이더라, 많이 자랐더라, 공부를 잘한다더라. 이런 식으로 가상의 아이에 대한 정보를 홀려 주면 실체가 없는 것에 더 집착 하여 고통스러워지겠죠.'

아르가는 에르안이 세이린에게 했다는 말을 떠올리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결혼은 절대 안 되지만.”

그는 짜중을 내며 중얼거렸다.

“리체 그만 고생시키고 일어나라.”

에르안의 옆에서 어린 시절처럼 붙어서 간호하던 리체를 떠올리며 그는 한숨을 쉬었다.

“1년마다 한 번씩 가려면 일단 일어나야 할 것 아니냐, 이 개차반아.”

에르안이 또 능글맞게 리체 옆에 붙어 있는 건 진짜 싫은데,  리체가 걱정스러운 표정올 하고 있는 건 더 싫었다.

하여간 세르이어스와 한 번 얽 히면 벗어나는 건 불가능이었다.

애초에 케일런과 친해지는 게 아니었다며 30년 전 일을 후회하 고 있을 때였다.

지하 감옥을 벗어나자마자, 세 상 온갖 근심은 다 짊어지고 있 는 듯한 제이드가 보였다.

“전하?”

“아, 페렐르만 자작.”

아르가는 제이드에게 예를 표했 고, 제이드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세르이어스 공작은 괜찮은가?”

“뭐…… 괜찮아질 겁니다.”

“하엘던 황자의 처분에 대해서 는 전권을 맡길게. 원하는 대로 고문 담당자도 배정했어. 난 당장 죽일 줄 알았는데 계속 살려 둔다는 게 신기하더군.”

“감사합니다.”

예의상 감사 인사는 표했으나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제이드가 리체에게 보낸 연서 아닌 연서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 문이다.

‘극도로 뇌가 투명한 주제에 언 감생심 뇌가 알차기 그지없는 내 딸을……

아르가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 을 본 제이드가 한숨을 쉬며 우 물쭈물 말했다.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어 리다고 해도 용서받을 수 없겠 지.”

“네?”

“마력의 돌말이야.”

“아.”

아르가는 사실 다섯 살 아이가 장난감에 홀려 마법 아이템을 반출할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시종들을 모두 따돌릴 수 있는 신체적 능력이 있었다는 게 특이점일 뿐, 제이드가 아닌 다른 아이더라도 악의 없이 저지를 수 있는 일이었다.

당연히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 았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친밀한 시녀를 이용한 어른이 더 나쁘다고 여겼다.

어린 에르안이 주치의에게 거짓 말을 하고 비밀을 가졌다는 것에 도 뭐라고 하지 않은 것처럼, 아 르가는 아이에게는 죄를 물을 생 각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굳 이 마력의 돌이 아니더라도 시오 니는 죽었을 것이다.

“네, 리체가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물론 리체가 그 일로 한동안 의 기소침해서 가족을 찾은 것을 마음껏 기뻐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 쉬울 수밖에 없었다.

“아.. 이런.”

제이드 황태자가 고통스럽다는 둣이 머리를 싸댔다.

아르가는 기본적으로 제이드를 크게 원망하지는 않았다.

아마 애초에 그에게 기대치가 하나도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었고, 그가 제작했던 약물을 기반 으로 한 독을 섭취했다는 것에 일말의 책임감을 느껴서일 수도 있었다.

“잘못했어, 자작. 정말로 반성하 고 있어. 앞으로는 절대 장난감 같은 것에 속아 아이템 방출은 하지 않을게.”

그의 순진한 푸른 눈이 워낙에 서글퍼 보여서, 아르가는 기운 없이 대답했다.

“예, 앞으로는 절대 장난감에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비록 전 하께서는 스물 셋이시지만.”

“자작이 리체 양의 친부라는 사 실은 새삼 참 놀라워. 리체 양은 귀엽고 깜찍한데.”

“그게 왜 놀랄 일이죠?”

“음…… 거울을 봐, 자작. 자작은 항상 화난 눈이잖아. 지금도 그렇고.”

그건 제이드의 편지를 떠올리고 있어서 그런 거라는 말도 못 하 고, 아르가는 살짝 한숨을 쉬었 다.

왜 제이드와 함께 있을 때 에르안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는 지 알 것 같았다.

아르가의 눈에는 제이드 역시 딸을 노리는 파렴치한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 갔다.

‘물론 독극물의 영향이 좀 있다지만 어쨌든 멍청해……. 저 아 무 생각 없는 인간보다는 나쁜 생각이라도 하는 에르안이 낫지 않을까. 잠깐, 내 딸은 나랑 평생 살 건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이야.’

아르가는 자신도 모르게 생각하 다가 더 짜증이 나서 미간을 확 찌푸렸다.

제이드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역시…… 이런 말로 만회를 할 수 있는 잘못이 아니겠지. 자작, 수도에 자작저를 하나 마련했다 면서? 직접 얼굴을 보고 사죄해 야겠어.”

“네? 지금 바쁘지 않으십니까?”

“뭐, 딱히 내가 할 일은 없어. 더 이상 전투도 없고 말이야. 페 렐르만 자작과 리체 양, 둘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할 것도 있고 하 니 내가 직접 들르고 싶은데.”

“음…… 제 딸은, 음……”

아르가가 싫은 내색을 어쩌지 못하고 망설이자, 제이드는 슬픈 표정올 지어 보이며 고개를 툭 떨구었다.

“세르이어스 공작이 목숨 걸고 페렐르만 영지를 지켜 준 데다가 자작도 구해 주었잖아. 나도 염 치가 있어. 나는 리체 양에게 잘 못한 것밖에 없는데 어떻게 공작 이 아니라 나를 선택하라고 할 수 있겠나.”

‘뭔가 순서와 인과 관계가 뒤죽 박죽으로 섞여 엉망인 것 같은 데.’

아르가는 굉장히 이상함을 느꼈으나 그렇다고 리체와 에르안의 연애사를 자기 입으로 옮어서 잘 못된 점을 교정해 주는 것은 더 싫었기에 침묵을 지켰다.

“어쨌든 곧 출발하도록 하겠네. 먼저 가서 준비해 놓도록 해.”

아무리 권위가 없어 보인다고 해도 제이드는 황태자였다.

아르가는 예를 갖춰 알겠다는 뜻을 표현한 뒤 한숨을 쉬며 새 로 구입한 수도의 저택으로 먼저 돌아가기 위해 마차를 탔다.

***

수도의 페렐르만 자작저는 갑자기 손님을 맞게 되었다.

제이드 황태자가 친히 말을 타고 달려온 것이다.

분명히 아빠가 먼저 출발해서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겠다고 했으나, 결국 둘이서 동시에 도착 하고 말았다. 말이 마차보다 빠 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빠가 옷을 갈아입고 올 때까지, 제이드 황태자는 내가 혼자서 상대해야 했다.

“어, 미안. 말을 달리다 보니 속 도 조절이 안 돼서. 근데 난 까다롭지 않아. 아무렇게나 준비해도 돼.”

“네. 어차피 급히 마련한 저택 이라 살림살이가 많지 않아 아무 렇게나 준비해야 해요.”

제이드 황태자는 나를 보자마자 세상이 떠나갈 둣이 한숨을 쉬었 다.

“제가 다섯 살 때에 시녀 하나가 장난감 검을 준다며 꼬셔서,  호위를 따돌리고 마법 아이템 하 나를 반출한 적이 있었지. 완전 히 잊고 살았는데……”

“아.”

“미안해…… 미안해, 리체 양. 페렐르만 자작에게도 계속 말했어. 앞으로는 장난감에 홀려 절대로 마법 아이템을 반출시키지 않겠다고.”

“네, 당연히 그러셔야죠. 꼭 명심하시길 바랄게요.”

나는 자리를 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제이드 황태자 때문에 내 가 마음고생을 한 건 맞지만, 그가 의도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도 아니고 다섯 살 꼬마에게 잘못을 묻고 싶지도 않아서 크게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대신 혹시라도 그때 편지에서처 럼 헛소리를 할까 봐 얼른 말했다.

“그나저나 저도 죄송해요. 황태 자님 마음은 받아들일 수가 없어 요. 저는 세르이어스 공작님을 좋아하고, 서로 마음도 통한 사이라서...”

“그렇겠지, 리체 양. 당연히 이해해.”

제이드 황태자는 고통스러운 표 정을 지어 보이며 신음을 홀렸다.

“나는 어리석게도 페렐르만 자작 부인의 죽음에 한 역할을 했고, 세르이어스 공작은 페렐르만 자작을 지키기 위해 저렇게 목숨까지 바쳤으니……. 리체 양의 선택이야 당연하겠지.”

‘뭔가 이상한데.’

“나도 그 정도 상황 유추는 충분히 가능한 사람이라네, 리체 양.”

“음, 저는 황태자님을 남자로 좋아한 적이 사실 한 번도 없어서요.”

“그래. 세르이어스 공작이 저렇 게 누워있는데 나에 대한 마음은 당연히 보잘것없게 느껴지지 않겠어? 나 역시 리체 양이 나를 구했을 때 모든 것이 의미 없어 지더라고. 이해해.”

그냥 우리의 인연을 여기까지로 끝내고 더 이상 얽히지 않는 것이 좋을 듯했다.

보낼 수 없다며, 내가 왜 안 되 냐며 울고불고 난리치는 것보다 는 나았다.

어쨌든 결론은 같으니까, 나는 더 이상 진실을 전달하는 것을 포기했다.

정말 하엘던 황자가 먹였던 독의 부작용인 건지, 아니면 본디 타고나기를 조금 부족하게 태어 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회귀해서 제이드 황태자를 구하지 않는 이상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가장 역량이 뛰어난 스승들이 붙었을 텐데 황태자의 지적 능력이 왜 이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스승이라고 해서 모두를 다 가르칠 수 있는 건 아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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