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44화
아빠가 이 사건에 자신도 모르 게 휘말린 피해자로서 황실에서 중인 출석 요구를 받아 황궁에 가는 날까지도 에르안은 그림같 이 누워 있었다.
내가 에르안을 보살피는 동안 에, 황궁에서는 반란군 하나하나 를 모두 캐기 위해 광범위한 조 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리체, 너무 걱정 마라.”
고모는 매일같이 에르안의 상태 를 보고 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한결같은 공작님은 네가 슬 퍼할까 봐 무조건 멀쩡하게 일어날 테니까. 게다가 넌 천재잖아.”
“다 맞는 말인데… 며칠 안에 분명히 일어나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걱정이 되네요.”
잘할 수 있는 걸 알면서도 늘 불안했고, 그가 눈을 감으며 의 식을 잃을 때에는 세상이 무너지 는 것 같았다.
소중한 사람에 대한 걱정은 이 성의 영역보다는 감성의 문제였다.
나는 평온하게 눈을 감고 누워 있는 에르안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마음에 걸리는 게 너무 많아 요. 제가 이렇게 공작님께 말하 지 못했던 것들이 많았는지 몰랐 어요.”
내가 고쳐 내겠지만, 당연히 일 으키겠지만 뭐든지 의학에 100% 는 없는 법이니까. 혹시라도 잘못된다면 어쩌지.
24시간 중에 20시간을 붙어 있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사람이라, 당연히 무언가를 같이 할 시간은 많을 줄 알았다.
나만 할 일을 다 끝내면 언제든 함께 있을 수 있게, 에르안은 그 자리에 언제나 서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삶의 불확실성을 만만히 보면 안 된다는 걸, 그래서 순간순간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해 사랑했 어야 했다는 걸 나는 이번에도 늦게 알아챘다.
“가족들도 물론 소중하고 당연히 급하게 결혼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아빠 말처럼 에르안 님과 당장 헤어지고 싶지는 않아 요. 당연히 제가 많이 아깝지만, 그래도 제게는 소중한 사람이에 요.”
“아르가 놈이 눈치는 없어도 염 치는 있어. 엄청 마음에 안 들어도 어쩔 수 없을 거다. 역시 괜 히 세르이어스가 아니야.”
“고모도 저보고 혼자 살라면서요”
“아기들 이름을 내가 지을 수 있게 해 주면, 난 마흔 살 즈음엔 결혼 허락해 줄게. 어때?”
아무래도 고모에게 내 아이들 얘기가 굉장히 잘 먹힌 것 같았 다.
“그나저나 아까 아빠랑 무슨 얘 기 하시지 않으셨어요? 무슨 얘 기 하셨어요? 아빠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의기투합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시는 건 처음 봤어 요.”
“응, 인생 두 번째였어. 첫 번째는 너랑 세르이어스 공작을 떼어 놓자고 결론 냈올 때였고.”
고모는 의식이 없는 에르안과 그의 손을 간절하게 잡고 있는 내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 다.
“아…… 음…… 그러셨군요.”
“이번에는 하엘던 황자에 대한 말이었어.”
나는 눈올 깜빡이며 고모를 보 았다.
“감옥에서 편하게 죽게 하고 싶 지는 않아서. 재판을 하고 있을
때 세르이어스 공작이 내게 어떻 게 하는 게 좋올지 말해 줬거든. 들은 사람은 나뿐이니, 내가 아 르가 놈한테 전달해 줘야 하지 않겠어?”
방청석에 앉아서 고모와 에르안 은 그런 얘기를 나눈 모양이었다.
그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 었을 디엘을 생각하면 조금 불쌍 했다.
고모는 에르안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근데 정말 복수하는 데에는 천 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 같아. 정말 받은 만큼 돌려주더라고. 감 탄스러율 정도야.”
“그러게요.”
나는 씁쓸하게 대답했다.
“저는 착하니까, 예쁘고 좋은 길만 걸으랬어요. 더럽고 사악한 일은 다 자기가 한다고.”
에르안만 다시 일어나 주면 고맙다고 얘기해 주고 싶었다.
창문 밖으로 이제는 완연해진 가을바람이 들어왔다.
곧 내가 회귀했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정말 아는 미래도 없고, 더 이상 알아야 할 비밀도 없다.
회귀 전에 원했던 대로 간절했 던 가족도 찾았고 더 많은 피를 홀리기 전에 반란도 막았다.
고모가 에르안이 했던 말들을 전해 주는 동안, 나는 이제 한 번밖에 없을 내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 다.
일단 가족들과 오랜 시간 함께지내고 싶었다.
특히 나를 간절하게 찾아 헤맸 던 아빠와는 절대 해어지고 싶지 않았다.
건국제에서 부스를 운영해 본 결과, 나는 아무리 대우가 좋아 도 주치의로 일하며 내 능력을 한 사람에게만 쓰는 것은 별로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음이 되고 또 그만큼 명성도 따라오는 게 좋았다.
그리고 곧 에르안이 눈을 뜨면, 나도 진심으로 당신이 절실하다고 말 해 주고 싶었다.
황궁은 여전히 어수선했다.
아르가는 담담하게 입궁하며 역 시 수도는 소문이 빠르다고 생각 했다.
황실 조사단이 반란군 세력들을 속속 알아내어 가차 없이 잡아들이고 있다는 말이 하루가 멀다하 고 들렸기 때문이다.
세르이어스 공작령을 미끼로 이시더 남작을 낚은 것처럼, 하엘던 황자는 거의 다 기존 체제가 어그러지면 이익이 있을 가문들만 귀신같이 영입한 것 같았다.
물론 본격적인 반란이 일어나기 전이므로 이대로 들키지 않은 채 숨죽여 지나갈 작은 가문들도 많을 것이다.
밑도 끝도 없이 군사를 일으킨 영지는 제이드가 직접 출정하기 만 하면 몇 시간 안에 몰살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다 무조건 몸올 사리고 있었다.
제이드가 항상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차피 내가 다 이길 텐데 반란은 왜?’라고 한결같이 말하 던 것이 맞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꼭 죽고 다 치는 피해자가 생기지.’
어쨌든 하엘던 황자가 오랫동안 준비한 반란은 이렇게 마무리되 고 있는 셈이었다.
아르가는 조사관 앞에서 그동안 있었던 사실을 모두 서술하며 다 시 한번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 을 느꼈다.
울분을 참지 않으며 모든 것을 다 얘기했을 때, 조사관은 한숨 을 쉬며 그에계 말했다.
“정말 힘든 일을 겪으셨군요. 그래도 따님을 찾으셔서 정말 다 행입니다. 재판은 몹시 인상적이 었고요.”
“아주 힘들었습니다. 끔찍했죠. 제가 이 일의 가장 직접적인 피 해자입니다. 황태자님은 뭐, 별로 잃은 것도 없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조사관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 다.
“하엘던 황자의 처분을 페렐르 만 자작가에 맡기는 건 어떻겠냐 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아마 자 작님이 요청하시면 황태자님께서는 받아들이실 겁니다. 아, 자비 롭게 용서한다는 건 힘들 수도 있겠군요.”
“자비라뇨. 그동안의 일을 귓등 으로 들으셨습니까? 제가 그딴 놈을 용서할 관상으로 보입니까?”
“아뇨.”
그냥 한 말인데, ‘용서’라는 말 에 진저리를 치는 아르가의 얼굴을 보며 조사관은 즉시 대답했다.
“딱 봐도 자비와는 거리가 멀게 생기셨습니다.”
“사람 잘 보셨군요.”
“어쨌든, 처분권을 요청하시겠습 니까?”
“예, 당연하죠.”
아르가는 이를 갈며 고개를 끄 덕였다.
조사관은 그 자리에서 시종을 불러 뭐라고 속삭였다.
시종은 잠시 사라지더니 얼마 지나지도 않아 다시 돌아왔다.
시종이 가져온 공문을 펼쳐 본 조사관은 별로 어렵지도 않다는 둣이 다시 깃팬을 들었다.
“황태자님이 모든 처분권을 맡기라고 하시는군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네? 이렇게 금방요?”
“원래 일처리가 시원시원하십니다.”
아르가는 시원시원한 게 아니라 그냥 직인을 남발하는 게 아니냐 고 묻고 싶었지만 정신 건강을 위해 참았다. 대신 다른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 처분, 나한테 맡기라고 말씀드린 사람이 누굽니까?”
“케인즈 경입니다.”
“내 딸을 가족으로 탐냈던 주제에 의리는 있군요.”
아르가는 피식 웃고 나서 조사관에게 자신이 원하는 처분을 읊기 시작했다.
조사관은 한 마디 한 마디 들으 며 기록할 때마다 흠칫하는 모양새를 감추지 못했기 때문에, 아르가는 미간을 찌푸리며 황급히 덧붙였다.
“내가 아니고, 세르이어스 공작이 생각해 낸 겁니다.”
“아, 그 공작님은 그런 생각 잘 해내실 관상이긴 하시죠. 지금은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뭐, 내 딸이 보고 있으니 괜찮아질 겁니다.”
아르가는 생각만 해도 속이 터 진다는 둣 한숨을 쉬었지만 이미 표정에는 체념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면회는 지금 가실 겁니까?”
“네.”
아르가는 고개를 끄덕인 뒤, 조사관을 따라 황궁의 감옥으로 들 어갔다.
예전에 한 번 세르이어스 공작 성의 지하 감옥에 가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참 끔찍한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황궁의 감옥은 더 심했다.
당연히 햇빛이라고는 조금도 들 지 않고, 어둡고 비위생적인 데다가 온갖 심리적으로 고통스러 운 마법은 다 걸린 상태였다.
음습한 길을 한참 걸어서, 아르 가는 엉망인 꼴의 하엘던을 볼 수 있었다.
젊은 날, 항상 리더는 자신이라 며 오만하게 찍어 눌렀던 하엘던 이 흡사 미친 사람처럼 감옥 구 석에 웅크리고 앉아 비식비식 웃 고만 있었다.
“왜 그랬느냐고는 묻지 않을 거다.”
황자에게 반말을 써 가며 아르가가 냉담하게 말했다.
“너같이 열등감에 잠식된 놈이 야 뻔하지. 남 잘되는 꼴 보기 싫고, 어떻게 해서든 무너트리고 싶고, 네 행동에 고통 받을 상대를 생각하며 희열을 느끼고, 딱 상대를 괴롭힐 의도로 행동하 고.”
조사관에게 이야기를 하며 울분을 토하던 때와는 달리, 아르가는 무표정을 유지하며 말을 이었 다.
“그거 병이야. 아주 추잡한 병. 정상이 아니거든.”
“비웃으러 온 거라면 꺼져. 네 놈에게 충분히 고통스러운 시간을 오래 선물한 걸로 만족하니 까. 어차피 난 죽을 테고 이젠 별다른 미련도 없다.”
“글쎄. 일단 내가 네 처분권을 가지게 되었다는 소식부터 전하 지.”
“그래서 축하의 인사라도 날려줄까?”
하엘던이 이제 남은 삶에 대해 별다른 미련이 없다는 것은 사실 이었지만, 아르가는 팔짱을 끼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글쎄, 난 인간미가 넘치는 자비로운 사람이라 마음이 약해져 서.”
“헛소리할 거면 가.”
“황자비가 임신했다.”
시종일관 비웃기만 하던 하엘던 의 표정이 싹 굳었다.
“내 딸, 리체가 천재라는 건 알고 있잖아? 리체의 처방을 받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
“거짓말……. 내가 지금껏 연구 했는데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야.”
“너랑 리체가 같나. 리체의 실력이야 네가 더 잘 알 텐데.”
흔들리는 하엘던의 눈빛을 보 며, 아르가는 제대로 먹혀들었다는 걸 알았다.
“난 아내를 잃고, 19년 동안 딸을 찾았다. 내 딸은 보육원에서 비쩍 마른 채로 자랐어.”
“……자작, 아이는 죄가 없다. 차라리 날 죽여. 날 고문해.”
“맞아, 아이는 죄가 없지. 그래 서 죽이지 않을 거야.”
하엘던이 그토록 원했던 것, 아 르가가 너무 부러운 나머지 오히려 그를 이용해 더 깊은 상처를 주려고 했던 것. 바로 아이였다.
“아이를 낳은 뒤 황자비를 처형 할 거고, 그 아이는 멀리 있는
보육원에 맡길 생각이야. 그 애의 인생이야 알아서 흘러가겠지.”
“……나를 어떻게 해도 좋으니, 평이 좋은 보육원에……”
하엘던은 무릎으로 기어 철창을 잡고 간절히 말했다.
참으로 염치가 없는 부탁이었으나 아르가는 딱히 지적하지 않았다.
“너도 19년을 기다려서 자살하지 않고 잘 버티면, 내가 그 아이를 보여 주도록 하겠다. 얼굴 한 번 못 본 아이가 얼마나 간절 한지, 그 마음을 내가 잘 아니까. 다만 그동안 내 고통을 느껴 봐.”
아르가는 그 ‘고통’이 무엇인지 직접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엘던은 그 말을 들었으니 그 어떤 고통이라도 참을 수밖에 없 을 것이다.
아르가의 말을 반신반의하면서 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믿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지난 19년간, 아르가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었다.